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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17:57:34 조회 : 2991         
복음과 역사 이름 : 이근호(IP:119.18.89.5)

복음과 역사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3-12)

Ⅰ 서론

1. 인간의 조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원치 않는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생물적 조건인 신체성이 기본 조건에 해당된다. 인간은 신체가 주는 생물적 조건과 변화에 고개 숙이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욕망도 이 신체적 특성과 관계있다. 쾌적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몸이다. 즐겁게 놀기만 하면 매사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라는 물질적 요건 때문에 한평생 “어쩔 수 없다”는 탄식을 두구 두고 해야 한다.

아담이 죄 짓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는 대는데,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 변화를 은폐하려는 변명이었다. 인간이 선악을 알고부터 인간의 정신은 죄악된 신체의 한계를 위장하고 보호하고 변명하는 노력으로 일관한다. 신체는 정직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솔직하지 못하다. 늘 저주스러운 세계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로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혼돈을 감추기 위한 시도 아래로 정렬되고 정립하면서 상황에 대처한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만 정당화시키고 싶은 것이다.

이 무리수법 속에는 소위 ‘신앙한다는 것’,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 ‘신에 대해서 좀 알고 있다는 것’ 등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은 자꾸만 밖으로 노출되면서 큰 세력으로 확대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신체 자체가 악마의 지배 아래서 이미 정신화되어 무한(無限)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펼치려는 본능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연대감’으로 이루어진다. 시작은 혈육 관계를 기본으로 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등등 혈연관계를 더욱더 공고히 하려고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런 경향을 모를 리 없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인간들의 집단적 연대성 추구는 애초부터 있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아담의 한 몸에서 출발한 인류는 비록 양적으로는 다수로 펴졌다고 하나 질적으로는 항상 ‘하나’로 집결하려는 몸부림을 멈출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범인류의 운명이다. 사람들이 연대성 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스스로 힘겨운 신체의 한계를 추상적인 ‘큰 덩치’의 한 몸에 소속해서 해소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체가 주는 한계가 추상적인 ‘한 몸’의 영속성으로 불멸의 존재로 남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내 자식이 살아있다는 그 자식의 신체 속에는 ‘나의 이름’은 죽지 않고 불멸의 흔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상상을 하게 마련이다.

이 하나의 연대성으로 집결하는 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어’에 있다고 보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6-8)

2. 언어를 통한 생활의 한계성

일반 언어학이나 학문 세계에서의 해석법에서는 몇 가지 전제가 수립되어 있다.

첫째, 인간의 이성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둘째, 인간의 이성은 자기 실수에 대해서는 실수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셋째, 인간의 이성은 실수에 대해서 수정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 그 밑바닥에는 또 무엇이 깔려 있는지 검토해 보았는가? 과연 이러한 이성을 언제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수용해 주신 적이 있었던가? 이런 것을 검토하지 않는 자들은 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곤 한다.

“전제 없이 무전제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자, 혹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보자!” 그러나 이렇게 외쳤던 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가? 주님은 그들의 무전제나 신앙의 눈을 죄악의 극치라고 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이 주님을 해석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하나님 아들을 죽이는 동기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당시 유대인들로 모르고 있고 오늘날 소위 자칭 신자라는 자들로 마찬가지이다. 즉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들은 자꾸만 십자가 사건을 비켜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래의 관심사가 계속 인간 긍정에 있기 때문이며 그것 보다 더 분명한 것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자체가 인간을 긍정하는 세계에 대해서 여전히 은폐와 비밀로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십자가 사건의 영역을 급히 떠나 버리려 한다. 계속 뭔가 추구하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 그것이 뭔가? 겉으로는 죄인입네, 혹은 부족합네 하면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바는 띠로 존재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계시화’이다. 인간은, 자아를 끊임없이 계시하므로서 신의 대열 속에 합류가 가능하다고 여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이런 시도를 멈추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하나님됨을 밝혀내지 못하는 그 해석 난점을 유대인들의 해석방식을 가지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연대감 구축을 위한 사회에서 정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정보(사상)는 다음과 같이 전달된다.

발신자 → 전 언 → 수신자

이러한 정보는 코드code화 해서 이루어진다.

발신자 → 약호화(encode) → 전언(massage) →해독(decode) →수신자

그런데 실제에 일어나는 현상은 이렇게 된다.

의미 창작 → 창작과정 →작품 → 해석과정 →독자

이러한 상대방의 의견 제시에 대한 듣는 사람은 이 경로를 타고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하게 된다.

작가 탐색← 창작 과정 탐색←작품 ←해석 원칙 ← 독자

이렇게 되니,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자기 목적성 안에서의 우연의 만남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자아가 타인을 통해 자아를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의미가 다시 자기에게도 되돌아가면서 그 의미성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는다. 작가나 독자나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의해 원래 자기 해석의 자리로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만약 일치점을 가질 수 있다고 고집해도 일치되는지 안 되는지를 언어 구조적으로서는 확인할 아무런 길이 없다. 단지 “일치되었구나!”하고 판단하는 그 당사자의 임의성 따라야 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 소리만 냅다 질러 대고 얼른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서 숨어 버리는 것이다.

