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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06:15:21 조회 : 3731         
육과 혼과 영에 대해서-워치만 니의 문제점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육과 혼과 영에 대해서

(워치만 리 신학의 허점)

Ⅰ. 서론

1. 정죄와 칭의의 관계

칭의의 반대말이 정죄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정죄가 무엇이냐를 통해서 칭의를 생각하면서 인간은 육, 혼, 영의 3분설, ( 혹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2분설)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정죄라는 것이 너 한번 행세해 보고 나쁜 짓하면 정죄한다는 정죄가 아닙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다고 해서 계속 나쁜 짓해야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을 때, 그 죄에 합류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 뒤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지어야 합니까? 간음죄, 도적질 다 실제로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평생의 일이 죄지을 될 수 있는 한 다 경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이유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한 다 의로운 일에 나서야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죄인이 돼버렸어. 정죄함이 돼버렸어요. 죄 안 짓더라도 죄 아래 있는 거예요. 죄 아래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이때에 만약에 인간이 3분설이나 2분설로 구성되어 있다면 죄가 들어 왔을 때 예수님의 육과 혼과 영 가운데서 (혹은 예수님의 지식, 감정, 의지) 가운데 어느 부분에 죄가 침투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영은 안 들어가고 혼과 육만 들어가면 그것도 문제가 돼요. 삼분설에서 세상에 온전히 죄인 돼야지 영은 빠지고 혼과 육만 죄인 되는 그런 수는 없습니다.

보통 보수주의적 조직신학자 벌콥에서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혼은 온전한데 육이 문제가 돼서 배고프고 눈물 흘려서 하나님답지 못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영과 혼에서 두 가지 빠지는 게 돼요. 빠지면 아예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누지 말아야 됩니다.

Ⅱ. 본론

1. 2분설이나 3분설 주장의 의도

인간론에 대해서 사실은 복음에서 인간론 문제를 조사하기 전에 실제는 사람들이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또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심리학이라든지 인간론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려는 그러한 경향이 많습니다. 납득을 시키려고 설득을 하려고 애쓰고 합니다.

설득 정도가 아니고 기본적인 원리가 개혁주의라든지 이런 원리가 뭐냐 하면,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한번 적어볼게요.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달성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마무리진다’. 십자가라는 힌트를 준 것은 하나님이지만 십자가부터 마지막에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내가 마무리 지운다. 하는 그러한 성향들이 교인들도 갖고 있고 목사들도 갖고 있어요. 개혁주의 자체가 이걸 부정을 안 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로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쪽이기 때문에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할 때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나’가 주인공이 되겠지요. ‘한다’라는 동사를 이거는 주체도 누가 되겠습니까? ‘내가’죠. 내가 나에게 뭘 가미해서 그래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된다. 그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이래 주장하면 안 되니까 성경적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위배된다는 그런 공격을 받을 테니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이 주의,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마무리 지운다는 이 주의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여기 나하고, 성경 속에 있는 나하고 일치를 시켜야 되겠지요. 그럴 때 자기가 하는 행동은 정당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쪽에 흔히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몸과 혼과 영에서 몸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이것이 업그레이드 하는데 내 마음가짐이 결정적 역할 한다는 거예요. 여기 ‘마음’이 추가되죠. 몸과 혼과 영인데 몸의 거듭남, 혼의 거듭남, 영의 거듭남에서 영이 거듭나야 구원받으니까 여기 이런 일련의 절차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마음, 누구 마음? 내 마음이 결정적인 그러한 작용을 하니까 내 마음이 좋은 마음 같으면 이것이 수월하고, 내 마음이 나쁜 마음 같으면 이 작업이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이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음가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거야 쉽지. 성경에 나와 있는 영적 사람, 사도들이 이야기했던 성도의 마음가짐을 동일하게 일치시키면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도 성경에 나오는 영적 생활의 행동도 일치할 것이고. 그러면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에 나는 성공할 수 있다, 성사시킬 수 있다. 이런 논리에 도달되겠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강의를 시작해서 방금까지 이야기한 것, 여기에서 벗어나는 설교 있습니까? 여기서 벗어나는 개혁주의적 강의 들어본 적 있습니까? 뭐, 종말에 대해서 논하고 뭘 논해도 그 밑바닥에는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결국 이거다 말이죠. 종말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고 구름 타고 오시고 이렇게 할 때 끝나고 난 뒤에 뭐라고 질문해요? 그럼 나는 어떻게 합니까? 꼭 ‘나’가 등장하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그럼 내 마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이래 되잖아요.

그러니까 종말론을 하면서 결국은 강사도 그것을 염두에 고려해서 강의 중에 뭐냐 하면,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꽃들을 위하여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되고, 항상 깨어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오실 때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은 예수님 몫이고, 그 다음 누구 몫은 여전히 남아 있느냐 하면, 내가 안 깨어있으면 내 구원은 실패로 끝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든 뭘 타고 오시든 간에 요점은 뭐냐? 내 구원받는 그 결정적 역할 하는 건 뭐냐? 내가 깨어 있느냐, 그때 오실 때 주무시느냐? 아니면 깰 때 기름 준비를 갖추고 있느냐, 안 그러면 기름을 준비 못하고 있느냐? 그 문제 아닙니까? 결국 누구 문제에요? 결국 내 문제로 귀결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인간들이 만든 인간론을 ‘바울의 심리학’이라고 래드는 붙이고 있습니다. 바울 심리학이든 어떻든 간에 정말 실감나는 것은 결국 심리학 여기에 모든 초점이 모아지게 되는 것이 인간들의 종교성 같아요. 모든 것이. 앞에서 세례요한이 어떻고, 뒤에서 베드로전서 나오고, 요한계시록 나오더라도 그 한 가운데 있는 이 바울 심리학, 관심을 여기다 두는 것 같습니다.

