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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8:57:48 조회 : 6373         
구원, 그 이후 이름 : 관리자(IP:220.81.176.150)


구원, 그 이후 
 
2009년 2월 16일     이 근 호 목사   (2009년 2월 21일 겨울 하루 특강) 
  
 
1. 인간 의식의 한계 
  
신약성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딛 1;12)
 
그레데 섬의 예언자는 기원전 6세기경의 에피메니데스를 가리킨다. 그는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명제로 삼고자 할 때는 모순이 들어가게 된다. 언어를 빌려서 표현된 판단을 명제라 한다. 그러므로 명제는 참과 거짓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그레데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이 되고 만다. 한편 그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그레데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런 모순이 19세기 말의 수학자들을 심란하게 했다. 수학을 참된 진리로 삼고는 싶은데 이런 모순을 제거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수학의 모든 이론을 오로지 참된 진리와 진리의 사슬 바다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수학의 모든 이론들이 견고한 기초 위에 수립되어 있는지를 연구하는 수학기초론이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독일의 다비드 힐베르트(1862~1943)이다. 힐베르트는 수학을 공리에 바탕을 둔 추론체계로 본다. 기호의 의미가 주어지면 그 의미에 의해 진리성이 이미 자명한 것으로 가정되는 명제를 표현 주는 것을 공리라 한다. 예컨대 ‘1=1’처럼 증명할 필요 없이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공리이다. 이러한 공리의 집합을 형식적수학체계라 한다.
 
일상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자연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확한 표현과 전달과 개념구성에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프레게라는 사람은 ‘인공적인 언어’ 즉 ‘기호’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기호를 가지고 명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힐베르트는 수학의 모든 이론을 공리화하여 각 공리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함으로써 수학적 추론의 확실한 기초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형식적 수학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정리(定理)가 참된 진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정리 중에 논리적으로 거짓인 진술이 적어도 한 개 섞여 있을 때에는 그 형식체계에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공리의 형식체계는 논리적으로 참이 되고 동시에 거짓이 되는 명제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 비로 무모순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형식체계 안에서 논리적으로 참인 모든 진술이 정리임을 증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공리의 형식체계는 완전성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힐베르트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영역인 수론의 공리계가 결코 모순되거나 불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31년 25살의 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은 힐베르트의 희망을 철저하게 좌절시킨 이론을 발표한다. 다름 아닌 ‘불완전성 정리(定理)’이다. 불완전성 정리는 “수론을 무모순의 공리계로 형식화할 떼에는 결정불능 명제가 포함된다”라고 요약된다.
 
산술을 모순이 없는 공리로 형식화하여 그 공리계로부터 논리적 추론에 의해 정리를 증명할 떼에는, 그 공리계 안에서 허용된 방법으로 증명을 끌어낼 수 없는 논리적으로 참인 명제(결정불능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요컨대 산술의 어떤 정리는 무모순의 형식체계 안에서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이 되는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산술의 형식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이와 같이 괴델은 비교적 간단한 수학체계인 산술의 형식체계조차 불완전함을 입증함으로써 공리계에 바탕을 둔 모든 수학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을 보여 주었다,
 
불완전성 정리의 논증은 아주 복잡하지만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는 매우 단순하다. 괴델은 간단한 산술의 특징을 이용하여 “나는 증명될 수 없다”와 같이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논리식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 논리식은 에피메니데스의 모순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이 논리식이 거짓이라면 증명이 가능하지만 산술의 형식체계는 거짓 명제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이 논리식이 참일 경우 증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산술의 형식체계 내부에는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결정불능 명제,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사람이 증명하지 못하고 성경이 증명한다”와 같은 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괴델이 결정불능 명제의 보기로 사용한 논리식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 자기가 자신을 증명하는 동안에서 주체와 객체와 뒤섞여 자기가 자신의 안과 밖에 모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자기언급 명제는 수학처럼 논리적 사고의 기본이 되는 영역에서조차 모순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한계, 즉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자기 언급이라는 한계란 다름이 아니라 똑같은 논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 사용하여 끝없이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소급하는 무한역행의 논증을 펼치게 마련이다. 이것이 인간 의식이기도 하다. 이 의식을 탈피하고자 하는 방도가 바로 바로 무의식 세계까지 시야를 확대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이성적 논리가 통하는 정돈된 세상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변화무쌍한 욕망이 주체 할 수없는 혼돈을 자아내는 세상이다. 여기는 따지는 세계가 아니라 느끼는 세계다.

 
2. 무의식 세계와 그 한계
 
무의식 차원에서 파악한 주체는 오인의 구조로 형성된 에고에서 시작하여 상상계의 나르시즘적 환상을 버리고 상징계로, 즉 문화와 언어의 상호 주관적 구조로 진입하여 욕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늘 ‘과정 중에 있는 주체’다. 그 주체는 사유 주체로서의 절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대하여 2차적인 지위에 있다.
 
