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HOME > 성경신학 > 신학과철학
2014-05-12 14:50:20 조회 : 1906         
[존재와 사건]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 존재와 사건 ] 알랭 바디우 저 조형준 역 새물결(서울:2013)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치자. 그냥 한 그루만 있다면 자연의 일부로서 한 그루 나무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에 일단 무리가 그 그늘 안에 앉아 있다고 치자. 그러면 졸지에 관심사는 느티나무 한 그루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들이 무슨 공모를 하는지 관심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다. 자연→정치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대자연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내용이 다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공모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핀다. 이 정치적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나 인간들이나 다 주목하고 여기서 경쟁이 일어난다. 인간들의 정치가 정당한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적 성격이 피어나는지를 놓고 싸우게 된다.

사과가 하나 있을 때, 인간은 말한다. “여기 사과 하나(1)가 있네” 사과가 둘이 있을 때는 “여기 사과 두(2) 개 있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이것만 말하고 있을 것일까?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사과가 등장하는 것을 ‘사건’으로 보자. 그러면 사과가 하나 있을 때의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 사과 하나가 있네” 즉 숫자 ‘1’이 등장한다. 이번에서 사과 두 개가 나타나는 사건이 생기면 인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 사과 두 개가 있네” 즉 이때는 숫자 ‘2’를 사용한다. 따라서 인간은 나타난 사건 속에서 대상을 발견하고 그 대상을 발견할 때마다 숫자를 사용한다면 그런 숫자를 사용하는 당사자는 숫자로 뭐가 될까? ‘1’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앞에 어떤 대상이 없으면 인간은 더 이상 숫자를 사용할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존재나 주체를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0’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이 현실 속에 들어서려면 ‘0’으로서 ‘1’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까지 포함한 수학 표현 방식이 바로 { } 집합, 곧 공집합이며 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집합성은 수를 헤아리는 주체자 본인도 포함해야 대자연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존재의 사슬 안에 인간을 포함시켜서 집합론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공집합 ø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담는 집합 {ø }가 존재한다. 그리고 ø과 {ø}를 담는 집합 {ø, {ø} }가 있다. 그 다음에는 ø와 그리고 {ø}를 포함한 새로운 집합을 담는 집합 {ø, {ø}, {ø, {ø}}}가 생겨나고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아무 것도 없음=무(無)’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고리는 집합론에서만 표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대자연이 무한대로 이어져도 집합은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가 있다. 순전한 무를 벗어나면 놀라운 숫자의 실체들이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 }=1이 되고 {ø}은 2가 된다. {ø,{ø}}은 3이 된다. 이런 식으로 대자연, 곧 무한을 헤아리고 셈하는 모든 바탕에는 { }이 되는 인간 본인들이 자리 잡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실체들은 어떤 다른 재료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순전하며 추상적인 조직체들이며 숫자의 조직을 흉내 낼 수 있다. 그리고 숫자는 그 복잡한 상호관계의 얽히고설킴 속에서 복잡한 세상을 흉내 낼 수 있다. 분명 숫자는 우주 전체의 모습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우주전체 ‘일자’ 곧 숫자 ‘1’로 표현하면서 유일신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주체성이 마지막 도달점이 모든 존재와 사건을 규합시킨 유일한 ‘일자(一者)’ 곧 신 그 자체임을 보여주는 바이다.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들은 최종적으로 존재하는 다수들의 일자로서 끝맺어진다. 사람들, 머리카락들, 웅덩이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일자-결과에 도달되는데 이는 곧 일자는 이 지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면 일자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無)요 꿈이 되어버린다.(p77) 따라서 다수의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도 일자와 관련 없는 다수로서 일자를 거론해야 한다. 이는 곧 일자의 비존재를 의미한다.

