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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6 11:53:37 조회 : 1445         
[살의 기호학] 장문정 이름 : 이근호(IP:119.18.89.5)

[살의 기호학] 장문정 저 한국학술정보(파주:2005)

메를로-뽕띠(1908-1961)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다. 이 철학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해서 ‘몸의 현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상학이란 인간의 순수 의식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과학의 진리성에 의심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외부에서 오는 경험을 인간의 의식과 상호작용을 통해야 참된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이런 인간 주관적 의식과의 상호작용을 무시했다는 것이 현상학의 주장이다. 과학은 이로서 진정한 의미나 가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현상학하고도 거리를 둔다. 인간의 선험적 주관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현실 문제를 지극히 추상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데카르트의 경험주의와 후설의 현상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친다.

데카르트는 특히 선험적(先驗的)자아(경험 이전의 순수 자아=코기토)의 확실성을 찾아내려고 애셨는데 메를로-뽕띠는 데카르트가 시행한 두 가지 시험test를 다시 검토하면서 그 허점을 밝힌다. 하나는 ‘나는 생각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응시 한다’이다. 이 두 가지에서 연상되는 경험 자체를 일단 의심(=반성)을 해보는 것이다. 환영(幻影=환상)일수도 있다는 식이다. 그래도 궁극적으로 의심하려야 할 수 없는 잔여물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의심할 바가 없는 절대적 명증성을 지닌 진리의 기초라고 데카르트는 주장한 것이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메를로-뽕띠는 비판하고 나서게 된다. 왜냐하면 참된 판단과 거짓된 판단을 하는 당사자의 판단을 판단할 근거는 그런 식으로 그 정당성을 증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데카르트의 시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항은 한 동안 외부와 자신이 관여하므로 서 자신이 ‘세계내존재’라는 사실 뿐이다.

특히 두 번째 시험인 “나는 내 눈을 통해서 이 책상을 응시한다”는 시험은, 결코 응시하는 절대적 자아의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테스트일 수 없다고 메를로-뽕띠는 주장한다. 그 근거로 환지통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지통(幻脂痛)이란, 이미 사지가 잘려서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두뇌에서는 계속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세계관은 본인의 절대적 의식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는 ‘세계내존재’라는 점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즉 이미 있는 세계로부터 도리어 찌그러뜨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늘 반성(의심) 당해야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메를로-뽕띠의 대전제이다. 명증적으로 느끼는 자기 의식은 늘 거짓이다. 이는 ‘자기 의식이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늘 거짓되게 갖게 된다는 말이다. 현상적으로 이런 점을 늘 드러낸다는 점에서 메를로-뽕띠는 현상학에 속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인 환원을 향하여 늘 시도하게 되지만 그것이 늘 실패로 끝난다 는 점에서 우리 신체(혹은 살, 혹은 몸)의 독특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이러한 실패성은 매개가 되는 언어로 표현되기에 언어가 품고 있는 본래의 의미 찾음도 덩달아 늘 실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감각적 기호는 기호의 의미로 환원되고 그런 의미의 연결로 통한 사유(생각)의 명증함과 정확함은 의식의 명증함을 대변한다고 알려져 왔다. 이로 인해 의식의 확실성은 언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관권이 있다고 그동안 주장되어 왔는데 바로 이점을 메를로-뽕띠는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진리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 사회에서 진리로 등장되는 것들의 명증성은 어떤 식으로도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메를로-뽕띠는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신체에 주목한다. 그동안 심리학이나 생리학이나 의식에서 다루던 방식인 기계적 생리학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이런 병리적 증후들을 해명과 관련시켜 인간의 신체 자체가 드러내는 현상을 설명한다.

프로이트(1856-1939)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떤 장애를 정신으로 새롭게 극복한다고 하는 억압refoulement이론을 내놓았다. 우리는 흔히 친한 친구의 죽음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그 친구가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절단 환자는 자신의 신체적 결손이 증명되는 것을 애써 피하고 있는 것이다.