즉 해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이다. ‘나’가 다른 인간은 ‘타인’을 해석하며 그 해석된 것을 도로 자신의 것으로 변조하고 각색해서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탐구에는 물론 ‘신앙한다’ ‘신앙이 있다’고 표현하는 의식까지 포함된다.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 주관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해 낼 수 있다. 육체라는 물성화된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외부의 환경과 접하면서 비로소 자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식마저 가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신체는 세계의 일부로서 교류가 된다.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그 원인 규명이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해석은 곧 해석자 자신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객관이라는 것도 실은 제대로 된 객관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세계와 자아의 상관맺음이 틀어진다. 결국에는 자아는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해변에는 여전히 물결이 넘실대건만 홀로 죽어 사라지는 것이다. 내 세상이라고 여겼기에 모든 것을 나를 위해 해석해 왔던 그 세상과 이별하면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관’에 머물면서 왔음을 되풀이해서 확인해주는 세상이 곧 이 세상이었다.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아’는 늘 세상과 결합되고 일치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늘 실패하고 만다. 존재는, 자아의 주관이 파악하려는 그 객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지금은 멀쩡하지만 결국 나를 반드시 죽음에 데려다 주는 이 시간을 미리 가미해보자. 그렇다면, 예를 들면, “도덕적으로 삽시다”라는 교훈적인 글을 있더라도 그 교훈이 시간과 더불어 다가왔을 때, 시간의 요소만 빼먹고 교훈적 내용만 가져와봤자, 그 교훈을 통해서 “내가 왜 꼭 죽어야만하지?”에 대한 해답을 줄 수가 없다. 따라서 ‘죄 아래’ 혹은 ‘아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롬 5:14) 객관적인 세상 구성에 언어가 동원되지만 시간적 요소를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요소마저 세상 구성과 그 해석에 동원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시간적 요소가 이 작업에 호응해줄까?

자기가 자기를 표현하면서 존재하는 신체인 인간은, 각가지 언어들을 순간마다 내뱉지만 사실상 동어반복의 경향을 띤다. 동어 반복이란, 글자 그대로 ‘같은 말 되풀이하기’이다. 아무리 길고 복잡하고 다양하고 풀이해도 결국 같은 의미를 다른 기호를 사용하여 대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따로 첨가될 새로운 가치란 없는 법이다. 명제 속에 이미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이나 신약 성경을 설화적으로 여겨서 구조를 나누고 분해하는 행위도 새로운 의미 전혀 생겨나지 않는다. 마치 2x=x+x로 표현된 수식과 같다. 이 수식에서 x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x로 시작해서 x로 끝나고 만다. 분해하려는 해석자의 분해 방식은 성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자의 의식 구조 안에 들어 있었던 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논리의 고리를 자체적으로 이어 봐야 흘러가는 구름에다 사다리를 놓는 격이다.

이러한 폐쇄적 사고로서 분석과 분해에 사용되는 이성을 도구적 이성이라고 한다. 곧 “수학적 형식주의는 직접성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인 숫자만을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사유를 단순히 작접성에 묶어 둔다. 오직 사실성만 정의로 인정되며 인식은 사실성의 반복으로 제한되어 사유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기호화 될 수 있는 생각들은 이미 참과 거짓의 평가에서 떠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가치와 의미가 숫자로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은, 진리라는 것이 숫자나 기호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이 도구적 이성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범주를 떠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여기는 이성과 더불어 끝없이 수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의미 없는 축약과 단축을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그 기호마저 의심하면서 증발시켜 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죽어 가는 의미 없는 자아뿐이다. 신학이든 모든 학문이든 그 뿌리가 처음부터 자아한테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 세계에 대해서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다 버리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33/요한복음 12:25) 이 본문들에서는, 자기 부인과 그리고 ‘십자가’라는 내용이 같이 덮어 온다. 과연 신학을 한다는 자들이 자기의 신학 작업마저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질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십자가는 사건은 죄인을 사라지는 곳이지 통과하게 하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를 보이지 못하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는 신앙인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속지 않으신다. 그저 세상 끝까지 자아만을 최종 신봉하는 사이비한 종교 연극인에 불과하다. 오로지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만을 증거 하지 않는 그런 신학 작업도 복음인가? 아니다. 주님은 그런 복음을 남긴 적이 없다. 그저 인류가 옛적부터 끊임없이 벌려 왔던 유신론적 종교의 축제를 위한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인간의 죄를 밝히는 예수님이 아니면 참 예수님이 아니며, 인간의 죄를 밝히는 하나님이 아니면 참 하나님 아니며, 인간의 죄를 밝히시는 성령이 아니면 참 성령님이 아니시다. 성경 해석법 자체를 공격하는 신학이 아니면 참 복음적 신학이 아니며 교회의 역사를 낱낱이 정죄하지 않는 교회사는 참 교회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 형식이나 칼빈과 루터를 높여 주는 교회사나 한국의 초대 부흥사를 부축이고 그것을 긍정하는 역사관은 주님을 모독하기에 충분한 역사관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네들의 종교 솜씨와 의를 치하하기 위하여 주신 것인 줄 알았다. 즉 도구적 이성과 반성하는 이성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그들은 모세교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세교에 대해서 누가 하나님께 고소하겠는가? 모세 자신이 정죄하고 고소한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왜 그들은 모세교에 집착했는가? 그것은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이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다.