이걸 쭉 읽어보시면 나오지만 여기 나오는 용어들, 뭐 사르크스라든지, 프뉴마, 네페쉬 여러 가지 상당히 깊이 있게 들리는 용어들, 소마, 몸, 혼, 영 이런 전체적인 것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을 탐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 갖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바울심리학이란 이런 책장을 통해서 우리는 내용을 다 훑어봐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다 읽어보셨겠지만 바울이 말하는 인간론에 있어서 래드가 이걸 쓰면서 뭔가 의식한 게 있습니다. 그건 뭘 의식하느냐 하면, 이원론과 삼원론을 대결하는 그런 투로 이 전체 내용을 썼습니다. 이분설과 삼분설, 전체를 래드는 대결하는데 그 대결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조직신학적인 그러한 안목이고, 나 래드는 성경신학자기 때문에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가 중요하지, 조직신학의 교회의 권세가 교회의 전통이 그동안 뭐라고 강요하느냐? 그 강요에 나는 기죽지 않겠다는 그런 오기 같은 게 살아있어요.

성경신학자들은 기존의 교회사에서 내려온 조직신학이라는 엄청난 파워, 권력에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순수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 자체가 뭘 이야기하는지 그것이 성경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심 같은 거죠. 자존심이라 하는 것은 차이가 나야 자존심 아닙니까? 조직신학하고 똑같으면 자존심 안 생기잖아요. 너희들은 이렇게 하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게 딱 자리 잡을 때 자존심 생기잖아요.

그래서 래드는 단단히 별렀습니다. 조직신학 같은 무식한 학자 한번 당해봐라. 교리만 해서 사람들 겁주던 조직신학자들아 한번 당해봐라. 성경에 정통한 나한테 당해봐라. 라는 식으로 별렀어요. 이분설, 삼분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쪼개서 보는 관점은 성경에는 사도바울에겐 그런 게 없다. 혼과 육, 영이란 용어를 표현했어도 그런 게 없고, 이것은 인간을 전체를 놓고서 전체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다양성이죠.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다양성을 가지고 마치 그걸 움직이지 않는 아주 고정된 조각된 것 같은 인간을 놓고 거기다가. 하나님은 바람처럼 통풍하듯이 바람이 불듯이 인간을 두고 바람 불 듯 휘몰아 드는데 조직신학자들은 인간 하나를 강하게 꽂아놓고 그걸 내부적으로 탐색하고 분석해서 이걸 억지로 성경의 역동적이고 유동적이고 움직이고 있는 이 성경 용어를 일방적으로 오해해서 적용시켰다. 그런 투로 반박을 하지요.

이런 반박을 하면서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를 따집니다. 삼분설은 오리겐에서 나온 헬라철학이지만 이분설은 바로 우리 어거스틴에 입장한 진짜 복음적이다. 라고 주장해왔다. 그동안 조직신학자들이 교회에서. 이분설은 정당하고 삼분설은 이방종교적이고. 그런 식으로 했는데 지금 래드는 이분설, 삼분설 다 나가라 이 말이죠. 어데 거짓말하고 있노. 이분설, 삼분설 인간을 쪼개본다는 자체가 이거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강하게 래드는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반발하고 있으면 래드의 성경신학자에 대해서 조직신학자들이 가만있지 않거든요. 누구는 성경 모르나. 이래서 대들거다는 말이죠. 네가 그렇게 하는 근거가 도대체 뭐냐?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냐, 안 그러면 성경에서 정말 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을 분석해서 인간을 부분적으로 쪼개서 영의 부분, 육의 부분, 혼의 부분 그런 게 아예 없다고 네가 주장하는데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그 근거가 어디냐?

이렇게 할 때 래드는 근거를 구약과 신약의 관계 속에서 이룹니다. 신약의 모든 용어들은 구약의 노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구약에서 인간을 어떻게 봤느냐가 그대로 구체화 된 것이 신약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뭐라고 봤는가는 그걸 생각 안 하고, 신약에서 자기가 생각했던 들었던 것 하고 매치를 시키려고 억지를 부리면 그건 안 되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래드의 바울 심리학은 제일 먼저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구약에서 인간을 어떻게 봤느냐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의 모든 신약의 그러한 삼분설, 이분설을 처분하고 성경 전체를 사도바울은 인간 전체의 다양한 면,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증거된 말씀과 인간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를 육과 영과 혼으로 이렇게 묘사했다. 라고 래드가 주장하는데 그 근거를 구약에서 찾아야 된다. 그걸 가지고 무슨 사고방식? 이걸 가지고 헬라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대로 히브리적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근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이러한 비복음적이고 종교적이죠. 종교적인 인간의 구원받고자 하는 자기 욕망, 이것이 히브리적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해결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나는 헬라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내 마음 속에는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는 일체 없다. 이것이 완전히 그러한 의혹이 다 해소가 되겠느냐 하는 문젭니다.

그렇다면 제가 래드에 대해서 반대하고 싶은 부분이 무척 많은데 반대하고 싶은 부분이 무척 많더라도 우선 래드가 기존에 조직신학과 반대한 자기주장이 있잖아요. 그걸 전부 충실히 우리가 다 인지하고 충분히 알고 난 뒤에 그리고 난 뒤에 우리가 복음 쪽에서 십자가의 복음적으로 볼 때 래드의 문제점이 뭐냐? 이래야 순서 맞지 싶어요.

그래서 우선 첫 번째 구약에서 인간을 어떻게 봤느냐하는 겁니다. 바울 심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배경 나오고, 옛날 책으로 나가니까 참고해 주세요. 바울 심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거기 뭐라고 돼있습니까? 거기도 인간론입니까? (바울의 인간론) 심리학 떼버렸네요.

[인간에 대한 헬라와 유대의 개념 중에서 중요한 요소를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 후세에 그리스 철학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가 중에 하나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이원론 주장한다 했잖아요. 플라톤이 이원론을 주장했는데 중간에 보면 유대인은 뭐하고 다르냐? 그리스 인간관하고는 매우 다르다고 돼있거든요. 페이지 중간에. 유다의 인간과는 매우 다르다.