존재론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논하려면 결국 무한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무한(無限)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假)무한과 실(實)무한이 있다. 반복적으로 끝없이 셈으로 진행되는 무한이 가무한 이다. 아무리 세어도 끝나지 않으면 끝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수를 택하더라도 이보다 하나 더 큰 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 이것이 가무한이다. 그래서 가무한 에서 ‘완결된 무한’이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실(實)무한이란 분할된 각 구간을 그것이 아무리 짧다해도 영(0)이 아닌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구간이 무한히 생긴다. 이때 영이 아닌 길이를 무한한 합하려도 유한한 길이가 되어 버린다. 즉 유한 속에 무한이 존재가 담겨 있는 역설이 발생되는 것이다. 실무한은 그 자체로는 무한이지만 유한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유일신의 속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을 때는 가무한 을 도입하지만 만약에 실무한까지 고려해서 설명해버리면 유일신은 사라지고 다신론으로 전환된다. 신도 여럿으로 셈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집합론에서 이 실무한을 가지고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이 바디우의 철학이다. 즉 무한마저 집합(set)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신마저도 집합론으로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자(一者)(혹은 일자들)는 애초부터 없는 바가 된다. 일자는 단지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 조작operation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무가 무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유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는 신이 신을 부정하므로 서 비로소 신으로 행세하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은 애초부터 없다. 단지 신을 언급하므로 서 무를 유(존재)로 설명하고 진리로 정립하고자 하니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출현하는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의 전개 순서는 다음과 같다. 임의의 상황이 있고 이 상황의 구조, 곧 일자로 셈하기 체제는 거기는 현시되는 다수를 나누게 된다. 정합성(일자들의 합성)과 비정합성(영역들의 관성)으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비정합성은 실제로는 그 자체로 현시되지 아니한다. 모든 현시는 셈하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셈하기는 수학의 집합론 공리로 이루어지는데 집합은 타당한 식의 다수를 일자로 셈하는 것이다. 순수 다수로서의 비정합성만이 셈하기 전에 일자가 존재하지 않기 위한 전제이다. 일자로 셈하기가 법칙이기 때문에 셈해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현시되지 않는 한 상황은 존재를 일자로 감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자가 존재한다.

이로서 존재란 셈하기의 결과이며 존재이전에는 현시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無)이며 바디우는 이 무를 공백이라고 말한다. 상황이 존재로 봉합되는 위치에 자리 잡고서, 일자로 셈하기와 비일자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집합적 존재론을 이 공백의 이론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무는 점이 아니다. 국소적인 것도 또 대역적인 것도 아니며 모든 곳에, 즉 어떤 곳에도 흩어져 있지 않는 동시에 또한 모든 것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는 상황의 장소도 또 항도 아니다. 만약 무가 하나의 항이라면 그것은 오직 이 무가 일자로 셈해졌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셈하여진 모든 것은 현시의 정합성 내에 있다. 따라서 일자로 항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배제된다. 일자-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비정합성의 유령으로만 존재할 뿐이다.(p105)

원래 상황이란 공백(무, 혹은 상황의 존재=셈하기가 없는 상태)이 집합이 된 것이다. 이는 모든 현시된 비정합적인 다수다. 이 다수가 자체적으로 셈하므로 서 일자(=최종적으로 신)가 출현하는 것이다. 상황이 구조적으로 정돈이 되는 것은 (정합적으로 다수가 되는 것은) 항상 셈하기의 사후 효과 속에서 가능하다.

이 사후 효과에 의해 애초부터 ‘존재의 구조’란 없다. 다수를 계열화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비정합적 다수를 셈하므로 서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다. 바디우는 이 관계를 수학의 집합론에 설명하면서 ‘속함’과 ‘포함’의 작용을 동원시킨다. 그 기본 요소는 공백이다. 이 공백을 가지고 공집합을 유도한다. 공백 { }과 공집합 { ø }과 다르다. 공백은 빈자리이다. 그런데 여기에 공백 자신이 자기언급을 공집합이 된다. 이는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는 원리다. 공백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백의 자기 언급으로 제 자신의 속성이 없는 ‘어떤 것something’으로 존재하는 데, 이것이 바로 ‘상황의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집합은 유와 무가 분리될 수 없는 비정합적(어떤 단위, 통일성으로도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비일관적)이다. 이러한 비정합성은 자기의 불안정성 때문에 무한한 다수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바로 정합적(일자로 셈하기에 종속, 곧 일관적) 다수이다. 그 기반에는 공백(무)이 작용하는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속성이 없는 그 집합이 멱집합(스스로 자신을 되먹여서 부분집합으로 속하게 되면 그 속하게 된 속성끼리 새로운 집합이 되는 집합) 작용으로서 포함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이 관계 속에서 무한도 셈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전체 무한한 모든 존재를 아울려는 존재론이 수립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이 국가를 구성하지만 국가가 성립되고 그 안에서 개인은 질적으로 달라진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이치와 같다. 포함 안에서 초과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기존 존재론에서는 자기 귀속이 금지된다. 그러나 바디우는 자연적 존재에서는 자기 귀속되지 않지만 이렇게 자기 귀속이 허용되는 것을 두고 역사적이라고 구별을 하고 특히 이를 ‘사건’이라고 한다.

