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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20:07:02 조회 : 6251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 이름 : 관리자(IP:124.59.84.82)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     

이 근 호 2004년 11월 21일


http://blog.daum.net/crosslamb/10876470

 첨부파일 : 인간구원을위한신학의구조.hwp (138.5K), Down:125
 관리자(IP:124.♡.84.82) 09-02-02 20:08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

2004년 11월 21일   이 근 호 목사


Ⅰ.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킨다. 자기 존재에 대한 포기란 없다.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 존재를 변명하는 선이해(先理解)를 갖고 다가선다.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려고 한다. 여기서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신학이 나온다. 그러나 진정 성경이 인간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아니면 주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인간은 파편적이고 분산된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수시로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의 주체는 마치 스크린과 같아서 위에 지속적으로 그림들이 투영되고, 그 위에 덧칠되고, 반복해서 말소되고 다시 표현되는 각가지 환상들이 아른거린다.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통해 아이는 비로소 자기 몸의 전체상을 지각하는 것처럼 파편화된 몸을 하나의 전체(통일성)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이어 주체가 자꾸만 분리됨을 느낀다. 새로운 타자를 대하는 순간 자아는 지금까지의 자아를 새로 구성되는 자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즉 자아는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나에게 바라는 바를 곧 내 자신으로 확인(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상징적 질서 속에 배정해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자아는 먼저 자기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아로서 구성하는 것은 곧 타자의 요구이며 타자가 나의 욕망을 부축이고,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 법이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로서 의식된 자아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상마저 아무리 해도 그 막 너머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이 어떻게 볼 수 있는 막 너머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외부와의 의사소통으로도 속성 수정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곳은 '아담 안'에서 구성된 보편적 인간성이 자리 잡고 있는 영역이다. 인간으로서 근본 한계 설정을 담당하고 있는 구역이다. 마치 사울이 본의 아니게 악신이 들려 다윗을 공격해야만 하듯이 이유 없이 무조건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대적하고 싶은 품성에 들 끊고 있는 구역이다. 스스로 절대 자유를 누리는 신이 되고 싶은 영역이라서 신마저 귀찮아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싶은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악마가 죽음을 가지고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는 곳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바로 주님의 이름이 인간의 근원을 노리고 공격하시는 곳이다. 바로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근거로 삼기 위해 보편적 인간성을 담보로 잡은 채 혈육(육신)에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합류하신 일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도 그 십자가를 위하여 전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에 거역하는 것이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지 실제 심판으로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겔 9: 1- 8)

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진노로 심판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이 아니라 멸망당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유지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공개된 바 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지탱한 모든 이유는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어두움'을 건져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이 과연 어두움인지 아니면 약간이나마 빛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증거가 확실히 확보되어졌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여지없이 전파된 사실이다. '주의 이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 물론 배후에는 악마의 활동이 있다. 이로서 같은 성경을 놓고서도 그 주제가 십자가냐 아니면 존재냐를 가려야 될 판이다.

이미 십자가가 터진 마당에서도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신의 심판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력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키려는 본능이 극을 달한다.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자기 존재를 아예 신의 무한한 속성의 감싸고 있는 형태로 보자는 인식이다. 신이 자신에게 허락한 무한한 요소를 자신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한의 요소를 중심으로 외부의 모든 우주의 속성을 거기다가 연결시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무한대로 이어져 가면 결국에는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과 항시 교류가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무한의 속성을 인간들은 자기 영혼이라고 본다. 영혼의 자리를 신의 자리로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은 신이 허락해서 존재하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신이 머물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위한 작업을 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신에 대한 의식과 무한에 대한 염원을 양산하고 있는 그 영혼의 자리만큼은 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즉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스스로의 선한 뜻에 의해 인간 내부에 심어놓은 신적 속성을 스스로 파기하는 모순된 행위를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거부하는 것은 신도 용납하지 않을 일이라는 확고성만이 인간의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보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 영혼의 자리를 확대하여 신의 은총 아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신의 무한성과 접촉하는 구원의 연결 고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런 신학은 '주의 이름'의 살해소식인 십자가 사건을 피해 가는 셈이 된다.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들의 이렇듯 집요한 자기 구원의지와 관련지어서 발생된다.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가를 알아야 한다.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인간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존재다. 늘 자기 형편을 살피고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책임지고자 하는 본능의 힘으로 살아간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돌볼 자가 없음을 늘 확인하며 산다. 누구를 믿기 전에 먼저 철석같이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선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신앙심은 요지부동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란 엄밀히 말해서 자의식이다. 자의식이란 대상의식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 자의식으로부터 자기만이 세계가 부풀어 오른다. 자아의 유한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무한을 향한 도전과 도발이 시작된다.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응시하고 있기에 그 유한을 바탕으로 하여 조금씩 유한의 폭을 넓혀간다.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규정시킨 그 무한한 대상에 손끝이 닿을 때까지 이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숭고한 무한한 대상(이상적인 자아상)을 바라보는 욕망은 늘 충동적 시선으로 이어진다. 라이벌이 자기 앞에서 어른거린다. 목표점이 확실히 나타났다. 따라서 응시가 강할수록 주체는 대상에 사로잡힌다. 기다리던 신이 곧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인간의 의식은 절대적인 그 어떤 대상과 일치되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기 구성'에 나선다. 자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주체의식이란 없다. 스스로 의지하고, 자신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것 자체이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음으로서 최초의 시작자로 행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자기 고유의 자아'가 될 때 진정한 실체, 생동하는 실체는 자기뿐이며 이런 의식의 전개는 자기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유한을 산출하는 무한적인 잠재력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즉 신의 무한성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무한성을 만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전개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불 수 있다.

첫 째, 무한이 유한자(인간)에 이르게 되는 과정

둘 째,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게 되는 과정

세 째, 무한이 유한자를 통해 방출되는 과정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자기 유지를 위한 정신 활동은 직관력을 발휘하는 영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 '영혼'은 기억을 더듬어 추구하는 영역이며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인 실체로서 변함없이 머무르면서도 각종 다양함이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관이다. 거기서 인간은 영원까지도 생각한다. 그 어떤 다양한 상태도 모두 영원의 전체성 안에서 이미 원천적으로 파악되어진다. 즉 영혼불멸을 인지하는 자아인식은 '전체성에 대한 신적 인식'과 유대성을 갖는다.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그 자신의 고유성을 따로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는 분해되고 소멸되며 나아가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이러한 해체, 혹은 파괴는 한편 만일 영혼에 의해 온전한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면, 곧 영혼이 물질적인 부분들을 조합하고 질서 지우지 않는다면 반드시 벌어질 사태이다. 거기서 조합으로 생겨나는 무기체들이란 그때마다 물질과 형태라는 두 요소로 설명된다. 그런 무기체는 공간을 따라 연장되거나 더 작은 알갱이로 끝없이 쪼개질 수 있다.

이처럼 참된 '하나 됨'의 성격은 유기체에 나타나기에 무기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무기체로서의 부분들, 혹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불안 속으로 몰아세운다. 이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주된 것이 무엇이고,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를 되묻도록 이끈다. 따라서 인간의 실체는 '영혼'이라고 칭해져야 하고 바로 그 영혼 곁에서 인간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우월하다.

육체에 대한 영혼은 마치 물질재료에 대한 형상과도 같이 혹은 도구에 대한 예술가의 경우도 같은 우월성을 갖는다. 물질세계의 기본요소들, 불, 공기, 물, 흙 같은 것은 비영혼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연적인 결합을 통해서 삶 혹은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영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쩌면 억지로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았다'고 말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속성은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또 지나가 버리는 것이 때문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이루어졌었다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앞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육체란 도무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영혼이 전체적인 것들(우주만물) 안에서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아가 그 어떤 질서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의 형상과 세상만물의 형상은 영혼 이외에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물질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육체적인 것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어떤 본성을 설정하도록 어쩔 수 없이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영혼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혼의 형상은 그 모든 육체적인 존재 바깥에 그리고 그 너머 저편에 자리한다. 곧 육체적인 것들에 앞서 혹은 그럼에도 육체적인 것들 곁에 있다. 이는 영혼이 모든 육체적인 부분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육체적(혹은 물질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을 근거 짓거나 스스로를 근거 짓고자 애쓰는 사고는 오히려 '본래적인 자아'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물질세계 내에 저마다의 존재는 하나의 장소를 점해야만 하는 반면에, 영혼은 - 정신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공간을 초월한다 - 그 본질상 도처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자체가 양적인 연장성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다고 단언 할 수만 없다. 오히려 공간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육체적인 것이 공간에 무제한적인 영혼에 의해 이해되어야 옳은 것이다. 한편 만일 영혼이 육체적인 어떤 것에 지니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모순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그때마다 느끼는 육체의 모든 부분에 존재해야 하고, 그것은 동일한 장소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감각행위 중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양적이지 않는 정신-영혼이 그 자체로 (물질적-육체적인 측면에서, 예컨대 하나의 일정한 신체적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무(無)는 아니다.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낳는 원천적인 실체로서 이해된다. 정신-영혼의 양적이지 않으며, 크기로 측정되지 않는 특성 따라서 우리는 정신-영혼 곁에서 어떤 '초연할 수 있는 능력(거리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활동에 의해 파악되는 다양성 안에서도 그러한 감각적 의미의 통일성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정신- 영혼에게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한편 눈으로 보고, 다른 한편 귀로 듣는다면, 그 두 가지와 관련된 어떤 통일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적인 현상들을 따라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곧 여러 가지 감각들로 받아들여진 것들 곁에서 동일한 어떤 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일한 어떤 것이 다양한 감각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드러나는 감각적인 현상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그어지는 무수한 반경과 같다 그와 같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서로 상응하는 것이 결국 그 중심에 '하나'로 존재한다.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러한 과정이 혹시 만일 그렇게 감각을 수용하는 정신-영혼이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되거나 혹은 거기에 머물러버린다면,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적인 요소와 객체적인 요소 사이에 '만남'을 주선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곧 감각은 육체의 도움으로 감각적인 대상을 영혼이 수용하는 활동수단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물체 안에 자리하는 형상들에게서도 정신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게서 '구별되는 것(형상)'이 '구별하는' 정신(곧 추상화하는 주체)으로 간주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하는 (추상화) 작업 안에서 그리고 그 도움으로 인간의 자기 및 세계에 대한의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과 관계하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로서 사고활동은 육체적인 사물에 두루 작용하는 원인에 대한 파악과 같이 '육체 없이도 포착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정신적인 활동의 실현과정은 육체적인 활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정신활동은 비록 외적이며 감각적인 충동을 계기로 시작하지만, '육체에서 깨어남'을 필요로 하고, 어쩌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에게 실상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로서의 전체적 정신세계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고무시킨다. 좀 더 자세히 살려보자면, 인간에게는 기억(記憶)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외적인 부재(不在)'를 내적인 현재로 되돌리는 작용을 한다. 기억 곳에서 공간적-물질적인 것을 초공간적-비물질적인 방식으로 특별하게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에 힘입어 공간적으로 연장되는 세계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이때 하나의 순수 정신적인 '세계'가 확보되며, 거기서 다양한 감각활동을 우리는 경험으로 곧 인식을 위한 원리적 소재로 이끌어낼 수 있다. 저 정신세계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표층적인 구조의 제한성을 넘어선다. 경험 안에서 내면화된 기억내용은 오히려 더 이상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심층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이 구조 안에서 공간적인 제약은 극복되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그들의 초감각적인 동일성을 따라 완성되어 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시공간 안에서 그저 단편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이며 부분적으로 표출된 감각적 존재들의 본질-내면적 원인구조를 그의 전체성 안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외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들 곁에서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는 본질로서 기억 덕분에 밝혀지는 정체성이다. 이러한 자기 신원에 대한 확인은 실상 이 세상의 우연적 조건을 능가하도록 이끈다. 근본적으로 또 내적으로부터 세상의 사물로서 자리 잡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자기실현과정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영혼이 사람에게 덧붙은 낯선 무엇이라면 사람의 변화하는 몸체처럼 한편으로는 떨어져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덧붙는 것을 볼 때, 그 몸체 자체에 고유한 무엇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도대체 부단히 영혼 자체의 동일성을 활용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는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고, 어떻게 우리는 낯익은 서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즉 느끼고 생각하고 삶을 대비하는 인간내면의 종합적인 태도가 인간 외적인 육체적인 태도와는 다른 실체(영혼)를 요구한다는 관점 말이다. 예컨대 이 세상의 물질 자체에는 기억과 통찰과 사유의 힘이 자리하지 않으니 지나간 것을 붙잡고, 다가올 것을 앞서 예견하고, 현재 하는 것을 포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이 모든 능력은 단지 신적 존재에 의한 것이니 신(神)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영혼은 육체 안에 자리 잡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존재함이 취해지는 것이라, 과연 이러저러한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은 다시 말해, 육체가 아니며 나아가 육체의 감정도 아니다. 영혼의 실체성은 오히려 육체적인 행동에 앞서 취하는 또 다른 실천적 행위이지 그에 앞서 전제된 질서요 작용이며 창조적 능력이다. 이러한 영혼의 활동은 외적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적인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혼은 모든 움직임의 시원(始原)이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영혼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영혼은 그로써 함께 하는 육체에 무엇보다도 생명을 부여한다. 그 생명은 영혼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따라서 결코 외적인 강요로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그 자체로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체적인 모든 것은 그때마다 생명을 계속하여 번창시킬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생명은 끝없이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존재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살아있는 어떤 본성이어야만 하는데, 그 본성은 필연적으로 파괴되지 않으며 불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되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생명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서 신적인 모든 존재와 복된 존재가 몸소 살아가며 존재하듯 거주해야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항상 그러하다. 그들은 나뉨 없이 존재하며 계속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결코 되어가지도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도대체 그들이 자신 외에 그 어디로부터 생겨나서, 그 무엇으로 사라져버린단 말인가?

더 이상 연소될 무엇이 남지 않는다면 불은 꺼져 사라져버리겠지만 영혼의 생명은 꺼져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는 결코 연소되어 사라져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혼의 실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을 따라 자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그 영혼 실체로서 이것이 인간들이 찾고 있는 영혼의 정체이다. 그로써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도 능히 불리어질 것이다. 혹 그렇지 않고 육체와 다름없이 사멸한다면 다시금 분해되어야 할 것이며, 영혼에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불멸하는 존재원인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운명을 전제하든지 해야 한다 영혼 개념을 가지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혼(혹은 식물의 혼이나 동물 혼)과 같이 개별영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관점을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영혼'과 연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영혼들은 저마다 그 과제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론적 구조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두 영혼(세계영혼과 개별영혼) 모두 움직임의 원인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두 스스로 길러내는 생명과 관계하며 그러한 움직임의 원인은 하늘 아래서나 하늘 저편에서 동일하게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추구하고, 그런 한에서 첫 번째 원인을 알기까지 계속 노력한다.

영혼은 이제 '정신'과 만난다. 곧 지적인 활동 안에서 순수 정신적인 생명을 지니기에 언제나 저 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통하여 이제 영혼은 자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산고의 고통'을 느끼지만 또한 그에 따른 창조적인 결실의 기쁨을 얻기 위해 영혼은 부단히 애쓴다. 이러한 욕망을 취하는 모든 영혼은 정신세계 안에서 바라본 것들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아 그로써 갈망하는 아픔이 생겨나 서둘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꾀한다.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곧 참된 존재적 존재는 여기서 다시금 영혼에 의해 물질세계 안에 앞서 전달된 생명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과 뒤섞여 가장 훌륭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장애를 갖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하는 것의 본성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기에 놓여 있는 순수함에 유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외적으로 덧붙여진 것은 언제든 그 이면에 자리하는 순수한 것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덧붙여진 것을 추려내어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더 이상 감각적인 것이나 그런 감각적인 사물들로부터 현혹되지 않고 진정 영원한 의미 안에서 영원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본래적인 통찰에 의해서 불멸하는 신적인 세계에로의 상승이 실현될 것이요, 그렇게 참여관계 안에서 곧 참여하려는 우리는 참여를 허락하는 그것에 의하여 성사될 것이니,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 자신의 영혼 안에 거처하는 가장 주인다운 주인에게 그의 자리를 내어준다면, 참된 의미에서 앎이라고 불리는 깨달음의 지혜가 영혼 안에 자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러한 완전성 실현의 이해와 관련하여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 뒤따른다. 예를 들자면, 완전성 실현의 의미는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그때마다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고도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듯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동일성을 잃지 않게끔 저 완전성 실현의 의미가 도처에 개입한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 그것은 모든 그때마다의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서, 곧 순수 동일성의 실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가운데 시공간적인 한계를 그때마다 넘어서 오히려 매번 그들 앞에서 전제는 한, 시공간적인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능력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마감될 우리의 운명이 실상 불사하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만일 도대체 존재한다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때는 존재하다가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움직임의 시원이다.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하면 존재하기 위하여 앞서 고려되어야 할 존재근거 및 원천으로서는 그는 '절대적인 하나'가 제안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하나는 완전성 실현과정을 위한 첫 번째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하나가 자체로 고정되듯 머물러 있지만은 않고, 운동, 곧 자신을 내어주는 -다른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로서의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면, 이미 절대적 하나 안에서 역동적인 요소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운동과 정지, 혹은 다름과 같음에 따른 존재의 역동적인 실현과정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존재에는 세 개의 역동적인 구조가 짜여져 있다.