여기서 여러분 하나의 의문점이 들지 않습니까? 보세요. 유대인이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죠. 헬라인은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죠. 어떻게 같은 인간에서 서로 상충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상충되는 다른 것은 뭡니까? 다른 것은 미처 못 나온 것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인데 다른 것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반대가 되는 게 나올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동일하게 공통점이 뭡니까? 인간이죠. 이 인간은 아담의 속성인데.

지금 사도바울은 유대인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 편을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 편을 듭니까? 어느 편을 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무엇이냐? 여기에 초점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헬라적 사고방식, 유대적 사고방식 둘 다 누구한테 공박 당해야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인간론한테 공박을 당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래드의 출발점이 뭐냐 하면, 유대는 옳고, 헬라는 틀렸다 이래 시작한다 말이죠. 약간 수상한 기미가 보이지요.

2. 복음에서의 육과 혼과 영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인간을 어떻게 봤는가? 여기에 육신이라 하는 것. 육신 또는 네페쉬라 돼있어요. 여기 네페쉬와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사르라 이래 돼있어요. 바사르라 해서 육체를 다루기 위해서 많이 사용되었고, 23번. 네페쉬라는 것은 영혼이라 돼있는데 이것이 플라톤처럼 ‘바사르+네페쉬=인간’ 이거는 구약에 그런 거는 없다 이 말이죠.

바사르는 뭐냐 하면, 무한한 하나님과 구별하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덧없음. 그러니까 바사르는 몸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뭘 앞에 붙여야 된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연약한 몸’ 또는 하나 더 붙인다면 ‘부서질 그 무엇’, ‘부셔지는 것’. 이건 자꾸 몸이라고 하니까 ‘부셔지는 몸’ 하면 사람들은 부셔지는데 관점이 없고 어디에 치우치느냐 하면, 또 몸에 관심 있으니까 아예 몸이라는 걸 빼버리고 ‘것’으로 해버리면 부셔질 것, 이게 빠사질 것, 그것이 바사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냐 하면, 네페쉬는 안 빠사지는 것. 전도서에 나오죠.(전 3:18-21) 모든 육체는 빠사져도 신은 도로 하나님께 가지요. 이것은 둘이 결합됐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하나님과 견주어볼 때는 빠사져야 되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의미에서는 절대로 안 빠사지고. 종속된다 이 말입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두 가지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 인간의 존재를 둘로 쪼갠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분설이고 삼분설이고 쪼갠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에 또 한 가지 뭐냐 하면, 루아, 영. 루아는 뭐냐 하면, 바람이죠. 권능입니다. 바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중에 휙휙 감아 도는 거예요.

이번에 U.S 여자 오픈 골프대회에서 박인비가 시속 32킬로의 강풍 가운데서도 드디어 4타차 선두를 했지요. 골프공 칠 때 뭐가 휙휙 돕니까? 바람이 돌지요. 그러면 다른 선수들은 자기가 예측한 대로 안 가는 거예요. 엉뚱한데 빠지는 거예요. 오초아도 엉뚱한데 빠져서 42등인가 전부 다 오바 파 했는데. 박인비는 운이 좋은지 실력이 좋은지 힘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바람을 예측해서 정확하게 언더파를 유지해서 우승을 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골프공이 인간이라면 그러면 시속 32킬로로 날아가는 골프공은 뭡니까? 루아죠. 그런데 시속 32킬로 돌풍이 할 때 돌풍이 그때 골프 칠 때 말고 태평양에 돌풍 불 때 뉴스 나옵니까? 잘 들어보세요. 태평양 아무도 안 사는 곳 돌풍 부는 것 그게 신문에 나오느냐 말이죠. 안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루아라는 것은 인간 없어도 루아에요.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람이고 기운이다. 그 장소를 누굴 가지고 묘사하느냐 말이죠. 바로 인간을 가지고 묘사한다 이 말이죠. 인간 없는데도 루아에요. 인간 없어도 개, 돼지도 하나님 기운이 있습니다. 해가 뜨고 달뜨는 것도 하나님 기운으로 떠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루아라는 하나님께서 바람이고 처음부터 인간에게 그 바람을 집어넣어서 모든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태평양 한 가운데서 하는 게 아니고 어디서 한다? 인간을 가지고 아담을 가지고 하고, 아담 이후에 자기 택한 백성을 가지고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분이냐를 뭘 통해서 이야기한다? 인간 없이는 표현이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또는 네가 바람이 임의로 불 때 그걸 모르느냐? 할 때에 육으로 난 건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할 때 그걸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혼잣말로 이야기했습니까? 누구 보고 이야기했어요? 니고데모 보고 이야기했잖아요. 그 니고데모가 무슨 역할 해야 돼요? 영과 대비되는 육의 위치에 있을 때 영은 영답게 영으로써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일과 기능을 보여주는 소모품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고, 그럼 난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겠네. 참.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은혜가 지가 소유하는 걸로 챙기려 해. 여전히 자기가 내가 내 구원, 이것을 세상에 하나님 영 앞에서도 이걸 고집,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참 골치 아프죠. 이렇게 되면. 복음 전하는 목사들이 제일 골치 아픈 게 뭡니까? 복음을 전했는데 이 복음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느껴야 될 텐데 복음을 지가 소유하려고 해. 복음에 소유 당해야 되는데. 지가 루아라. 지가 네페쉬고, 지가 바사르고 다 돼버려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들도 육과 영과 혼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맨 날 당신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식이란 말이죠. 그 소리 안 해도 지금 귀한 줄 아는데 지가 지금 귀하다고 교태부리고 있는데. 아예 복음을 가지고 빠사야 되는데.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느냐 하면, 바사르하고 네페쉬하고 영하고 이게 인간 밖에서 주님의 기능에서 모순이 없는데 이게 인간 내부에서는 모순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순서를 정해버려요. 목사님, 저는 바사르 됐는데 네페쉬 됐고, 이젠 루아 됐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네페쉬를 이겨버리는 거예요. 십자가는 지났고요 저는 부활 남았습니다. 맨 날 이런 식이라.