다수가 출현하면 그 다수의 부분집합들이 구성하는 일자-다수는 처음의 다수(순수 다수)보다 언제는 더 크다. 이 말은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에서 상황에 속하지 않는 다수는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속함 위에 있는 포함의 초과다. 곧 부분집합은 그 상황에 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작업을 수학의 공리(公理)들의 체계로 진행한다. 공리적 현시(顯示 =있는 그대로 나타남)는 비규정된 항들로부터 조작 규칙을 규정하는데 있다. 공리를 통해 정합적인 것을 만들면 일자(一者)에 따른 구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수들이 현시되는 상황의 일자로 셈해지기 전에 붙잡히면 그러한 다수들의 현시의 현시 속에서 공리적으로 나타나기 위해 순수 다수성의 정합성 이외에, 즉 상황들 속에서의 비정합성의 양식 이외의 어떠한 정합성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존재론이 다수를 일자로 합하기 위한 명백한 조작자operator로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의’ 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는 존재를 잃어 버리고 말 텐데, 만약 존재론의 구조가 그러한 속성을 가졌다면 그것은 다시 일자와 상호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론은 다수의 하나의 다수를 구성할 수 있는 조건을 지시하게 될 것이다. 바디우는 그러면 안 된다 고 한다.(p 65) 여기서 요구하는 바는 다수를 일자로 만들지 않고, 따라서 다수에 관한 규정을 소유하지 않은 채 존재론의 조작적 구조가 다수를 구분해내는 것이다. 순수 다수와 ‘다른’ 아무 것도 자신이 구조화하는 현시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정합적인 다수는 필히 일자의 나타남에 따른 구성으로서 집합적 존재론이 말하는 ‘포함’의 의미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과 국가를 가지고 이 점을 설명하면 이렇다. 국가가 한 개인을 취급할 때에 이미 그 개인을 ‘그’ 혹은 ‘그녀’ 자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개인은 이미 국가라는 상황 속의 한 요소로서 취급받지 못하고 하나의 부분집합a sub set으로 취급받는다. 집합에서 공집합은 자기 자신만을 유일하게 요소항으로 하는 동시에 자신을 부분으로도 삼는 공백이 일자로 생성돼 들어가는 것, 이것은 그 사람의 이름이다. 그런데 국가라는 상황 안에는 개인은 이미 유권자로서 취급받는다. 국가라는 것을 재출현시킨 부분으로서의 그 개인의 이름이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는 이미 그 개인은 개인이 아니다. 국가의 강압을 받게 되며 원하던 원하지 않던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그는 유권자인 동시에 국가가 징발할 때는 어디든 끌려가야 한다. 국가는 근본적으로 귀속에는 관심이 없고 포함에만 관심을 두는 집합이다.

구성체로 포함된 부분집합은 국가에 의해 계산되고 고려된다. 그래서 국가는 그 자체가 돌출이다. 전통적인 국가관에 있어 국가란 사회적 유대적 관계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그렇게 보지 않고 국가란 비유적 관계에 기초해 있다. 국가의 비유대적 분리성은 일관성에서 결과한 것이 아니고 비일관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인 대 만인에 대한 전쟁은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절대 권위를 필요로 한다. 집합론 상으로 볼 때에 부분들을 메타 구조에 의해서 셈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여기서 다시 공백의 등장이 불가피하다. 이 말은 멱집합에서는 공백이 불가피하게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백의 등장이 집합 내에 비일관성을 가져오게 한다. 여기서 국가는 상황에 속하는 요소들을 초월하는 일자로서 통합 내지 통일시킬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다름 아닌 부분으로 포함된 다수인 공백이다. 그러면 공백과 그리고 셈하는 것과 셈되어지는 것 사이의 간격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정합적 비정합성’이란 역설이 발생한다.