억압이론에 따르면, 절단 당한 부상자의 경우, 변화된 그의 개인적 실존은 절단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었던 실천적 영역, 즉 세계내존재를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억압의 결과, 현재의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왜곡되어 나타난다. 있지도 않는 다리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인격적 실존은 정상적인 세계(다리가 없음)를 억압하여 병리적인 세계(다리가 있음)로 만들어 버린다. 어떻게 일개 개인이(그것도 신체적 결손을 당한 환자가) 견고한 구조로 작용하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는 데카르트처럼 그가 세계(다리가 있음)를 환영으로서 구성해낼 수 있는 초월적 주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그는 세계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세계를 찌그러트려 놓았을 뿐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인칭적인 실존 주의에 이미 비인칭적인 것에 가까운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왜곡이 가능했던 것이다. 즉 그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세계를 변경시켜 놓은 것이다.

신체는 더 이상 의식의 작용을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거짓이었을망정 그런 의식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계기로 역할하고 있다. 만지고 만져지는 기능 속에 변화될 수 있는 매한 조직이 바로 신체인 것이다.

코기토(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선험자아)는 사유하는 이성적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공적 세계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응시의 순간, 나는 그와 동시에 나의 신체와 책상 사이에 점·지평 구조로 정향된 공간이 솟아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는 게쉬탈트Gestalt 심리학자들의 말대로, 평면적 그림에서 형태·배경 구조가 조직됨으로써 공간의 환영이 생겨나는 것도 동일한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공간이 신체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신체적 공간’이라고 부른다.

신체적 응시를 실행하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로 존재하는 공간은 오히려 착시로 여겨지는 신체적 공간이어야 한다. 그동안 심리학자들은 일종의 착시현상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내 눈의 망막 상의 투사로 인해 일그러지기 이전에 ‘이미’ 존재라는 객관적인 공간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신체적 공간은 환영이고 그 속에서 응시된 일그러진 책상 역시 환영이다.

이와 같은 대상의 절대적 위치는 오히려 ‘응시하는 나’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게쉬탈트 심리학자들도 다음과 같이 우를 범한다. 그들은 봄의 형태·배경 구조를 망막의 법칙으로 확립함으로써 자신들이 발견한 신체적 공간을 눈앞에 두고 신체성의 뿌리가 뽑혀지고 균질적 공간으로 구성된, 소위 객관적 공간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진실은 이러하다. 나의 신체는 이런 객관적인 공간의 바탕 위에 놓여 있는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 운동과 달리 신체의 고유운동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는 추상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생리학자들은 신체와 별도로 그것의 선행적인 상위의 능력으로서 의식의 범주를 설정해왔다. 추상적인 운동은 운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운동하는 주체는 운동에 대한 사유를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물건을 잡으려고 손을 들어 올리지 않고 그냥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한다면, 그 때, 손을 들어 올려도 괜찮을 어떤 공간에 대한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확신이 바로 운동에 대한 사유인 셈이다.

