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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13:22:30 조회 : 3211         
쌍용자동차사태, 하버마스, 복음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쌍용자동차 해고정리와 하버마스의 철학과 복음

Ⅰ. 서론

1.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사태

2004년 중국 상하이 자동차 회사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게 되는데 인수가격은, 원래 가격의 ⅓수준이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고급 제조 기술이 국외로 유출되고 검찰이 수사에 나서자 상하이 자동차는 글로벌 금융위기상황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핑계로 내세워 회사에서 손을 떼고 중국으로 철수하고 결국 회사는 2009년 1월 9일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사태 해결은 나라(산업은행)가 떠맡게 되었다. 지금은 인도의 마힌드라 자동차가 대주주가 되어 있다. 이 쌍용자동차가 2009년 9월 전 종업원의 37%인 2046명을 정리해고를 하게 된다. 그 이후 무려 22명의 노동자가 자살내지는 화병에 의해서 죽게 된다. 노동자들이 77일간 파업을 하게 된 이유는, 회계상 부채 규모를 168%에서 갑자기 561%로 올려서 구조조정이 피할 수 없는 조치라고 조작한 데 있었다. 유형자산(토지, 건물, 기계설비 같은 자산)에 감액손실(손상차손)을 시행해서 졸지에 40%나 자산이 줄어들게 만든 것이다. 원래 법적으로는 회사에 긴급한 경영상의 위기가 아니면 구조조정을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회사는 이 조작된 회계장부를 근거로 구조조정을 불가피하다고 강변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진해서 임금을 50%나 삭감하면서까지 회사 회생에 나서겠다는 제안을 한 반면에 회사측은 회사 가치를 극도로 낮추어 외국 회사에 기업합병(M&A)식으로 팔아먹을 시도만 했고 산업은행(나라)은 그 중재에 나서게 된다.

이 와중에서 국가는 다수의 국민인 노동자들의 권익과 최소한의 생활 여건마저도 지켜주지 못하고 도리어 기본적 생존바닥마저 붕괴시켰고 그 이익은 국내외 투자자들과 메이저급 회계 법인회사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들 퇴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있어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지속될까? 아니면 다른 대안은?

2. 하버마스의 ‘담론(談論)적 이성(理性)기획(企劃)이론’

담론은 영어로 discourse라고 하는데, 담론 혹은 담론적 공간이란 공동체 내에서 공론화되는 주제를 놓고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화적 공간을 뜻한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1929〜. 독일)는 특히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희망을 건다. 인간 이성의 합리적인 대화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언어의 능력을 가지며 행위 할 수 있는 주체들로서 상대방의 주관성을 상호 인정해주면 상호이해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보기에, 그동안 인류가 이러한 상호인정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이성의 최고 경지를 생활세계, 자체에서 형성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상적(理想的) 경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담론적 이성 기회를 위해서 기존의 이성 작용의 사용과 적용에 있어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것이 바로 ‘비판이론’이다.

그동안 자본주의 내의 피폐된 상황을 분석하고 점증하는데 있어 ‘비판이론’ 계통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도구화’를 문제 삼았다. ‘이성의 도구화’란 이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인간을 미성숙에서 성숙에로 이끌어내는 계몽을 위한 것이다. 인간을 자연의 공포로부터 몰아내고 인간 자신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 이성은 그동안의 마법과 신화와 무지와 몽해함과 권위와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비판이론가’들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에릭 프롬 등) 인간의 계몽을 가능하게 했던 그 이성의 합리성 속에 처음부터 파국의 씨앗의 담겨 있었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애초에 계몽의 출발은 인간이 자연의 위협적인 힘에 맞서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연을 지배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자기보존’인데, 그렇다면 대자연이 주는 죽음의 공포와 위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남겨진 선택은 결국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었다. 즉 자연 지배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연과 원활한 관계로 맺어진 과거를 뒤로 하고 자연과 맞서는 대립적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보자면 왜소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거대한 자연에 맞서 싸워나가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의 집단적 힘과 사회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형성,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지배 양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연 지배를 완성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이 자연의 폭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사회의 형성과 지배 체제의 발전은 이제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라는 사회적 체계를 강화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한때 거대한 자연의 힘 아래서 신음하던 인간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발전시킨 사회 체계의 구속 아래 점차 종속되어갔다.

이것은 또 다른 야만이었다. 자연이란 인간의 신체 외부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내부에도 자리 잡혀 있었다. 인간이 꿈꾸는 환상이나 욕구나 감정 같은 것도 자연이다. 이 내적 자연을 충족시켜주지 아니하면 행복이란 없다. 이러한 개개인이 담지하고 있는 내적 자연이 사회 지배하고 통제하는 체계에 의해서 끊임없이 배제당하고 억압당해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과 충동은 대의명분을 위해서 항상 무자비하게 몰수당하기 일쑤다. 내일의 사회적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오늘의 기쁨을 접고 담념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진해서 스스로를 다그치고 철저한 검열에 나서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런 지배 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기 통제가 내면화되고 결국 자기 본성으로 굳어져버린다. 달리 말해서 폭력적으로 지배된 자연은 인간 주체 속에 내면화된 스스로에 대한 폭력으로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것이다.