첫째, 중심에 한결같이 머무르도록 작용하는 내존재

-이는 언제나 순수 동일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요,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존재, 곧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근거, 혹은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둘째,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작용하는 외존재

-이를 가리켜 저 내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운동, 혹은 표현하려는 움직임이라 이해하고, 두 번째 존재, 혹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셋째, 중심에 의해 전개된 활동들을 다시금 하나로 모르도록 작용하는 합존재

-이를 두고, 저 내존재와 외존재를 물질세계에 해명하고자, 곧 실제적으로 내보여주고자 하는 관점에서 '행위'요, 그 때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물질세계와 만나 정지된 단면을 보여주는 세 번째 존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같은 존재의 근본구조는 셋으로 동시에 하나 됨 안에서 전체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첫째 이미 자기다움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항존적인 동일성 안에서 '존재'로서 포착됨을 가리킨다. 둘째,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 언제든 능동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기에, 정신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존재한다는 것은 가만히 머무르거나 그저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따라 존재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곧 영혼은 살아있는 몸 안에서 그 운동의 출발점, 그것이 나아갈 목적지, 그리고 그 본질적인 형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동과 정지, 다름과 같이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이 아니라 부단히 서로의 관련성을 확인하며 '하나 된 완전성'을 이루려고 하는 점을 목격할 수 있다.


2.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는 양상

인간이 어쩌면 본질적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따라서 영혼이란 그 육체가 관계하는 지상적인 삶에 봉사하는 무엇이다. 이로써 육체는 일찍이 인간 본연의 삶에 제약적이고 짐스러운 무엇이라고 여겼던 생각에서 벗어나, 성경적 창조론에 따라 모든 것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 그로 인해 그 육체를 조정하는 불멸하는 정신영혼의 힘입어 선(善)에로 나아갈 수 있는 성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할 것이요, 정신은 오로지 정신만을 위하거나 오로지 몸만을 위하여 안일한 곳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신적인 원천은 -끝이 없는 끝에서- '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말이 의도하는 바는, 모든 감각적인 것이 모조리 타락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요, 또한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장애요소로 작용 하지만은 않고, 단지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두 은총 개념으로 분류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창세기 1:2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에 분산해 있는 참여 개념이다. 이 형상개념은 곧 모상(模像) 개념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닮아가고 있다는 사상이며, 참여 개념은 수동적 태도, 즉 하나님께서 당신 생명에 참여시킨다는 사상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다.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 영혼의 질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이고, 불멸하고 영속적이다. 인간 영혼이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자신의 영혼이다. 육체는 영혼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이들의 복합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것은 사실상 영혼의 충만한 삶에 있어서 하나의 방해에 불과하다. 영혼은 육체를 '움직이는 자'일 뿐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선장과 배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 단순히 육체의 실체적 형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적 작용의 영성이다. 그 결과 인간 영혼은 식물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다. 모든 것은 존재인 만큼 현실성을 지니며 또한 행위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 한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를 위한 것이다. 행위는 존재를 따르며, 작용은 본질을 따른다. 그러므로 작용의 양태는 존재 양태에 상응한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로서 행위 한다. 지적 작용은 본질적으로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 작용이며, 영-육 복합의 작용이 아니라 영혼에서 유래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지적 작용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자립적이다.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 혹은 자립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육체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혹은 자립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단일성은 가장 우선적이자 근본적인 진리로서, 의문시되거나 상대화될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실체 이론과 실체적 형상 이론에 의해 굳건하게 확립된다. 인간의 단일성은 실체적 단일성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자립성 또한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자립성이 주장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립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고려된다. 이 세 물음이란 인간이 영혼이 온전한 실체인가 하는 것과 온전히 자립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 그리고 개별적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자립적인 영혼은 분명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체이다. 왜냐하면 자립성은 온전한 실체성을 전제하며, 실존에 대해 질서 지워짐을 명백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립성은 실존의 현실성으로부터는 추상되되, 모든 속성들을 지닌 온전한 실체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은 파괴될 것이다. 이 경우 영혼 자체만으로 인간이거나 아니면 영혼은 천사와 같이 하나의 영적 존재일 것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실존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개별적 실체인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개별적 실체인 것은 바로 인간이다. 만약 영혼이 개별적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라는 전제가 더 이상 음미도 되지 않는 않은 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는 명백하다. 인간 영혼이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적 완전성을 모두 끌어안는 온전한 자립적 형상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며 그 자신의 실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참이다. 영혼의 이중적 역할의 문제에 있어서, 영혼은 하나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간과하는 것은 곧 신체에 대한 형상의 부여자라는 영혼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 그 자체로서 자립적이다. 가능성은 항상 현실성을 위해 있으며, 물질은 형상을, 그리고 육체는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지적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지닌다. 이 능력들을 수행하기 위해 영혼은 육체와의 결합을 요구한다. 영혼은 지적작용을 수행하며,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이 수행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오직 지적인 능력이 작용할 경우에만 지성성과 자립성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능력이 작용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미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적 영혼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이미 자신의 지적 능력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지적 능력에 더해 감각적 능력을 지니는 영혼 따위를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럴 경우 영혼은 아무런 손상이나 손실도 입지 않은 채 육체로부터 쉽사리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에 형상을 줌으로써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이유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의 영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존재에 그것의 존재성과 단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실체적 형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우, 육체에 존재성과 단일성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형상 부여행위가 있기 이전의 육체는 순수 가능적인 물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질의 가능성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가 되며, 인간이 되고 또 인간적 존재방식을 지니게 된다. 육체와 인간의 형상성과 실존 전체가 바로 영혼의 형상부여 행위 덕분이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자립적 영혼은 인간을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자 개별적 실체이게 만드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거나 개별적 실체는 아니다. 실체이자 존재의 주체인 것은 인간이지 영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살아남은 영혼은 하나의 실체이자 온전한 실체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며, 영혼의 역할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아니라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실체는 아니다.

죽음 이전과 이후의 영혼의 위상과 관련해서, 존재의 이중 주체와 그에 상응하는 존재양태의 이중성은 매우 당혹스러운 형국을 띠고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진리에 의해, 다시 말해서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동일한 본성을 유지한다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또한 죽음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비자연적인 사태이며,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연적으로 진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영혼의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것이며, 불가멸적이고 불멸·영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물질적 존재들이 다른 실체적 형상들은 질료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다. 이들은 물질의 가능성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이들의 현실성은 가능하였던 것에서 현실로 된 것의 현실성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로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이므로, 물질에서 유래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영혼은 부모에게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은 다른 영적 존재들에게서 유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그 영적 존재들 안에 형상의 전이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은 창조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 앞서 존재하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오직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완전자이며 무한자인 신만이 창조할 수 있다.

사실상 신은 오직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존재하고 행위 한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2차적 원인의 매개 없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다.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기 때문에 육체와 결합되지 않는 한, 자신의 본성적 완전성을 지닐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 앞서 창조될 수 없다. 정확하게 어느 순간에 그것이 창조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물질과 형상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며, 이와 함께 형상 우연적으로 소멸한다. 하지만 자립적 형상인 인간 영혼은 우연적으로도 소멸할 수 없다. 자립적인 형상에게는 실존이 그 자체로서 속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비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자립적 형상 역시 절멸될 수 있다. 신이 사물을 절멸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해 신이 아무런 관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에 의한 절멸은 이 세상 전체의 완전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뿐 아니라 신의 무한한 지혜 및 섭리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본성적으로 존재하기를 욕구하며, 지적 존재들은 영원히 존재하기를 욕구 한다. 그런데 자연적 욕구는 허위일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해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은 정확하게 어떠한 것인가? 유한자들의 존재성은 본질과 실존 그리고 작용에 있다. 모든 유한자들에게 있어서 본질과 실존은 구별되며 이들의 본질은 그들의 작용을 통해서 알려진다. 분리된 영혼의 경우, 우리는 그 작용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유한자들의 경우 지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생득적이든 아니면 획득한 것이든 간에 가지상(可知象)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한 영혼의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상으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추상 작용을 위해서는 감각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감각상으로부터의 추상을 요구하는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을 지닌다. 분리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습관적 지식을 지니며, 그의 수동지성 안에는 가지상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며 이미 소유한 학적 지식을 부분적으로 보유한다. 이에 더해서 분리된 영혼은 신과 영적 존재들의 영향 덕분에 지식을 지닐 수도 있다. 이들이 영향 하에 혼동된 방식으로나마 물질적 사물들을, 그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나마 개별자들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보다 더 많고 탁월한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 분리된 영혼이 본성적인 상태가 아니라 비본성적인 상태, 즉 본성 이외의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인간 영혼에게 본성적으로 적절한 앎의 방식은 육체와의 결합 안에서 추상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점 역시 명백하게 긍정하고 있다.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실존의 행위를 이전과 똑같이 수행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존재성을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직하고 있다. 죽음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게 부여했던 존재성을, 즉 인간의 존재성을 되돌려 받는다. 죽음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영혼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분리된 영혼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기 이전의 존재성을 갖지 않았거나 그것을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음으로써만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 자신의 존재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며 또 한 가지고 있다. 인간 영혼과 인간은 같은 존재성을 공유하는 것인데, 다만 그것이 동시에 인간의 것이며 그 영혼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과 실존의 원리는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자신의 자립성 혹은 영성을 인간의 지적 기능을 바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그 영혼의 영성에서 유래되며, 그것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 본래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의 영혼으로서 수행하기 위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 혹은 영성의 등급은 인간이라는 종의 모든 완전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 영혼은 항상 하나의 영혼일 뿐 인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존재성은 그 자체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존재성에서 유래된다. 육체의 모든 존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다. 자기 육체를 지닌 전체적인 인간은, 영적인 인간 영혼에 의해 신체적 가능성의 현실화로 인한 것이다. 영적인 인간 영혼은 인간을 현실화함에 있어 자신의 전체적인 존재성을 소모하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자립성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인격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영적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 선(善)과 만남으로써만 자기 충족을 이룰 수 있다.

의지가 없는 지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지성이 있다면 당연히 의지도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이 의지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긍정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에서 나온다. 신적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신적인 지성과 연결된다는 교리가 형성됨으로써 이 교리를 확정 시켜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표상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다. 그렇다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은 무엇인가? 모든 개인은 신에게만 있는 속성과의 연결을 통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사랑이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별 인간을 찾아오시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공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의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구원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무상하지 않는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구원 소식은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으로 하여금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인간의 구성 요소로 파악했으며, 이렇게 규정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사상을 몸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몸으로 창조되고, 한편으로는 영혼으로도 창조된 자가 인간이라면, 몸 되시는 분이 몸의 구원에 개입해야 하고, 영혼 되시는 분이 영혼 구원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로써 이제 영원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표상이 개인화 된 것이다. 요컨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이 지상적 현존은 이제 영원에 참여해야만 한다. 비록 그 현존이 영원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여전히 구체적인 몸이다.

이처럼 구원 소식은 지상에서 개인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현존에게 영원한 의미를 제공했다. 당연히 이 지상적 삶에서 개개의 모든 인간들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멸망당하는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이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부여받게 된 새로운 삶은 보다 인간이 보다 인간다워지는 그 품격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다. 인간의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면,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둔다. 창세기 9장 6절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인격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분여될 표준적인 인격 개념이 선행된다. 인격적 개념은 극장의 세계에서 수행되는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할 역할을 가리킨다. 여기서부터 이제 이 낱말은 어떤 사람이 연기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로 전가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서 바로 그 개인이 이러한 특징으로 일컬어지지 않고, 오히려 완성되어야 할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능이 특징화된다.

인격을 '이성적 개체 본질'이라면 예수 그리스는 두 본성에서 하나의 인격이 되는데, 그 예수님의 인간적 본성이 인격의 단일성에 내재한 신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인격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설명한다. 로고스의 인격이 그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적 관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로고스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 예수님의 '엔휘포스타지(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신적인 인격 내에 존재한다는 뜻)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즉 두 본성 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이라는 기독론 교의가 삼위일체적 인격 개념으로 소급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엔퓌포스타지적 인격 개념만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인격 존재에 따른 규정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현존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구성적 관계에 의해서 '이성적인 개체 본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첫 번째로, 다른 인격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를 구성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격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아버지이며, 역으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아들이다. 인간론 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나이다. 즉 신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피조물의 속성을 갖지만 또한 동료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사상에서 인격성은 인격을 규정하는 상관개념이 손상 받지 않고 늘 자유라고 생각되었다. 타자와 특히 고유한 인격의 신적인 근원과 자유롭게 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유사상과의 이러한 연결은 기독교 사상에서 이성적 본질이 자유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도 역시 자유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자유로운 의지로 인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신학의 과제란 무한한 실체인 신에 의해 만들어진 만물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초자연적인 빛의 도움으로 신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 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인격의 구성이 손상 받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구성하는 사태에서 자유롭게 이런 혹은 저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규정되었으며, 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근대 사상에서는 이 주관성이 인격적 자립에 속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주변 세계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근대의 존재 개념 중에서 극단적이라 할 이런 인간 이해를, 그것은 최초로 인간의 본질을 야기하고 있는데, 고대의 인간 이해에 대한 연구도 없이 전제되면 안 된다. 근대의 주관성 사상이 말하는 자명성에 우선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교만에 가지 이르려하는 본능적인 태도를 간과한 채 인식의 의지가 종속적 위치로 떨어졌다는 점인데, 이 인식이라는 것은 인간 주관성의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식이 이루어질 때 자기 자신의 참된 것을 가능한 최선으로 순수하고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인간이 창조적으로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 내용이 변조시키는 원천으로 간주되고 말 것이다. 이런 앎은 외적인 인상의 동기를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진리를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 활동은 여기서 신의 조명을 통해서 발생한다. 만물은 영원한 신적 이데아를 통해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물 속에는 신의 모습이 피조물의 특성을 따라 더 강하게, 혹은 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만물이 창조주의 반영이요, 표현이요, 그림자요, 길이요, 발자취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만물이 어떤 식이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의 이데아를 분유(分喩)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은 창조의 목적대로, 즉 창조주 안에서 완성되게끔, 모두 신께로 돌아갈 운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창조는 완성에 도달한다.


