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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2 14:45:49 조회 : 1323         
[소리의 철학]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 ] 박정진 저 소나무(서울:2012)

1. 자연과 소리

“태초에 자연이 있었다.”라는 것이 요한복음 1:1을 의식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시발점이다.

문자로부터의 해방과 소리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포노로지Phonology는 인간에 내재한 자연을 회복하는 것을 모색하며 인류 구원을 철학을 제시하는 목적으로, 인간을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되돌리겠다는 사상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능력의 복원은 인류의 종교와 철학과 과학과 예술의 원형인 샤머니즘에 대해서 새로운 환기를 요청한다. 이성과 과학은 자연의 발전이 아니라 자연을 이성으로 재구성하고, 문자를 중심으로 재조합할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포노로지를 수행할 것이라고 천명한다.

소리는 인간의 인위적 글쓰기가 없어도 귀를 통해서 인간의 몸에 축적되고 저장된다. 저장된 소리는 언젠가 필요할 때 의미로 환생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능력을 지닌 여성이 문자보다 소리에 민감하고, 샤먼이 쉽게 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자연에 남성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자연의 능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소리=자연이라는 상징적 등식이 성립한다고 소리학Phonology은 말한다.

우리의 소리는 인간에 이르러 목소리가 되고, 목소리는 문자에 앞서 음성 언어가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결코 지상의 존재만은 아니다. 소리를 해석하는데 있어 인간의 몸은 같이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리는 인간의 몸에서 기호가 되고 기호는 소리로 재생산된다. 그런데 인간이 매일 접하는 세계는 역동적이고 동일하지 않기에 소리의 의미도 똑같은 의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알지 못하기 사는 것이다. 살 수 밖에 없기에 사는 것이다.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고 잡을 수가 없다. 내가 잡았다고 하는 것(혹은 안다고 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이다. 존재는 무無이고 존재자는 유有이다. 인간은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록인 존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기록이다. 따라서 시간을 소환한다는 것은 시간의 기록을 소환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시간 여행이란 있을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입각해서 시간여행을 언급하는 것은 지독한 환원주의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한다거나 윤회할 수 없다. 부활이나 윤회, 시간여행이라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적 설명(언어적, 구성적, 문명적)일 뿐이다. 인간이 부활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록을 부활하는 것이다. 기록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모두 간접적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즉물卽物주의, 혹은 물신숭배주의자들이다.

2. 신화로 돌아가자

해결책은 있다.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응하는 종교의 원형이다. 샤머니즘은 자연과의 화해를 기초로 해서 성립된 종교이다. 샤머니즘이야말로 가장 수평적인 종요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관련하여 신을 만들고 섬기면서 동식물과 더불어 삶의 행복을 기원하던 종교이다. 토테미즘은 특정 동식물을 집단의 시조始祖)로 여기고, 이를 먹는 것을 금하는 신화적 문화를 말한다. 이는 부족의 분류학이면서도 동시에 부족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환경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적 체계 혹은 이해를 시도한 것이다. 고대 종족에게 있어 특정 동식물이 자연계로부터 선택되는 것은, 그것은 경제적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분이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 신화 안에서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요소는 다른 신화에 그대로 반사되게 된다. 이러한 반사기능으로 인하여 신화 내에서는 특정 ‘주체’가 사라지고 ‘주체의 끊임없는 교환’이 자리 잡게 된다. 마치 유전자DNA 풀pool에서 유전자를 공급받아 현 세계가 유지되는 것과 같다. 유전자의 바다라는 무의식의 매트릭스 위에서 펼쳐지는 인정, 민족, 국가라는 의식의 주체가 다 이런 신화의 바탕 위에서 번져 나온 것이다. 이 가운데 종교에서 말하는 성스러움, 곧 거룩도 등장하는데 이런 거룩은 같은 종족 내에서 자급자족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라는 것은 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의 일부이다.