운동에 대한 사유의 전형으로 우리가 채용했던 것은 물리학적 운동 개념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운동하는 주체가 움직일 수 있는 배경인 객관적인 공간을 전제하는 물리학적인 운동 개념을 추상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근거로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메를로-뽕띠가 말했듯이, “추상적 운동은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되는 가득 찬 세계의 내부에 반성과 주체성의 영역을 움푹 들어가게 하고 잠재적이거나 인간적인 공간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대체해놓고 만다” 그러나 물리학이 근거되어 있는 신체의 운동 이전에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공간 개념은 현상학적 반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비반성적인 것이다. 환원에 의하면 이러한 공간은 신체로부터 파생된 원근법적 공간이 ‘자유변경’(반성)됨으로써 무한한 응시의 총합으로 구성된 잠재적 공간으로 판명될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추상적 운동의 바탕인 객관적인 공간은 이미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다. 정상적인 우리는 구성된 것, 그렇기 때문에 허구적이고 가능적인 공간에 열려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신체와 별도로, 자유변경하고 구성을 행하는 주체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체는 이런 구성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된 공간에서 운동하는 수동적 주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체를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의식의 범주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심맹환자(후두부 손상으로 인해 자신의 신체의 위치를 제대로 못 잡는 환자, 자기 신체를 자유롭게 취급 못한다)의 경우, 환자가 의식이 없는 신체로 있는 한에서, 그의 흉내는 당연히 의식의 추상화가 아니라 (이는 정신주의의 주장) 신체의 고유운동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환자에 비해서 정상인들은 도리어 거짓말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반면에 심맹환자는 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신체의 운동으로 인해 신체적 공간이 생겨난다. 신체의 공간성은 자신의 신체 있음의 전개이며, 신체로서 현실화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움직이는 나의 신체를 느낀다는 것은 동시에 이런 신체로부터 펼쳐져 있는 원근법적 공간도 내가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내가 나의 신체의 운동을 의식한다는 것은 내가 익명적으로 운동하는 내 신체의 부분으로 있지 않고 거기서 나와서 밖에서 보고 돌아와야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고 했던 후설이 말하는 지향성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이것을 ‘지향적 호intentional arc’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신체의 각 부분들의 지향적 호에 의해서 우리는 원근법적으로 무한한 방향에서 신체 전체를 볼 수 있다. 즉 지향적 신체의 무한한 응시를 통해 우리는 한 방향으로 일그러져 있는 원근법적 공간으로부터 이런 일그러짐을 보정하여 객관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체도식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의식은 신체의 의식의 자격으로만 존재하지 신체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초월적 존재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매번 나의 신체적 실행(의식의 실행과 응시의 실행과 같은 구체적 행위)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우리의 신체는 시공간 속의 사물로서 존재라는 해부학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 반성을 실행하기에 언제나 반성 밖으로 나아가지 않는 ‘현상학적 신체’이어야 하는 것이다.

병이란 어떤 특질이나 본질의 결여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기-조절 체계이다. 그렇게 병리적인 것이 바뀐 환경 속에서 자기-보존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 역시 정상적인 것과 동일한 구조(세계내존재)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정상적인 층위와 다른 층위에서 정립하는 하나의 평형인 한에서 정상적인 행위의 의미와 다른 병리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다름을 가능하게 하는 동일한 어떤 구조를 추구할 수 있다.