또 그 주체는 사회적 구조에 선행하는 존재가 아니며, 대타자를 타자로 인정함으로써, 즉 대타자의 관점과 자기에 대한 대타자의 견해를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로 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명제와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명제를 비교해보면, 라캉의 경우, 주체를 구조화 하는데 외부 세계가 우위성을 갖는다는 것은 유아가 생존 충분성을 어쩔 수 없이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세계와 필수적 동화 내지 통합을 이룸으로써 생리적인 미숙성을 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주체의 가변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주체는 무수한 개별화를 만들어내면서 평생을 산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시각적 이미지와 대상들은 변화가 무수하며 무한히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주체 형성의 요인들인 이미지· 콤플렉스 등을 본질적, 혹은 본능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혹은 후천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늘 새로운 주체 추구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주체로 정립하더라도 갈등과 균열을 야기하면서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다. 즉 무의식 세계에서의 존재는 유일한 이름만으로는 결코 충분치가 못한다고 한다. 즉 두 개의 이름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의식에서의 이름과 무의식에서의 이름이다. 왜 이런 주장할까?
 
그 이유는 존재는 자신이 내뿜는 환상과 허상들의 다수성 중에서 하나를 늘 골라잡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유일한 의미를 임시방편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름’이란 자신을 지시하고 자신을 대표하고 자신을 외부에 알리게 한다. 신체가 자아의 자제력을 무시하고 방출하면서 현실화 시키는 식으로 자신을 알리게 되고 또한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차후에 변명을 늘어놓는 주인공으로서도 또 다른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직 나는 하나의 유일한 의미로만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말썽꾸리기 나와 뒤치다꺼리하는 나,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이 같은 존재를 표현하는데 필요하다. 실제로 플라톤(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에 대한 사전에 준비된 구분, 그렇지만 일자에 이르는 길로서의 구분)으로부터 하이데거(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그렇지만 운명적인 것에 또한 존재의 사건에 이르는 길로서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가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발설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순수한 긍정이다. 비록 사람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순수한 긍정이다. 뭔가 모든 것을 알기에 마땅히 자신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자기 긍정 무모한 태도라고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긍정을 수그린 적은 없다.
 
여기서 무의식 세계가 두 개의 자아가 있음을 통보해주어도 인간은 두 개의 이름들 중에서 오직 하나의 이름을 대변자로 내세워 모든 주장을 전개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상 변화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진리나 현실을 이미 나 위주로 일방적으로 결정 나 버린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주고, 그 권위 밑에서 죽은 자처럼 다소곳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고개 숙인 얼굴 밑으로 어느새 묘한 미소가 번진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결코 지지 않는다. 다만 고개만 숙이고 있는 척할 뿐이다”고.

 
3. 구원 없는 세계에 대한 폭력의 개시
 
폭력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사람의 상상력이 모든 현실에 폭력을 가한다. 상상력의 난폭한 종합은 과거의 수동성을 현재의 지평 아래에 두고 시간적 차이를 동질적인 흐름의 외관으로 덮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시간의 층위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한다. 또 시간을 연속적으로 일률적인 지금들의 연계로 축소시킴으로써 시간성을 현재의 지배하에, 즉 시간의 현재적 유지의 지배하에 놓는다. 그렇게 보면 현존은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폭력은 ‘지금’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일체의 재생 단계에 앞서, 순순히 현재를 제시할 때 또는 포착한 것을 종합하는 조작에서 이미 분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최초의 종합이 벌써, ‘단일성에 의한 복수성의 이해’이다. 그것은 연속적 전개, 상이성의 관통, 그리고 그 전개에 대한 이해를 수행한다.
 
그것은 이미 합쳐놓고, 그것을 하나로 쥐는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폭력이다. 각각의 순간들은 각기 나름의 폭력을 품고 있다. 그 폭력들은 끊임없이 저희들의 과거와 미래를 향해 폭발하고, 그 과거와 미래들을 현존으로 돌려놓기 위해 그것들 속으로 스스로를 투영한다.
 
인간의 경험이란 상이성의 종합적 연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종합이 폭력적이라 한다면, 이 기초적 폭력이야말로 모든 객관적 인식과 경험 전체, 그리고 최소한의 인지 작용을 위한 가능 조건이다. 현상들의 지평을 여는 선험적 폭력. 그것이 없다면 현상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다.
 