3.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

인간도 하나님의 모상(模像)대로 창조된 이상,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 중에 있다. 이성과 신앙은 이 여정 안에 통합되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활동적인 이성은 곧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개인적 영혼이 불멸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변역의 결과로 인해 서 인식 과정에서 '영혼의 활동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창조적 행위에 상응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이로써 이제 인식 과정에서 인간의 영적인 주관성이 근대사상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물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와 인간적 경험과의 조화는 인식을 이미 주어진 진리로 해석함으로써 고대 인식론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인간 영이 바로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과 맺게 된 동질성을 통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물론 신학적 전제가 떨어져나가 버리면 창조적인 인간 영의 활동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틀림없이 모호해지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 인간 영이 활동은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는 사물을 그 존재의 특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모범은 너무 완전했기 때문에 인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주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고유한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해서 인간을 용서해 주신다. 신앙 행위는 확실성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과 인격적 경험에서 비로소 현실화된다.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섭리의 직접적 적용을 배제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책임, 그에 따른 칭찬과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서도 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인간의 자유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의 목적적 질서에서 어떻게 제 1목적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섭리적으로 규정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섭리가 왜 어떻게 제2원인자를 매개로 해서 실행되는가, 이러한 제2원인자의 본질에 따른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사태가 발생하는데, 특히 이러한 우연적인 결과는 제2원인자의 산물인 뿐인가 아니면 이러한 우연적 결과까지도 신의 섭리 아래 규정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발생하도록 이미 결정지어져 있으므로 우연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제2원인자의 완전성에 따른 자유선택으로서의 우연적인 결과 역시 섭리에 의해서 성립된다면 이미 섭리적 차원에서 결정지어지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들을 해명되어야 한다. 신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자신 안에 한 목적을 위해 새롭게 규정되어질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신은 모든 존재의 목적과 그러한 각자의 존재의 목적 실현의 방법까지 규정한다. 섭리란 궁극적인 통치자로서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신적 지성 자체이다. 이렇게 신은 모든 존재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궁극적인 한 목적을 위한 모든 실천적 방법에 대한 규정으로서 섭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신의 원인성이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로 신으로서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섭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신은 그의 지성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범형을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직접적인 섭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신의 섭리의 매개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 힘이 결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낮은 존재를 탁월한 존재에 의해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왕이 집정관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여 대리로 통치하게 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경우 집정관의 권위는 결국 왕에게 속하지만 왕 스스로 모든 지역을 직접적으로 관할 할 수 없는 힘의 결핍으로 인해 대리 통치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왕은 집정관들의 나름의 통치 계획과 실행을 남김없이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신에 의해 부여된 원인은 신적인 힘의 결여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풍부한 선성(善性)으로 인해 피조물에게 원인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러한 충만한 신격 사랑에 따른 매개자에 의해 통치가 실행되면서도 신이 섭리에 따라 실행을 위한 매개자들의 모든 과정이 낱낱이 직접적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섭리에 있어 인간은 행함은 무엇인가? 인간은 원리적인 원인자이다. 원리적 원인자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내적 본성에 따른 목적을 지닌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원리적 원인자는 자기 성장과 실현, 자기 산출 그리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의 목적이 따른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론 원리적 원인자가 자기 내적 목적에 따라 스스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운동과 목적인 신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원리적 원인자는 세계 내의 다른 존재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자기 목적작인 활동을 한다. 과연 제 2원인자가 성립되어야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성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2차적 원인자도 능동적이지 못하고 오직 신에 의해서만 작용한다면 결과들 사이의 어떠한 다양성도 이끌어 질 수 없다. 이런저런 결과로 된 존재들에 어떤 작용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구분할 길이 없다. 우리에게 서로 다르게 알려지는 작용 역시 피조물이 2차적 원인이 되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신의 직접적인 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작용에 따른 어떤 결과들도 그 차이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 어떠한 결과의 산출에 피조물들의 어떤 원인적인 작용이 없다면 원인에 관한 지식이 오직 공허하게 수반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2원인자가 원인성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제 1원인자의 완성에 따른 필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유의지의 산물인가? 후자라고 할 때 임의적인 우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기 목적에 따른 신적 지식과 계획에 따른 선택인가? 물론 신은 완전한 실현자이므로 자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어떤 존재나 세계를 우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택되는 세계 중에 불완전한 세계보다 더 완전한 세계가 신의 목적, 즉 지극한 선함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최선으로 활동하므로 어떤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양태들을 신의 활동에 적용할 수 없다. 제2원인자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작용의 주체로서의 실체적 형상이 있어야 하며 또한 작용의 목적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실체적 형상과 목적이 신에 의해서 부여되고 보존된다. 또한 실체적 형상은 새로운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가능적인 능력이므로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제1작용자가 있어야 한다. 이점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1원인자인 신에 의해서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실체적 형상으로 부여되고 그러한 의지적 활동이 실행되며 그러한 의지의 대상인 선이 주어진다. 이렇게 제1원인자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내적으로 작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 이러한 제1원인자의 작용은 의지의 내적 원리의 근거라는 점에서 외적인 조력이나 방해와는 다르다. 외적인 작용자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거나 아니면 설득할 뿐이다. 이처럼 제1원인자만이 억압 없이 의지의 자발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신은 어떤 억압도 없이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섭리관에 준해서 윤리관이 나오게 된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지므로 목적원인을 가진다. 마치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목적인에 비추어 다루어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의 연관 하에서 고려된다. 그 결과 윤리학은 곧 행복론이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 이 명제는 분명히 경험론적 명제이다.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지고의 선이며 총체적 선이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모든 선을 추구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행위가 행복 일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각각의 인간들에게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부, 권력, 우애 등을 추구한다. 또한 모든 행위자는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생명체들은 자기 운동의 원리인 영혼을 가짐으로써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복 일반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의지가 선(善)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인간학적 진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엇을 행하든 자신의 자기완성과 자기충족, 즉 형이상학적 의미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다. 결과적으로 윤리학은 도덕성의 자기목적성을 함의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행복 추구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주인이 되지 않는 행위를 말하고, 인간적 행위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로서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인간이 주인 되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적 행위는 곧 자발적 행위 혹은 자발성을 가지는 행위이다. 이것은 영혼론의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간으로서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며 그것을 이해하고 의도한다. 이 자발성은 식물과 동물의 것보다 더 완전하다. 인간 행위의 내적 원리들이란 그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가진 기능들을 말한다. 그 기능들은 인간이 유한자로서 그리고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로서 가지는 원리들이다.

신은 창조자이다. 창조자로서의 신은 피조물을 기획, 통치, 주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목적 짓는다. 신은 세계에 대한 철저히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초월적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창조자인 신으로부터 유래되며 신에게 궁극적 목적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각기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에게 복귀한다. 이와 같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신에게로 복귀 과정이 신학적·철학적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신은 단순한 일자로서 완전히 자기동일적이다. 신에게는 본질과 행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 사이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유한자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물이다. 따라서 유한자의 경우 본질과 행위, 그리고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이 서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해 능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 능력이 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영적 존재는 이성과 그것을 동반하는 영적 욕구 능력인 의지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분된다. 이론이성의 경우 전체가 올바르고 추리가 형식논리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그것의 결론은 올바르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개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다다를수록 선과 악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성은 지식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지며, 의지는 선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자연적 욕구들은 작용의 증가에 따라 더욱 활발해진다. 이성의 지식을 확보하면 할수록 그것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증가한다. 그런데 이성에 의한 지식의 확보는 의지의 욕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지의 대상에 대한 욕구는 이성의 그것에 대한 지식의 정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지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맹렬히 추구할 수 있다. 이성은 자신이 이해하는 대상을 의지에게 추구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의지 자체는 가능적 기능으로서 선에 대한 욕구일 뿐, 이성의 이해 없이는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지는 이성이 선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의 주관적 이유는 그가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숙고 혹은 자발성의 과정을 거친다. 숙고는 이성, 의지 그리고 감각적 욕구 기능들의 공통된 작업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이성과 의지의 공통된 결단으로서 형상적으로는 이성의 것이지만 실체적으로 의지력과 관련 있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의지가 도덕적 선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일상 언어에 따라 말하자면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주로 열정들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항상 도덕적으로 선할 것인가?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의지는 항상 도덕적으로 선한가? 그러나 육체를 가지지 않거나 의지로서 만의 인간 행위자는 모두 추상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유한한 의지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게 도덕적 선이나 악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 요인은 감각적 욕구 기능에 기초하는 열정의 영향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열정들을 통제하는 작업은 덕들의 몫이다.

다시 말해 이성과 의지는 덕에 힘입어 열정을 지배한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행하기 위해서는 덕들이 필수적이다. 열정은 우선 감각적 욕구들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변모이다. 라틴어의 passio 라는 말은 수용함을 뜻하며, 가능태-현실태 원리에 기초한다. 현대 언어로는 그것이 열정을 의미한다. 열정은 영혼의 운동이며 인간과 동물은 공통적으로 열정을 모두 가지나, 그 열정들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열정이 행위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욕구 기능의 강한 작용들인 열정들을 전체적으로 억압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합리적 조절과 지배를 시도하는 가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적 차이인 동물성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철저히 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의 가능성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현실적 모습이며 실체적 형상으로서 인간의 총체성과 단일성을 보장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육체가 어떠한 물리적 혹은 육체적 변화를 겪을 때 영혼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육체가 큰 상처를 입을 때 인간은 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은 항상 간접적으로 육체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은 육체 내의 변화로 인한 영혼 내의 변화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동적 열정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 고려되는 정념들은 '인간 영혼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의해 이해되고 의지에 의해 의도되는 열정들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이상 그러한 열정들은 단순한 감각적 욕구들에 따르는 열정들이 아니다. 인간 영혼은 대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인식함에 따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즉 자발적으로 추구하거나 도피하려는 열정을 가진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열정들은 도덕적 의의를 가진다.

행위의 도덕성은 여러 차원의 기준을 부른다. 그것의 궁극적 기준은 신의 지혜와 동일한 신의 세계에 대한 기획과 통치를 표현하는 영원법이다. 모든 도덕적 법들은 그것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유래된다. 더 가까운 도덕의 기준은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는 자연법이다. 그리고 행위의 도덕성의 가장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으로서의 실천이성이다. 인간은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에 대해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인 양심에 비추어 그 행위를 평가한다. 그러나 양심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도덕의 기준이 아니다.

유한한 영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 속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도덕법의 궁극적인 원리일 수 없다. 인간 이성은 신성한 이성에서 유래되는 실재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사변적으로 인간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그는 존재의 객관적이며 보편적 진리에 상응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은 의지의 특권이 아니다. 의지가 자신이 욕구 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위를 명령할 때 의지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한 이성의 규정 하에서만 의지의 행위가 법의 성격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법은 항상 이성에서 유래되는 명령이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법은 신성한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적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으로 다시 구분된다.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어지며,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교회법으로 나눠지고 모세 율법은 다시 도덕법과 예절법과 재판법으로 나눠진다. 자연의 법칙은 신성한 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적이거나 신성한 실정법은 자연의 법칙을 내포된 신성한 법에 대해 외적이다. 그런데 도덕법으로서의 자연법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에 내재적이다. 자연법이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 이상 불완전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법의 부분을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이성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 자체가 사물의 지침이 아니고 인간 이성 안에 심어진 원리들이 자연적 이성의 지배 하에서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지침이며 기준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자연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아니다. 자연법은 물리적이거나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의한 행위가 아닌 자발적 행위만을 지배한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자연법에 의해서 지시된다. 인간의 형상적 본성에 적합한 모든 행위는 덕스러운 행위이고 자연법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위들 모두가 도덕법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자연법은 선을 행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침은 그 자체로 자명하다. 그래서 이것은 증명될 수 없고, 또한 증명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이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다. 즉 정상적인 성숙한 인간은 이것을 이해한다. 이 법칙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파악하는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과,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법칙은 이미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인간이 본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덕적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이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선에 대한 경향성을 가지며 선을 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물론 때로는 자연법 법칙들은 항상 예외적인 사례를 허용하며 이들 법칙들은 첨가나 삭감의 방식에 의해 수정될 수도 있다.

올바른 이성이란 순수한 형식적 이성이 아니다. 올바른 이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보한다. 이것의 내용은 알려진 바로서의 세계의 모든 법칙성이다. 이 내용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법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 및 우주, 타인과 공동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때로는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들이 그것이다. 이 올바른 이성이 기초하는 세계의 질서 혹은 법칙 자체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 행위의 기준일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기준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 및 법칙을 반영하는 이성이다. 모든 법과 같이 도덕법은 보편적 지침이다. 그런데 한 인간 행위는 개별적인 이유로 구체적이며 또한 자유로운 행위로서 필연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연적이고 상황 역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서 우연성을 지닌다. 실천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원리이며 그것의 질서지음의 원리이다. 따라서 보편적·도덕적 지식을 구체적 행위에게 적용하는 것은 행위자의 실천이성 몫이 된다. 개별적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하는데, 이것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만이 자신의 의도, 자신의 선택의 동시, 그리고 구체적 상황을 알거나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행위에 대한 판단은 자의적인 것일 수 없다. 마치 사변적 이성이 존재의 본질들과 그것들의 연관에 의해 지배되듯이, 실천 이성도 객관적인 올바름과 그릇됨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한 실천이성의 추리의 결론이 바로 양심의 내용이다. 양심이란 나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이다. 그러나 양심은 실천이성의 보편적 기준의 하나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적용하는 것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의 기준은 아니다. 도덕의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이다. 도덕적 행위자인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그리고 물리적이 아닌 조건적인 필연성에 의해 선한 행위를 행하도록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그는 타자에 의해 도덕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천이성의 명령을 수행함에 구속된다. 즉 그러한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가진다. 그를 구속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신이다. 그래서 인간 행위자의 양심이 유일하거나 전체적인 도덕적 행위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행위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를 행함에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자연적 필연성은 행위자의 내부에서 비롯되며, 도덕적 의무는 타자의 원인성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양심의 구속력의 궁극적 근거는 모든 인간을 통치하는 도덕적 질서의 주관자인 절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기초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덕성이 성립되지 못하거나 인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한과 관련된 생산자로서 행세하게 되면 이 생산의 주체는 객체와의 격차나 간격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생산된 객체를 계속 자기 안으로 귀속시키고 싶어 한다. 정신은 그 자유로운 사유적 운동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통일한다. 존재란 결국 주체와 객체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을 객체로 삼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을 경로로 해서 원래의 출발 자리인 자기에게로 신과 함께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의식은 그 주체성을 그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

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


이런 와중에서 신의 규범은 어떻게 되는가? 초월적 주체로서 신은 세계에 형식을 제공한다. 그 형식 안에서 세계는 신의 규범에 묶인다. 그런데 그 규범이 문자로 되어 있기에 과연 문자와 실재 사물이 일치되는 식으로 인간들이 읽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문자를 대하게 된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매시지를 보내야 하며,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지시하는 맥락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 맥락이 수신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만 송신자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다. 메시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공통된 코드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메시지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질 만 한 물리적·심리적 접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코드화에 예술적 감성이 가미되면 작품 과정은 이렇게 된다.

작가→창작과정→작품→해석과정→독자

이 작품 과정을 거꾸로 하면 비평 과정이 된다.

독자→해석원칙→작품→창작과정 탐색→작가 탐색

이렇게 되니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작자가 지니고 있는 자기 목적성 안에서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자아가 타인을 통해 자아를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의미가 되돌아가면서 그 의미성을 강화시켜 는 결과를 낳는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신체성'에 있다. 나의 신체에 의해서만 나의 사물이 존재한다. 이러한 신체의 능동성에 의해서만 주관이 형성된다.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 주관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해 낼 수 있다. 육체라는 물성화된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외부의 환경과 접하고 비로소 자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는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신체는 세계의 일부로서 교류가 된다.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그 원인 규명이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해석은 곧 해석자 자신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신의 진리성이 문자로 전달되면 인간들은 그 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신의 사법적 권위에 저촉을 받게 되고 판결을 받게 된다. 살기 위하여 문자를 보다가 죽는 수가 생긴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관리자(IP:124.♡.84.82) 09-02-02 20:13 
모세가 시내산에 가지고 온 말씀은 자신이 쓴 글이 아니다. 그 글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엄위하심을 함유하고 있고 또한 능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참으로 거룩하지 않는 자라면 그 말씀이 발휘하는 거룩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사망하게 되어 있다. 그 말씀은 거룩한 차원 만에서 통용되는 문자이다. 그래서 거룩을 이겨내지 못한 존재는 아예 그 말씀의 세계에 산 채로 들어설 수 없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찌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출 19:12-13) 하나님께서 모세만 불러올리신다. 이로서 모세는 거룩이 제공하는 삶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세계가 오직 거룩으로만 살 수 있는 말씀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을 고린도 후서 3:17에서는 '영의 세계'라고 말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영은 주가 아니다. 그러나 주는 영이 될 수 있다. 영으로 계신 주님으로 인해 이 거룩한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받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모세처럼.

그러나 모세가 그 거룩한 세계에서 벗어나 이 인간 세계에 나타났을 때, 백성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모세 얼굴에서 방출되고 있는 거룩한 광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수준에 두고 논하고 있다. 문자로 보고자 하는 자는 그 문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죽지 않고 사는 수는, 주의 영 안에 놓여있는 경우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취지는,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독해 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가지고 온 말씀으로 인해 모세와 백성들 사이에 현격한 단절이 성립되는 것처럼, 주의 영 안에 거하는 자와 육신에 거하는 자에게는 현격한 단절이 성립된다. 결국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쓰고서야 모세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백성들 속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수건이 여전히 모든 사람의 마음을 덮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의 광채를 쬐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 안에 들어올 때만 벗겨진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속된 세계에 대한 심판적 자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십자가 사건이 기록된 그 대목만이 원어적으로 주해한다고 해서 뜻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왜 성경을 보고자 하느냐, 무엇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자 하느냐 에 대한 그 의도성까지 십자가 앞에서 정죄 당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 인간들이다. 개인적인 언어활동은 이미 그 사회의 기호 체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관습화된 문화적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가 중심의 계시성은 인류가 뿜어내는 모든 의도를 근원적으로 정죄하시면서 다가오신다. 철저하게 비밀스럽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 심지어 그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자도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6-10)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배척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로서 인간은 육적인 성향을 더 이상 은밀하게 감출 수가 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 폭탄은 계속 투하된다. 성경 전부가 그 밑에 십자가 폭탄을 감추어두었다가 이 종말에 성령께서는 말씀을 앞장세우시면서 그 배후에 두고 있는 십자가 폭탄을 남김없이 인간 세계에 다 쏟아 붙는다. 십자가 능력과 은혜로만 될 일은 인간들은 집요하게 행함으로 성취하려는 성향을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이것이 하나님께서 벼르고 벼른 언약적 차원에서의 심판성이다. 십자가의 심판이 곧 은혜로 느껴지는 사람은 이사야 같은 영적 체험을 가진 자들뿐이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4- 5)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한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언약에 의하면 반드시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약 안에서 축복과 저주가 함께 담겨있다. 여호수아 8:33-35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과 저주, 모두를 포함하고 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룰 때 축복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반드시 이루어내게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 완성과 그 내용에 있지 결코 개인에 대한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언약 완성을 위해 동원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언약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언약궤가 가진 위력을 온 우주에 퍼지게 하는데 있다.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다. '주의 이름'이 온 우주에 퍼지는 일만이 진정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는 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9-11)

그렇다면 이 오직 하나 뿐인 이 언약궤는 축복산과 저주산 가운데 어느 쪽을 자신의 자리로 정돈시키는가? 여호수아 8:30절에 보면, 에발산, 즉 저주산이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즉 하나님의 언약은 저주 편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축복이란 저주가 저주답게 하는 와중에서 형성된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격으로 축복을 요청할 입장이 못 된다. 축복이란 오직 저주 속에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피어난다. 즉 언약에는 들어있지 않고서는 축복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을 산 채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언약은 인간의 이름으로 인해 저지르진 죄가 인간을 향하여 분노의 저주를 퍼붓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궤에는 인간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긴다. 그 이름은 항상 인간의 이름의 횡포를 아울러 온 우주에 알려주고 있다. '희생당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마치 야곱에 의해 공격받은 천사의 심정으로서.(창 32:25) 따라서 그 '주의 이름'으로 인해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인간의 이름들은 죽어야 한다.