병을 통해서 병자는 새롭지만 축소된 환경과의 관계를 시작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병자는 환경에 맞게 활동 수준을 감소시키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설정하게 된다. 삶의 규범은 세계내존재의 의미에 불과한데, 그런 점에 병리적 상태는 규범의 부재가 아니라 열등한 규범을 의미할 뿐이다. 심지어 질병은 기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여 생명체가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생존의 조건을 확립하는 새로운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신체를 매개로 세계에 물음을 묻고 다시 사물들이 신체에 응답하는 방식이 어떤 공통성을 획득할 때, 이른바 그것은 습관적 행동이 된다. 메를로-뽕띠가 예로 들고 있는 행동들, 즉 자동차를 몬다든지 오르간의 건반을 연주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전형적으로 정상인의 무의식적인 신체의 행위이다. 처음에 우리의 응시 속에서 자동차나 오르간은 매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왔겠지만, 이런 도구들은 조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신체처럼 익숙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하여 그것들을 응시해도 전과 같은 소름끼치는 물량감을 느끼지 않는데, 우리 몸에 배인 도구들은 우리 신체의 연장(延長)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정 양식을 통해 이런 도구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확장되고 이질적인 공간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자동차를 몰게 되면서 겪게 되는 공간은 우리가 맨몸으로 걸어가면서 겪게 되는 느린 공간과 달리 빠른 공간으로 재편되며 우리가 오르간 연주를 통해 탄생시키는 공간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표현적 공간이다. 우리의 손의 고유운동적 실행을 통해 생겨난 신체의 고유 공간이 자동차나 건반의 공간에 통합되는 형식으로 ‘확장된 신체적 공간’이 유발된 것이다. 현상학적 신체는 신체들의 운동에 의해서 추상적 체계들을 형성하고 다시 그것을 신체가 습득하는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험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즉자적인 사물이나 지각자와 별도로 사물에 내재하는 고유한 감각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찍이 버클리Bekery(1685-1753)가 말한 것처럼,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사물의 분절은 우리 실존의 분절 자체가 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메를로-뽕티는 지각자의 신체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신체와 사물 사이의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분모는 사물이나 우리의 실존을 표현하려는 요구와 더불어 기호로 확정되기 마련이다. 분석적 응시를 통해서 우리가 분리해낸 크기, 형태, 색깔은 그런 기호학적 체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데, 감각소여들의 전개는 그 자체 가르쳐질 언어로서 있으며, 거기서 의미작용은 기호들의 구조 자체에 의해 비밀화 될 것이다. 언표되지 않는 존재가 있은데 그것은 우리가 크기나 형태나 색깔과 같은 척도를 통해 고정시키려 하자마자, 그 체계의 망에서 빠져나가는 그런 존재들이다. 다른 것은 우리의 일상적으로 익숙한 응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반성을 빛으로 비유하면서 반성 없는 어둠 속에 있는 몽자(夢者)나 광인의 경험을 자신의 성찰에서 배제시키는 반면, 메를로-뽕띠는 반대로 이처럼 어둠 속에서 있는 몽자, 광인뿐만 아니라 원시인이나 예술가들을 자신의 성찰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빛은 그 자체가 보여 지지 않지만 자기와 다른 것을 보게 해주는 미덕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반성은 반성하는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반성되지 않는 것을 반성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 반성하려는 그들에 대한 경험은 어둡지만 반성의 빛에 의해 애매하나마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드러난 의미는 물리학적 법칙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명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언제나 비의미와 함께 하는 애매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서 추상적인 스타일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애매성 자체가 의식이나 실존의 정의 자체다.

만약에 창 밖에 모자와 외투를 입고 가는 타인을 응시한다고 치자. 내가 나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는 신체도식을 통해서 인칭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다시 내가 눈을 돌려 창 밖에 있는 저 모자와 외투를 입은 물체를 응시할 때는 이러한 신체도식을 깨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에 나의 고유의 신체는 응시를 통해서 저기에 있는 모자와 외투와 ‘함께 조직되어’ 새로운 체계를 형성시키게 된다. 모든 체제가 그러하듯이, 체제는 어떤 의미를 응결시킨다. 모자와 외투가 함께 더해진 통합 신체의 구조는 낯선 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타자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세계는 나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와 나와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신체들이 조직된 하나의 체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기작과 타자의 지각 사에서 공유되고 서로에 의해 능가되는 하나의 세계가 된 것이다. 나는 타자를 통해서 존재하고 타자는 나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동시에 나는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존재하려 하고 타자는 나를 억압함으로써 존재하려 한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타자와의 어떤 공통적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타자의 세계에 대한 타자의 위치와 나의 세계에 대한 나의 위치는 양자택일을 구성한다.

내 고유 신체의 체계인 신체 도식도 익명적인 체계였으나 나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게 하여 내 쪽으로 극화시킴으로써 1인칭적 자의식을 응결시켰던 것이다. 데카르트적 기원은 언제나 자기 쪽에 힘을 주어서 응시하는 실존의 안쪽, 즉 인칭적 의식의 편을 선택하는데 이러한 편애의 대가는 타자를 무화시키고 역설로 만듦으로써 유아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메를로-뽕티는 구조주의와 자신의 사상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현상학의 근본적인 특성이 초월적 주체의 확실성에 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이 문턱의 단절성을 통해 주체의 절대적인 위치를 파괴함으로써 현상학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과부하된 주체 개념, 절대화된 주체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으란 법이 없으며 순간순간 나를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반성철학은 그러한 의심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그런 의심을 무화시키는 절대적 주체를 발명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주체를 다시 흔들리는 위치에 갖다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른바 구조주의 ‘주체의 죽음’인 셈이다.