내 구원은 내가 달성한다. 자기를 주목하는 것, 마귀의 역사입니다. 제가 주일날 아침에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요한계시록 4장에서 24장로들이 있고 네 영들이 있고 보좌 있을 때 어디서 거기서 지 생각합니까? 난 과거에 어느 대학 나왔고, 내가 재수 세 번했고, 교도소 열두 번 왔다 갔다 한 그게 천국 앞에서 그 생각 왜 해요.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기껏 생각한다는 게 면류관 벗어서 속히 반납하는 것, 그 생각뿐이에요. 나는 내 몸이 더럽나, 그 생각 할 수가 없어요. 그 생각 안 하니까 세상에 어떤 휘발유 값 올라도 무서워 안 하죠. 무서움이 없죠. 자기한테 집착하면 무서움이 찾아오게 돼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인간의 아픈 데를 공략하는 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사실은 인간은 아픈데 있으나마나 지가 신경 쓸 것 없는데 아프기 때문에 아프다고 한 순간 마귀는 와서 아프지? 많이 아프지? 하고 위로 하듯이 찾아오는 거예요. 아파도 그만, 안 아파도 그만. 사실 인간에게는 웃을 일도 없고, 울 일도 없고 그저 감격할 일만 있는데 사람은. 석가모니가 맨 날 생로병사라. 생로병사해서 뭐 할 건데. 태어나서 죽고 아프고 병들고 늙고 그게 뭐 했다고. 그게 전부다 루아인데. 그게 바사르는 빠사져야 돼요. 이게 안 빠사지는 게 이상해.

하나님이 자기 일 하는데 내가 왜 뒤늦게 나와 간섭합니까? 콩 내놔라, 팥 내놔라. 주여, 일 그래 하면 안 됩니다. 지가 뭔데 간섭하고 난리입니까? 삼분설이니, 이분설이니.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다루느냐? 네페쉬로 다루느냐, 루아로 다루느냐, 바사르로 다루느냐?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기능과 인간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인간론입니다. 만남이에요, 만남.

이번 잠언, 십자가마을 주제도 ‘만남’이에요. 잠언의 주제가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을 설명해주셨어요. 예수님 혼자 산 위에서 육은 육이고, 안 그랬습니다. 이미 육은 육 맞아요. 아무도 없더라도. 하지만 그걸 일러주고 찔러주는 것.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것도 인간이 아니고 자기백성에게. 맨 날 배워도

이러한 구약의 인간론이 기초가 단단해져야 비로소 신약에서 용어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이 여기서 일찍 감치 해결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루아는 부분적으로 네페쉬와 일치한다. 어디 속에서 일치할까요? 인간 내부에서 일치하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바깥의 루아가 인간 내부에 들어오면 네페쉬가 될 수 있느냐? 네페쉬라고 볼 수 있느냐?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다만 차이를 둔다면 루아는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인간을 가리키는 반에서 네페쉬는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다가오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것이 드러나지도 않아요. 여기서 네페쉬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네페쉬라 하는 것은 바로 영혼, 구약에서 말하는 영혼, 구약입니다. 신약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했지만 번역했을 뿐입니다. 여기 네페쉬라 하는 것은 바이탈리즘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인간의 생명력이라 표현해 놨어요. 여기는 번역을 생명력이라 해서 네페쉬는 영혼.

영혼은 뭐냐 하면 육체부분 빼놓고 나머지 부분이 아니고, 인간의 바사르를 쥐고 흔드는 쥐고 살게 하는, 생명력이라 하지 말고 살게 하는, 살게 하는 힘이죠. 그렇다면 구약에서 이 네페쉬, 영혼, 이 개념만 잘 알아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요. 욥기에 나오잖아요. 저 말이 당당한 앞발을 휘저으면서 갈기를 휘갈기면서 달리는 저 말을 누가 달리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게 네페쉬에요. 그런데 말은 하나님께서 네페쉬를 보여주는데 왜 인간은 말과 똑같이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살면서 왜 너희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말이죠.

하나 빠졌다 하는 게 뭐냐 하면, 프쉬케 와 프뉴마가 만나서 어떻게 자아가 되느냐? 그 과정을 제가 설명을 안 드린 거 같아요. 인간은 자아는 자기 몸을 대변하기 때문에 프뉴마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인간이 뭘 대변하고 있는가? 아담의 몸 그걸 대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그 몸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그래야 성자께서 마리아 몸에서 육체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있잖아요. 그 과정을 제가 설명 안 했거든요. 아까 한 거는 있지만 그 과정, 어떻게 프뉴마가 자아를 발견하느냐? 그런 과정을 구약의 영 있잖아요. 영이 활동하는 걸 가만 보면 제가 방금 약속대로 했다. 그 말이 맞아요. 약속대로 한 건 맞는데 사울이나 다윗에 찾아가는 그 신이 임하고 할 때 보면, 항상 사울이 활동할 때 언제 하나님께 대들고 까부느냐 하면, 꼭 그 원천이 자아를 바탕으로 꼬부칠 때(챙길 때), 딱 내세울 때 그때 반드시 신이 떠나버리고 악신이 임하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해석을 사울이라는 사람이 죄 지었으니까 신이 떠나는구나. 이래 되는데 그러나 그걸 그 반대방향으로 루아흐의 목적이 아까 의지, 절대로 악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데 보여주는 게 뭐냐? 원천이 사울이 꼭 자아를 고집하는 할 때에요. 이거는 심지어 다윗도 마찬가지죠. 다윗이 언제 밧세바를 간음하고 하느냐 하면, 꼭 자아를 내세울 때에요.

그래서 그걸 보고 아하, 프쉬케와 프뉴마의 만남은 우리의 가장 약점인 자아를 공박해서 들어와서 그 자아는 우리의 몸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반격해 나가는, 그 몸은 사실은 소마가 아니고 사르크스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입어서 죄인으로 오셔서 통째로 몸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게 지적해야 논리상 맞지 싶어요.