이 모든 현상은 기원(紀元)과 시원(始原)의 폭력을 감춤으로써만, 그리고 시간의 탈존적 파쇄와 상상력의 시간적 열성을 덮어 가림으로써만 출현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성경의 주인공 되시는 분을 내리쳤다. 자기 내부의 폭력성을 마냥 감추고 있기를 예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이 세상은 세상을 말아먹는 두 부류의 폭력의 주체가 등장되게 된다. 하나는 인간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두 폭력의 주체가 마주쳐서 벌어진 사태가 십자가 사태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서 거드셨다. 다른 한쪽(인간)은 버려두고 다른 한쪽(예수님)을 부활시키므로서 누가 폭력의 진정한 주체자인가를 드러내셨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대신할 그 어떤 신적 증거물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에 대한 실존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이며 모든 현실은 소급해서, 그리고 추가적으로 오직 거기서만 쏟아져 나온다. 현실이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이 의미의 해석과정은 곧 두 폭력자 사이의 마주침이 연신 확대되는 형식으로만 진행된다.
 
이 폭력장 안에서 인간의 의미를 다시 보자

 
4. 인간이란?
 
자리로서만 말한다.

하나님의 폭력으로 인해 자아 속에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텅 비어있기에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다. 먼저 점령하면 통치자가 되고 인간은 주인을 만난 종으로 전락한다. 악마는 인간의 자아의 자리에 선악 지식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면서 일부러 비워둔 자리였다. 왜냐하면 생명나무 과실로 채워야 될 자리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리란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자리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에 대한 자기 해석이 일절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장차 완성된 복음의 관점에서만 인간의 자리를 해석하신다. 이것이 진정 처음 인간을 만들 때의 원칙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다.
 
유혹이란 비어 있는 것을 마저 채우려는 의도와 관련 있다. 악마는 그 비워있는 점을 노리고 인간에게 다가셨다. 악마에게도 비어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의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 빈 곳을 채우는데 실패했다. 신의 자리란 결코 추가될 자리가 아니다. 또한 피조물에게 넘겨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악마의 유혹에 이끌리어 인간은 최초로 ‘시도’라는 것을 한다. 뭔가를 노리고 뭔가를 창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리는 비어있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문제다.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몫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채워져야 할 따름이다.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선악에 관한 지식으로 채워져 있기에 이때부터 자기에게로 몰두 한다. 더 이상 자아 속에 난 구멍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의사와 자기 의견만을 개진하는 식이다. 하지만 빈자리를 차지한 선악의 능력은 선악을 아는 영적 세력과 선이 닿아있었다.
 
인간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악이 시키면 시킨 대로 인간은 악을 행사했다. 가인이 그러했다. 악이 그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창 4:7) 누가복음 22:31에서는 베드로도 같은 처지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셔서 베드로를 악마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휴, 아찔하다.
 
이로서 인간은 갇혀있다. 그 안에서 폭력이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서로가 서로에게 악을 행한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힘들게 한다. 나를 놔두고 내가 나를 떠날 수 있다면 번민이나 고통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놔둘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지배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서로 속이며 산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2-13) 즉 속이지 않는 자는 속이지 않는다는 경건성으로 인해 이 속고 속는 세상에서 핍박과 불이익을 당한다.
 
이는 성도에게는 책임자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성도는 천사처럼 자유하다. 자신의 중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기에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문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째서 못 빠져나올까 하는 차원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성도는 훌륭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께서 그를 항상 그가 예상 못한 다른 쪽으로 이끄신다. 복음으로 시작하는 사람과 자아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각자 속해있는 사람이다.
 
 
5. 구원이란?
 
구원이란, 하나님의 폭력에서의 건짐 당함이다. 그 반대의 경우를 보자. 열왕기상 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즉 구원된 자로 하여금 어떤 자리에게 어떤 자리로 구원되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떠난 상황을 지니고 있는 이 저주받은 세상 속으로 떠밀리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과 더불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여기에서 성도는 예수님이 가졌던 절망을 체험해야 한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는 일부터 본격적으로 구원의 일을 개시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극단적인 폭력성을 체험하셨다. 거기서 예수님을 절망을 털어놓으셨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절망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는 뜻이다. 그 안에서 ‘버림’이 무엇이며 ‘건짐’이 무엇인지를 안다. 참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확신이 선 사람에게만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진정 용서를 구하게 된다.(행 7:60) 자신을 절망에 밀어 넣지 않는 신앙은 신앙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어떤 존재 정당성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인정받지 못할 정당성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원통함과 억울함 속에서 비로소 성도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체험을 맛보게 된다.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신다. 성령께서는 줄곧 예수님을 평생 인도하신 그 영이시다. 따라서 구원이란 세상 것을 추가적으로 받은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평생을 재현해 주시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셨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론이란 성령을 받은 상황을 무대로 해서 본격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6. [구원, 그 이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1) 복음적 관점
 
성령이 임해야지만 성도가 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후로부터 ‘이 후’에 해당되는 작업은 주님에게 넘겨지고 성령을 통해 성도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조사해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 생애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구조와 사건의 유사성을 보게 되면, 