메를로-뽕띠에게서 신체는 익명적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인칭적인 자기의식을 가능하게 했다. 더 이상 의식은 확실성의 토대가 아니라 더욱 더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고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메를로-뽕띠가 고수하는 현상학적 확실성이란 유한성을 극복하는 확실성이 아니라 이런 유한한 환영(幻影)적 존재들이 존재하는 바탕, 즉 가시적 신체를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절대 주체를 찾음으로써 손쉽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믿었고, 후설은 자신이 그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끝없는 반성을 주문하면서 이론적으로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현상학자들에게 내 바깥에 있다고 믿는 세계는 사실상 그 보다 상위의 ‘나’를 통해서 가능한 세계, 즉 상위의 ‘나’의 안에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이 ‘바깥’은 진짜 바깥이 아니며 나의 존재 위계를 통해서 안과 밖의 변증법적 운동에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 위계는 개인적 나에게 객곽적인 나, 상호주관적인 나, 객관 정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박한 유아론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후설이 취한 해결책은 바로 이런 식이었다.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서 의식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탐내는 본성을 가지는데, 이 본성이 여전이 의식의 본성인 한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것 역시 의식인 것이다. 반성은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것이다. 전기의 메를로-뽕띠는 세계내존재를 이와 같은 지향성을 통해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지향성은 정확히 말하면 의식의 지향성이 아니라 신체적 지향성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신체적 지향성을 통해서 우리가 의식의 안에서 바깥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메를로-뽕띠의 키아즘chiasm(대칭 병행 행태로 맞물려있으면서 교환되는 구조체제. 이 사이에는 문턱과 틈이 있다.)의 핵심이다.

세상과 신체는 상호 대칭되면서도 순환되는 키아즘 체제로 진행되며 의식이란 그 진행으로 인한 결과로 생성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만지듯이 내 자신, 즉 내 신체를 볼 수 없다. 내가 보게 된 신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만져진 신체로서의 내 신체, 만져진 만지는 것으로 있는 경우와 다르게 보여진 바로 그것을 보는 바도 아니다.

우리는 나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과 마주할 때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타자를 보았을 때, 타자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가 보는 것은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즉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타자를 보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 닿는 내 자신을 간접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체의 보는 힘의 또 다른 면이’다.

신체의 힘이 바깥으로 발산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발산이 차단될 경우, 그 본능은 안으로 향해지고 그 힘이 내부로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떻게 바깥으로 향해 있는 신체의 힘이 안으로 축적될 수 있을까? 이질적인 두 힘들의 충돌할 경우에는 더 이상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른 힘에 지배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반동적 힘이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충돌을 통해서 좌절된 힘들의 내부축적. 내부에서 억압되고 있는 힘은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반동적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의식은 명석 판명한 초월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니이체(1844-1900)는 힘들의 충돌을 죄로 구체화시키고, 그 죄를 대가로 신체적 형벌이 가해지는 상황을 분석했다. 이러한 형벌을 통해서 죄인은 죄를 자기의 시체에 각인하고 기억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억이 의식인 셈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충동을 느끼게 될 때마다 그는 이러한 신체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충동을 더 이상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도록 축적시키는 그것이 바로 공포심과 다를 바 없는 도덕적 의식이다.

언어란 애매한 가시성의 세계에 침입하여 그것을 강제적으로 질서 짓고 침전시키는 작업의 결과다. 언어는 가시성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지만, 반성과 언어의 폭력 행위에 선반성적인 가시적 사물이 결코 완전히 복종하는 법은 없다. 사물은 언제나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언어의 질서의 틈에는 언제는 그 질서를 피해가는 가시성의 질서가 있다.