다시 한 번 하면, 어떻게 프뉴마가 오는데 자아가 형성되는가? 형성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그게 형성되는가? 자아라 하는 건 없거든요. 소마가 있지 구약에 자아는 없습니다. 구약에 자아라 하는 것은 바사르거든요. 자아라 하는 게 따로 없는데 어떻게 자아가 구성되는가? 예수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인간의 악마성을 지적하기 위해서 자아의 경향성, 그걸 앞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자아를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면서 다가오는 겁니다.

신약에서도 네페쉬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프쉬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말로 하면 목숨, 혹은 영혼이 됩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를 살게 하시는 힘을 두고 말합니다. 선인과 악인에게도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퍼부어주셔서 살게 합니다. 만물이 다 이 네페쉬의 힘으로 삽니다. 소나 말이나 개나 돼지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루아, 즉 영이라는 것은 뭡니까? 영이라는 것은 네페쉬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래드는 말합니다. 옳습니다. 루아도 네페쉬와 같이 사람을 살게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네페쉬는 인간에게 찾아오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인간을 다룰 때 작용하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즉 그냥 인간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완성된 약속, 혹은 약속된 분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와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 그것이 루아, 즉 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신약의 성령과 연관성을 가지게 되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인간에 관한 용어들은 결코 인간 자체를 분석하거나 탐구하기 위한 용어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구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바사르, 즉 몸이나 네페쉬, 즉 혼이나 루아, 즉 영은 모두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새로운 그 무엇으로 인하여 인간은 어떤 식으로 이미 완성되어버린 약속을 증거하느냐?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한 또는 하고 있는 그런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신약에 나온 인간에 관한 용어들입니다.

즉 신약에 나오는 소마, 즉 몸을 통하여서 십자가 사건으로 모아져야 하고 프쉬케, 즉 혼 개념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으로 통해야 하고, 퓨뉴마 즉 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의가 설명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복음 발생을 말하지 않는 인간론은 성경적 안목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고수하겠다는 자신만을 절대존재로 품어보겠다는 사단적 악마적인 안목에 불과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서 이것이 나옵니다. 사울도 분명 루아를 받았습니다. 즉 성신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군대를 성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백성들이 외치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나오니 그러한 외침이 루아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작용에서 나온 외침인 줄 모르고 그 성신의 작용 앞에서 그만 자아가 절대적으로 고수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선 악신이 임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처럼 루아, 곧 성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 앞에서 인간이 숨어있는 자기 위주의 반응을 드러내가 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약에 가서는 성령의 활동 앞에서 인간은 자기 본색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악마적 본성을 노출시키는 그러한 작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악마성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며 이로 인해 성신이 기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당당하게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신약의 인간론 용어들을 씹으면 씹을수록 마치 자일리톨 껌을 터뜨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깨물 때마다 팡팡 터져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에 나오는 인간에 관한 표현들, 바사르, 즉 몸이라든지, 네페쉬, 즉 혼이라든지, 루아, 영이라는 표현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결코 인간 자체를 묘사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십자가 복음을 머금은 용어라면 구약은 무엇이겠습니까?

래드의 인간론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이분설, 삼분설을 배척하기 위해 구약의 인간론을 근거를 두고 신약의 바울 인간론을 논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인간론이 그건 어디에 근거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인간론을 다루면서 이미 여기 내가 있다. 그 ‘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있는 존재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인간론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인간론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없음’에서 ‘있음’을 이끌어내신 그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기 위한 인간론입니다.

사라가 있음에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라에게 자식 없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없음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태의 죽음’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렇게 되겠지요. ‘없음’에서 ‘있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요 이 창조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한 용어가 인간에 관한 용어입니다.

그래서 바사르, 즉 몸은 이 땅에 머물 수가 없는 겁니다. 자꾸만 어디론지 흘러가는 겁니다. 바사르를 지닌 자로서 자아를 찾기 위해 많은 학문을 해봤자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공을 잡는 일이 되고, 자아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봤자 그것도 바람, 즉 공기를 잡는 일이 되고, 자아가 얼마나 대단하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무리 선한 일을 해봤자 그것도 바람 잡는 일이라고 전도서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그냥 사라지고 없어져가는 것이 곧 바사르로서의 인간입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 인간은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이 머물지 않는 바사르로서 결국 음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음부에 들어간 입장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하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음부에 머물지 않는 바사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바사르라든지 네페쉬라든지 루아는 모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기 위해 표현된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바사르란 인간도 삶으로써 전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는 겁니다. 결국 구약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론된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를 말하기 위해서 있는 거는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은 온전히 하나님께 도로 드리기 위한 기능과 용도로만 존재할 뿐임을 알았습니다.

루아 같은 경우에, 네페쉬에 동일하게 인간에 작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네페쉬나 루아나 다같이 인간을 살게 하는 힘으로 주어지지만 특별히 루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는 일과 관련돼있습니다. 즉 루아가 작용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만드시고 다루시는 그 본래의 목적이 서서히 밝혀집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이요 언약입니다.

분명 노아나 그 당시에 사람들 모두가 네페쉬, 즉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 햇빛과 공기가 주어지고 단 비가 내려서 그들을 살게 했고 그들의 심장은 한 밤중에서 멈추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다른 이에게 없는 게 특별히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신이 임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창세기 6장 3절에 보니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려서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남은 것은 네페쉬나 바사르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냥 편한대로 사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죄가 되는 겁니까? 노아도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네페쉬, 즉 혼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온통 관심사가 그것뿐이었습니다.

반면에 노아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약속 달성과 관련 돼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더불어 언약을 맺었습니다. 노아의 관심사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노아의 뚝딱거리며 방주를 만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루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루아적으로 봐서 비로소 그들이 바사르, 즉 허무하게 부서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네페쉬, 즉 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전도서 마지막에 그게 나오지요.