언약을 인도하시는 '주의 이름'은 오로지 그 언약 안에서만 살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는 능력이 함유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용서'로서만 가능하다. 즉 저주 없는 구원이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동원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래서 십자가의 심판성과 저주성과 무관한 성경 말씀은 어느 한 곳도 없다. 모든 말씀의 그 바탕에는 십자가의 취지와 연관되어 있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달되지 않고 누락시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성경 말씀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과해서 도출해야 하는데 그것은 구원과 무관한 성경 해석이 인간으로부터 반드시 나온다는 점을 밝혀져야 구원은 인간들의 성경 이해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함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해석은 환상을 낳는다. 십자가란 인간에 의해서 '메시야 밀침', 혹은 '자빠뜨림', 혹은 '제거' 해야만 했었다는 동기성을 함유하고 있기에, 십자가를 거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해석력 속에 들어있는 메시야에 대한 적대성을 고려하지 않는 채 해석을 내놓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이 원초적으로 '아담 안'에 속하지만 그 사람만큼은 '아담 안'에 속한 적이 없는 셈이 된다. 그런데 '아담 안'에 속한 적도 없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속할 수 없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옛 언약 안에서 폭발하는 새 언약의 위력이기 때문이다. 즉 구원이란 '아담 안'에 있는자에게 대해서 새 언약적 능력이 작렬해서 얻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 놓여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구원의 능력에 접촉한 적이 없는 자가 된다. 이처럼 자기 속에 있는 본래적인 '메시야 공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해석을 내놓겠다는 것은 죄악으로 지배받는 '아담 안'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 시대에서는 비현실적 규정받는 환상이 된다. 이 환상은 인간들의 원초적 이해력의 증폭으로 야기된 결과물에 해당된다. 따라서 새 언약 안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성경 해석은,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 구원 위주로 움직이는 비(非)십자가적이고 비복음적인 발상을 병행해서 도출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인간 배후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제안된 성경 해석임을 십자가의 의(義)로 정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즉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구원을 달성해 보려고 모든 변화와 동기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오직 십자가로만 대응하면서 거룩한 전쟁을 벌리게 된다.

이런 사정안에 놓여 있기에 인간들은 신의 함축된 판결성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아의식은 자신을 판결 받을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모든 판결로부터 무관한 입장에 있거나 자체적인 자체력이나 반성으로서 충분하게 해소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으로 잘할게요. 그러한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게요" 이것으로 문제 끝이다.

과연 인간은 자기 죄를 미리 방지할 수 있을까? 죄를 방지하려면 선을 무기로 삼아 악을 이겨야 하는데 자체적으로 선을 결집한다는 것 자체가 자아를 새로운 집착성에 묶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절대선을 가장한 악이다. 즉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 내부에서 죄가 다른 모습으로 뭉쳐서 몰려다닐 뿐이었다. 악은 그 선에게 잠시 주도권을 내어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선의 영역 안에 악의 영역을 일부를 점유하겠다는 것이다. 선은 악의 이 타협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체적으로 마모가 일어난다. 선의 일부가 악으로 뜯겨 나가는 것이다. 선이 악에서 다소 양보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점차 선과 악은 평준화된다. 어느 것이 선이지 어느 것이 악인지 결국 구분 짓기 곤란하다. 만약 양보를 하지 않고 절대선으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절대선의 위상을 자체적으로 확정시키야 하는데 절대선이란 맞은편에 절대악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어있다. 악을 공격하고 싶을 때 선이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선에 비견할 만한 절대악이 드러내지 않는 상태에서는 일단 자신의 모든 의식과 행위를 절대선이라고 결집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에게로 집중된 집착이다. 이러한 현상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는 절대선을 악을 재료로 삼아 '집착'이라는 형태로 대처하므로 서 더 이상 자신을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결과이다.

이렇게 되면 신이 외곽에 머물고 그저 곁눈질하는 참고 사항일 뿐이다. 신이 주셨다는 서술적인 문구나 명령적인 문구에서 신적 심판성을 누락한 채 절대적인 선이 되어버린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고 정돈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신의 말씀은 부차적이고 우연적이고 임시적이고 산발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접촉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은유적 해석성이다.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은유로서 움직이고 본문 위에 헤엄쳐 다닌다. 마치 금속에서의 자유 전자처럼 실재와 결코 합치되지 않는 상태에서 근접할 수 있는 은유들만 들이대면서 세상 구조를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규칙과 구조로서는 은유의 의미가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은유는 언어 규칙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진리가 이 은유적으로 움직이는 언어에 담겨져 옮겨지고 선포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의미와 진리성이 같이 구현되지 않는 현상이 빈번하다. 하나의 기호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거짓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준과 참의 기준을 일률적으로 정립해 낼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이 실존성이 여기에 개입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사람을 위한 의미요, 사람을 위한 진리일 때 비로소 그 언어행위는 가치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의 문제를 경험에서 찾는 반면에, 의미의 문제는 선험적으로 처리한다. 언어란 단순히 소리 나는 가장 원자적 요소인 음소의 의미를 집합적으로 모집했다고 의미가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란 음소의 변별성과 배제성에서 비롯된다. 음소의 근본적 현상은 대조의 현상이다. 언어 자체에는 오직 차이성만 있고 아무런 규정항이 없다. 차이성이 동일성을 나중에 배태한다. 동일성은 근본적이기보다는 파생적인 어떤 것이다. 차이성이 더 근원적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음소 분석은 원자론으로는 소용이 없고 전체론적으로 봐야 한다. 체계와 동떨어져 개별적으로 놓여 있는 음소는 그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전체 체제를 전제로 해야 한다. 행위나 발언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실증이 가능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특정한 표현의 선택에 의해 배제되는 모든 대안적 가능성에 의존하는 어떤 것이다. 물리적으로 구별될 없는 행위나 발언은 다른 체계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색을 본 적도 없는 장님이 그가 비록 색을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수 없이 색에 관한 낱말들의 용법을 배울 수 있다. 만약 경험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그는 결코 색에 관한 낱말들의 의미를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들은 사물을 볼 수 있는 정상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미론적 대조 체계를 익히고 있다. 따라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 구성된 추상적 대조들의 체계이지, 그 표현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에 관한 세세한 역사가 아니다. 부호가 전달하는 정보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갖지 않는가 여부는 그 부호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가 또 그 부호가 실제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의로 규칙을 조정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 규칙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통한다. 그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내온 것이 관습과 관행이요 문화이다.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건 없건 관습이 실행하는 규칙을 낳았다는 증거이다.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적 세계는, 지적 세계가 물질적 세계를 본뜸으로써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되고, 그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적 세계는 임의적인 관계의 조합들로 구성되고 그 관계들이 연계되어 사물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 지으면서 관습과 관행의 구조를 역사 안에서 계속 엮기도 하고 솎아내기도 하는 인간 자체를 직접 공략해서 검색해 봐야 한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소멸되는가?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물어봐서는 안 된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 있지 않고 아담 밖에 있으면서 아담 안으로 들어온 분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 분의 일생에서 무슨 의미 있는 진리적인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십자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보여주며,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죽임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신은 자신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부활을 약속한다. 이는 만물이 텅 빈 공간인 죽음을 축으로 끝없이 순환한다는 말이다. 우주의 주인은 죽음을 잉태한 신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절대 주인으로 끌어들여 속죄와 부활의 주체를 제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헤겔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로 정립했고, 칸트는 사유의 주체와 실천의 주체를 분리하여 경험보다 선험적 직관을 우위에 놓았다. 헤겔은, 칸트의 주체는 타인을 방문한 사회적 주체가 아니기에 개인적인 자유 의지에 머무를 뿐 진정한 보편 주체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은 누구인가? 실존적 측면에서 봐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역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절대 주인은 죽음이다. 삶을 한 순간에 지워버리는 두려운 부정성을 고려하지 않고서 복음은 보편성에 이르지 못한다. 헤겔이 알았던 것은 죽음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신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값을 지불했다고 말한다. 이로서 진정한 주체의 탄생은 인간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어 주인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과 함께 부활의 주님도 같이 받아들이게 된 새로 태어난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이것이 십자가가 암시하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이다.

죽음이 어떻게 삶에 내재화되는가? 실재 세계의 원형은 죽음이다. 그것이 삶 속에 들어와 있으니 주체는 삶과 죽음의 상호 접촉에 의해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체의 죽음을 요구하고 가중하는 타자와 그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주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 주체는 분열된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주체는 원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 이기적 상태에서 대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서 형성되는 것이 상징 질서계이다. 주체는 언어로 짜여진 상징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죽음의 전부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여분의 그늘이 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생이란 지연된 죽음의 삶이 된다. 욕망의 주체는 살고자 애쓰지만 그래도 계속 죽음의 강도가 더욱 세다. 삶이란 죽음을 부풀려놓은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상징의 질서 속에서 늘 환상을 꾼다. 분열된 주체가 늘 욕망의 대상을 찾아보는 모습이다. 꿈을 잠시도 꾸지 아니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실재계는 그 환상에 늘 구멍을 뻥 뚫어놓는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다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끌고 간다. 신체가 주체를 끌고 가는 최종 목적은 부서져서 죽는 것이다. 삶은 죽음을 우회해서 천천히 가고 있다. 이렇게 천천히 지연시키면서 즐기면서 죽음을 잊도록 조치하는 것이 상징 질서계에서 통용되는 잉여 쾌락이다. 여기서 쾌락의 원형은 파괴적 향유로서 법으로 위장하게 된다. 즉 법을 의도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이 강화되면 향유도 같이 증가한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즐거움의 일종이다. 법을 강화하면 그 법의 준수를 위한 폭력도 강화된다. 법은 텅 빈 기표이다. 원인 모를 힘이다.

칸트는 지고의 선(善)에 도달하는 도덕적 규율과 법을 순수 이성에다 호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주변의 삶의 환경 탓으로 돌린 가능성이 농후하며 무슨 판단을 할 때에도 최고의 선과 악을 놓고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늘 덜 나쁨과 최악 사이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는 이 인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한다. 이것이 칸트의 바로 실천이성이다. 순수 이성이 물(物) 자체를 포착하지 못하고 '지고의 선(the Supreame Good)에 닿을 수 없다는 인간은 어디서 도덕적인 행위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기 위해서 마련되는 도덕적인 규율과 법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종교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인간이 동물이나 자연과 같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존의 경험론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가 끄집어낸 숙제였다. 인간에게는 뭔가 고귀한 것이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감동을 맑고 선하게 만드는 '미(the Beauty)의 역할과 그것과 차원이 다른 숭고함의 영역을 대비함으로서 순수한 이성과 실천이성의 틈새를 종합하는 비판이성의 기능을 제시한다. 칸트의 미학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고 마음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감흥은 증오나 폭력적인 방향으로 악용하거나 선동하는 기능이 아니라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미는 목적 없이 목적을 가지고 아름다움이란 선을 지향한다. 이것과 다른 감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엄이다. 장엄함은 수학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으로 땅이 흔들이고 폭풍우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광경을 보면 장엄을 느낀다. 왜 인간은 자연의 파괴를 보면 마음이 고양되는가? 이것이 인간과 자연이 다른 점이다. 자연의 파괴적인 힘은 인간이 그것을 보며 느끼는 숭고함보다 하위에 있다. 인간에게는 파괴와 증오를 숭고함으로 고양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환상의 힘이며 칸트는 이 심미적 이성을 보았다. 그래서는 단순한 이해와 숭고함을 느끼는 이성으로 두 영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초월적인 이성은 인간을 지고의 선과 일치시키는 못해도 인간이 지고의 선에 가까이 가게 할 수는 있다. 도덕은 이해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인 직관에 의지하여 세워지고 지켜진다. 그리고 미는 개인적인 감동과 보편적 도덕을 조화시키는 윤리적 이성이다. 칸트에게 있어 순수이성이란 쾌와 불쾌의 감동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므로 인간 의지의 객관적 재현은 가능하지 않고 우발성만이 인간 의지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순수하게 경험에 반응하는 이성은 물 자체를 포학하지 못하고 항상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경험보다 우위에 있는 보편 선의 영역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대상이나 실천 행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의 형식(form)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일관성 있게 보편법 형식을 따르는 것이 도덕적 당위이다. 행위의 형식이란 감동이라는 내용을 억압하는 지고의 선이다. 감동을 지우고 그 자체를 메우는 보편 법의 형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분열된 주체가 자리 잡고 있고 상징 질서계이다. 그렇다면 지고의 선이란 인간의 상상을 억압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언제나 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그리고 법을 지킨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자로서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성은 그 신체로 실천하는 대목에서 오히려 없는 욕망을 만들어 내게 된다. 법은 욕망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여분의 욕망이 새로 발생한다. 이처럼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으로서 욕망의 경계 넘기에 법이 같이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이 늘어나면 법의 범주로 같이 늘어난다. 욕망은 그 욕망을 거세하고 금지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부르게 되고, 그 법은 새롭게 없는 욕망을 계속 생산하게 된다. 죄가 새로운 선을 탄생시키고 곧장 그 선을 죄악된 것으로 물들게 해 버린다. 아무리 지고의 선에 가까이 가보고자 해도 실재계에서 주어지는 텅 빈 죽음의 힘은 절대선을 더욱 더 멀리 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선을 따라 붙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신체를 지탱하는 욕망은 여분의 쾌락대로 움직이기에 분열된 주체는 또 다른 법을 동원시켜 땜질을 하고자 한다. 변명과 핑계 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자기 수련과정이다. 하지만 행위자의 행위는 그저 뭔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위 후에 행위 전에 다르게 되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즉 주체는 그 행위로 뭔가를 달성하는 자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뭔가를 새롭게 겪는 자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지난날의 주체상은 계속 지워져 버린다. 그리고 새로 경험한 행위 속에서 자아를 수시로 정비하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상징 질서계 속의 모습이다. 이처럼 죽음의 무의식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의식 세계를 자꾸만 삼키면서 진격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인간은 환상 속에서 대상을 본다. 신체를 둘러싸고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끝까지 환상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파괴당할지언정 결코 신에게 패배할 마음은 없다, 따라 붙일 때까지 따라 붙는다. 무한한 절대성과 자신과 기어이 간격을 좁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신의 절대의지와 동일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자신이 불완전함을 지우고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한다. 그 자유의지의 끝에는 자신의 환상이 낳은 신이 대기해 있다. 그런데 그 신은 그 신을 만든 창조자인 그 인간처럼 분열된 주체를 갖고 있다. 지옥을 만들어놓고서도 그 지옥을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지옥의 스산한 징후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멀리 도피행각을 벌리는 그런 신이다.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실재계의 여분이라면 그 여분은 아무리해도 다 제거할 수 없다. 이것이 적개심이 된다. 그런데 도리어 이 적대심이 사람의 삶을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삶의 충동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생긴다. 복수할 일이 남아 있을 때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자기 민족에 대한 애국심은 타민족에 대한 지독한 배태의식을 낳는다. 경쟁자가 있는 이상 인간은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신은 경쟁의 파트너로 최종 삼는다. 공격 목표이다. 죽음 속에 던져진 이상 당연히 발생되는 악의 징후이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처음부터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 6:23)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임이 확인된다.(롬 5:10) 이 적대감은 거룩한 말씀의 가르침으로 제거되거나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를 향한 정복욕으로 옮아 갈 뿐이다. 파괴적 충동이 사라지면 본인도 살 의욕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인간의 주체를 욕망으로 삼켜버리는 유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종교 욕구를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의식의 간섭에 의해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닌 다른 것을 상상하므로 써 이미지를 발산하는데, 이 발산된 이미지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며 또한 종교 형태로 발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한다' 또는 '신앙 있다' 하는 것조차 인간의 배후에 자기를 닮은 존재에 의해서 주도되는 형태에 불과하다. 성경 적으로 말해서 '아담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다.(롬 5:14)