정말 인간이 죄를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를 지적하시되, 그것도 성령의 능력, 곧 십자가 취지 안에서는 활약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만 비로소 죄를 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이 대목에서 ‘죄가 없었으려니와’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전에 왜 ‘죄 없음’이 인간 세상에 유통될까? 그것은 인간들이 ‘죄가 아닐 수 있는 방안을 전제로 고려하면서 죄개념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포시키고 교육시켜 왔다.

이 모든 시도가 일거에 부정당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등장뿐이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넣었다고 자부했고 이 언어를 해독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내리기 전부터도 이미 자신들은 신의 존재를 간파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즉 ‘신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구태여 계시주시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미 확보된 확실한 존재성에다 추가적으로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첨가하면 온전한 하나님상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생각마저 죄. 혹은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규정하신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게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스스로 큰 가능성을 거품처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준 것은 그들을 의인 취급해서 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왜 우리 인간들이 원초적으로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안 되는 존재이며 왜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더 나아가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왜 더욱 더 증가해서 더욱 더 교만케 되는지 그 실상을 보이기 위해서 주어졌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죄와 의는 자신들의 행동하기 나름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전적으로 악마에 매여 있어 선은 하나도 없고 오직 악 덩어리 인 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때로는 반성도 하고 겸손해 하고 회개도 하고 자복하며 금식까지 할 줄 아는 그런 인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 죄의 또 다른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 자기네들 손으로 그 분을 살해하기 전까지는 그 이유와 동기를 전혀 몰랐다. (물론 그 후로도 그들은 알지 못했는데 이는 시간이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마감성’과 연계되므로서 낯선 용도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 인간들의 죄를 전부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의 언어적 속성을 통해서 침범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였던 것이다. 구약 성경은, 인간의 죄가 어디까지 뻗쳐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신약은, 시간이 흐름이 구원의 여지와 무관함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Ⅱ 본론

1.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인식

‘있는 것들’(=존재)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여기서 시간에 대해서 두 가지 인식이 있게 된다. 하나는 ‘있은 것’들은 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쪽과 그렇지 않고 변화하는 것(=생성) 자체가 잠시 있는 것보다 더 진실 되다 여기는 안목이다. 먼저 ‘있는 것’을 우선시하는 안목부터 살펴본다.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짝을 이루는 식’으로 있고, ‘공동체를 이루는 식’으로 있다. 이것은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아본다”는 일반적 믿음이 한 몫을 하게 된다. 이것을 확장하게 되면 ‘같은 것’ 까리로 계속 분할이 이루어지고 이는 ‘전시적(展示的) 상황’이 된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동일성’이다. 즉 운동이란 동일성을 구성하고 구축하기 위한 한시적인 변화라고 보는 것이다.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주체적 인식 자체가 동일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자부해야만 한다. 즉 자신이 이미 존재라서 밖에서 동일성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 동일성을 갖추었다고 인식하므로서 ‘존재’들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운동되는 것은 정지되어야지만 ‘존재’로 파악할 대상이 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운동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게 된다.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간주해서 ‘존재’에서 빼버리고 ‘없음’과 연관시킨다. 있음과 있음 사이의 간격에서만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 운동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오히려 존재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래서 있음을 있음 되게 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운동을 해석한다. 즉 운동이란 없음과 다름을 통해서 있음을 있음 되게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존재가 우선이 되면 이 세상은 존재의 바다가 된다. 존재의 바다에는 나름대로 각 존재들은 동일성을 갖추게 되면 그 동일성 사이에는 ‘다름’이 형성된다. 즉 A는 B와 다르고, B는 C와 다르고, C는 D와 다르고 … 등등의 식으로 확대되는데 그 변화를 통해서 ‘같음’이 나온다면 이는 상위 유(類)가 된다. 새로운 집합된 종류가 따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위(下位) 단계의 개별적 형상과는 다른 새로운 형상을 상위(上位)에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양(糧)에서 질(質)로 (혹은 질적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동일성

이처럼 동일성은 무와 부정(아님, 혹은 다름)을 매개로 해서 스스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동일성은 시간을 초월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동일성을 꼭 쥐고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외부 세계를 차츰 삭제해 나간다. 주변 사물들을 하나하나 삭제 해 나갈 때, 이때는 나 자신은 엄연히 동일성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내부세계를 삭제해 보자. 내 의식이 삭제되어 갈 때, 나는 나의 또 다른 의식이 발동하면서 조금씩 삭제되어 가는 나의 의식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듯 그 어느 경우든 삭제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삭제 하는’ 존재의 동일성을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외부세계와 나의 내부세계를 동시에 삭제하는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때 우리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왕복 운동하면서 두 세계를 조절해가면서 ‘무화(無化)’시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가 존재한다면 이는 단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왕복 운동할 때는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그 경계선에서 발견될 뿐이다. 즉 없는 것은 없고 단지 있는 것만 계속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것이 바로 생성론적인 안목이다. 예를 들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거기에 어떤 다른 도시가, 아니면 최소한 어떤 폐허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 인간은 타자의 현존을 동일자의 부재로서 이해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기대를 투사해 세계를 본다. 주체의 기억과 기대를 거둬내고 사실을 보면 거기에는 그가 기억/기대했던 그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 현존하고 있음을 본다. 우리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없다거나 아직은 없다고 생각할 때, 실제 현존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내 마음이다. “A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A"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A라는 표상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고, 이것은 이미 A라는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실제로 존재하는 A보다 더 많은 생각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A의 배제’까지 에둘러 짐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 가능성은 존재의 실재성 위에 붙어 있다.