하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루아라는 영적 활동 혜택을 입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게 하는 그 모든 원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사실은 오직 루아의 작용으로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 루아가 신약에 와서 프뉴마로 이어집니다. 소위 말해서 성신에서 성령으로 바뀌는 겁니다. 실은 이 용어의 바뀜은 이미 말라기 이후의 유대 묵시문학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래드는 말하기를 이 루아가 신약에 와서는 ‘죽을 몸도 살려내는’ 성령의 기능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래드는 어떻게 해서 ‘죽을 몸도 살려내는 영’인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령이 활동한다는 복음적 안목과 인간론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를 근거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 무엇인가를 성경적 문자로만 수집하겠다, 이걸 결합하겠다.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간론을 쓴 거예요.

마치 구약에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려내는 창조 기능’을 위해 인간에 관한 용어가 등장했듯이 신약에서 오로지 십자가 복음을 말하기 위해 인간론이 등장한 겁니다. 근데 래드는 그걸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오면 ‘몸’의 개념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구약에서는 바사르 하나로 설명했지요. 사라져가고 부서져야 될 몸, 그게 바사르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바사르라는 ‘허무한 몸’이 ‘소마’와 ‘사르크스’로 나누어집니다. 그냥 몸과 그리고 육에 속한 몸, 혹은 육신에 속한 몸. 그냥 몸은 소마고, 육에 속한 몸은 사르크스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네페쉬는 신약에 와서 프쉬케가 됩니다. 목숨, 혹은 혼으로 번역될 수 있지요. 그리고 루아는 프뉴마 곧 영이 됩니다.

이 프뉴마는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어서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약속을 듬뿍 담고 그 약속을 전개하는 영입니다. 그냥 맨 탕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프쉬케일뿐입니다. 그런데 왜 구약의 몸이 신약에 와서 그냥 몸과 ‘죄 있는 몸’으로 둘로 나누어질까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 특히 바울의 인간론에서 ‘자아’ 개념이 형성되게 됩니다. 이 ‘자아 개념’이 없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할 수 없고, 십자가를 제대로 설명 안 되면 왜 사도 바울이 몸과 육신의 몸을 나뉘었는지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다짐을 합니다만, 바울의 인간에 관한 용어들은 결코 인간 자체를 표현한다든지 분석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그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소마라든지 사르크스라든지 프쉬케라든지 퓨뉴마라는 용어를 씹을 때마다 십자가 피 복음만이 톡톡 터져 나와야 됩니다. 인간에 관한 용어는 일종의 피를 머금고 있는 캡슐 같은 겁니다.

자아란 신약에 와서 크게 부각이 됩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자아는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오직 신자에서만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가왔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자기 죄를 전가하였고, 하와는 뱀에게 자기 죄를 전가했습니다. 넘겨주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죄를 예수님이 받아내도록 했지만 말이죠. 이럴 경우에 분명 인간에게는 자아라는 게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평소에 사람들이 프쉬케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존의 은혜로 살 때에 과연 자아를 생각합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사고팔고 할 때 과연 자아를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자아에 대한 분석과 탐구 없이 그냥 목숨을 유지하는 기운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즉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살아있으니 살아가는 대로 살아간다고 답변할 뿐이죠. 자아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지를 않습니다.

편한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몸이 이끄는 대로 살고 200개조의 세포가 아우성치는 대로 사는 겁니다. 배고플 때 밥 먹고 자아에 대해서 생각안합니다. 그저 위가 요구하는 대로 밥으로 채워주면 그만입니다. 잠이 오면 자면 그만이지 ‘왜 나는 잠이 와야만 하는가?’라고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서 구약의 바사르는 ‘부서지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한 순간도 가만있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을 밟아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 있을 때 자아를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영원하다고 보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에서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허무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국은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겁니다.

이처럼 바사르를 제쳐두고 프쉬케나 프뉴마와 찾아들면 자아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바사르는 그냥 해체중이니 고정적인 자아 개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계속 해체중이니까. 그런데 그 자아가 꼭 자아를 규정할 때는 반드시 자기 손에 만져지는 몸을 앞장 세워서 자아를 거명합니다. 여기에 바로 동원되는 것이 ‘소마’입니다. 즉 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무엇이며 어디 있느냐?’ 물으면 꼭 자신의 몸을 가지고 말하죠. ‘자, 여기 이렇게 몸이 있잖아. 이 몸이 누구 것일 줄 알아? 내 것이야. 그러니까 이 몸이 곧 나이고 내가 이 몸이야.’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자아라는 것이 이처럼 이렇게 몸, 소마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은 구약에 의하면 바사르, 즉 ‘헛된 몸’으로만 존재하는 겁니다. ‘여기 나 있다’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다’로서 자신을 말해주어야 하나님이 규정해주신 그 ‘바사르’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인간은 바사르적 인간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마’적인 몸이 여기 있음을 가지고 자아를 대변해주고 자아를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 원인은 바로 프쉬케와 퓨뉴마의 합작된 활약 때문입니다. 즉 종말에 인간은 드디어 자신이 지닌 악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시기에 돌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부셔지는 몸을 가지고 그 ‘부서짐’을 거부하고 안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가지고 자아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렸고 그 십자가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고대했던 약속을 성공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프쉬케+퓨뉴마의 활약 때문에 이런 현상이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인간들의 이러한 자아근성, 그것도 바사르적 몸을 가지고 소마라고 하는 고정된 몸이라고 우기는 그 죄를 그냥 주시하지 않고 ‘문제 있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출현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아가 붙들고 있는 몸은 소마가 아니라 사르크스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즉 인간은 그냥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 된 몸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셔진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그 원인이 없었지요. 신약에서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비로소 원인이 밝혀진 겁니다. 여기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죄악 된 몸을 지닌 것이 아니고, 그냥 죄악 된 몸 자체가 곧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죄악 된 몸을 지닌 것이 아니라 죄악 된 몸 자체가 인간이에요. 하지만 인간들은 죄악 된 몸이 아니라 소마적인 안정적인 몸으로서 자아라고 자기 본인이라고 허구적 개념을 계속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 아래 들어앉아있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짓는 자아적 존재가 아니라 아예 죄에 의해서 허구적 개념인 자아를 고집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 아래 자기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란 통치 아래, 지배 아래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본인들이 이것을 문제 있다고 탐구해봤자 진정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죠.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어두움이란 빛이 찾아들었을 때 비로소 어두움입니다. 빛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어두움이 어두임 줄도 모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앞에서 소경을 앞장 세워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생각하니까 소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인간, 진짜 몸은 프뉴마와 프쉬케 작용에 의해서 이 세상에 출생하시고 사셨던 예수님 아니면 없습니다.