표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 그렇게 의식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한 끝내 표현되지 못할 줄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끝없는 물음과 반성 자체가 어떻게 회의주의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가? 그토록 힘들게 말고 온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생토록 바위를 밀고 올라올 수밖에 없는 시지프스(평생 산 위로 돌을 굴리고 떨어뜨리는 형벌을 반복해야 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저주받은 비극적 운명을 직시하게 될 때에 비극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저주받은 운명을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긍정의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언어라는 아슬아슬한 바위를 굴리는, 근본적으로 그르치는 실천 행위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이게 될 때 생겨난다. 언어뿐만 아니라 신체 주체의 실천은 여러 가지 층위에서 가능하다. 언어적 실천, 가시적 실천, 촉각적 실천, 후각적 실천 등. 각각의 실천은 서로 얽혀 있지만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모든 표현은 진리를 고정시키고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진리를 자유롭게 살게 만드는 일인데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순간 진리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메를로-뽕띠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즉 현상학적 기술의 불가능성이라는 자기 해체적 역설을 자기 내에 소화시킬 수 있는 존재론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역설을 껴안는 논리가 필요했으며 그러한 표현 불가능성이 가능한 근거를 묻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메를로-뽕띠의 살은 존재론이 근본적으로 이러한 표현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뀌어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의 실천(운동)이 진리를 소유하는 영원히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계속되는 파롤을 위해 체계들을 채용하려는 점에서 실천의 가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체corp 대신 살chair(혹은 몸)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그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철학의 환경을 교체했다는 가장 직접적인 임시가 된다. 살은 기계론적인 실체로 생각될 수 없도록 만드는 묘한 표현이다. 살에는 고유한 성질이 있다. 이를테면, 물, 불, 흙, 바람이 그러하듯이 살은 유형적으로 존재하되, 어떤 결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움직이는 것, 다른 것으로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떤 익명적 생명을 상징한다.

나의 살이 다른 살들로 둘러싸이게 되고, 나의 살과 남의 살의 경계는 아메바 운동 속에서 새로운 의미 경계(나-타자의 경계)를 산출하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살의 존재론은 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 있다. 살은 자기 몸의 표면에 나 있는 촉수들을 통해 다른 살들과 접합하려 하나의 살이 되는 융합의 운동, 그리고 하나의 살에서 다른 새끼 살들이 분산되는 분열의 운동을 한다. 이런 아메바 운동을 하는 살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며 각각의 살들에 한시적 이름을 붙이지 전에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일반적 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신분석학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승화되거나 억압될 수 있는 표상을 일으키는 1차적 과정의 영토로 알려져 있다. 1차적 과정이란 이른바 성(性)의 내용을 전면에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도록 억압함으로써 그러한 억압적 잠재면이 놓여 있는 장소로 설정된 무의식이 성애의 내용을 실수나 병, 그리고 꿈이나 환각과 같은 비유적 사건을 통해 왜곡된 표상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우회의 과정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개념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의식을 통해서 설명하기 힘들었던, 실수, 꿈, 병리적 현상을 담론의 장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구별적 장소나 영토가 가정되는데, 메를로-뽕띠가 보기에, 투명한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하위 영역으로서의 무의식은 상공비행적인 초월적 의식과 더불어 또 하나의 초월적 실재를 가정하는 꼴로 여겨진다.