“이 탁자는 희지 않다”고 말 할 때,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은 ‘희지 않은’ 탁자가 아니라 흰색의 여집합 속의 어느 한 색의 탁자를 본 것이다. ‘희지 않는 색’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노란색이며 노란색이고 붉은 색이면 그냥 붉은 색이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희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저 탁자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흰 색 탁자는 아니구나”를 염두에 두고 나온 표현이 된다. 따라서 부정(否定)에는 모종의 주관이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부정과 무란 세계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투영하는 주관적 속성이 된다.

절대 무란 ‘전체’라는 존재에 덧붙여진 정신의 조작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 부재를 고려하고 부재를 염두에 두면서 사는 이유는 현재와 현존을 마저 완벽하게 채우기 위함이다. 존재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려는 시도다.

그러나 동일성이라는 사실상 평균치일 뿐이다. 탄소의 원자가가 6이라는 말하는 것은, 사실상 수많은 실험치들의 평균치가 6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사(動詞)의 경우이다. 우리가 운동에서 주목하는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부동의 윤곽이다. 우리는 운동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운동의 주체, 운동의 목적/의도, 결과 등에 주목한다. 운동을 우리 삶의 내부에 접속시키고 이미 마련된 윤곽에 짜 맞추고 난 뒤 윤곽에 맞지 않는 운동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사라져버린다. 동사를 사용하면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운동이 존재에 남기고 간 흔적이요 추가된 윤곽인 뿐이다. 존재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떠나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난 뒤 헤어졌다면, 그 만남은 두 번 다시 재현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에 추억으로 남을 뿐이고 그것으로 계속해서 그리워하면서 아파하는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할 뿐이다.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눌 때, 여기에서는 정확히 영화(映畵)적 착각이 작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실재-지속을 몇 가지의 ‘가능적/상상적 정지컷’들로 나눈 후 다시 그것들을 이어서 (거짓 생성임) 소위 ‘내 인생’을 구성한다. 'My way!' 자르는 분절의 수를 늘인다고 해서 사태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이 끊어짐이 없는 연속적이며 질적으로 다 점검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창조적 의미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지키려는 존재적 집착에 의해서 손상하고 왜곡 당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안목과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을 같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린이가 어른이 된다”고 하지만 어린이라는 어떤 ‘것’은 인위적 구성물이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의 어린이와 어른 시절에서 어린이를 보는 안목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가 어른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생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어린이와 어른은 그 생성의 잠정적 계기(契機)들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네 일상적 사고와 언어 속에서 영화적 착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어릴 때 갖고 놀던 만화경(萬華鏡)을 생각해보자. 조그마한 구경으로 들여다보면 온갖 모양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면서 나타난다. 색종이들이 숱한 거울 조각에 반사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만나게 되는 모든 신체들과 우리 신체를 매일 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각가지 관계와 사태들은 우리들 동일성적인 주관으로 인해 새로운 배열을 일방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매번 새로운 윤곽이 일부를 접하게 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영화 시나리오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사나 목적, 방향, 맥락에 따라 실재-생성으로부터 어떤 단면들(성질들, 형태들/형상들, 의도들)을 절취한다. 잘라서 취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절취한 단면들을 연결시켜 나름대로 생성을 파악하려든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의미요 역사이다. 이 역사적 연속성은 실재의 연속성이 아니라 지능에 의해 구성된 연속성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 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물로 대체하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 그 대표적 사례가 진화론적 창조론을 반대한다는 취지에서 등장한 ‘기독교적 창조론’이다)

3. 시간과 역사

문제의 핵심은 ‘시간의 공간화’에 있다 시간을 공간화함으로써, 즉 운동을 운동체의 궤적으로 대체함으로써 해명하고자 시도해온 것이다. 운동에서 운동 그 자체를 제거하고 그것을 추상공간으로 옮겨놓은 후 기하학적 조작을 함으로써는 결코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자의적으로 분절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공간과 실재-운동 사이에는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렇게 되면 지속은 기하학으로 갇혀 잠시 멈춰 선 것이 된다. 과연 실재가 인간의 조작으로 중지되나?

생성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잠재성의 생성이다. 그것은 곧 생명활동이다. 우리 인간들의 사고(지각)는 세계를 분절(분석하기 위해 자르는데) 동원된 언어의 표현과 물려 있다. 그것은 의미를 도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래서 해서 도출된 의미는 모두 일방적으로 평균화된 것들이다. “하늘이 파랗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경우다. 이 언어가 기호로 바뀌면서 근대 과학에서 고유의 질은 사라지고 과학에서는 모두 양적으로 다루어지는 질점이 된다. 생물체란 그저 작동되는 기계가 되고, 사람이나 사과나 코끼리나 기차는 하나씩 있으면 모두 ‘1’이라는 숫자로 다루어져 계산된다.