예수님은 프뉴마와 사르크스의 결합입니다. 즉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라는 사르크스와 성령에 의해서 출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소마, 즉 몸을 지녔습니다. 그 몸은 죄 없는 몸이십니다. 하지만 몸소 죄 아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르크스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약에 바사르가 신약에 와서는 소마와 사르크스로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왜 나뉘어져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죄를 지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죄는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모습으로 양상으로 죄가 발각이 되는 겁니다. 사르크스로서의 인간존재는 단순히 흔히 생각하는 나쁜 짓을 지었다가 아니라 메시아에게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기운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게 악의 본질입니다.

프쉬케로 있을 때 프쉬케라 하는 것은 신께서 인간을 살게 하는 그 힘을 말하죠. 그래서 꼭 복음을 모르더라도 나는 절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연의 은혜로 산다. 보이지 않는 어떤 신의 은혜로 산다. 종교가 없더라도 야, 조물주 때문에 내가 산다. 이렇게 자기 은혜를 깨닫고 또는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허무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프뉴마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가는 것이 죄라는 것을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죄인 줄 모르죠.

그 소마와 사르크스와 프쉬케, 프뉴마를 통해서 인간 자신이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지셔야 될 몸으로 오신 겁니다. 따라서 신약에 나오는 인간의 용어라 하는 것은 인간을 규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용어들이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인간 존재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아는 소마, 즉 몸의 실재로 말을 하고, 그 실제로 있는 몸을 자아라고 우기죠. 그 소마, 그 몸의 영원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아를 영원히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십자가를 더욱 욕되게 하는 거죠.

왜냐하면 주님은 그걸 지적하거든요. ‘너는 죄 있는 몸이야.’라고 우겨도 자꾸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는 거예요. 뭐라고 반발하느냐 하면, 나는 신의 은혜를 받고 사는 걸 안다. 그리고 내 인생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고 정말 죽는 걸 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아는 내가 죄인이란 말인가? 라고 자꾸 대들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죄는 죄로써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죽게 하는 그런 죄의 본성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에 그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마라고 보았지 결코 사르크스로 본 것이 아닙니다. 소마적인 자아에는 네페쉬나 루아적인 요소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그렇게 착각한 거죠. 쉽게 말해서 구약에 약속한 대로 루아, 즉 성신이 임하게 되면,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예언한대로 성신이 임한, 즉 루아가 임한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과 거룩을 드리는 자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생각과 같은 겁니다. 옛날엔 죄 때문에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하나님 용서받고 의인되니까 제대로 하나님 말씀 지킨다.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겁니다.

네페쉬로 주신 은혜를 루아적으로 영광 돌리겠다는 그런 계산이었지요. 그래서 자아는 네페쉬와 루아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그들이 주장했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끼어들 필요조차 없이 된 거죠. 바로 이점을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 때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죽었던 것이 바로 이런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이 자기 속에 있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그 죄의 앞잡이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무엇이 죄가 무엇일까요? 바사르식이 아니라 소마식으로 자아를 규정했던 그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물론 분명 소마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페쉬, 곧 프쉬케를 통해서 몸이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은 하나님께서 살게 하는 저 말이나 소나 돼지가 있는 것처럼 프쉬케로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몸도 프쉬케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아라고 규정한 바로 그 인식이 이미 죄의 지배 아래 있기에 그러한 몸을 자기를 대신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소마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사르크스, 죄 있는 몸이 인간을 대신한다. 이래 바울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렇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소마적인 자아를 고수하기에 진정 네페쉬와 루아로 오신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공격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이 사르크스, 즉 죄악 된 육신의 죄 됨을 보여주는 방식이죠.

예수님은 프쉬케로서 루아 아래서 소마로 오셨습니다. 소마는 프쉬케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마, 몸은 어디까지나 프뉴마, 즉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구약의 인간론에서 루아가 약속과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소마, 몸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소마를 통해 자아라는 허구적 개념을 유지하기 위한 소마죠. 하나님 뜻이 아니고 자기 몸, 갖고 있는 몸 자체를 계속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신께서 자기 은혜를 줬다고 이래 보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겁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깨어계셨지만 제자들은 자기 몸 편한 대로 살다보니까 그 시간에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프쉬케→퓨뉴마→소마→사르크스’ 이런 일련의 절차를 그대로 밟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죄의 본질이 들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질이 들추어지게 되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피가 왜 하나님께 유일하게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완성이 되는가도 드러나죠.

요한복음 10:16에서 예수님은, 자진해서 소마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누가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자신의 몸을 죽음에 넘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맡기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그 절차를 다 밟게 되면 바로 거룩한 소마, 하늘에 속한 영적 몸이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겁니다.