 누가복음                                                               사도행전

 1: 1- 4          데오빌로에게 드리는 헌정사                 1: 1- 2
 3:22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심             2: 1-13
 4:16-30                 첫설교                                     2:14-40
 5:17-26         중풍병자가 치료받다                          3: 1-10
 7:1-10   백부장이 예수님(복음서)과 베드로(행전)를  10:23 자기 집으로 초대하다.
 7:11-17         과부의 아들의 소생                            9:36-43
 9:51-19:28     예수살렘에로의 수난여행                 19:36-43
22:5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체포되다   21:30
22:63-6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매질을 당하다 23:2
22:66/ 23: 1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에 대한     23-26, 8, 13 네 번의 재판
23: 4, 14, 22  세 번이나 무죄 선언을 받은 예수님과 바울 23:28/ 25:25/ 26:31

이번에는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바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봅시다.


I. 베드로의 장 (1장-12장)                                  II. 바울의 장 (13장-28장)

 베드로의 장                                                           바울의 장

앉은뱅이 거지의 치료( 3: 1-10)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14: 8-11)
베드로와 마술사( 8:14-25)                                  바울과 마술사(13: 4-12/ 19:13-19)
다비다 혹은 도르가를 살림( 9:36-43)                    유두고를 살림(20: 7-12)
베드로의 수감( 4: 1-22/ 5:17-42)                       바울의 수감(16:16-40)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12: 7-11)                        바울의 기적적인 출옥(16:26-34)
예루살렘에서 매 맞은 베드로( 6:40)                      빌립보에서 매 맞은 바울(16:22-23)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시도(10:25)                         바울을 경배하려는 시도(14: 8-18)
스데반의 돌 맞음( 7:54-60)                                 바울의 돌 맞음(14:19-20)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베드로 (15:7-11)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울 (15:12)
성경을 연구하는 내시( 8:26-40)                           성경을 연구하는 베뢰아(17:10-12)
사도들이 계속에서 설교하도록 천사가                     바울이 계속해서 설교하도록 환상이
격려함( 5:17-21)                                               격려함(18: 9-11)
베드로가 유대적 의식을 따름( 3: 1)                       바울이 유대적 의식을 따름(18:18/21:23-26)
산헤드린 앞의 베드로(4:5-22/5:22-42)                산헤드린 앞의 바울(22:30/23:10)
베드로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5:15/16)               바울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28:8-9)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눈멀게 함
저주하여 죽게 함(5:1-10)                                    (13:8-11) 
  

 
위와 같이 예수님의 사건의 반복성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예수님의 초월됨이 역사 속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명하고 증거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2) 개인적인 관점
 
사람은 자신이 상상한 메시야와 자신과 주체와 객체의 자리에다 깔아놓고서는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는 제 3의 자리에다 또 다른 자아상을 설치해놓고서는 그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살피면서 조율해나가는 배치를 채택하게 된다. 인간들의 이런 사고(思考)적 장치 안에서 함께 놓아날 참된 메시야는 없다. 따라서 인간 자아에게 포착되는 메시야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메시야가 인간들이 상상해낸 허구적 메시야에 불과하다.
 
[구원, 그 이후]를 개인적 관점에서 정립하고자 한다면, 주체적으로 느껴지는 자아 1과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주님과의 관계를 위에서 살피고자 하는 초월적 자아 2,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이 시스템이 전체 구조가 와르르 무너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원, 그 이후‘의 개인적 관점은 바로 이 ’무너짐‘에 있다. 늘 무너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이후의 삶이다. 이 구조가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말씀과 성경 말씀이 명령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규정이어야 하고 표식이어야 한다. 즉 명령이 새삼스럽게 주체 행위 여유에 따라 미완료적 결과를 낳게 되지만 표식이나 규정은 그 전달함 자체가 완료적 성격과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실체를 새삼스럽게 미완료적으로 보지를 않는다. 예를 들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라는 말씀이 명령인가 규정인가?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기 위해서 생겨난 나라이다. 호세아 13;11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라고 되어 있다.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이제 이 나라가 어떻게 망하느냐를 보겠다는 겁니다. 즉 그 망하는 과정이 하나님의 뜻이 완료적 차원성을 전달하는 필연적인 매개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가치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가운데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성취의 완료성(하나님의 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아직 이런 작업들이 남아 있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아니요’가 없이 ‘예’만 되기 때문이다.(고후 1:19-22)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자유가 성립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끌었던 그 성령께서 성도에게 동일하게 이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7. 결 론
 
말씀노선과 인간 노선이 사뭇 다르다.
 