계산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어떤 대상이든 갖고 있는 질적인 측면은 추상화되어야 한다. 추상이라는 말은 특정한 속성만을 남기고 다른 것은 제거한다는 뜻이다. 즉 수로 추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양적인 속성만 남기고 다른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처는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시장에서 돈으로 가치가 등질적으로 환산되는 분위기에 부합된다. 근대 수학은 더 나아가 시간의 연속성마저 정복했다고 자부한다.

이는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소미분이다. 시간을 무한히 분해해서 다시 적분을 하게 되면 시간은 등질적인 것이 된다. 과학적 법칙을 세우는데 있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 간격을 재는 것이다. 즉 시간의 측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시간은 곧 ‘측정 가능한 시간’인 것이다.

확고한 물리적 법칙의 세계는 우리 인간이 실제 체험되는 그 세계와 다르다. 예를 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실제로는 기다려야 체험되는 시간이지만 물리법칙에서는 이미 법칙상 설탕은 몇 분 후에 녹는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에 아직 되지도 않는 사태를 미리 고정시키고 만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미리 주어진 바가 된 것이다. 화학적 과정이나 생명체의 운동이나 나아가 인간의 뇌와 정신까지, 심지어 문화와 역사까지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발견이 아니고 발명이다. 곧 가능성의 발명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실재보다 더 많고 크고 넓어져 버렸다. 이것은 거짓이다. 미리 당겨서 내놓는 망상이다. 이렇게 해놓고서 “인간은 무無를 정복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를 정복하여 유로 전환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실재로부터 과거의 가능을 추후(追後)적으로 추론한 것이다. 실재를 그것을 미리 규정했던 것으로 상정되는 가능으로 되돌려 투사한다. 하지만 실재가 가능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능이 실재에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이로서 실재는 덧붙여진 주체의 작용으로 새롭게 변모 되어버린다. ‘나’라는 주체자가 실재에 개입하므로서 실재 풍경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주체는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점이 절망적인 사태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상으로부터 실제 인물이 튀어나오기를 고대한 만큼 부조리한 일이 또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거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예상 못할 일을, 거울 앞에서 서면서 비로소 그런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기회가 유발된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유발한 것인가 아니면 실재가 스스로 유발한 것인가? 주체의 개입 (개인이든 집단이든)으로 사태는 예측되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드는 셈이다. 마치 우물 속이 어둡다고 작대기를 갖고 우물을 쑤셔대면 댈수록 우물은 더욱 탁해지는 원리와 같다.

유신론적 역사가들은 말한다. 신학자들도 말한다. 신의 개입으로 세상의 초기조건은 마련되었다고 말하다. 그런데 그 초기조건이란 현재 인간들이 추후적으로 논평한 것이 아닐까? 뭔가 본다고 여기고 안다고 여기는 그 주체마저 오늘도 우발적으로 생성된 결과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역사’라고 고려되는 역사란 없다. 단지 ‘역사’를 진리라고 확신하는 주체된 집단의 등장이 우선이다. 역사는 자신의 특이성들에 의거하여서 전체화로부터 하나의 장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기억’으로 고려되는 하나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다. 곧 하나의 사건이다.

역사의 진행이란 최초의 사건에 충실한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역사란 회고적인 방식에 의거하여서 사건들이 해석에 통해 서로 간에 스스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사건들로 짜여진 충실성이다. 충실성이란 개입이 하나의 상황 안에 하나의 사건의 이름을 유통시킬 때, 그리고 이 유통되는 사건의 이름에 다수들의 실존이 연계 되어 있을 때, 바로 이때의 다수들을 상황 안에서 분간하는 공정이 바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충실성의 공정이다. 쉽게 말해서 충실성이란 우연한 생성을 늘 재취합하고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충실성과 주체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4. 주체

우선 주체는 검열을 행하는 개입자이나 그 공정의 결과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작용이지 작용의 결과요, 생산이자 생산물이다. 진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진리의 실존이 매번 동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생산이자 그 생산의 결과인 것이다. 주체는 주체-대상이라는 관계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체는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이다.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와 더불어서 어떤 사건이나 진리가 있게 된다고 할 때에 주체는 사건 또는 진리의 부분이기도 한 것, 따라서 사건 또는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사건이나 진리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다. 이로서 주체는 우연적이다. 주체를 늘 가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주체는 사건적 진리를 존재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추진하고 성취하려 한다. 어떻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가? ‘이름붙이기’이다.

그리고 주체가 이름들과 진술들을 생산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곧 주체는 동시에 언어-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 생산된다. 주체는 진리에 감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주체가 벌이는 진리의 실천이다. 주체는 이 소진된 진리의 유한한 부분인 것이다. 곧 그림자요 모형이다. 주체의 집합은 진리와 마찬가지로 식별 불가능한 부분집합을 형성하고, 식별 불가능한 것들을 행한다. 결국 주체는 상황의 법칙(백과사전적 지식 체계)이 진리를 인정하도록 진리를 지식에 강제한다. 지속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5. 진리