천사가 그렇게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위함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귀하신 몸을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흙에 속한 소마,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소마, 하늘에 속한 몸으로 완전히 정립시켰습니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 자아란 자기 몸을 제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런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아입니다. 즉 더 이상 자기 몸이 아닌 자기 몸으로서는 자아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프뉴마가 기대했던 성령이 기대했던 그 약속 완성이 예수님의 소마, 예수님의 몸으로 인해 완성되었습니다. 그 완성의 결실물이 바로 성도의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이제 성도의 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즉 프쉬케는 전부 십자가 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많은 인간 중에서 집 앞에 놔둔 쓰레기를 쓰레기차가 몰래 와서 회수하듯이 거두어 가셔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변에서 무슨 촛불집회가 일어나든지 말든지 간에 기름 값이 치솟든지 말든지 간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피의 은혜를 찬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소마’로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에베소서 1:6-7에 보면,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래드는 십자가 피 중심의 인간론을 펼치지 못하고 인간 중심의 구원론을 펼쳐놓으니까 ‘육에 속한 자’와 ‘육신의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구분을 자신의 성실함으로 구분 지어놓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자기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육에 속한 자에서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에서 영에 속한 자, 이렇게 이전한다고 본 거예요.

물론 육에 속한 자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 성실함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서 된다고 래드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단지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성된다. 그렇게 봤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화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죠.

그러나 십자가 복음으로 보면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날마다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프뉴마에 의해서 곧 성령에 의해 날마다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 사실은 이게 즐거움과 행복이죠.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나옵니다.

‘우리’라는 자아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려내시는 프쉬케+프뉴마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광을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현재 활동하고 계심의 공로로 돌려야 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우리의 면류관을 예수님 발 앞에 반납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현재 남아 있는 몸은 바사르가 되어야 됩니다. 즉 옛 사람은 후패해야 됩니다. 그래야 새 몸, 새 소망을 입게 됩니다.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 말씀이죠. 왜 그래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산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입니다.

Ⅲ. 결론

인간은 자신의 몸에서 자아 이미지를 유발됩니다. 몸과 자아라는 이미지 사이를 자신의 행함과 노력이 매개가 되어 결합시키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아가 나서야 자기 몸을 온전히 관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즉 자아는 몸을 하나의 대상체로 간주하여 제대로 관리해서 그 자기 몸을 천국에 까지 끼어들어가게 만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구원’이지만 실은 ‘궁극적 자아실현 작업’ 또는 ‘자신을 신(神)으로 변신시켜보면 상상적 작업)

자아는 자기 몸을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기고, 활동적인 면에서 (자유)의지와 감정과 이성(理性)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작 본인이 기대하는 자아는 그 순수성(순수한 육, 순수한 혼, 순수한 영, 혹은 순수한 의지, 순수한 감정, 순수한 이성)을 따로 상정하고서 현실적으로 오염된 육과 혼과 영을 따로 분리하게 됩니다.

즉 ‘죄 짓지 않는 자아상’ 과 ‘죄 지은 후의 더럽혀진 자아상’을 본인(자아)가 따로 분류시킨 가상상태 가능하게 되면 그 나머지 작업은 어떻게 하든지 오염된 자아상을 순수한 자아상이 수시로 관리하고 절제하고 개선시켜서 그 오염된 면을 제거하는 작업에 나서게 되면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성도에 부합된 거룩한 자아상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여기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자아의 세척 작업에 성령께서 능력이 부여되어서 성사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워치만 니만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아니라 모든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거룩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할 때 인간이 내놓을 있는 최선의 처신과 방안은 이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하지만 바로 이런 인간들의 보편적 현상이 곧 복음에서 말하는 육된 죄성입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자신을 ‘상한 심령’으로 십자가 앞에 나서기를 거절해서 어느 순간부터 십자가의 절대적 지적을 자기 인생사에서 떼 내어서 자기 자체로서 순수 거룩체로 유지하려는 악마는 본성을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란 딴 게 아니라, 독자적인 존재로 영구히 고착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로서 거룩 유지가 가능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그 완성됨에 만족하겠다”는 본성을 인간은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하나님, 저의 본 뜻과 달리, 저의 의지를 잘못 놀리고, 저의 입술과 저의 생각과 저의 행동을 잘못 놀려서 악마의 꾐에 빠져 주님의 영광을 가리웠으니 앞으로서 제가 제 의지와 감정과 이성을 잘 관리해서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거룩한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저에게 아직도 이러한 의도가 살았다는 것 자체가 제가 온전한 영적 존재로 살아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영적 부분은 여전히 제대로 가동중입니다. 이점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죽을 때까지 최선의 노력으로 쉬지 않고 경주하겠나이다. 결코 십자가의 칭의에 머물지 더 앞으로 나아가서 전인(全人)적인 성화의 삶을 계속 시도하겠나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사람이 이런 성경 대목을 보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자기 관리 하에 두겠다는 것은, 자아 앞에서 모든 것이 대상체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갖출 것은 갖추면서 그러고 난 뒤 자기 앞에 등장하는 대상체를 마중하듯이 상대하려고 합니다. 결국 나의 나됨을 추호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망가지고 또 망가져도 ‘내가’ 끝까지 안 다치고 싶고 궁극적인 자아 가치는 고이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나의 ‘순수 자아성’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내가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격려할 자는 나 밖에 없다는 자기 긍정으로 무장한채 ) 미련 두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십자가 능력은 그 최후의 자존심과 자아가치를 관통해서 붕괴시키고 맙니다. 마치 거대한 기관차를 정면으로 자아에 들이박아서 속절없이 파괴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고 할 만 것이 일체 조립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십자가 능력입니다. 나가 없으면 육과 혼과 영이라는 분류작업이나 (자유)의지와 감정이나 이성적인 자아활동성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인간이란 그저 안개입니다. 있다가도 주님의 뜻이면 일시에 사라져버려야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4-16)

성도는 십자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입니다. 십자가 용서 자체가 거룩이요 그 피 안에서 의인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안에서 인간적인 시간 의식이나 흐름 의식도 의미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저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는 능력만 작용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이미 인간은 죄인으로 확정되어 있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죄인이 아니면 결코 절대적으로 십자가 만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이 성도의 입장입니다.

성도는 압니다. 악마가 무엇을 노린다는 것을! “십자가만을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 딴 게 더 있는 거야.” 이게 최후의 악마의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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