자연과의 통일과 화해를 배반한 인간은 주체 자신에 대한 자기배반으로 대가를 치른다. 이는 모든 감성적인 것의 억압, 정서적 자발성과 욕망의 거세로 나아가며, 결과적으로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자기소외 현상이 일어난다. ‘비판이론가’들은 이런 세태에 대해서 애도한다. 이제는 자연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 갈 일이 무섭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이 ‘비판이론가’의 문제성과 한계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사회적 공동체의 연계망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가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개인적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붕괴될 소지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든, 가정이든, 교회든, 정당이든, 기업체든 상관없이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면 해체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버머스가 볼 때에 ‘자유로운 인간의 공동체’라는 이념은 (호르크하이머의 주장) 공동체의 사실성(事實性)에만 마음을 빼앗긴 결과인 것이다. 인간은 실제적으로 ‘공동체가 여기 있다’라는 점만 고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필히 있어야 될 타당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공동체에서 사적 이익을 노리는 것은 ‘자기노동의 대가’를 그 안에서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노동의 가치로만 사회가 형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아니 되고 ‘상호 인정’ 그 자체의 가치를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동의 역량으로만 사회가 움직이게 되면 필히 여기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발생한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에 실망을 느끼고 모든 합리적인 의사교환을 접고 비-합리적인 도피적 생을 살 가능성이 있다.

소위 신화나 신비주의 세계를 따로 만들어서 그쪽으로 도망쳐버리는 것이다. 하버머스는 그런 예를 유명 철학자들을 거명하면서 제시한다. 야스퍼스(실존해명과 철학적 신앙), 콜라코프스키(학문들을 대체하는 신화), 하이데거(신비적인 존재사유),비트겐슈타인(치료적인 언어작업), 데리다(해체하는 활동), 아도르노(부정의 변증법) 등이다.

하버마스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그 어떤 정의나 정답도 미리 내리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생활세계는 그 정답에 의해서 이데오르기적으로 지배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상호작용 참여자의 자유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참여자의 이기주의는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실천, 곧 공론화된 의견 개진으로(담론의 공간) 담론에의 참여 동기가 지속적으로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타당성으로 지적받아야 한다. 즉 그 어떤 경우도 대화의 창구가 닫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만약에 상호주관적 인정관계가 미리 앞서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비록 담론이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여해 들어간다 해도 그 타당성은 항상 형식화로 굳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형식에 의해서 또한 참여자들이 지배받을 공산이 크다. 이는 자기 실현의 욕구가 합리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기대를 충분히 가질 수 없게 된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억압 없는 자율적 자기실현을 위한 규범적 토대 곧 그들 간의 공통의 가치 확신은 항상 상호순환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늘 재구성되어야 한다. 바로 공동체의 타당성이란 생활세계 자체의 생동성을 질식시키지 않는데 있다.

3. 복음

하버마스 방식의 생활세계 속의 삶이란 오늘날 교회 구성과 안정과 유지에 있어서도 예외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나름대로 ‘교회 담론의 공간’이다. 마치 쌍용자동차 회사 자체적으로 ‘회사 담론’을 형성하는 것과 같이 교회도 나름대로의 ‘담론 공간’을 갖춘다. 제직회 의사일정이나 예배 시간이나 절기조절, 혹은 당회장 임명과 임기에 관한 토의, 교회 행사, 교회 건물 증축을 위한 상호 출자, 같은 것들도 ‘교회 담론’에 해당된다. 타협과 협상으로 수행되면서 어떤 경우라도 교회라는 간판만은 내리지 말자는 합리적인 이성이 모아지는 공간이다. 교회 없으면 천국도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교회 담론’과는 달리 복음의 세계는 성경 말씀이 지배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살아있는 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계는 십자가 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생활세계’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 지으셨다. 따라서 교회도 생활세계의 일부이기에 전혀 ‘말씀의 나라’하고는 무관한 친목단체에 불과하다. 생활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같이 죽은 경우에만 국한된다. 물론 성령으로만 가능하고 인간의 어떠한 종교적 노고나 애씀이나 행함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가 적용되어 예수님과 같은 죽은 자에 한해서는 이 복음의 세계는 알 수 있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 무조건 범죄했고 무조건 죽어야하고 무조건 죄인이다. 따라서 나름대로 살아남고자 하는 의욕은 하나님에게 용납되지 못한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그 세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웃거린다. “어떤 말씀과 신학을 펼치면 나의 생존과 존재가치에 유리할까?”를 구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기껏 나오는 것은 타협이고 협상일 뿐이다.

“결국 살아남는 게 진리입니다. 죽게 되면 그동안 살려고 노력한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협상해서 다같이 함께 사는 수를 모색해봅시다!”를 외친다. 물론 이 외침은 일단 아쉬운 자들의 외침으로 가까이 들려온다. 삶의 터전이 박탈당한 자들의 외침은 그만큼 다급하고 긴박하게 쏟아진다. 그러나 여유 있는 자들은 멀리서 눈에 뜨지 않는 자리에서 동감한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 새소리가 이렇게 청아할 수가! 하늘의 별이 저처럼 청명할 수가! 내 아들과 딸아. 이 대자연을 만드신 신을 사랑하라! 이것이 인간된 도리다.” 이 말은 곧 ‘나의 몸의 컨디션은 정상이다 는 것을 간접적으로 자랑질하는 표현이다.

복음으로 볼 때에 인간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 속으로 사라진다. 죽음 속에서 인간들이 나왔다. 따라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것도 죽음의 힘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죽음이 희망이다. 그러나 자기 죽음은 절망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7-38)

죽지 말고 꼭 살아남아서 죽음의 위력을 온 몸으로 실감하면서 죽어야 한다. 나의 죽음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희망의 창구요 부활의 입구다.

참고 도서

『로고스인가 사튀로스인가』 한국헤겔학회편 용의 숲(서울:2007)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권용선 저 그린비(서울:2003)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신혜경 저 김영사(서울:2009)

 첨부파일 : 쌍용자동차 해고정리와 하버마스의 철학과 복음.hwp (37.0K), Down: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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