주체의 실천은 결국 진리에 충실한 후後사건적 실천이며, 이 실천을 통해 결국 진리는 옳은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과정이고, 주체의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이다. 일단 상황의 법칙이 진리를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진리가 지식 내에 자리 잡게 되면 상황은 변화한다. 상황의 법칙이 변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지동설이 옳은 것으로 인정되면 천동설은 틀린 것이 되어 지식 체계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상황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변화다. 진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게 진리에 대한 충실성으로서의 주체들이 행하는 후사건적 실천은 변혁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진리의 동력이다. 바디우의 철학은 이렇게 주체적 실천과 변혁의 전망을 간직한 전투적인 철학이라 하겠다.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애초의 상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성이나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언어-주체의 진술이 그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 또는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을 애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새로운 상황이라고 일컫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말을 뒤집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만약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를 명명, 분간하고 부분들을 분류하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한한 사건들에 의해 떠받쳐지는 무한한 진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과 진리를, 진실 된 것과 참된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아’라는 주체개념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구출해내려고 한다. 주체를 구출하려면 그동안 주체를 대신해 왔던 신(일자)개념을 대신 부숴야만 했다. 신을 부수는 방식은 존재론을 부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곧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다 아는 위대한 존재자’를 제거하고 그 대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끼리 만나서 나름대로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껴졌던 그 의미들을 언어를 통해 상호 소통하는 것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유로 삼고자 한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 한복판에 메시야가 출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 외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즉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세례 요한은 단언하고 있다. 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겨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진리와 심판을 오로지 자신의 행하심에 근거해서 시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주체에 대해서 총독으로 대항해보겠다는 것이다. 즉 진리의 공유가 가능한가를 타진하는 제안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체성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주체성으로 끼어들 수 없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홀로 이루어낼 일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몸이 교회다. 예수님이 친히 주체가 되셔서 벌리는 사건으로 인한 ‘초과’적 상황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활동을 벌리게 하신다. 여기에 대해서 세상은 나름대로의 역사관과 존재관을 근거로 자신의 주체에 의해 성립된 교회를 가지고 나선다. 총독 빌라도처럼 예수님의 활동에 자신들이 끼어들고자 묻고자 하신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자리와 총독 빌라도의 자리가 같은 자리가 아니다. 세례요한의 자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빛을 증거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야 될 자리로서 마련되어 있지만 총독 빌라도의 자리는 인간 역사로 굳어진 자리다. 인간은 사건을 소지 하지 못하고 반복시켜내지도 못한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초기 사건을 통해서 고정화된 역사를 자신들의 주체적 활동으로서 생산해내고서 그것을 ‘진리’라고 이름 붙인다. 제자들로 그러했고 모든 인간들도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그리스도 나라에 참여될 것인가?

6. 천국 비유와 그 해석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의도적으로 비유로 나타내셨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원인과 이유가 있었다. 원인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사야 예언에 근거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이 예언의 말씀은 필히 이루어져야 했고 그것도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했다. 즉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 결코 구원이 돌아간다든지 구원이 달성되어서는 아니 되는 부류가 발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원이 돌아가는 부류도 그들의 자력이나 선행이나 행위나 지혜나 지식에 의해 구원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문제인데 이것도 예수님의 행위만이 중심 기준이 될 뿐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이 본문에 보면, ‘너희’라는 부류와 ‘저희’라는 부류가 하나님의 허락과 예수님 행위에 의해 반드시 구분된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허락’이 예수님의 통해서 어떻게 이 땅에 필히 성취되는가에 관한 비유들이다. 즉 예수님이 어떤 행위자이시기에 인간편으로 전혀 불가능한 구원 환경에서 구원 가능한 자들이 탄생되느냐 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비유의 주된 내용은,

첫째로, 천국과 지옥은 사전에 만들어지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유통성 있게 각자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만드셔야 하고 동시에 거기에 들어가야 될 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들어가도록 이 세상은 완벽하게 움직여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옥 만들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며 이 일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지상에 나타나셨다. 예를 들면, 소위 가라지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운명은 이미 뿌린 씨앗으로 확정되고 뿌린 자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통고하는 비유이다. 하나님이 일반적인 농사꾼임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가라지의 출처와 그 최후의 운명에 의미를 두는 농사꾼으로 비쳐지는 비유이다. “가만 두어라”라든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라든지 “추수꾼은 천사들이 그런즉 가라지는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도 그러하리라” 대목이 이를 반영해준다. ‘천국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가도록 변동 사항이 도저히 생길 수 없는데 이는 각각 뿌린 자들의 위상들에 비해서 씨앗 나름대로의 ‘자기 운명 바꾸기’나 ‘자기 운명 선택하기’가 전혀 먹혀들 수가 없는 종속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국 아들’ 과 ‘악한 자의 아들’ 의 구분은 오직 예수님 본인으로만 기준으로 삼게 되는데 그것은 여타의 인간들과는 달리 예수님만이 예언 성취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격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천국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확언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자기네들이 지옥 가는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유대인들의 ‘하나님 믿기’는, 예수님만은 전적으로 배제한 상태에서만 고려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실 메시아와 자기들 간의 계약상 관계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계약 상대자인 자신들의 존재와 종교적 행위에 의미가 가득 부어넣었다. 즉 이미 따로 이 구원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틀에다 메시아만 집어넣으면 만사 완료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는 그들의 구원의 틀마저 그냥 두지 않고 시비 걸어 버린 것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2-17)

그런데 이 본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구원방식은 어떤 방식인가? 그것은 온전히 예수님 자신의 죄사함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완수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 9:6, 25)