하이데거는 존재성을 더 탐구하여 말하기를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자아를 제대로 파악하자면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존재'와 '자아' 사이에 균열과 구분이 생긴다. 자기라는 신체성과 지기가 신체로 되어 있음을 파악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아'는 늘 '존재'와 결합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늘 실패하고 만다. 존재는 자아의 주관이 파악하려는 그 객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아는 이미 존재 위에 있기에 끊임없이 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여기에 시간적 요소를 가미해 보자. 그러면 비로소 존재와 자아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아라는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존재 위에 자아가 기초해 있기에 가능한 사태이다. 자아가 존재와 일치되어 영원성을 보장받으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존재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자아는 늘 존재를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된 존재는 이미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곧 존재의 소멸을 뜻한다. 존재의 무(無)이다. 이것은 자아의 죽음이며 자아가 무가 되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무에 청초한 자아는 무적 속성을 지닌 존재를 표현하는 증거물이다. 그래서 자아와 존재는 일치되지 못하고 늘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다.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다만 존재만이 존재로만 홀로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늘 불안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불멸자로 만들어 놓고 늘 그 존재 위에서 불멸한 것을 희망한다. 이러한 희망은 상상력으로 도출된다. 이 상상력으로 자아 불멸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이미지요, 불멸과 소멸 사이의 이미지요, 높음과 낮음의 이미지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이미지요, 안정과 불안정의 이미지요, 천상과 지상의 이미지요,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미지요,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미지요, 신과 인간의 이미지요, 차가움과 따뜻함의 이미지요,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 등 모두 두 개씩 배타적 개념이 쌍을 이루는 이미지로 최종 귀착된다. 이것은 실존과 존재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이미지들이다. 이 대립은 '은폐'하므로 서 존재로 지향된 은유적 몸부림을 보인다. 은유는 이처럼 우연을 필연적으로 잠시 머물게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는데 앞 단계에 있어서는 우선 대상이 있고 그 다음 뒤이어 그 대상 속에 상상력이 화육된다. 그런데 그 다음 관계에 있어서는 우선 상상력이 있고 그 다음 그것이 대상을 창조하여 거기에 화육함으로써 외계에 나타난다" 이러한 이성적 인식 방법은 곧 '자기에 의한 통치 방식'을 가지고 눈 밖에 펼쳐진 전 세계를 통치하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세계 정복의 기초점이 되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넘어서는 극복점이 되는 발판으로 자기 이성을 사용하다 보니 여기에 '이성의 횡포'가 있다. 즉 멈추지 않는 범주의 확대가 계속 요구되는 것이다. 보다 더 큰 범주 안에 보다 더 큰 테두리 안에 세계를 자꾸만 담아내려고 한다. 이 구조의 확대를 끌어줄 새로운 틀로 도입되는 것이 '시간 개념' 곧 역사 범주의 영원성이다. 약간 지연되더라도 모순되고 대립되는 모든 것도 영원한 어떤 한 시간 점에서 해결이 지어지지 않겠느냐고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개방적 역사 외부의 구조를 역사 내부 구조로 변형시켜 추진력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다. 우연을 역사 안에서 필연으로 묶어내고. 허구는 역사의 우연적인 사건들이 뒤엉킴과 마주침으로 자연적으로 차이점이 해소되리라 믿어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인간의 시간 의식이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2. 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 시도

시간이란, 인간이 현재를 버티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지 과거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 영혼에 의한 '자기 확장' 시도로서 등장되는 의식이 시간 의식이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다면 시간도 끝난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죽음 이후까지 세계를 확장시켜서 죽어 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사전 작업을 미리 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역사란 언제는 회고적으로 서술 할 뿐, 일어나는 일을 서술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놓고서 자기 생명을 거기에 위탁한 채 안심하고 숨을 거두고자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확장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그동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이것이 '역사 만들기'이다. 그러니 '허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허구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낳는다. 즉 역사란 아예 없고 역사 이야기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구적 서술이 어떤 시간요소를 차용하여 자기 구원을 위한 이야기를 꾸며내는가?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연속성, 즉 '시간성'을 도입했다. 시간을 어떻게 규모 있게 농축시키고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역사 안에서 설득력 있는 의미를 갖게 했다.

간단한 예로 시계의 소리를 들어본다. 시계가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한결같이 '똑딱' 소리를 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의성어는 시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구적 표현이다. '똑-딱'에는 두 가지의 허구성 차이를 부여된 언어가 등장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다. 앞 뒤 소리가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틀리다는 것이다. '똑'이 '딱'과 서로 틀린 글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똑'과 '딱'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채 흐르고 있는 중립적 시간 의식을 상정할 경우뿐이다. 이것을 '지속'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속이 시간 체계로서 간주될 때만 처음과 끝소리가 감지될 수 있다. 이 점은 '똑-딱'처럼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 구조를 청취하는 피실험자가 그 구조 내에 간격은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지만, 리듬군 단위 사이, 즉 '딱',과 '똑' 사이의 간격은 그것이 일정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 똑과 딱 사이의 구별은 단순히 음성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이다. 음성적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공간적? 시간적 인식으로서 형태를 조성하고 리듬을 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소리를 '딱'이라고 구별해 부른다는 사실은 첫 번째 '딱'을 '똑'으로 염두에 둔 상태에서 시간적 구조를 즉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과'딱' 사이의 간격을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운다. 이 시계의 '똑-딱'을 우리는 시계가 나타내는 플롯(줄거리 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롯은 시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킨 구성물의 한 모델이 된다. 시간은 이처럼 인간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시적 플롯에 따라 종말론을 이해할 때도 이 가장 기본적인 '똑-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똑'은 초라한 기원이라면 '딱'은 그 초라함과 같은 양으로 상응하는 미약한 최후이다. 그런데 줄거리 구성이 '똑-딱'보다 훨씬 복잡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그것은 분명 이른바 우리의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된 소리 중 두 번째의 '딱'과 같은 종류이겠지만, 분명히 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교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이 장치들은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이 도중에 사라지려는 성향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똑'에 이어지는 간격 내에서 '딱'이 이어지리라는 생생한 기대와 함께 '딱'이 아무리 늦게 올지라도 그 안에 발생하는 각가지 일들은 '딱'이 확실히 뒤따를 것인 양 발생한다는 의식과 관계성을 치밀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한 모든 플롯(구성)은 결말이 모든 지속에 부여해줄 어떤 의미를 전제하고 또 필요로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간격에서 단순한 시간성, '딱-똑' 사이의 공허감, 즉 인간적 흥미와는 무관한 연속성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각(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kairos)가 된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그들이 '시간적 통합'이라고 부르며 현재에 대한 지각과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의 기대를 하나의 공통된 구성에 의해 함께 묶는 방식이다. 이 구성에 의해서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이제는 과거가 과거로서, 미래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된다. '크로노스(chronos)'이었던 것이 '카이로스'(의미 있는 특정한 한 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구별되나?

보통 신약 성경 사도행전 1:7에서 나타난 용어의 구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으려한다. "크로노스(때)와 카이로스(시)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 이 구절에 나오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에 대해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은 강력하게 두 구별을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즉 크로노스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이 의미에 차별을 두고 특히 지정된 시점인 카이로스를 가지고 친히 '구속사의 체제' 형성에 나셨다는 것이다.(살전 5; 1/ 마 26:18/ 요 7: 6/ 벧전 1: 5)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특별하게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위기의 순간'이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시간의 운명'이란 의미로 쓴다. 어떤 경우든지 그는 그 말을 '삶의 기반이 발밑에서 흔들리는' 시대인 현대 특유의 삶의 의식과 강력히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 견해는 현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줄곧 되풀이되는데, 그 한 예가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으로서, 이것은 죽음, 고통, 죄악 등의 개인적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짓는 자료들과는 관련된다. 반면에 쿨만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전통적, 성서적 의미로 쓰고자 한다. 즉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 또는 '기다리는 시간' - 묵시록에 의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충만한, 즉 종말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미로 차 있는 구원의 시점이며 구원의 때이다.

아주 극단적인 구별이다. 그리스도는 과거를 새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새롭게 완성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종말과 관련된 과거에서 초시간적 의의를 갖는 역사적 시점들, 곧 '카이로이'가 생겨난다. 그러한 신적인 플롯(줄거리)은 종말과 관계되는 카이로이의 패턴이다.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이러한 대립항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는 크로노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지겹게 이어질 뿐인' 시간과 '카이로스'와 같은 집약된 시간 사이의 대조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대의식(현대인은 여러 시대 aiones 가 겹쳐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과 다른 성격의 시간들 사이의 현대적 구별, 즉 신의 시간(kairos)의 도래, 신의 시간의 완성(kairos-마가복음 1장 15절). 여러 시기의 징조(마태복음 16:2-3) 등을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보는 구별에 기초가 잡힌 것은 신약 성서에서였다. 여기에서는 완성의 관념이 필수적인바,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구약성서의 예표와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시키고, 종말뿐만 아니라 인류의 태초의 기원과의 일치도 시도한다. 그러므로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분은 현대의 일부 신학자들의 예표론적 관심과 상관성이 깊으며, 예표들의 매력은 궁극적으로, 한가운데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시작과 종말을 조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점들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느냐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 교수 같은 자는 모두 성서의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별은 사실 신약성서의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라고 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 4에 '때가 참'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pleroma tou chronou'이다. 사도행전 1: 7과 데살로니가전서 5: 1에서는 hoi chronoi kai hoi kairoi라고 씌어 있듯이, 두 용어는 변별되어 있지 않고 흠정역은 이 구절을 '때와 기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도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에 훨씬 큰 관심을 보여준다고 바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바꿔 쓸 수가 있다. 아마도 카이로스의 의미는 '결정적인 시간'에 가까운 것 같고 크로노스는 보다 양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바 교수에 의하면 성경에서 '카이로스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카이로이를 '결정적인 시점들'로 이해한다할지라도 그 뜻이 성경에서만 고정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저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역설하기를 예수님마저 '旣存'(이미)과 '未存'(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나타내는 종말론을 펼치시면서 구속사의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볼 때 '미완'의 부분이 미래에 남아 있고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보면 분명 구원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님의 활동을 보게 되면 아직 미래에 펼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그도 인정했다. 오스카 쿨만이 내세우는 구속사 이론에 의하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병렬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그것도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또 다른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서는 그는 초대 기독교도의 신앙과 사상은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이나 저 세상(혹은 차안이나 피안)을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와 지금 또는 그 때라고 하는 시간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간의 과정에 완전히 속해 있어 근본적인 것은 공간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이다 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도 또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과연 오스카 쿨만과 같이 시간을 공간적인 구원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말씀도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 의식 구조는 본능적으로 공간적 그림을 구성하며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직선적 도상(圖上)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공간적 사고의 연장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은 이 직선적 시간인식을 가지고 모든 입체적 공간적 의식 형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시간 의식 이전에 공간 의식이 우선되어 있다는 말인데, 공간이란 실은 점들의 집합이고, 시간은 공간의 부정(否定)이며, 공간은 점의 부정이기에, 시간은 점의 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바꿔 말해 점성적인 속성이 곧 시간이다 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란 점으로 나타나는 '지금'의 연속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뱀이 스스로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서 결국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불합리하다. 그런데 인간의 합리는 자기 모습이 결코 살아지지 않는 한도에서는 합리이다. 시간관도 이 바탕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님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 있었지 결코 '이미', '아직' 이라는 시간관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요 10:33) 시간을 일직선상으로 그려놓으면 ‘이미’란  ‘아직’을 직선상에서 후차 지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를 뜻하고, ‘아직 아니’는 ‘이미’를 일직선상 앞에 두지 않았을 때나 성립한다. 수학에서 직선이란 점들의 순차적 계열에 따른다. 따라서 ‘아직’, ‘아직’, …의 이어짐으로 표현된 일직선뿐이든지, 아니면 ‘이미’ 라는 한 점으로 직선을 마감해야 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직선 위에 묵시 세계라는 명목으로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있는 도형을 얹어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묵시는 시간과 점으로만 표현 할 수 있지 면적이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면 묵시란, 기껏 '많은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개념으로 왜곡되어 정의(定議)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스카 쿨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말씀의 완성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했는데, 시간 자체가 긴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을 느끼는 주체자들이 갖는 긴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긴장감이나 사도나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긴장감은 '아직 아니'라는 시간상 미착성(未着性)으로 인해 아직도 손도 못된 미해결 문제의 존속으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아니라 '이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 어두움의 세계의 속성으로 긴장했고 또 고난을 받았다.

오스카 쿨만처럼 그저 다가오는 시간에다 모든 고민거리를 위탁해서 넘겨버리는 식으로 해결 지우려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내외적이고 심적인 악의 유혹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들은 구원의 '아직 아니'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긴장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있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4- 7)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주님이 지키겠다는 데 더 이상 아직 아니가 무의미하다. 주님이 아니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성도들은 예수님이 모든 활동을 하시던 이미 말씀이 성취된 가운데서의 활동임을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가 아직 파장을 맞이하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끄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아직 구원이 덜 되어서 뭔가 주님께서 일을 더 하시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저 착수만 하고 마감은 아직도 되지 않은 미완성적 구원관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이다. 실제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은 실제적 차원의 내용에 의해서 평가받지 다른 범주적 평가를 허용할 수 없다. 이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의 담긴 내용대로 '이미'의 고유 가치만을 드러내 줄뿐이다. 예수님의 이미는 '아직'과 대비되는 '이미'가 아니라 '이미'의 성과 자체가 아직도 시간 의식에 기대를 거는 그 '이미'를 공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자고 나타난 '이미'다. 오스카 쿨만 교수의 구속사 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절대적 시간에 예속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에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 선상의 한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시간의 사건들과 차별되게 대조된다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시점에 있다는 것 인해 비로소 그리스도 중심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전 구속사의 중심점 작용을 했다는 것에 준해서만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유발되는 일들이 아니라 일단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점 만들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을 보여주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중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세상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의 중심' 혹은 '구속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을 수 합당한 사유의 연결 고리가 제시될 수 있는가? '시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개념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스카 쿨만의 주장대로 구속사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흘러간다면서 어찌 중심이라는 것이 따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단절된 막대기 같으면 무게의 중심점이나 길이 중심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수직선과 같은 것에 중심점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한 지점에 의해서 두 개의 직선으로 분리해 나가는 분절점을 상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 교수가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주장하려면 구속사가 한 개가 아니라 두 번째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구속의 역사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부합되는 학자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이다. 이 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스스로를 넘어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지시하여 첫 성취 자체가 다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먼저 번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문자대로 후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기 선지자의 시대에 성취된 역사는 그 예언을 추월해서 미래의 내용이 더 추가적으로 함유된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미래의 것이 선취(先取)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서 무작정 '약속-성취'의 속성만을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최종적 계시가 예수님에게는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비추월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모든 계시가 전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후에 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최종 통치에 마주 향해 가는 아직도 열린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아직 미완결이며 잠정적이다 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세상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취성 안에서 새롭게 미래로 출발하면서 또 하나의 최종 성취를 기다리는 보편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점 설정은 같은 구속사 선상에 놓여 있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결정되었음을 증명할 길도 없다. 구속사가 되었든 보편사가 되었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해 역사를 정립하는 방법으로는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나 사건 자체에서 계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계시를 배척하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 나타나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인식 근거로 여기는 구속사 위주의 사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계신 분에 의한 말씀 성취 차원의 사건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3-24) 즉 현재 인간들이 아무리 역사를 끌고 다녀봤자 죄 가운데 죽는 세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사 자체를 완성시켜 건지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는데 다른 차원의 선포이다. 예수님은 때를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다. 단지 실시하신 특정 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특정 때를 기다리시기는 했지만 그 특정 때를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라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오셨다. 이처럼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존재 보다 구속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절대적 계시의 대용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유대교적인 히브리인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고대 문화에는 두 대조적인 인식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헬라)적 사유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쪽 사유, 즉 히브리적 사유를 계시 전달에 적합하다고 여겨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히브리적 사유 쪽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가 보다 확연해 진다는 것이다. 토를라이프 보만 교수는 그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 사유적 시간관의 특징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데 있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 인식론이 계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장애가 되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바리새인들의 말씀 해석은 시간의 흐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역사 인식이 도리어 메시야 앞에서 좌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짓고 부정해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든 아니면 헬라적 사유든 상관없이 말이다.

인간의 시간관념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도 아이온(시대)과 플레로마(특정한 질의 때의 충만)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일종의 그 시대의 용어 사용에 있어 서로들 언어 규칙에 존중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모호한 문화적 현상들을 보아 합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서 확신 있는 내용으로 확장시켜 채우자는 데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아무리 지금 형편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구원 될 미래를 내다보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의 충만과 완성의 때, 즉 '플레로마'를 요청한다.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역사관이 이런 성향을 담고 있다. 플롯(줄거리)에 의해서 과거 및 중간의 시점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물릴 줄 모르는 관심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똑-딱'이라는 시간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이 동일한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과거의 그 인간과 현재의 그 인간과 미래의 그 인간이 그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연속적인 동일인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는 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류의 문학과 문화가 자생적으로 배태해 오고 있다. 작품에 담겨있는 구속사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재현이 아니라, 이야깃거리가 수시로 첨부되어가서 구성된 구속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이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구속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주님에 의한 실제적 구원 사건을 대단히 모호하고 낯선 일로 생각하고 주류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신들이 만든 구속사의 가치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발휘가 아니라 구원 사건에 관해 그 의미성을 수집하여 거기에다 자기 구원을 대비시켜 그 진위를 확인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인해 지금도 바람같이 일하시는 성령의 구원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허구란 문학에서 이단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는 조작되기를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그들을 지배하는 신화라는 허구성에서 되레 변화를 촉구하는 각성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만약 허구의 이러한 반발이 없다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자꾸만 후퇴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현재의 의미로 이해케 하고 미래로 향한 개방의 발판을 닦아주는 현재가 되도록 해준다. 문학에서의 허구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반해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케 한다. 혼돈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 두는 법은 없다. 인간들은 혼돈을 겁내며 그것을 필연성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려 하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만약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기다린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문학에서의 "이제 믿을 것은 허구성밖에 없다"로 표현 안에 포괄적으로 담긴 셈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허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허구적 표현과 시간의 틀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신화로 분류되어 과거의 패러다임(인식 체제)라고 핍박을 받게 된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문예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제와 현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의 상징적 기능이 동원되어 '현 시대의 문학'으로 나타내 보자는 것이다.