그가 볼 때에 프로이트주의는 무의식이라는 ‘두 번째 주체’를 끌어들여는 식으로 결국 귀신 연구와 다를 바 없이 보인다. 정신분석 진영에서 일어난 무의식의 논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 현상들을 결국 ‘의식의 전매’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 즉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가정하지 않기도 결정한 것을 다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의 성찰과 마찬가지로 정신 분석학자는 억압된 것을 다시 접촉하고 바로 잡음으로써 무의식을 ‘나쁜 믿음’이거나 ‘상상하는 자유의 머뭇거림’ 이상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초월적 영역으로 무의식을 가정하는 것에 대해서 메를로-뽕티는 ‘인식 수준의 영토화’라고 간주해서 반대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찬성한 게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실존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익명적 신체 구조화 작용으로서 무의식을 해석하고 있는 경우다.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의 힘 자체는 표상될 수 없는데, 특정 실존의 의미를 지칭하지 않고 수많은 실존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 프랑스 구조학자)는 프로이트주의를 의식하면서 무의식이 무언의 코기토, 즉 잠재의식과 다름을 분명히 했다. 잠재의식은 모든 삶의 과정에서 회상과 집적된 상들images의 저장소로서, 기억의 단순한 측면이 되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은 자기의 영속성을 확신하는 동시에 자신의 한계들을 포함하는데,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는 보존된 것으로의 기억이 언제나 이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의식은 언제나 비어있다. 무의식이 잠재의식이 아닌 이상, 우리는 이러한 무의식을 어떤 의식적 형식으로도 실현시킬 수 없다. 잠재구조가 의식이 아니라 의식과 단절되어 있는 무의식이 되면서 주체는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무의식이 작동시키는 지상의 체계들의 한 효과나 표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모형이나 가설에서 요구되는 보편성은 본질의 보편성이 그러하듯이 단절적이고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키는 지성의 힘의 작용인데 파편들이 한편으로는 유사성 없이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유사성을 통해서 서로 관련되어진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동일적 구조가 아니라 차이의 체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메를로-뽕띠의 사상은 후기 구주조의와 상관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장문정)의 주장이다.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버겁게 영원한 법칙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하는 분산적 파편들 속에서 차라리 놀이함으로써 차이의 무한한 심연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그래서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으로 말하기보다는 특이점들의 분배로 표현하고자 한다. 수학적으로 특이점이란 다른 요소들의 위치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값을 의미한다. 차계의 한 요소가 조정되면 다른 모든 요소가 그 영향을 받는 것처럼 특이점은 그것이 변하면 그곳이 속해 있는 전체 형태도 변하게 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이점들의 분배란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관련 요소들의 전체 집합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체계란 단지 순간적일 뿐이다. 체계는 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다른 체계로 변화한다. 마치 장치의 규칙을 장기를 두는 그 순간에 발현되는 것과 같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언어학자 1857-1913)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활동에는 랑그와 파롤로 형식을 구분 지을 수 있다. 파롤이란 말하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오직 일회성만 갖는다. 반면랑그는 누가 어떤 목소리로 말해도 동일한 규칙과 동일한 순서를 나타내는데 이 규칙 전체를 말한다. 문법이 랑그의 일부다. 500명 학생들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게 하면 500개의 파롤이 행해지지만 그 모두에서 오직 하나의 랑그만을 찾을 수 있다. 만약에 기존의 언어규칙에 어긋난 문장을 말한다면 이는 새로운 랑그를 만드는 바가 된다.

소쉬르가 자신의 언어학을 불변의 원칙 즉 랑그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후자인 파롤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변의 규칙은 각각의 놀이가 실행되는 양태를 통해서 실험되고 이처럼 놀이가 실행될 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쉬르에서 공시성과 통시성은 더 이상 단순히 병행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조를 해체하는 구조로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신체다. 한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와 대체가능하며 그렇게 파생된 전체 기호들의 의미와 유사한다. 체계 전체의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각각의 기호의 의미들의 합이 아니라 한 기호의 의미처럼 수렴되어 있다. 기호들의 등가적 순환은 동시에 극화된 전체로서 하나의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이 된다. 순환하기, 반복하기,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바로 의미를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결정이 아니라 수렴이나 극화이기 때문에 또 다른 순환이나 반복에 의해서 수정될 수 있는 열려진 의미이다. 의미란 파롤의 총체적인 운동이며 바로 그런 한에서 파롤은 랑그가 될 수 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란 살아 있는 체험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적인 표현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 인간의 언어활동이란 필연적으로 그러한 체험을 잘게 분절함으로써 그러한 분절의 틈, 즉 기표들의 연쇄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환유작용은 기표와 기표의 연결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데 그것은 저항에 부딪혀 자신을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을 메우기 위해 끊없이 부유(떠다니는)하는 욕망과 같다. 기표는 결코 기의에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등가적인 다른 기표들로 대체하거나 우회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환유적 욕망은 기표들의 연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표가 등가적인 다른 기표로 대체(우회)됨으로써 끝없이 의미를 결핍하게 만들고 도망하게 만드는 환유의 과정은 소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미작용이란 어떤 식으로건 기표와 기의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유의 과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표들 사이에서 이러한 대체가 이루어질 때마다 어떤 의미가 파생되는 비록 그것이 충족된 욕망이나 구현된 의미는 아니라 하더라도, 기표와 기의 사이에 놓였던 의미 저항선을 뚫고 창조적이고 시적인 의미가 수렴되거나 극화된다는 것이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에 의하면 일상적인 의미작용을 신화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파롤이든지 일차적으로 유통시키는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의미를 언제든지 파생시킬 수 있다는 혁명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그는 구조주의적인 의미의 변형을 강조하기 위해 파롤을 신화라고 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등가적 대체를 통해서 그는 어떤 파롤이건-예를 들자면 가장 보편적인 스타일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르주아 계급의 글쓰기나 그들의 과학적 담론조차도- 데카르트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무구하고innocent 명석한 의미작용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스타일을 통해 이데올르기적이며 본질적으로 애매한 의미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 즉 기만적인 ‘글쓰기의 영도’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르로-뽕띠와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롤랑 바르트에게서 신화의 이중적 의미작용은 소쉬르적인(공시적인) 랑그가 아니라 파롤과 관련되며, 메를로-뽕띠의 의미작용도 당연히 소쉬르적인 랑그가 아니라 파롤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랑그는 파롤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 안에서만 또 다른 파롤과 랑그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애기가 된다.