신화는 결코 사라지지 아니한다. 자연이 있고 인간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아니한다. 관습에 대한 기억을 품고 인류사는 변천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신화적 요소는 예전처럼 다른 부족들의 관습으로 계속 넘겨져서 활용된다. 그래서 신화라는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em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신화적 구조는 형식의 총체가 아니라 원리이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지금도 작동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관련하여 신을 만들고 섬기면서 동식물과 더불어 삶의 행복을 기원하던 종교이다. 절대적이고 유일적인 신을 모시는 종교들은 다시 상대적이고 다신多神적인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는 바로 절대적, 유일신이라는 것이 절대왕권과 모의한 제국주의의 산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고등 종교는 그 어떤 종교라 하더라도 수평적 샤머니즘이 수직적으로 변형된 형태이다. 샤머니즘은, 거대한 권력의 피라미드를 필요치 않을 때 마을 사회, 부족 국가에서 성립한 종교이다. 샤머니즘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인간 종교의 원형이다.

그동안 진화론자의 주장에 의해서, 주술에서 종교, 종교에서 화학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주술→종교→과학의 시퀀스), 이러한 연쇄사슬은 직선적이 아니라 순환되어 도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샤머니즘은 특히 그 이전의 애니미즘(animism 모든 사물에는 영혼과 같은 영적, 생명적인 것이 두루 퍼져 있으며, 삼라만상의 여러 가지 현상은 그것의 작용이라고 믿는 세계관)이나 토테미즘을 통합하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이다. 토테미즘은 특히 동식물과 인간을 맺어주는 이중성의 표상이다. 이 이중성에는 서로에게 먹이는 되는 먹이의 교환과 왕성한 번식을 위한 결혼의 교환마저 있다. 인간은 토테미즘을 통해서 먹느냐, 먹히느냐(사냥하느냐, 사냥 당하느냐)의 생존의 갈림길에서 오랫동안 버텨왔다. 심지어 토테미즘 신화를 통해 토템과 결혼을 함으로써 번식과 집단의 확장에 성공하고 종합적으로 환경에 적응한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신화는 즉 에코로지Ecology, 즉 생태학적이다.

3. 문명

항상 문명의 이면(심층)에 자연이 있듯이 가부장제의 이면에서 모계 사회가 있다. 다시 말하면 모성적 특성이 받혀 주지 않으면 가부장제는 성립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면서 자신을 소유 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는 소유하기 때문에 소유 당하려고 하지 않는 모순 구조에 놓여 있다. 이에 비해 여자는 소유하지 않기(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소유 당하는 것에 강한 반발을 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자궁은 소유할 필요가 없다(가부장장에 길들여진 여자는 다르다) 누구든 자신으로 하여금 생산하게 하고 즐겁게 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자연이다.

현재에도 가부장 사회는 점차 그 힘을 잃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 지구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한 마을(모계 사회의 마을)처럼 가깝게 되었다. 이는 지구가 더 이상 넓고 넓은 정복과 식민지 시장 개척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의 인터넷에 의한 정보화 사회의 구축은 바로 이런 모계 사회 자체의 징후이기도 한다. 인류는 이제 가부장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지구촌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한다.

남자의 가부장 사회에 권력 경쟁은 실은 여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제판에 불과하면서도 밖에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기표가 되고, 권력이 되고 지배자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 즉 여자는 결국 적당한 때에 밖에서 팽창된 모든 것으로 안으로 거두어들이게 된다.

4. 상징

두 발로 서서 이동하여 살아가기 시작한 직립보행의 인간에게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자기 자신, 즉 사람이 사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선先-경험적經驗的 인식 a priori이다. 이것이 상징을 낳는데, 상징 중에도 자연적 상징이다. 이 상징은 처음부터 상징의 이중성에 따라 서로 이중적 의미를 띠거나 겹치거나 순환관계에 놓이게 된다.