언어 범주가 인간의 사고 범주를 다 수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언어 범주를 입장에서 서서 보면 수용이 다 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완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약조가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가 있다. 기호 체제의 본질은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약'이다. 놀이를 하는 어떠한 사람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질 수는 없는 법이다. 게임 안에서의 진리란, 그 게임의 규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자기 완결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기에,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절대조건을 대리하는 분산된 조건과 의미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변별성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기 사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를 변별적 구조를 통해서 잡아내려고 한다. 구속사는 이 작업의 일부이다. 문학을 이루는 개인의 상상력은 사실에 있어 그 사회 구성원으로 갖는 체험의 일부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접쳐진 사회 구조가 작자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어 의미가 비로소 만개 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 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된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세계는, 우연은 제거되고 영원한 반복성만이 규칙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 소통에 준한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관을 신학자들은 놓치지 않고 계시를 정의(定議)하는 아이디어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인간 사회를 놓으면 개인주의적 계시관과 더 이상 계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라는 호칭으로 교류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 자리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친 이상 '그'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들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너'이신 분 앞에서 '너'인 채 만나게 된다. 이로서 계시는 '그' 분과 개인적인 '나'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동일성이 갖추어진 상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찾아드는 질문과 대답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교회'라는 단체에서 시행되는 모든 교육적, 훈계적 사역은 반성과 참된 회개를 유발하는 중재적 사역으로서 계시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각자 개인적인 '나만 관심 두고 '나' 그 자체를 본질성을 삼고 존재하는데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너' 되시는 분을 뵙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부정성이 각자에게도 유발될 필요가 있는데 이 중재적 계시 활동이 지금도 교회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는 계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교회 역사도 나름대로 계시로 대우받는다. 즉 자기 교회 위주의 신의 계시사(啓示史), 신의 구속사도 따로 편성되어 계시의 일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29장, 30장, 31장… 계속 되면서 하나하나가 신의 계시로 편입되면 계속 미완성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처럼 교회 존재를 구심점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 안에서 남을 위한 '너'가 되도록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있는 교회를 도저히 부정하지 못한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계시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역사가 곧 계시가 되고 성경은 이 계시활동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로서 성경은 역사의 대상물로서 풀이 가능한 내용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쓰여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보편적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물음의 영원성은 보편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절대성이라는 계시인식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까지 보편적 관념들을 동원시켜 붙잡아 묶어둔 모음집이다. 그래야 지만 '나'에게서 한없이 터져 나오는 물음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하여 '나' 자체에 대한 가치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되었든 그 어떤 절대 사물의 관한 과학적 원리가 되었든 종국에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 자체에서 물음으로 도출될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산발적인 게임에 늘 파묻혀 사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 행함의 보금자리'가 장만된다. 즉 나의 행함도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뜬다.


3. 시간으로 만드는 '행함의 자리'

인간이 범죄한 후에 모든 면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을 공격한다. 하나님의 율례나 법도나 말씀이나 언약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홀로 달성해 내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자들이 아니라 거침없이 대드는 존재로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런 바벨탑 건립으로 처음 드러난 성향은 '자기 이름 내기'이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자기 이름 내기'란 모든 의미성을 인간 존재성에 두겠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가치 규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존재함을 드높이 다질 수 있느냐 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은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열심으로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수는 식으로 만물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현실로 보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피조물의 대한 권리 행세를 마음껏 하신다. 더 이상의 현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이름 내기' 성향은 '존재→인간→시간→역사→구속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내막을 쏟아내고 있다. 어쨌든 자기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 점을 현실 규정의 핵심으로 간주해 달라고 신에게 항변할 참이다. 인간의 존재성을 배제하고 하나님 쪽에서 구원사역을 시도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영광을 위하든 무엇을 하든 서로의 존재를 피차 인정해주시면서 그로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인간들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서 그 인간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도록 하므로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의미를 갖추는 식으로 일을 하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신앙은 나의 존재 증명이 아니다. 신앙이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었다. 신앙은 오직 언약 안에만 담겨 있었다. 즉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을 두고서 비언약 세력과의 거룩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 신앙이다. 언약 안에는 오직 언약이 성취자 되시는 분만 계시다. 그 분의 신앙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이로서 언약 전쟁에 초대를 받은 자들에게만 그 분의 신앙의 지배 안에서 그 분에 대한 신앙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자신이 행함으로 주어진 신앙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허락 받은 신앙을 선물로 받았기에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

하나님이 친히 벌리시는 전쟁은 종말에 와서 완전히 본격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름'으로 설쳐대는 모든 자존심을 사정없이 공격하신다. 왜 인간의 이름이 공격받아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와 거룩과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전쟁은 인간의 이름을 겨냥해서 '구속사→역사→시간→인간→존재' 라는 과정을 뒤덮으면서 따라오며 공격하신다. 존재의 궁극적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도 아니며 그저 이 세상이 쳐놓은 역사 속에 등장했다 점멸된 모든 존재의 재등장과 임시적 보존성에 불과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시간도 그 인간과 함께 사라진다. 시간은 곧 모든 인간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계는 인간이 봤을 때 부정성(否定性)을 지니고 있음을 시간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들의 시간 본성은 자신들의 구원에 앞서 '시간 구원성'에다 자신을 맡긴다. 즉 사라진 과거 속에서 자신에게 뭔가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건들을 제멋대로 골라 배치해놓고서는 그것으로 자기 구원을 위한 간증거리에 해당되는 구속사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 작업으로 그 시간 안에 있는 모든 부정성을 제거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보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자리는 '존재의 보편성'으로 마감 처리된다. 즉 존재자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부정성을 제거해서라도 종국적으로 그 존재를 받아주신다는 희망 같은 것이 서려있는 아이디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해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므로 만약 사랑의 대상이 상실되는 그런 결함이 생겨버리면 (예를 들면 가롯 유다의 배반 같은 것) 그 책임도 가롯 유다가 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의 대상 관리조차 제대로 못해내는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의 존재성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 구현'도 실패로 돌아가고 불가능하다는 점에 인간의 보편적 존재성이야말로 구원의 궁극적 이유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반발의 속셈은 따로 있다. 곧 구속사의 수립이 하나님 일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구속사의 도입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내막을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이 배제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더 나아가서 인간들이 자기 존재성을 기초로 수립한 구속사와 크게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내용상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구속사를 구상하면서 첫 번 시작과 맨 마지막 목표를 의식하자마자 그 선들의 상호종속성과 통일이라는 사상을 물리칠 수 없게 밀어닥친다. 역사 경과 자체의 의미통일과 수평적 통일!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디서 가져오며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적 실재성을 위하여 따로 인식론에 요구되고 있다. 인식적인 것의 근거 설정과 규정과 변명을 존재적인 것에서부터 얻기 위하여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를 구별 지우는 데부터 시작한다. 즉 인간만이 역사를 만들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 역사의 부분으로 참여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바로 이런 연유로 객관적 자연 세계를 규명한 우주론과는 별개로 인간학 위주의 새로운 신화를 낳게 된다. 그런데 이 신화가 영원을 사칭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 실제 역사로 인해 보장받는 영원임을 증명해야 되는 부담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 등장되는 것이 소위 미래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한 '믿음'(신앙)이다.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에 직면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는 것은 역사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 관해서도 새로운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곧 '믿음'→'이해'로 바뀔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이다. 즉 임의적인 사건들을 한 통일성 안으로 묶어내지 못하는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하니 믿음의 내용에 관해 이해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물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물로 채우는 것이다. 그 이해 안에는 초자연적인 자리도 필히 마련한다. 즉 구속사 자체가 초자연적인 면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끊임없이 이해→'믿음'으로 나아가는 합당한 구원 요건이 구비되어야 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와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차이를 좁히고 극복하는데서 '행함의 자리'가 부상된다.

만약 믿음에서 출발하면 '행함'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행함을 지속적으로 제거시키고 부인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고난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가 자기 '행함'의 증인에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벧전 5: 1, 2:21) 만약인간의 행함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은혜로 인해 남은 자는 발생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은혜는 고유 원칙에 따라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것은 '남은 자'는 원칙이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 5- 6, 9:27 참조) 은혜는 언약에 준해서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만에게만 적용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 2) 은혜의 온전함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믿음은 추가적으로 인간의 행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믿음에서는 오직 믿음만 계속 나온다.(롬 1:17)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행함'이란,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이해성을 기본으로 하고 그 이해한 바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력을 발휘해 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요소는, 옆의 사람의 이해력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의 이해력이 아니라 행함의 당사자인 곧 '나'가 이해하고 있는 이해력이 곧 나의 '행함'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행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력을 그 인간 혼자서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에 휩싸이게 된다. 이 양보 못할 고유성 확보로 인해 그 사람은 극한 희열에 사로잡히게 한다. "보라, 목표는 섰다. 주의 명령을 행해보리라. 내가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행하는지…!"

절대적 주체의식에서 유발된 투지, 이것이야말로 생물체가 산 생물로서 가지는 존재성의 절정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기 행위 함에서 나오는 이 환희의 맛을 잊지 못한다. 자기는 어디까지 기죽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이 되고 싶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내가 행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인간은 늘 이런 식이다. 중보자가 행하시는 대속의 의의(意義)가 무참하게 밟혀버리는 순간이다. 주님의 찔림과 매 맞음(사 53: 5)은 인간의 자기 고생담에 밀려서 그 가치가 어디론지 살아지기 일 수이다. 그리고 십자가(자기 부인)를 향하여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다음과 같은 주의 은사성은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 8) 인간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다. 인간을 죄인취급하면서 행하시는 대속의 기능도 그렇고 그 우연적인 적용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8-9) 이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태도를 눈여겨봐야 한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즉 "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방식이 구원이 실시되는 겁니까?"라는 반발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를 만난 대부분의 상식 있고 건전한 인사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이 인간 나라에 불필요한 인물로서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림받는 자'로서 세상을 끝내야 했다. 따라서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고 "왜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도대체 그 때 그 인간들이 어떤 이해 구조를 가졌기에 그 분을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밀쳤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그 때 당시의 유대인과 동일한 이해 구조를 가졌기에 여전히 그분에 대해서 못마땅함이 여전히 신앙의 주류가 되어 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 3 하반절)라는 말씀은 아직도 인간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이해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충돌한다. 인간들의 이해는 우연성을 배제하려든다. 우연성을 주류가 되면 이해성은 와해되고 이해성이 모호하면 행함의 궁극적 의미도 흐물흐물해진다. 자기 행함이 허무로 끝나면 곧 자기 행함에 대한 처리 능력도 신뢰치 못한다는 말이 된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바로 이점은 산 생물체가 근원적 생의 희열이 빼앗기는 경우이다. 따라서 신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한다. 전적인 믿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행함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이해의 폭을 초자연적인 것까지 넓힐 용의가 되어있다는 고백을 늘어놓게 된다. 어쨌든 이해의 범주 안으로 신앙을 아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행함'의 유효함은 유지될 터니까. 그런데 이러한 타협책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다가오셨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 1 상반절)
 관리자(IP:124.♡.84.82) 09-02-02 20:14 
'이해' 상태는 자연적인 것이기에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애쓰고 노력하면 처분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이해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에 신을 요청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같은 역사를 놓고 이중 역사관이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이해의 범주에 합류시킨다. 역사는 역사로서 이해하고 초역사는 과잉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로되 자연적 역사로서 보는 안목과 초자연적 역사로서 그 역사를 받아드려야 하는 이중 안목은 '행함'에 있어 신에게 기도로서 달성해야 될 역사와 자체적인 힘으로 이끌어갈 역사로 갈라지게 된다. 어쨌든 '행함' 그 자체는 부정(否定)당하지 않는 장치로 인간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실역사의 안목에서는 인간은 가치 생산의 주체자가 되어 완벽함에 도전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발생되는 실수나 잘못한 면에 대해서는 즉시 초역사 성향으로 안목을 바꿔 신으로부터 그 때 그 때마다 자비와 용서를 구하면 된다고 여긴다. 신는 어떤 보완적 기능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안목 변경과 관련된 '행함'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의 심성으로 넘겨주신 자유의지에 해당되기에 영원히 인간의 몫으로 잔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역사 쪽으로 안목을 바뀌었다는 그 '행함' 자체는 하나님 쪽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의롭고 정당한 행위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인간은 아직도 신뢰할만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해도 내 길을 갈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기획하고 결단한 행위가 전제 되어야지만 정당함이 가능하다는 정신자세가 본유가 되어 있기에 이것을 기초로 해서 보면, 초역사적으로 눈 돌린 것뿐만 아니라 실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모든 인간의 행함도 원칙적으로 정당한 일임을 자부하고 확대할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공인하는 의인'으로 자처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하지만 현대인들은 내부 속성상 처음부터 의 지향적으로 살아왔음을 공언하면서 그 증거로 율법화 된 자신의 인식의 틀을 폭로한다. 아무리 율법 시대가 지나가도 준 율법적 조항을 뇌리에서 떨쳐버리지 않는다. 어떤 식이라도 율법과의 관련을 맺지 않고서는 의(義)라는 것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의 행함이 가미되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의가 나를 향해 날라 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어이 거룩한 법과 자기를 결속시키는 모사적(模寫的) 행위를 보이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 타인의 의(義)와 격차가 지는 나만의 고유의 의(義)를 위하여 여차하면 무기로서 써먹을 종교 기능을 품어도 된다고 여긴다. 이는 명백하게 다음의 성경 구절과 격돌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코앞에 두고, 기어이 차별 시키는 자기 소유의 의(義)에 전 자존심을 걸고 대결에 나서는 그 심보는 도대체 배후에서 누가 조종하기에 발생되는 악인가!

이런 정신이 거대한 인류 역사를 떠받쳐왔다. 이로서 인류의 의(義)는 궁극적인 손상이 없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거뜬하게 장만되었다. 이 판단은 실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이 세상적으로', '피안적인 것'을'차안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사고방식을 취한다. 인간들이 초역사적 결단으로 내리는 의미의 본질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고 싶을 때는 인과적 도식이나 종국적 도식으로는 결코 다 정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더 높은 층위의 연관 속에 넣어서 논술한다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더 높은 연관 속에 있는 개체(예수님이나 먼저 돌아가신 성도나 천사)가 역사 안에서 나타날 때면 그 높은 연관의 법칙에 준한 필연적 질서를 나타내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일단 역사 속으로 들어온 이상 역사를 총체적으로 그 의미를 정립하려 할 때에는 그 독자적인 것은 용납이 된다. 그 고립을 인정해 주지 않고 어쨌든 그 나름대로의 연관성을 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말이 안 통하는 사이니까

따라서 구속사에 있어서 겉으로는 역사학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결국 불가능한 것이므로 역사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내용에 맞도록 재편성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대중들은 역사 속에서 자리 잡게 해 주자는 것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양식과 초월적 표상은 상호 합치되지 못하면서도 마치 합치된 것처럼 해놓고서는 그 다음으로 해석과 이해의 과정에서 특수한 초자연적 체험을 지닌 자만이 새로운 이해의 특성을 갖자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는 실제 역사와 초자연적 해석의 역사는 상호 일치될 수 없는 두 개의 역사관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다. 이 현상은 성경에 나오는 구속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도출되는 현상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초자연적인 사실을 주장하는 데는 원칙적으로 충분한 근거 설정이 가능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초자연적 해석적 역사가 도입되어야 될 그 정당성과 그 정당함을 확신해 줄 수 있는 근거는 또 어디서 끌어와야 한다. 그곳이 어딘가?