그가 여전히 침묵의 의미작용의 우선성, 즉 일차 파롤을 강조하고 있다면, 그것은 파롤에 내재하는 파롤의 틈을 지칭하기 위해서이지 파롤 바깥에 선험적 사유를 위치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틈이 없다면 구조주의적 변환이나 신화적 의미작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가시성(可視性)이 없으면 언표는 불가능하며, 틈이 없으면 구조가 불가능하며 불가역적이지 않으면 가역적일 수가 없으며, 표상이 가능하다면 표상할 수 없으며, 증여가 아니면 교환이 불가능하다. 대표적으로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이 이러한 표현의 여분과 내용의 잔여 즉 의미론적인 모호성과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새로운 약호화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있지 않은가?

의미작용은 기호를 넘어서 빛나지만 기호들의 진동일 뿐이다. 의미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매 번 내 손에서 빠져 나간다. 의미는 기호들 사이로 미끄러진다. 의미란 단어들의 교차로 나타나는데 또한 단어들 간의 간격 속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도망가는 의미, 진리는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의미를 ‘결정된 틈’이라고 말했는데 그 결정된 틈은 결코 메워질 수 없는 한에서 그 틈을 메우기 위해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끊임없는 진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실존이란 어떤 자연적 대상에 의해서 정의될 수 없는 어떤 의미 속에서 극화(極化)가 되면 실존으로 자리잡더라도 그 실존이 다시 열려지고 연결되려는 곳이 바로 존재의 이쪽이기에 그런 이유로 실존은 자기 고유의 비존재의 경험적 기반으로서 파롤을 창조한다. 파롤은 자연적 존재에로 우리의 실존을 초과하는 것이다.

(평가) ‘인간 몸의 애매함’, 그리고 ‘마저 설명이 안됨’이 메를로-뽕띠가 정리한 인간과 세계상이다. 왜 그런지 이유는 밝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밝혀내면 거기서 또다시 마저 정리가 되지 않는 균열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확답을 내리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사태를 몰고 온다. 자연 변화 속에서 같이 변화되는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은 죽음에 의해서 계속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늘 우연을 접하면서도 나름대로 필연을 조작해낸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미 시작된 죽음의 힘에 의해서 온통 뚫려버린 구멍 투성이가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차이가 주는 피곤함을 직시하는 것만이 실재라고 메를로-뽕띠의 외친다.

(복음적 평) 철학자는 세계의 중심을 모른다. 그저 ‘공백’이라고만 표현하고 몸으로 현상한다. 그러나 복음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즉 인간은 자기를 돌아볼 권한이 없다. 그저 주님의 것이다.(롬 14:8) 세상이나 자신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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