겹치는 사고思考가 선형적線型的이 되면 환유換喩(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과 가까운 다른 낱말을 사용하는 수사법)로 나타난다. 범형적이 되면 은유(비유법의 하나로, 행동, 개념, 물체 등을 그와 유사한 성질을 지닌 다른 말로 대체하는 일)가 된다. 과학의 인과적 사고(원인과 결과를 연결짓는 사고방식)는 바로 선형적-환유의 사고 계열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선형적-환유적 사고는 문자적 사고(직선적 사고)로 대변되고, 범형적-은유적 사고는 이미지적 사고가 된다. 이미지적 사고는 회화繪畵에 의해 이끌어져 오다가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절정을 맞고 있다. 사진과 영화, 비디오, 그리고 인터넷은 바로 이미지적 사고, 메트릭스적 사고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실은 매트릭스적 사고를 원시, 고대로부터 해 왔다. 그것이 바로 매핑mapping이다. 매핑은 자연과 겹쳐서 이름을 부여하고 정체성을 갖게 하는 인식 행위이다. 토테니즘도 실은 매핑의 일부이다. 여러 각 집단의 사람들은 각 집단 사이의 특징을 찾아서 그 특징별로 이름을 부여한다. 그들이 이때 이름들을 동물들의 것으로 명명한다. 이 논리는 자연계에서 다람쥐 물총새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분화 체계에서는 비이버 사람과 물총새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매핑과 함께 대립과 중재로 상징적 의미를 창안하는 방법이다. 대립이란 상징적 용어들을 서로 대비되는 한 쌍으로 분리시키는 논리적 고안물을 말한다. 대립 가운데 남/여, 왼쪽/오른쪽 등은 문화적으로 인류사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상징이다. 먼저 남과 여는 생물학적 관계의 대립이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자연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은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문화적 행위를 할 때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상징이다. 움직이는 인간은 항상 왼쪽 아니면 오른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안 되기 때문이다.

중재는 상징적 의미를 창안하는데 세 번째 방법이다. 중재 범죄는 어떤 대립 관계에서 한쪽의 일부분을 다른 쪽으로 것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믿음 체제에서 아주 중요한다. 중재 범주가 대립관계를 붕괴시킨다. 사람이 두 발로 서서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를 볼 때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고, 발아래에는 땅이 있고, 땅 위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천지인天地人 사상은 처음부터 무슨 거대한 철학적 개념 위에 체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전개되는 자연의 양상을 보고 이름붙인 것이다. 따라서 천지인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상징이고 기호이다.

천지인 사상은 무엇보다도 자연을 삼등분하는 매핑을 통해서 우주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을 이해하는 일종의 범형(패러다임paradigm)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발견한, 상징적 의미를 창안하는 방법으로 판단된다. 천지인 사상에는 상징적 의미를 창안하는 방법인 매핑과 대립과 중재의 원리가 모두 숨어 있다. 천지天地는 기본적으로 대립이고, 중재로서 인人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천지인은 기본적으로 순환체계이고,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모든 대립의 관계도 되고, 동시에 중재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그런 상징체계이다.

천-지-인의 구조가 발달하게 되면 실은 상징·구조적인 세계(상징)-진화·생물적인 세계(적응)-정치·권력적인 세계(권력)에 상응하는 세계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의 세계관을 크게 삼분법과 이분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구조는 현대에도 어김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인간 인식의 구조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이 지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천국의 개념이나 지옥이라는 개념도 실은 이와 같은 인식의 구조의 산물이다. 물론 그 사이에 연옥이라는 개념도 끼어든다.