성도에게 더 이상 ‘나의 위기’란 없다. 오직 ‘주님의 위기’만 성령님에 의해서 찾아든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성도가 놓인 자리는 오직 주님이 계신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늘 ‘자리가 바뀌어졌음’을 깨달으면 살게 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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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목양교회 [구원, 그 이후]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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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그 이후
 
2009년 2월 16일     이 근 호 목사   (2009년 2월 21일 겨울 하루 특강)
 
 
1. 인간 의식의 한계
 
신약성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딛 1;12)
 
그레데 섬의 예언자는 기원전 6세기경의 에피메니데스를 가리킨다. 그는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명제로 삼고자 할 때는 모순이 들어가게 된다. 언어를 빌려서 표현된 판단을 명제라 한다. 그러므로 명제는 참과 거짓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그레데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이 되고 만다. 한편 그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그레데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런 모순이 19세기 말의 수학자들을 심란하게 했다. 수학을 참된 진리로 삼고는 싶은데 이런 모순을 제거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수학의 모든 이론을 오로지 참된 진리와 진리의 사슬 바다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수학의 모든 이론들이 견고한 기초 위에 수립되어 있는지를 연구하는 수학기초론이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독일의 다비드 힐베르트(1862~1943)이다. 힐베르트는 수학을 공리에 바탕을 둔 추론체계로 본다. 기호의 의미가 주어지면 그 의미에 의해 진리성이 이미 자명한 것으로 가정되는 명제를 표현 주는 것을 공리라 한다. 예컨대 ‘1=1’처럼 증명할 필요 없이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공이다. 이러한 공리의 집합을 형식적수학체계라 한다.
 
일상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자연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확한 표현과 전달과 개념구성에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프레게라는 사람은 ‘인공적인 언어’ 즉 ‘기호’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기호를 가지고 명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힐베르트는 수학의 모든 이론을 공리화하여 각 공리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함으로써 수학적 추론의 확실한 기초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형식적 수학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정리(定理)가 참된 진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정리 중에 논리적으로 거짓인 진술이 적어도 한 개 섞여 있을 때에는 그 형식체계에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공리의 형식체계는 논리적으로 참이 되고 동시에 거짓이 되는 명제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 비로로 무모순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형식체계 안에서 논리적으로 참인 모든 진술이 정리임을 증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공리의 형식체계는 완전성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힐베르트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영역인 수론의 공리계가 결코 모순되거나 불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31년 25살의 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은 힐베르트의 희망을 철저하게 좌절시킨 이론을 발표한다. 다름 아닌 ‘불완전성 정리(定理)’이다. 불완전성 정리는 “수론을 무모순의 공리계로 형식화할 떼에는 결정불능 명제가 포함된다”라고 요약된다.
 
산술을 모순이 없는 공리로 형식화하여 그 공리계로부터 논리적 추론에 의해 정리를 증명할 떼에는, 그 공리계 안에서 허용된 방법으로 증명을 끌어낼 수 없는 논리적으로 참인 명제(결정불능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요컨대 산술의 어떤 정리는 무모순의 형식체계 안에서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이 되는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산술의 형식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이와 같이 괴델은 비교적 간단한 수학체계인 산술의 형식체계조차 불완전함을 입증함으로써 공리계에 바탕을 둔 모든 수학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을 보여 주었다,
 
불완전성 정리의 논증은 아주 복잡하지만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는 매우 단순하다. 괴델은 간단한 산술의 특징을 이용하여 “나는 증명될 수 없다”와 같이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논리식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 논리식은 에피메니데스의 모순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이 논리식이 거짓이라면 증명이 가능하지만 산술의 형식체계는 거짓 명제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이 논리식이 참일 경우 증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산술의 형식체계 내부에는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결정불능 명제,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사람이 증명하지 못하고 성경이 증명한다”와 같은 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괴델이 결정불능 명제의 보기로 사용한 논리식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 자기가 자신을 증명하는 동안에서 주체와 객체와 뒤섞여 자기가 자신의 안과 밖에 모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자기언급 명제는 수학처럼 논리적 사고의 기본이 되는 영역에서조차 모순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한계, 즉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자기 언급이라는 한계란 다름이 아니라 똑같은 논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 사용하여 끝없이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소급하는 무한역행의 논증을 펼치게 마련이다. 이것이 인간 의식이기도 하다. 이 의식을 탈피하고자 하는 방도가 바로 바로 무의식 세계까지 시야를 확대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이성적 논리가 통하는 정돈된 세상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변화무쌍한 욕망이 주체 할 수없는 혼돈을 자아내는 세상이다. 여기는 따지는 세계가 아니라 느끼는 세계다.

 
2. 무의식 세계와 그 한계
 
무의식 차원에서 파악한 주체는 오인의 구조로 형성된 에고에서 시작하여 상상계의 나르시즘적 환상을 버리고 상징계로, 즉 문화와 언어의 상호 주관적 구조로 진입하여 욕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늘 ‘과정 중에 있는 주체’다. 그 주체는 사유 주체로서의 절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대하여 2차적인 지위에 있다.
 