현실 판단과 그 해석에 대해서 확정 지울 기준은 역시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 구속사가 더 깊은 책임소재지를 요구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인간 행함의 자리'가 확실히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 들어간다. 구속사는 인간들과 인간들 간의 어떤 차별성과 결부되어진다. 즉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차적으로 어떤 초월적 세계라는 장소를 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리가 따로 있다든지 하여 인간적 처분에서 벗어난 존재 즉 초월자 내지 신의 존재 방식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어 놓는다. 그런 무리들의 이해 및 인간의 실존은 결국 인간 밖의 문제이다. 반면에 언어 표상은 언제나 처분이 가능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학적 현상인 신앙 표현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기 해석으로 머무는 것으로 귀결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는 이 이중성향이 바로 이중적 역사 개념으로 말미암아 설정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중립적인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능력들로 말미암아 같이 한통속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차원에서 역사 속의 신의 음성을 알아차리려고 한다. 동시에 그것으로 역사를 통째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얻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새로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아니라 결국 이해가 되고 만다. 신앙이 하나님의 결단이 아니라 인간적인 결단으로 매듭지어진다. 성경은 다른 문헌들과 다른 이해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말로 인간에게 전파되었고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성경이다 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 자체에 대한 인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내용과 부합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인간의 말씀'의 취지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말씀/인간의 말씀' 즉 상호 배치되는 관계 속에서만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론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시도는 기껏해야 동일한 이해의 원래의 자리를 들추어보기 위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참 신앙에로의 접근이 전혀 가능치 않다. 역사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해의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립된 인간들만의 세계에서 시간관이나 역사관에 있어 타인과의 미묘한 차이성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신앙이 타인의 신앙보다 더 옳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무리한 논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능력껏 노력하면 보다 상승된 신앙을 갖출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0-21,25-27) 인간의 행함이 권력에 의해 조정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신 말씀이다. 개인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권력에 의해서 조정 받지 않는 이해력은 없다. 사상도 유행이다. 유행이란 그 사회가 유포하는 무의식적인 사주요 훈육이다. 개인은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해 왔기에 처음부터 자유와 전혀 무관한 채 자유 개념을 갈망하는 본능의 소지자가 되었고 전혀 주체성이 아닌 주체성을 희망하게 된다. 자신의 거부와 자신의 수용 사이에서 달리 결과를 확정되는 운명 같은 것은 아예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여 자신의 선택이 자기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그르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해서 자기 실수와 실패에 부담을 느낀다. 이런 폐쇄성에서 내려지는 그 어떠한 판단도 진리 이해에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자기만족의 일종이 되어 버린다. 소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수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와 그 유구한 역사', '내가 행한 목회', '내가 속한 노회의 법이나 총회의 법', '내가 친히 행한 전도나 선교', '내가 행한 기도와 금식', '내가 받은 은혜' '내가 실시한 제자 훈련'이라는 류의 것들이다. 세월이 가면 이런 환영(幻影)들은 어디까지나 얇은 껌 같은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찌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독자적인 차원에서의 권리나 의무가 아예 주신 적이 없다.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독자적 위상이 허용되지 아니한다. 또한 자신만의 체험을 가지고서는 보편적 하나님의 뜻에 그 어떤 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 9) 하나님의 뜻은 단지 그리스도의 그 한 몸의 공로에 다 맡기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맡긴다는 말'은. 자기 포부가 이제는 해결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는 해결될 문제가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주님이 주신 세례는 예수님 고난과 영광의 체험만이 지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상황이다. 따라서 몸을 바라보지 않는 지체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신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2)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어떻게 작동했기에 성도가 주님의 몸이 될 수 있었던가를 염두에 두고 살겠느냐는 반문이다. 만약 성도의 개체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과 신앙의 세계를 분석하려는 자는 이 '주님의 강함'을 모독하는 자이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미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롬 1:28) 애써 다른 가능성 있는 추가적 존재적 모습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쁜 행위로 인하여 인간은 죄인이라고 새삼스럽게 규정해야만 하는 작업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고 단지 죄인이기에 어떤 죄악된 행위를 뿜어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을 다루어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논점에서 봐서 '믿음',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행함'을 거론하는 것은 그 '행함'의 진리성 여부를 '행위자' 본인이 규정할 수 없기에 기껏 위선적인 자기 자랑으로만 등장해서 믿음의 주를 훼손시켜버리는 가짜 복음이 될 뿐이다. 야고보서 2장에 말씀하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것은 선한 행함을 믿음에다 추가적으로 보태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행함의 토대가 되는 그 믿음을 행함과 같이 스스로 부정해 버리라는 구원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말씀이다.

복음의 내용은 인간의 행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로마서 3:10, 26과 같은 말씀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그 어떤 시간개념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구원론에 있어 시간개념을 집어넣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으로의 귀결성 표현을 핵심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경대로 모든 하나님 위주가 되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실을 인간 자신 안에서 포괄하는 역사관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계속되는 작업에 맡기면서 자신의 일방적인 구원계획은 날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게 된다. 반대로 인간의 자기 역사관이 붕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객관화 작업은 자기 구속사관 안에서의 객관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곧 자기가 일방적으로 꾸며낸 구원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사역은 그 어떠한 인간의 구원적 요구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터져 버린 상황에서 성령이 하실 일은 십자가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과 더불어 벌어지는 구원의 기적에 관한 일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그 어떤 인간의 지혜의 협조(칸트에 말에 의하면, 다양한 외부 계시를 접수하여 하나로 표상으로 파악해 내는 '직관의 통일능력')도 필요치 않고 고려해 줄 수가 없다.

오직 구체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겨냥할 뿐이다.(요 16:13) 이것을 하나님께서 고수하려 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늘 위협과 공포와 절망을 안겨다 준다. 시내 산을 내려온 모세가 함부로 일반 대중들 앞에서 서서 말을 할 수 없어 수건을 얼굴에 쓰고 나타나는 입장이 된 것과 같다.(고후 3:12-18) 성령에게 구원이 일임되어 있다는 것은, 허구 안에서 변별적 기능을 하는 기호로 통해서만 실제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의 구원적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영의 차원으로 육의 차원을 정제하면서 일하심을 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영으로 난 것만 영이다. 이것도 실제다. 따라서 영으로 난 것에 육이 개입될 수 없다는 실제적 내용을 가지고 성령께서는 나타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성령은 육에서 나올 분이 아니다. 육은 육만 배출한다. 영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다.

인간 육의 특징은 구원에 있어서도 그 육을 발판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인간 육을 향하는 모든 '가르침'은(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의 명령적 가르침과 권면이든, 목사의 설교이든, 구속사이든, 복음이든, 율법이든, 일반적인 에티켓이든, 학문에 관한 것이든, 윤리와 도덕과 법이든 상관없이) 오히려 욕망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 육이 품고 있는 성질이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8) '가르침'이 어떠한 내용을 가졌던 간에 현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굴된 욕망을 확인케 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가르침'을 물고 들어와서 자신의 욕망이 제거되었음을 변명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여러 개가 아니다. 역시 그 욕망이다. 다른 욕망이 없이 그 욕망이 변신을 꾀한 양상이다. 율법은 누가 뭐래도 선하다. 원인은 '육'에 있다. 인간이 그 어떠한 이론과 신학으로서 구원 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육의 소산물로서의 구원 욕망이 자기의 육적 행위에 의미를 둔 구원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 하나 하나마다 나름대로 구속사적 의미로 정렬시켜놓고 그 다음에 외부적인 신과 거래 내지는 언약적 흥정에 나선다는 말이다. 이러니 신의 존재성은 일종의 인간들의 자기변명이며 도피처이며 구색에 불과하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점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구원과 무관함을 더욱 더 확고하게 다지는 증거로 삼으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성령님은 늘 성도에게 예수님과 마주치게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행위와 비교케 한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의 만남에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 만나진다. 구약 때도 마찬가지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19:12-13, 20:19/ 고후 3: 6-11 참조)

신약에서도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이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심판이란 곧 인간으로부터의 구원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가 자신이 구원되도록 노력을 안 하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 또한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구원되고자 시도하는 것을 용납해 주신 경우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의도적으로 차단시키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은 자격이 처음부터 주어진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차단을 돌파하고 구원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은 본질적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하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천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롬 11:32 상반절) 하나님의 가두어 두심에 대들면서 자기 힘으로 돌파해서 생명나무 과실이 있는 곳에 접근이 가능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센 구원의 힘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악마만이 가르칠 수 있다. 창세기 3:24의 생명나무 지킴을 무효로 만드는 이런 경우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왕노릇을 유명무실해진다. 왕이란 자기 통치력에 한 치의 하자가 없는 입장에 놓인 자라는 것이다. 자기 왕국에 구멍이 뚫린 줄도 모르는 그러한 왕은 정말 온전한 왕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이 가두심을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 예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의 여호와 전쟁은 '진멸'을 그 특색으로 한다. 불쌍히 여기지 말고(신 7:2)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하셨다.(신 3:6/삼상 15:3) 결코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수 11:20)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구원은 순전히 언약에 의해서 자비를 받는 자에게만 국한되고 나머지는 언약에 의해서 진멸당하도록 맹세되어져 있다. 이게 구원의 전모이다. 인간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긍휼함을 입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도들의 순종과 의로운 행위가 칭찬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위가 결국 본인으로 영광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활동하시는 주의 몫으로 돌려져야 마땅하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시 89: 1- 4, 110: 1- 4)

신약에서의 종말이란, 새 언약에 의하여 나타난 종말이다. 이 종말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자로 서 있다는 말이다. 심판 앞에 선 인간은 그 순간 본질적인 자아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와 같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심판 당해야 한다. 끝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연약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 4- 5)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약하신 것처럼 성도도 같이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효력이 사도 바울에게 내려졌다. 이로서 사도는 늘 죽어지어야 될 정도로 약해진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사도는 결코 자신이 행한 윤리적, 도덕적 덕행이나 선함을 근거로 힘을 발휘하기를 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로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기 위해 자신은 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넘겨지기만을 원했다. 자신이 소유해서 사용할 그 어떤 힘도 자기에게는 필요치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 7) 보이는 것을 끌어당겨 그것을 모아 전도하는 여력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믿음으로 전도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배고픔과 환란이었는데(고후 11:27-28) 그것으로 인해 사도는 더욱 더 약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한시도 십자가의 현장을 제쳐놓고 떠나버릴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를 뒤로 돌리고 새로 뭔가 시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대로 받은 그 죽음 속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비로소 생명을 말해서 해석해내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죄로 기인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미 죄인인 채로 계속 가는 것이다. 죄인 된 자신을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따로 뽑아내어 그것으로 뭔가 새로 시작할 입장이 되지 못 된다. 그렇게 되면 죄인으로써 예수님의 공로와 무관한 절대적 죄를 마구 온 우주에 살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면 예수님의 의로 인해 의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그 안에 이미 죽은 자인고로 자신이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와 연관되는 죄를 보이게 되며 동시에 (주님의 대속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인인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의임을 온 우주의 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는 절대로 임의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입장이나 권리가 없다.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만 평생을 다 가도록 죄가 자신을 통해서 계속 새어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본인이 죄로 인해 처벌받은 자의 입장에서 계속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비록 수고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니요(이점이 대단히 중요함)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딤전 1:15)

이로서 성도는 자신을 증거 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 하는 인생을 산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말씀의 성취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주님의 구속의 활동은 인간의 구속사를 늘 정죄한다. 그것은 단 한번이 아니라 매번 늘 정죄한다. '때가 찼다는 것'의 의미는. 역사 자체가 정죄를 받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연장시켜 추가적 비밀을 얻어 낼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종말은 더 이상의 시간 연장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세계시간 상의 끝부분이 아니다. 종말은 세계의 일부도 아니며 세계 안에 아무런 병행항도 갖지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서는 그 어떤 특정한 상태로도 표현할 수 없고 연장을 은근히 고대하는 세계의 눈으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언제나 마치 '아닌 것'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밑둥치를 제거하는 종말론을 누가 상상하고 싶어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와 관련 없고 오직 예수님만 관련 있다. 옛날에 있었던 창조의 일이나 장차 있을 종말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바른 의미의 창조와 종말론은 그 창조와 종말이 이제 완성의 차원에서 주님에 의해 자기 성도에게 늘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있다. 나의 창조나 나의 종말이 아니라 혹은 내가 만들어 가는 창조나 내가 조심하는 종말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와 종말이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성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6:19-20, 7:29-31) 자신의 결혼보다 취직보다 성공보다 자신의 죽음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뜻에 탄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함에 매달리게 만든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종말의 심판의 한 복판에 와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자기 구속사에 끝까지 기대를 걸어보는 이런 불신앙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죄에서 오는 것이다.

성도를 구원받은 인간이 아니라 구원받은 죄인이다. 성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아담 안'은 곧 죄인들의 집합이요 전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2-14) 인간이라는 규정은 이미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자기 실체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는 허구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인간이란 없다. 그 어디에도 없다. 공연히 죄인들이 죄인 아닌 척 하기 위해 지어낸 용어이기에 이 발상 자체가 죄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죄인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자+인간≠성도'이며 곧 '하나님의 구원자+죄인=성도'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의 관권은 죄인인 성도 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 6 상반절) 그런데 죄가 무엇인가?

인간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비로소 밝혀진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인간은 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즉 예수님 앞에서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죄를 더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아래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기를,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치 않는 바로 그러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궁극적으로 모르도록 되어 있는 존재인 것을 주님은 일러주시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죄 아닌 것이 없으면서도 죄 인 것과 죄 아닌 것을 임의로 구분하는데 율법까지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근거해서 그 규정에 의해 죄와 의를 구분 지을 수 있는 판단력이 우리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율법에 자칭 정통하다 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37-3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셨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7:45, 47) 즉 바리새인들은 철두철미하게 모세 법에 준해서 죄와 의를 구분 짓고 그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모세 율법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따라서 모세 율법이 정죄하는 그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유독 예수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계시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이해 불가능함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의 주장은 참으로 일방적이다. 인간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준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주장을 예수님은 펼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과 인간들 간의 거리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멀다. 함께 있다고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이러한 해석 차이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극한 대치를 보였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자는 너희들 중에 없다는 주장을 하신다. 즉 죄가 전혀 없는 자만이 말씀의 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죄 있는 자는 율법을 해석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못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보기에 죄가 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새로운 규정의 죄 규정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죄를 사해주시는 자비이다. 즉 주님에게서만 나오는 그 자비를 믿지 아니하는 바로 그것이 궁극적 '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죄 규정에 근거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새로 규정한 죄 규정에 의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다음 구절이 그 해답이 된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와 같은 동행의 원리는 멀리 출애굽 시작부터 있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즉 히브리인들이 결코 애굽인들 보다 더 의로워서 그들에게 10가지 재앙이 안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신 9: 5) 하나님은 치료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셨다.(출 22:27) 만약 이런 자비성을 잊는다면 가차없는 진멸과 멸망이 이스라엘에게도 떨어진다.(신 8:20) 자비로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하는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에서 벗어나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죄의 관점을 가지고 타인과 자기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그 죄 규정 자체에 대한 회개이다. 유대인들은 가혹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율법으로 들볶았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 2- 3)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는가. 참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을 알게 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인간들이 스스로 이런 자기 죄를 알아서 회개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무효가 되기에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일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1-16)

이 본문에서 '허락'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는 선포가 담겨 있는 대목도 있다. 이런 복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구원의 근거를 '뺏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고서는 '넉넉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래서 '복'이고 '허락'이 되는 상황이 유지된다. 즉 이사야 6: 9의 말씀이 인간의 겸손한 회개나 경건성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말소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말씀의 성취는 필히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만 성취되어진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0-11)

말씀 성취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행위뿐인데 이 행위에 인간들의 시간 의식에 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숨어 계시는 양상으로 계시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시간 의식이 적용된다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표현을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이삭의 자식들이 이 지상에 태어나서는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를 각자 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운명대로 실시된다. 따라서 하나는 사랑 받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는데 이는 그들이 이 지상에 남긴 자신의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식으로 인간 행위를 제 근거로 수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은 인간들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죄라고 규정한 터전 위에 출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것이 죄라는 범주 안에서 출발하면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성만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성은 자기 백성의 행위 여부를 보고 후차적으로 추적하듯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구약에서 각가지 인물들이 나타나서 사태들이 일으켜도 그 모두는 종말 때 보여지는 실체를 위한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히 1: 1- 2, 8: 5, 9:23) 이처럼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창세 전에 누구 안에서 선택함 받았느냐에 증거하기 위해 이미 확정되어 창조된 자들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 5, 11) 그런데 이러한 일의 실천자는 오직 바로 예수님뿐임이 요한복음 6:39에 나와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예수님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 상반절) 따라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원 사역에 있어 하나이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28-30) 즉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빼앗기거나 혹은 얻게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하시는데 있어 행위의 연쇄성에 하나님이 일체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기에 은혜만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 6) 이러한 구원의 상황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 행위에 관한 시간적인 요소는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분명 구약이 신약보다 시간상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먼저 구원되고 나중 구원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 같이 시간과 무관하게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성 안에서 비로소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실 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 4)

예수님은 인간들이 얼마나 시간의 흐름에 매여 있는지를 구약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을 때에 먼저 말을 걸으신 적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주' 개념과 '자손'개념을 대비시켜 바리새인들을 당황케 하시고자 하셨다. 즉 '주'되시는 분은 시간상 시작에 해당되는 자리이기에 결코 '자손'의 자리에 서 계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윗은 '주'가 자신의 '자손'이 된다고 했느냐 라는 것이다. 시간의 역류인가 아니면 시간과의 무관성인가? 그 당시 바리새인에게만 묻는 물음이 아니라 구원을 고대하고 모든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질의이다.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의 시간론 자체를 두고서도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내신 것이다.