예수님의 이러한 구원방식은 유대인들의 구원방식, 즉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구원방식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며는 다음과 같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즉 유대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그들은 그냥 선택되었고 구원된 점을 인정한다. 결코 자기네들의 금식 행위로 구원이 쉽게 성취되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금식을 하는 것은, 여호와의 자비로운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낮추겠다는 조치요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경건한 마음가짐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행위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특하고 갸륵해 보이는(?) 자세가 예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도 (심지어 극단적으로 고상하고 경건적 각가지 종교적 선행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전적 죄인됨을 새삼스럽게 파악하는 눈을 뜨게 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알기 위해 예수님에게 집중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시키는 수단으로 숱하고 거룩한 율법이 이미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 자각’ 정도의 문제는 자기네들 선에서 종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율법이 코앞에 있더라도 진정 그들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왜냐하면 소경이 눈 뜨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몫이며 또한 그렇게 일이 진행되어야 이사야 6:9-10의 말씀을 예수님의 의해 주도적으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기존의 고정 관념적인 ‘인간 의(義)’에 대해 하나님의 전략적 공격이었다. 하늘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으로 지상에 펼쳐진다. 즉 ‘대전쟁의 양상으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그러나 이 전쟁은 이미 확정적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예수님은 기필코 지옥을 만들고야 만다. 천국을 천국답게 지상에 나타내 보이기 위함의 ‘철저한 지옥 확정짓기’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옥 갈 자를 천국으로 돌리는 착오는 생길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을 예수님은 비유에 담았다.

둘째로 비유에 담긴 내용은, 천국이 이 지상에서 드러날 때는 환영받지 못하는 고난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천시되고 무시되고 극히 미미한 위치밖에 점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대수롭지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누룩이나 겨자씨 같은 대우밖에 받지 못한다. 심지어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대외적으로 털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여야 할 지경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숨긴다는 것, 천국을 숨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천국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둡다. 동시에 지금의 천국은 심판의 대상자와 함께 있는 것이 용납이 되는 방식으로 존속하고 있다. 마치 어부의 그물 안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같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지금은 악의 세력에게 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 끝에는 전혀 상황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용납이 풀리면서 정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악한 자들은 이를 갈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천국이 어떻게 존재하던 간에 여전히 우주의 기준이며 중심점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도 그러했고 나중에도 그러했다. 단지 너무나 미미하고 숨어 지내기에 사람들의 기대하는 그런 식의 즉각적인 효율성과 효능성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44-45) 왜 창세로부터 확정된 진리가 감추인 채로 왔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창세 때의 지혜의 전부이고 그것이 ‘예수님 오심’의 현존성으로 인해 성취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실 분으로서 지옥도 만들어야만 하시기에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더 이상 은폐되어야만 하는 비밀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되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6-17)

여기 복되다고 판정받은 사람들은 그 어떤 내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 되었음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즉 농부의 씨는 극도로 낭비되는 형태로 비취듯이 예수님의 모든 행위도 극도의 낭비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농부의 태도는 소위 천국의 비밀을 이미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지혜를 황당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즉 씨는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밭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기존의 모든 진리적 가치조차 빼앗아버리는 역할을 하는 희생적 씨가 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복음의 씨를 무시하며 간직하지도 않으면서 많이 가졌다고 여기는 이 세상은 곧 마귀의 유혹과 고난의 유혹과 재리의 유혹으로 뒤덮인 세상이며 그런 것들의 가치는 있으나마나 하는 가치들이다. 과연 천국의 농사일은 이런 세상의 속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로 돌아온다. 특별히 시험성 씨앗 뿌리기를 통해서 얻은 진 것은 옥토가 누구인가가 밝혀졌다는데 있다는 점이다.

복음의 씨와 밭의 대비에서 이 세상의 속성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복음의 가치를 더욱 가치 있는 보이는 그런 복된 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무모한 낭비처럼 보이겠지만 바로 이런 자를 가려내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7)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에 허락된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분류하기 위한 작업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뒤섞이지 않게, 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게 예수님은 일하셨다. 바로 이 작업이 기준이 되면서 새로운 인간상과 죄관이 정립된다. 즉 성령님의 은혜로 새로 피조물 된 자와 여전히 인간 행위에 의미를 둔 구원의 틀을 지니고 있는 자 사이의 구분이다. 마치 바다에 그물을 치고 각종 고기를 모으는 어부의 비유와 같다. 결국에는 의인과 악인은 가려지게 되어 있다. 이 의인과 악인의 가려짐은 새것과 옛것을 가르는 그 동일한 기준에 의해서만 모두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마 13:51-53) 그렇다면 이런 내용이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 어떤 논리로 전달되는가?