또 그 주체는 사회적 구조에 선행하는 존재가 아니며, 대타자를 타자로 인정함으로써, 즉 대타자의 관점과 자기에 대한 대타자의 견해를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로 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명제와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명제를 비교해보면, 라캉의 경우, 주체를 구조화 하는데 외부 세계가 우위성을 갖는다는 것은 유아가 생존 충분성을 어쩔 수 없이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세계와 필수적 동화 내지 통합을 이룸으로써 생리적인 미숙성을 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주체의 가변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주체는 무수한 개별화를 만들어내면서 평생을 산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시각적 이미지와 대상들은 변화가 무수하며 무한히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주체 형성의 요인들인 이미지· 콤플렉스 등을 본질적, 혹은 본능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혹은 후천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늘 새로운 주체 추구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주체로 정립하더라도 갈등과 균열을 야기하면서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다. 즉 무의식 세계에서의 존재는 유일한 이름만으로는 결코 충분치가 못한다고 한다. 즉 두 개의 이름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의식에서의 이름과 무의식에서의 이름이다. 왜 이런 주장할까?
 
그 이유는 존재는 자신이 내뿜는 환상과 허상들의 다수성 중에서 하나를 늘 골라잡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유일한 의미를 임시방편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름’이란 자신을 지시하고 자신을 대표하고 자신을 외부에 알리게 한다. 신체가 자아의 자제력을 무시하고 방출하면서 현실화 시키는 식으로 자신을 알리게 되고 또한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차후에 변명을 늘어놓는 주인공으로서도 또 다른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직 나는 하나의 유일한 의미로만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말썽꾸리기 나와 뒤치다꺼리하는 나,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이 같은 존재를 표현하는데 필요하다. 실제로 플라톤(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에 대한 사전에 준비된 구분, 그렇지만 일자에 이르는 길로서의 구분)으로부터 하이데거(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그렇지만 운명적인 것에 또한 존재의 사건에 이르는 길로서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가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발설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순수한 긍정이다. 비록 사람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순수한 긍정이다. 뭔가 모든 것을 알기에 마땅히 자신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자기 긍정 무모한 태도라고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긍정을 수그린 적은 없다.
 
여기서 무의식 세계가 두 개의 자아가 있음을 통보해주어도 인간은 두 개의 이름들 중에서 오직 하나의 이름을 대변자로 내세워 모든 주장을 전개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상 변화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진리나 현실을 이미 나 위주로 일방적으로 결정 나 버린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주고, 그 권위 밑에서 죽은 자처럼 다소곳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고개 숙인 얼굴 밑으로 어느새 묘한 미소가 번진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결코 지지 않는다. 다만 고개만 숙이고 있는 척할 뿐이다”고.

 
3. 구원 없는 세계에 대한 폭력의 개시
 
폭력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사람의 상상력이 모든 현실에 폭력을 가한다. 상상력의 난폭한 종합은 과거의 수동성을 현재의 지평 아래에 두고 시간적 차이를 동질적인 흐름의 외관으로 덮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시간의 층위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한다. 또 시간을 연속적으로 일률적인 지금들의 연계로 축소시킴으로써 시간성을 현재의 지배하에, 즉 시간의 현재적 유지의 지배하에 놓는다. 그렇게 보면 현존은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폭력은 ‘지금’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일체의 재생 단계에 앞서, 순순히 현재를 제시할 때 또는 포착한 것을 종합하는 조작에서 이미 분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최초의 종합이 벌써, ‘단일성에 의한 복수성의 이해’이다. 그것은 연속적 전개, 상이성의 관통, 그리고 그 전개에 대한 이해를 수행한다.
 
그것은 이미 합쳐놓고, 그것을 하나로 쥐는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폭력이다. 각각의 순간들은 각기 나름의 폭력을 품고 있다. 그 폭력들은 끊임없이 저희들의 과거와 미래를 향해 폭발하고, 그 과거와 미래들을 현존으로 돌려놓기 위해 그것들 속으로 스스로를 투영한다.
 
인간의 경험이란 상이성의 종합적 연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종합이 폭력적이라 한다면, 이 기초적 폭력이야말로 모든 객관적 인식과 경험 전체, 그리고 최소한의 인지 작용을 위한 가능 조건이다. 현상들의 지평을 여는 선험적 폭력. 그것이 없다면 현상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다.
 