곧 국가는 세 사람 이상 모이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선포하기 이른다. (p186) 개체들이 모여 집합을 만드는 것은 이미 사회 치안의 저해적 요소가 된다. 세 사람 이상 모이는 어떤 부분들도 용인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국가는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는 귀속이 유지되도록 하는 포함만을 셈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 비유대적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존재 근거다. 이처럼 국가라는 진리의 돌출은 존재 자체의 정리에 속하며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다. 곧 국가란 전복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왕이 전복의 대상이 아닌 이유는, 공백(없음)을 전복하거나 제거의 대상이 아닌 이치와 같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p.570) 그러나 ‘진리의 존재’는 유적 절차, 즉 분류되는 절차에 따라 생각이 가능하다. 진리의 존재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범주에서 관념적 통합체로 나타난다. 그 네 가지 범주는 곧 존재의 범주로서 사랑(=종교)과 예술과 과학과 정치(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주체는 이 범주 안에서 해명된다.

바디우에게 주체는 궤적으로 나타난다. 식별 불가능한 것과 결정 불가능한 사이에 결합을 위해 존재론적으로 등장한 것이 주체다.(p 678) 그에게서 주체는 존재에 속하지도 않고 어떤 속성을 띠지도 않으며, 몸이나 인격으로 환원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주체는 정확하게도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것은 진리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주체화의 과정과 동일시될 수 있다. 한 존재를 지배하게 되는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바디우는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의 증상이다.(p 680)

다시 말해서 개입으로서의 사건과 연관의 작용자로서의 충실성의 공정을 연관 짓는 과정 그 자체를 주체라고 보는 것이다. 공백으로부터 시작된 게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개입과 충실성 그리고 연관 작용자의 3자과의 관계가 주체다. 충실성이란 ‘공정 과정의 집합’을 두고 말하며 공정 과정의 집합이란 한 상황 안에서 다수들을 분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출현된 다수의 집합군 안에서 사건에 의존되어 있는 다수들을 분리시켜 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주체가 벌이는 진리의 실천이다. 진리는 지식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공백에서 나온 것이기에 즉시 인정받지 못하고 소진한다. 주체는 이 소진된 진리의 유한한 부분인 것이다. 곧 그림자요 모형이다. 주체의 집합은 진리와 마찬가지로 식별 불가능한 부분집합을 형성하고, 식별 불가능한 것들을 행한다. 결국 주체는 상황의 법칙(백과사전적 지식 체계)이 진리를 인정하도록 진리를 지식에 강제한다. 지속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주체의 실천은 결국 진리에 충실한 후後사건적 실천이며, 이 실천을 통해 결국 진리는 옳은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일단 상황의 법칙이 진리를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진리가 지식 내에 자리 잡게 되면 상황은 변화한다. 상황의 법칙이 변하기 때문이다.

지동설이 옳은 것으로 인정되면 천동설은 틀린 것이 되어 지식 체계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상황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변화다. 진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게 진리에 대한 충실성으로서의 주체들이 행하는 후사건적 실천은 변혁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진리의 동력이다. 바디우의 철학은 이렇게 주체적 실천과 변혁의 전망을 간직한 전투적인 철학이라 하겠다.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가 결정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애초의 상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성이나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진실성의 결정을 강제하는 항,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에 귀속은 오로지 그 자체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산출적인 공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주체의 진술이 그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 또는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을 애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새로운 상황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편 위의 말을 뒤집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만약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역으로 재구성된 문장으로부터,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아니한가를 미리 판단해 보는 일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을 사건적 진리와 애초의 상황 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하였다면, 이 확인은 곧 진실성의 결정을 주체에게 강제하는 될 항이 산출적이며 충실한 공정에 의해서 만나지고 검열되었다는 것을(조건적이라는 것을), 따라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기회 판단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때의 고정 관계, 즉 강압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우연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산출(産出)적이며 충실한 공정을 통해서 강압이 미리 만나지고 검열된 이후에만 강압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를 명명, 분간하고 부분들을 분류하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한한 사건들에 의해 떠받쳐지는 무한한 진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과 진리를, 진실 된 것과 참된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산출적인 주체가 지식과 진리를, 진실 된 것과 참된 것을 내재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온다. 왜냐하면 산출적인 주체는 언어-주체의 진술을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이 되도록 (즉, 지식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주체, 그리하여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의식의 주체나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사건적인 진리의 주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진리의 솟아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체. 오로지 사건적인 진리 안에만 머무는 주체가 아님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신의 언어에 의해서 지식과 진리의 교차에 위치하는 주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는 주체인 것이다.