7. 성령에 의한 등장되는 교회

사도 바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핍박당하는 자’로서의 예수님이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 즉 십자가 사건의 지속성을 배경으로 한 계시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의 십자가 사건 해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義)문제로 야기된 사건으로 풀이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 이유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긴 의 때문에 자기 의가 정죄 당해야 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될 현실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십자가 앞에서, 인간 행함에 준한 의 생산은 그 어떠한 경우에서 성사되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 스스로 세상에 만든 재판장에 서시면서 확실히 해주신 사건이다. 인간의 모든 시도는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끌어당겨서 예수님의 죽음에서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전부 다 죄인이기에 심판 날에 저주의 대상일 뿐이다 는 것이다.(롬 3:9-20)

그런데 교회의 생성이 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에서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란 곧 말씀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정죄하는 그 작업의 반복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예수님 한 개인을 지목해서 사형을 집행했지만 정작 살해당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숨겨진 계시 비밀의 확대로 활용하신다. 이렇게 되면 인간 세상은 진리 수립의 탈락이 되고 박탈당한다. 비록 인간들이 스스로 타락했다고 신 앞에서 공손해하지만 그것으로 탈락 당하는 조치를 대신하거나 무마시킬 수는 없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진행해야 될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는 의사를 드러내신 것이다. 곧 예수님 재판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과 밖으로 구분지어 대결구조를 이어가시려는 것이다. 이 추진책의 일환으로 세상도 나름대로 ‘자기 구도’를 세워나가면서 하던 대로 본색을 발산을 이어가게 된다. 그 작업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 만들기’이다. 평소에 인간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진리를 유발할 수 있는 자격자라로 자부한다. 진리가 우선적으로 수립될 때, 그 진리의 터전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나 원만한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인간들은 십자가 사건을 최초 사건으로 간주해서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을 반복해내는 작업을 공동체 내부에 들여놓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자기 단체에 은혜와 복을 내리지 아니하면 안 되도록 거룩한 것(성사聖事)을 지도자의 주도 하에 실시한다. 개신교에서는 세례식과 성만찬으로 축소되었고, 천주교는 역사적으로 늘 해오던 대로, 혼배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임직성사, 종부성사가 추가적으로 행해진다. 여기에 필요한 인물선정과 세칙과 규칙들이 쌓여 교회법이나 노회법을 형성한다. 이로서 교회는 주체적 존재자로 행세하게 된다.

교회가 집단 주체자로서 행세하게 되면 진리냐 진리 아니냐의 판단은 내부에서 결정하게 되며 이 결정에서 그동안 얽혀있는 모든 역사적 의미가 새삼스럽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즉 최초 사건, 곧 십자가 사건과 그 이후의 인간들이나 인간집단이 주체가 되어서 유발시킨 사건의 관련성이 과연 합당하게 연속되느냐 하는 문제가 관심을 끌게 된다. 쉽게 말해 예를 들면 이런 주장들이다. “천주교는 초대교회 정신 노선에서 이탈되었기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고, 우리 개신교는 참된 복음의 전수자로서 제 노선을 되찾았으니 우리만이 정통적으로 진리를 함유하고 있는 단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로 인간 세상에서 끊임없이 주장되고 제기되는 이러한 후유증을 이미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그 당시 유대교의 속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최초 사건인 십자가 사건으로 흡수되고, 복음 전파를 통해 이 사실이 세상 끝날 까지 되풀이 될 것임을 천명하셨다. 그리고 이 작업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부터 핍박당한 인물로 전면에 내세우신다. 사도 바울에게 다메섹에서 그러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 전체에서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돌로 인해 깨어져야 할 것을 출생하면서부터 지니고 있었다.

십자가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이해되게끔 들이미시는 분은 다름 아닌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이러한 시도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그 취지를 본격화시키는 작업이다. 성령님께서는 십자가를 걷어치우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것을 십자가 사건화 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계신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을 상대로 구원을 거래한 시절은 십자가 사건으로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재주와 능력으로 구원될 수 있는 여지는 날아갔다. 구원되고 아니 되고는 십자가 사건 앞으로 포획되느냐 아니 되느냐를 결단난다.

교회의 나타남은 예수님께서 기존의 교회를 늘 파괴하면서 그 파괴의 현장을 통해서 늘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만 새롭게 등장시키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사건이란 ‘역사’가 진리처럼 행세하는 상황에는 속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 포함되지만, 그 포함되는 것이 전체 상황을 늘 뒤엎어버리신다. 이는 곧 어느 인간도, 어느 단체도 십자가 사건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동일성 안에서 사적인 동일성은 용납되지 못한다. 사적 존재에서 유발되는 인식론으로 그리스도를 내내 포착하기를 시도한다면 이는, 시간이 십자가 사건 용도로 동원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역사의 찬란함이나 내 교회의 역사를 빛내기 위하여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가 자체적 ‘동일성’을 지닌 존재로 행세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 몸’은 인간이 더 이상 주체적인 주도권을 행사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Ⅲ. 결 론

언제가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예수님은 인간의 일이 이미 악마의 일임을 익히 아시고 이런 당부를 하신 것이다.(마 16:23) 성령으로 보는 세상은 이처럼 다르다.

육으로 보는 세상은 인간이 세상 중심에 있다고 보고 모든 학문적 진리와 의미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라야 유용하다고 믿고 있다. 거기에 비해 영적 인간이 보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중심이 서 있다. 진리란 바로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분의 능력의 웅대함과 깊이를 알도록 성령께서 일하신다고 믿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점을 익히 아는 사도 바울의 운명은 곧 십자가에 참예하는 삶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는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을 성령의 은혜로서 아는 자이기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한 참 인간임을 드러내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이런 고백은 그의 안에서 있는 십자가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8-29) 성령을 받았기에 육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자만이 고난으로서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참고 문헌

이정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한길사, 2008

이진경, 『수학의 몽상』, 푸른숲, 2000

Alain Badiou, 김정태 역, 『들뢰즈-존재의 함성』,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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