이 모든 현상은 기원(紀元)과 시원(始原)의 폭력을 감춤으로써만, 그리고 시간의 탈존적 파쇄와 상상력의 시간적 열성을 덮어 가림으로써만 출현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성경의 주인공 되시는 분을 내리쳤다. 자기 내부의 폭력성을 마냥 감추고 있기를 예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이 세상은 세상을 말아먹는 두 부류의 폭력의 주체가 등장되게 된다. 하나는 인간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두 폭력의 주체가 마주쳐서 벌어진 사태가 십자가 사태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서 거드셨다. 다른 한쪽(인간)은 버려두고 다른 한쪽(예수님)을 부활시키므로서 누가 폭력의 진정한 주체자인가를 드러내셨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대신할 그 어떤 신적 증거물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에 대한 실존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이며 모든 현실은 소급해서, 그리고 추가적으로 오직 거기서만 쏟아져 나온다. 현실이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이 의미의 해석과정은 곧 두 폭력자 사이의 마주침이 연신 확대되는 형식으로만 진행된다.
 
이 폭력장 안에서 인간의 의미를 다시 보자

 
4. 인간이란?
 
자리로서만 말한다.

하나님의 폭력으로 인해 자아 속에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텅 비어있기에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다. 먼저 점령하면 통치자가 되고 인간은 주인을 만난 종으로 전락한다. 악마는 인간의 자아의 자리에 선악 지식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면서 일부러 비워둔 자리였다. 왜냐하면 생명나무 과실로 채워야 될 자리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리란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자리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에 대한 자기 해석이 일절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장차 완성된 복음의 관점에서만 인간의 자리를 해석하신다. 이것이 진정 처음 인간을 만들 때의 원칙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다.
 
유혹이란 비어 있는 것을 마저 채우려는 의도와 관련 있다. 악마는 그 비워있는 점을 노리고 인간에게 다가셨다. 악마에게도 비어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의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 빈 곳을 채우는데 실패했다. 신의 자리란 결코 추가될 자리가 아니다. 또한 피조물에게 넘겨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악마의 유혹에 이끌리어 인간은 최초로 ‘시도’라는 것을 한다. 뭔가를 노리고 뭔가를 창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리는 비어있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문제다.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몫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채워져야 할 따름이다.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선악에 관한 지식으로 채워져 있기에 이때부터 자기에게로 몰두 한다. 더 이상 자아 속에 난 구멍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의사와 자기 의견만을 개진하는 식이다. 하지만 빈자리를 차지한 선악의 능력은 선악을 아는 영적 세력과 선이 닿아있었다.
 
인간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악이 시키면 시킨 대로 인간은 악을 행사했다. 가인이 그러했다. 악이 그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창 4:7) 누가복음 22:31에서는 베드로도 같은 처지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셔서 베드로를 악마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휴, 아찔하다.
 
이로서 인간은 갇혀있다. 그 안에서 폭력이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서로가 서로에게 악을 행한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힘들게 한다. 나를 놔두고 내가 나를 떠날 수 있다면 번민이나 고통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놔둘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지배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서로 속이며 산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2-13) 즉 속이지 않는 자는 속이지 않는다는 경건성으로 인해 이 속고 속는 세상에서 핍박과 불이익을 당한다.
 
이는 성도에게는 책임자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성도는 천사처럼 자유하다. 자신의 중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기에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문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째서 못 빠져나올까 하는 차원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성도는 훌륭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께서 그를 항상 그가 예상 못한 다른 쪽으로 이끄신다. 복음으로 시작하는 사람과 자아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각자 속해있는 사람이다.
 
 
5. 구원이란?
 
구원이란, 하나님의 폭력에서의 건짐 당함이다. 그 반대의 경우를 보자. 열왕기상 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즉 구원된 자로 하여금 어떤 자리에게 어떤 자리로 구원되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떠난 상황을 지니고 있는 이 저주받은 세상 속으로 떠밀리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과 더불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여기에서 성도는 예수님이 가졌던 절망을 체험해야 한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는 일부터 본격적으로 구원의 일을 개시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극단적인 폭력성을 체험하셨다. 거기서 예수님을 절망을 털어놓으셨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절망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는 뜻이다. 그 안에서 ‘버림’이 무엇이며 ‘건짐’이 무엇인지를 안다. 참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확신이 선 사람에게만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진정 용서를 구하게 된다.(행 7:60) 자신을 절망에 밀어 넣지 않는 신앙은 신앙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어떤 존재 정당성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인정받지 못할 정당성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원통함과 억울함 속에서 비로소 성도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체험을 맛보게 된다.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신다. 성령께서는 줄곧 예수님을 평생 인도하신 그 영이시다. 따라서 구원이란 세상 것을 추가적으로 받은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평생을 재현해 주시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셨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론이란 성령을 받은 상황을 무대로 해서 본격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6. [구원, 그 이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1) 복음적 관점
 
성령이 임해야지만 성도가 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후로부터 ‘이 후’에 해당되는 작업은 주님에게 넘겨지고 성령을 통해 성도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조사해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 생애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구조와 사건의 유사성을 보게 되면,