결국 성경 전체는 성도의 개인적인 일생을 초점을 두고 추적하듯이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과의 구별성을 가지고 구원을 소개하신다.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상에서의 출생 순차와 같은 그런 차원 속에 놓여 있는 출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몸에게서의 출산은 세례 요한보다도 오히려 늦기 때문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 출생의 창조적 근거자 위치에 홀로 계신 분이다 는 뜻이다. 즉 '태어날 모든 이'는 그 분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를 보여주기 위한 목표로 출생되어진다는 말씀이다. 이 목표 앞에서는 그 어떤 시간적 요소도 이해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시간상으로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서 시간적 요소를 구원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시간성을 지닌 표현 방식을 동원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참되게 증거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론될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며 비성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한 '이미'와 '아직'은 개인들이 하나님에게 궁금해 하는 자신의 구원의 진척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있어 그 결과로 인해 구원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이 서로가 대비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 원칙에 준하면 성경에서 성도의 개별적 구원성을 확정지어 질 성경 구절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대비성이 성도 개인이 기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모든 성경이 거부하고 있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인해 구원 기준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필연적으로 인간들의 자기 구원을 위한 성경해석을 가로막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구원되지 못하고 정죄 받는 자들의 불의한 점이 결코 구원된 자들과의 행위 비교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모든 성경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 성도인 점을 감안할 때, 참성도가 아닌 자는 이 사실을 당연히 거부함과 동시에 자신이 참 성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간의 틀로서 성경 구절에 접근해서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구원 적용이 이미 자기의 결정권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도저히 인정 안 한다. 성경에 나와 있다는 구속사를 근거로 필히 자신도 그 구속사에 놓여 있다는 전제로 인해 그 구속사에 몸을 싣는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시도에 호응해 줄까? 이렇게 보면, '이미- 아직'이라는 시간적 표현 방식 안에서 구원 사역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검증을 거치겠다는 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서나 나올 이론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외쳤는데 (요 19:30) 소위 성도라 자처하면서 '아직'을 고백하고 있다면 정신을 엉뚱한 데로 팔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은 '아직'이라는 미완료 측면에서 고려해 볼 만한 여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물론 이들의 믿음 속에서도 여전히 미완료성은 살아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 쪽으로 점검해서 납득이 가능 방향으로 수용하겠는데 어쨌든 자신의 판단에 의하면 아직 구원이 미완료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 세상의 현상 속에서 명백하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 허기져 있다. 인간은 육을 지녔기에 본인이 관념적인 신의 자녀라는 점보다 이 사회의 자녀라는 점에 더 실감을 느끼고 절박한 문제로 다룬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이 차에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하나님으로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런 육적인 하나님 상으로 조명해 볼 때, 이 세상은 복음 전파 이후에도 이렇다 할 혜택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1-4를 통해서 보면, 육적인 인식이 얼마나 크게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하도록 있는지 파악되도록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본문에서는, 같은 구름 아래의 생활과 같은 모세와 같은 만나와 같은 물을 마신 경우를 같은 그리스도로 인한 다 같은 세례 환경으로 보고 있다. 즉 경제적 여건이나 삶의 조건의 불평등이 전혀 하나님의 일의 초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세례'라는 입지 안에 놓는 자들은 모든 육적인 불평등이나 미완료적 가치 평가 환경에서 벌써 벗어나 버린 것이다. 생활 여건의 불충족성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는 미완료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자들이 이런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 같음'과 '한결 같음'을 이해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세례 안에는 결코 '발전'이나 '진보' 같은 미완료적 뉘앙스를 용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적인 자들은 구원을 달리 생각하고 있다. 자기 삶의 여건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그저 구원받을 개연성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기회 앞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식이다. 따라서 이 구원을 계속 성취해 내기 위해 갖추어야 될 신앙의 기초 조건을, 세속인과는 뭔가 다른 면에 대해서 인내하는 신앙인 자신의 각성에다 두고 있다. 자기네들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한다. 천국으로서의 미완료적인 요소가 완벽하게 보완되어 완료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자기네들은 소위 '믿음'이라는 지탱하여 성도로서의 도리를 다해주겠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이 벌린 구원의 미흡점과 보완점이 이들의 신앙에 의해 이미 발각 당한 입장에 놓여 있기에,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헛말이 되어 버리는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내용물이 추가적으로 채워놓는다는 조건 하에 천국을 믿어주겠다는 이들의 믿음 공세에 밀려 합의라도 봐야 될 신세에 놓인 셈이 된다.

즉 예수님이 이미 하신 일과, 미완료성을 아직도 믿는 자신들의 신앙만이 참 신앙이라는 주장 사이의 놓여 있는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아직 신앙의 내용은 다 밝혀진 바가 없으니 아쉬운 딴에 그저 장래의 개연성에 희망을 두는 정도의 믿음이라도 참 믿음으로 인정해 주겠다"라는 선언을 터뜨리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이들의 이러한 불신앙은 철저히 정죄하신다. 무엇으로? 십자가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또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 …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 8, 15) 철학과 세상의 학문은 결코 '승리했음!' 표현을 건방지게(?)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리라!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화를 보게 되면 신들이라는 작자들의 행동거지가 인간 군상들을 꼭 닮았다. 폭군(가이아, 제우스), 패륜아(크로노스), 질투의 화신(헤라), 간통자(아프로디테), 깡패(아레스), 도둑놈(헤르메스), 병신(헤피아도스), 술주정뱅이(디오니소스) 등 각종 성격을 총망라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 있어 이러한 신 인식은, 만물이 상호간의 호혜적인 사랑에 의해 구성된다는 믿음의 토대 위에 도출된 결과이다. 신과 인간이 멀어지거나 따로 떨어지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세상이 구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지평적 융합' 안에서 의사소통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래는 적당한 유혹으로 형성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거래 여하에 따라 허물이 조정된다. 우주는 부조화 가운데서의 조화이다. 즉 신들에게도 저마다 약점을 갖고 있고 신들에게도 허물이 있기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각종 실수와 욕망의 모습에 대해 운명은 너그럽게 용납해 달라는 희구의 반영이다. 우주의 움직임이 그러하듯이 신들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챙길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신도 자기가 만든 인간으로부터 인정받는 재미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 광활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우주 속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우주'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처럼.

신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보호하고, 이뻐해 주고, 심사숙고해 주고, 위대한 영웅을 창조해서 심어주어 난세를 풀어 가는 그런 역할에 충실할 때 신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 통념이다. 신화 그 이후에 이어져 나오는 모든 학문도 이런 통념의 바탕에서 이어받아 인간의 정당성을 확실히 다지는 쪽으로 학문적 개방을 주저하지 않는다. 학문 세계에서는 정보의 개방된 교류에다 생명을 걸고 미래를 건다. 이런 학문적 속성에 준해서 볼 때 "이미 십자가로 승리했음!"라는 주장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독단처럼 보일 것이다. 도무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도 자력으로 못 믿게 하기 위하여 마지막 때에 비밀로서 등장하신 것이 구원이 메시지이다. 이성의 판단과 눈으로 볼 때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직 아니야. 왜들 이래. 세상은 이 정도에서 진화가 멈출 리가 없어. 신앙이라는 아편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식으로 비겁하게 미래 문제를 외면하지 말어!"라고 손을 절레절레 젓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 준한 인간의 행함에 전적으로 기대를 거는 태도는 오늘날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역사에 걸쳐서 힘차게 세월들을 깔아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중심 이외에 벗어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친히 지셔서 유발하신 십자가 차원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미'로서, 소위 '이미-아직'이라는 구원론의 시간성 자체를 공박하신다. 그 예의 하나로, 로마 군대 백부장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오는데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았으니 앞으로도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자의 허점을 다른 차원의 신앙을 개입시켜 정죄해 버리시는 예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즉 예수님은 천국에 이르는 신앙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백부장의 신앙과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차이는 현재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이미' 결정 나 있는 것이다. 지금 완전한 주님과 완전히 사귀는 자가 아니면 결코 천국의 유업자가 아니며 만약 지금 주님 안에서 주님과 사귀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 완성의 차원에서나 나올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미'가 되었든 '아직'이 되었든 시간적 이미지에서 못 벗어난 자라면 그 연계성 고리마저 끊어버리는 진정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자이다.

시간을 초월한 구원의 능력이 다시 시간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시간의 연계성 속에 자진해서 헤집고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를 말해준다. 십자가는 자체적으로 능력을 갖고 발휘한다. 사람들의 저항력에 멈칫하는 능력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라도 이 능력을 저지할 수 없다. 인간들이 손에 넘겨준 능력이 아니다. 성령께서 친히 발휘하시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걸림돌의 기능을 가지고 활동한다. 어떤 것들이 이 십자가가 제시한 걸림돌에 자빠질까?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 8- 9) 이 본문에 보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라는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십자가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즉 구원 얻기 위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바탕은 그 어떤 수단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 자체에서 나오는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을 뿐이다.(고전 1:18) 그리고 십자가로 대변되는 그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인간의 육의 노력과 전혀 이미 무관한 채 오직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제공하시는 성령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이 현실이며 실제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완벽하게 구분 짓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경에서의 '이미'는 개인적 구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역의 실정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즉 사도는 개인적으로 자기 구원에 대해 새삼 걱정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걱정은 주님의 구원에 있어 생길 수 없는 일이라고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좀 더 뒤에 나오는 말씀에 견주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19-22)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는 대목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개인적인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예'를 이용하면 된다는 그 어떤 마음도 여기에 담겨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상황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요한 서신에 나오는 모든 인간 행함에 대한 검증이나 구별은 이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되레 소유할 그 어떤 명분도 사라졌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따라서 성령의 인치심은 이 십자가에 성도가 죽은 상황을 (혹은 값으로 산 상황을) 지속적으로 주님의 '예'에 합당한 차원에서 끌고 가는 것이 완성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의 명령은(빌 2:12), 그 명령 자체가 성령에 의한 구원 완성의 능력으로 퍼져 나가는 자가 따로 존재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구원받아라!" 라는 차원과 같은 차원이며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 6)와 같은 차원이다. 이 명령은 아무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있는 자에 한한다.(행 3:16) 마치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라는 명령이(마 9: 5), 명령 자체에서 나간 능력으로 인해 중풍병자가 완벽하게 구원되는 경우와 같다.

그 명확한 내용이 사도 바울로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증언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님께 붙잡힌바 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그 부르심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이 본문에서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잊어버림'이란 과거를 과거로서,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귀하게 포장해 두라는 말이 아니다. 즉 현재의 의미를 위해서라도 과거라는 시간으로 구색을 갖추라는 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잊어버림'으로 인해 현재는 과거와 연관된 현재가 아니라 그냥 늘 시작되는 상황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야고보서 5: 9에서는 이 점을 확실하게 표현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이 본문에서 '심판자가 문밖에 서 있다'는 말씀은 자아의 절대성은 더 이상 절대성을 유지할 수도 없고 불가침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절대적 공간에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도리어 잊어버려야 한다. 심판주를 의식하면서 시간의 감금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개인이 과거-현재-미래를 한 세트로 하여 시간 정렬을 소유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과거의 이력이나 경력이 그 어떤 가산점을 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잊기를' 원하신다. 매일을 살고 매일을 잊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잊는 것보다 더 한 것은 매일 매일 죽은 것일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왜 성도는 늘 죽어도 살아있는 것인가? 그것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그 은혜가 은혜로 되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성도는 오로지 현재에 주어진 명령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것도 무익한 종으로서 말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성도는 이처럼 시간적 요소로서 구원의 틀을 만들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이 아니라 늘 작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사명 감당하면서 성도는 구원된다. '뒤에 것을 잊는다'는 사도의 고백 안에서 사도는 자신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다. 미래의 화려함과 찬란한 성공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상대적으로 비교거리가 되는 과거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사도의 생각이 아니다. 사도는 자신이 걸어온 자국과 그 모든 행함 자체를 잊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또 쌓게 될 자신의 행함도 마찬가지로 잊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잊음'과 '잊음'의 연속만이 구원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잊음이 없이는 앞에 있어 푯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미래는 과거와 무관하다. 미래는 그 때가서 하나님이 새로 발생시키시는 능력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래서 미래는 순전히 인간의 기다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될 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뒤에 것을 잊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할 것 없이 항상 주안에 놓여 있어 새로운 자신의 본질을 부여받는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다음과 같은 보편적 구원론으로 대변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9) 이처럼 사도의 명령이나 주님의 명령이나 또한 설교자의 명령은 모두 구원될 자가 누구인가를 구별짓는 사역이다."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사도 바울이 경험은 구원 사역은 항상 이런 식의 결과를 유발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 3- 5) 이 본문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망할 자들이 필히 복음이 가려진 입장을 고수하는 것조차도 바로 예수님이 주되심으로 인한 작용과 구원적 기능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 대목도 이러한 정신에 부합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4-28)

사도 바울의 자신의 전도가 안 먹혀 들어가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말씀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씀대로 완악한 자들은 필히 완악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단이 부흥하지 않는 지옥이란 있을 수 없다. 이단은 꼭 부흥되어야 하고 악마의 일꾼들은 날이 갈수록 활개쳐야한다. 이것은 말씀 성취의 완성된 종말이기에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말씀을 빠짐없이 다 들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성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랑은(딛 3: 4) 오로지 택한 자에게만 흘러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딤후 2:10)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경은, 영역의 확장으로서의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지상 차원이 아니라 말씀 성취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전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아직'은 그만큼 좁혀진다든지 메워 나갈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의 정신과 전혀 다른 것이다. '아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에 전도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내는 분의 전도의 성취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보냄을 입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보냄을 입은 자가 등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발걸음 자체가 전도의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씀이 완성된 시기이기에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반응된 자는 이미 종말적인 구원 원리에 의해서 반응 받는 자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여기에 나오는 '너희'에 해당되는 자는 결코 새삼스럽게 구원되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자가 아니다. 이 주님의 완성된 말씀이 적용됨을 보여지는 자들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 8- 9) 그래서 아직 구원받고 싶어서 안달이난다든지 아니면 아직 구원되지 못해서 허기진 자는 이러한 종말적 상태를 가리게 되는 자이다. 즉 여전히 어두움의 일을 벗지 못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를 구원받은 자라고 간주해 줄 어떤 근거도 없다. 또한 어두움의 일을 벗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나중에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자도 주님으로부터 구원된 자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능력으로 어두움의 일을 벗을 수 있는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자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러한 영광성은 예수님에 의해 비로소 말씀이 성취되었음으로 나타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취지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유혹으로 작용한다. 구원 이야기도 유혹의 일종으로 받아드리며 자기 구원으로 이전시켜 놓는다. 그래서 자기만의 의를 생산하여 따로 간직해 두려고 한다. 그것 없이는 '나 만의 나' 됨이 상실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처럼 유혹의 절정이며 최후로 빠지게 되는 황홀한 함정이며 동시에 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 말을 듣지 아니한다. 복음은 지속적인 심판이며, 택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저주 행위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게임으로 만들어놓고 성직자들은 그것을 사업체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성도는 그저 자기 인생을 뜯어내며 사는 자이다. 시간으로 중무장이 된 세월을 뜯어내면 그 자리가 어두움의 자리로 드러난다.

이제 태초의 빛은 복음의 광채로서 이 종말시에 등장하셨다. 복음의 빛으로 인해 어두움의 정체가 드러났다. 모두가 병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다. 복음 안에 들어있는 자는 십자가 거울 안에 들어있는 자와 같다. 세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으나 서로 손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빛은 이 땅에 새로운 피조물을 발생시켰다. 그들은 자신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만 앞장세우며 사는 자이다. 그들은 빛과 사귀기에 정신없다. 세상 좋은 줄 모른다.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선(행 26:18) 사람들의 특징이다. 여기에 비해 세상 사람들은 늘 자기 형편만 살핀다. 그러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음을 안다. 사귀었지만 사귄 것이 아니다. 자기가 구원되기 위해 하나님도 이용하고 예수도 이용하고 교인들도 이용하고 목사도 했을 뿐이다. 이들은 사귐은 없고 애씀만 있다. 자기 시간을 측정하고 자기 구원사 챙기기 분주하다. 자신이 자신의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질곡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성도가 빛과 사귀게 된 것은 그 빛을 일부러 불러내어 소유화 한 것이 아니다. 그 빛은 어두움의 경계선을 넘어 길게 뻗어 들어오신 것이다. 양치는 목자들의 주위를 두루 비취던 그 빛의 '터 잡음'이 (눅 2: 9) 바울에게도 일어나고 모든 성도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 6) 하나님과 성도와의 사귐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가능하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학 탐구, 그것으로도 빛 되시는 분과의 사귐을 대신할 수 없다. 신학이 인간을 위한 인간 구원을 돕기 위한 취지로 진행된다면 깜깜한 소경의 절규에 해당된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골 3: 1- 3) 도로 땅의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신학을 만들어서 소지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지혜는 헛것이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가지고 (고전 3:20) 어떻게 세상 지혜를 긍정하고 옹호하는 신학을 전개할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다루면서(고전 2: 4-12) 어떻게 인간의 종교성을 신뢰하자는 신학을 내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인간들의 신학마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점을 신학에 천착하는 자들마저 자동적으로 아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 신학의 죄악성이 노출된다. 신학은 사람을 구원해주기 위해 발판을 만드는 작업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금 앉아 계시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를 증거 하는 것만이 내용이어야 한다.(행 2:34-36) 신학은 시간 의식이 토대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결코 속일 수 없다. 그럴수록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고 그리스도만의 공로만 내세워야 하는 고백으로 터져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목회나 신학 작업조차 어느 새 '자기 죄 위에 페인트칠하기'의 한 경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십자가는 신학자라고해서 봐주고 비켜지나가지 않는다. 우수한 설교자라고해서 따로 반 편성해 주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십자가 앞에서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거기서 영원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것을 두고두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다만 빛에 의해서 빛의 자녀가 된 것뿐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 5) 주님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놓여있는 자기 자녀들에게 다음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그렇다, 은혜를 받았은즉 고난의 잔 또한 받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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