바디우에 있어 진리란 유한 구조에 근거하여 상황의 무한적 부분을 정립하면서 펼쳐진다고 보고 있다. 충실한 공정(工程)의 무한(無限), 그리고 긍정적인 결과는 공백을 근거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즉 진리란 무한 긍정의 총체이다. 비록 사랑과 예술과 과학과 정치가 개인적 개입으로 머물고 말지만 이러한 그들 자신의 분별하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인 비분별적인 힘인 새로운 다수의 힘, 곧 공백의 추가적 출현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존재론적 위상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최초의 숨겨진 초과분의 진리가 강압적으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평)

바디우의 주장은 과학 일변도의 사상에 대해 그 한계를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있음에서 있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 사람들만의 적법성과 유용성의 발휘한 결과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시대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디우는 복음적 신앙에 대해서도 그 근거를 공백에서 이끌어낸다. ‘진리는 상황 전체를 통해, 그것을 명명하는 상징 즉 십자가 아래는 순환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예언들의 이중적 의미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건에 몸을 맡기고, 그것의 도발적인 이름 공백-메시아의 모든 영광과 모든 형상과 상충되는 그리스도의 추문적인 죽음’-의 한 가운데서 끝어내야 한다‘ 는 것이다. (p 357) 이는 십자가 사건 자체를 0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p 363) 즉 십자가는 다신(多神)의 현 세계에서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숨겨진 진리란 유한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오시는 것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복음적 평)

알랭 바디우는 왜 수학을 존재론에 적용시켰을까? 수학 집합론에 나오는 공리로서 기존이 존재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수학의 집합론의 공리가 왜 기존의 존재론에 시비 걸 자격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온전한 자기 엄정함(자명함)을 집합론에 와서 비로소 밝혀졌다고 바디우가 보기 때문이다. 수학은 우주 질서를 연구하거나 표시하는 단순한 계산 기술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그 자체이다. 이런 수학이 자체적으로 진리의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믿을 만한 기초가 마련되어야 했다. 수학적 질서란 객관적이고 불변적인 ‘실재(實在)’이어야 했던 것이다. 집합론은 특히 ‘수(數)’ 자체의 기초에 대해서 엄중해야 했다. 그 방식이 바로 무한까지 포함해서 수를 다루어야 했고 그 무한을 다루는 기술(技術)이 바로 ‘바구니’ 담기이다.

즉 ‘수 센다’를 통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ø’마저 바구니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 바구니가 ‘집합set’ 다. 표시는 이렇게 한다. ‘{ }’ 비로소 ‘바구니’ 양상으로 ‘존재’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무(無)까지 끌어들인 존재론이다. 이렇게 해놓고 자체적으로 과연 무모순점이나 결정 가능성이 있는지를 자체 검토에 나서게 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집합론의 공리다. 알랭 바디우는 수학의 도입을 통해 이런 인간 존재론의 한계를 확인코자 했다. 하지만 결국 드러난 것은 인간 자체의 한계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게임으로 인하여 본인들은 그 안에서 스스로 게임을 망치게 된다. 주체의 개입으로 인해 스스로 판정관 노릇을 하는 게임에 점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집합론으로서는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밝혀지지 않는다. 죄와 의에 대해서도 모른다. 따라서 복음이란 이러한 존재론 시도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등장해버렸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실 때부터 인간의 모든 일들은 이미 틀어져버렸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2-24)

 

 첨부파일 : 존재와 사건.hwp (47.5K), Down:103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