 누가복음                                                               사도행전

 1: 1- 4          데오빌로에게 드리는 헌정사                 1: 1- 2
 3:22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심              2: 1-13
 4:16-30                 첫설교                                      2:14-40
 5:17-26         중풍병자가 치료받다                           3: 1-10
 7:1-10   백부장이 예수님(복음서)과 베드로(행전)를   10:23 자기 집으로 초대하다.
 7:11-17         과부의 아들의 소생                             9:36-43
 9:51-19:28     예수살렘에로의 수난여행                    19:36-43
22:5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체포되다    21:30
22:63-6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매질을 당하다 23:2
22:66/ 23: 1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에 대한        23-26, 8, 13 네 번의 재판
23: 4, 14, 22  세 번이나 무죄 선언을 받은 예수님과 바울 23:28/ 25:25/ 26:31

이번에는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바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봅시다.


I. 베드로의 장 (1장-12장)                                  II. 바울의 장 (13장-28장)

 베드로의 장                                                           바울의 장

앉은뱅이 거지의 치료( 3: 1-10)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14: 8-11)
베드로와 마술사( 8:14-25)                                   바울과 마술사(13: 4-12/ 19:13-19)
다비다 혹은 도르가를 살림( 9:36-43)                    유두고를 살림(20: 7-12)
베드로의 수감( 4: 1-22/ 5:17-42)                         바울의 수감(16:16-40)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12: 7-11)                        바울의 기적적인 출옥(16:26-34)
예루살렘에서 매 맞은 베드로( 6:40)                     빌립보에서 매 맞은 바울(16:22-23)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시도(10:25)                         바울을 경배하려는 시도(14: 8-18)
스데반의 돌 맞음( 7:54-60)                                 바울의 돌 맞음(14:19-20)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베드로 (15:7-11)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울 (15:12)
성경을 연구하는 내시( 8:26-40)                           성경을 연구하는 베뢰아(17:10-12)
사도들이 계속에서 설교하도록 천사가                   바울이 계속해서 설교하도록 환상이
격려함( 5:17-21)                                               격려함(18: 9-11)
베드로가 유대적 의식을 따름( 3: 1)                      바울이 유대적 의식을 따름(18:18/21:23-26)
산헤드린 앞의 베드로(4:5-22/5:22-42)                  산헤드린 앞의 바울(22:30/23:10)
베드로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5:15/16)                바울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28:8-9)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눈멀게 함
저주하여 죽게 함(5:1-10)                                    (13:8-11)
 

 
위와 같이 예수님의 사건의 반복성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예수님의 초월됨이 역사 속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명하고 증거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2) 개인적인 관점
 
사람은 자신이 상상한 메시야와 자신과 주체와 객체의 자리에다 깔아놓고서는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는 제 3의 자리에다 또 다른 자아상을 설치해놓고서는 그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살피면서 조율해나가는 배치를 채택하게 된다. 인간들의 이런 사고(思考)적 장치 안에서 함께 놓아날 참된 메시야는 없다. 따라서 인간 자아에게 포착되는 메시야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메시야가 인간들이 상상해낸 허구적 메시야에 불과하다.
 
[구원, 그 이후]를 개인적 관점에서 정립하고자 한다면, 주체적으로 느껴지는 자아 1과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주님과의 관계를 위에서 살피고자 하는 초월적 자아 2,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이 시스템이 전체 구조가 와르르 무너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원, 그 이후‘의 개인적 관점은 바로 이 ’무너짐‘에 있다. 늘 무너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이후의 삶이다. 이 구조가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말씀과 성경 말씀이 명령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규정이어야 하고 표식이어야 한다. 즉 명령이 새삼스럽게 주체 행위 여유에 따라 미완료적 결과를 낳게 되지만 표식이나 규정은 그 전달함 자체가 완료적 성격과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실체를 새삼스럽게 미완료적으로 보지를 않는다. 예를 들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라는 말씀이 명령인가 규정인가?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기 위해서 생겨난 나라이다. 호세아 13;11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라고 되어 있다.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이제 이 나라가 어떻게 망하느냐를 보겠다는 겁니다. 즉 그 망하는 과정이 하나님의 뜻이 완료적 차원성을 전달하는 필연적인 매개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가치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가운데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성취의 완료성(하나님의 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아직 이런 작업들이 남아 있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아니요’가 없이 ‘예’만 되기 때문이다.(고후 1:19-22)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자유가 성립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끌었던 그 성령께서 성도에게 동일하게 이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7. 결 론
 
말씀노선과 인간 노선이 사뭇 다르다.
 
성도에게 더 이상 ‘나의 위기’란 없다. 오직 ‘주님의 위기’만 성령님에 의해서 찾아든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성도가 놓인 자리는 오직 주님이 계신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늘 ‘자리가 바뀌어졌음’을 깨달으면 살게 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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