천국은 낙원이어야 하고 지옥은 아비규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가까울수록 고귀하고 땅으로 가까울수록 비천하다는 것이다.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머리로 갈수록 고귀하고 생물로서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몸으로 갈수록 비천하다. 인생에서 확률적으로 보면 언제나 고귀하게 될 확률은 적다. ‘지배자-부자’가 될 확률이 적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고귀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는 설사 기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일종의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하다.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기원하는 상대로서의 신神이라는 상징이 필요한 것이 인간이다. 설사 신앙이 불행할지라도 힘이 된다. 아니, 도리어 불행하면 할수록 더욱더 힘이 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구조는 항상 신에게 빌지만 동시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이중적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않더라도 필요하다. 인간은 신(실재계-상상계, 혹은 존재-존재자)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음으로써 스스로 힘을 얻어 가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상징적 상대로서의 의미가 크다. 신을 객체화하는 이유도 바로 주체를 다스리기 위함이다. 신은 주체이면서 객체이고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신은 상대이면서 절대이고, 절대이면서 상대이다. 예컨대 샤먼이 흔히 재앙의 원인으로 돌리는 귀신이나 귀신을 막는 처방이 틀릴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인간은 그렇게 빌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의지가 강한 사람은 모든 걸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신의 설정 문제는 가부可否나 진위眞僞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문자답하는 방식의 하나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신을, 혹은 귀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했다고 해서 틀리는 것도 아니고 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맞는 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신이라는 상징을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설사 신이 위僞(위조된 것)라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神은 신信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은 새로운 신新이 되어도 문제가 없다. 어차피 인간이 설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신이 자기완결적인 존재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통해 자기완결적인 존재인 것을 우회적으로 역설하게 해준다. 자기 완결적 존재인 인간은 결국 상징적 균형 잡기를 통해 우주관과 삶을 설계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인간은 신을 선택하지 않고도 종의 번영과 생존을 달성하였으며 기타 여러 분야에서 훌륭하게 균형 잡기에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에 있어서다. 집단생활을 하는 종으로서의 인간, 그들의 문명은 대체로 신을 선택하여 왔다. 그래서 각종 종교 의식이 만연하고 도리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종교적 축제를 통해서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지구의 여러 문명, 원주민과 도시 문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상징 세계는 아무리 복잡하고 화려하더라도 상징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있는 한 종교는 영원하다. 종교를 믿으면 영생한다고 역설하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허무와 영생이라는 것은 말로는 정반대이지만 결국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대응 방식이라는 공통점에 속해 있다. 이 둘은 뒤집으면 같은 것이 된다. 그 실체는 바로 자연의 순환이다. 순환에 순응하는 것을 생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고 순환의 입장에서 보면 영생인 것이다. 허무한 것은 생명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허무는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은 변화하고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5. 언어

인류는 소리의 원초성, 예컨대 비분절된 소리, 모음 중심의 소리로 되어 있고 우주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의 선후先後는 초기 단계에서 애매모호할 수 있어도 대체로 음성언어가 먼저 등장하고 그 후에 문자언어, 더욱 세련되고 복잡한 문제언어가 정립되었다. 아, 야, 어, 여, 우에 기초한 ‘모어母語’에는 모계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모어 자연스럽게 목청과 발성 기관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음성언어 혹은 표음문자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神을 뜻하는 ‘갓’, ‘고god’와 신을 부르는 퍼포먼스인 ‘굿gud’와 신에게 행운을 비는 ‘굳good'은 그 좋은 예이다. 또 생물체에게 가장 중요한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말하는 섹스sex, 식스six, 미지수 엑스X와의 관련성도 마찬가지 경우다. 이미 미지의 X는 미지수 외에는 신비, 교차, 십자, 복잡성 등을 상징한다. 또한 마고mago와 마귀magi와 매직magic의 관계도 중요하다.

‘m’이 지닌 신비도 대단하다. 어머니mather, 바탕matrix, 물질matter, 마음mind, 사람Man, 남자man(wo-man)과의 관련성도 중요하다. ‘m’으로 시작하는 발음상의 연관을 느끼게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m’을 발음할 경우 ‘마, 머, 매’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마ma’는 신의 소리, 신성한 소리다.

말을 사용하는 인간의 등장은 바로 자연을 인위적으로 분절하는, 분절의 등장을 의미한다. 문제는 말의 사용은 분절에 투사하느냐, 아니면 말을 사용하지만 분절을 추사하지 않느냐의 문제다. 말은 본질적으로 분절적이다. 여기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실은 시작 문화와 청각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를 청각적으로 보는 것은 공명, 울림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체가 없어도 된다. 이에 비해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는 것은 시각적으로 공간으로 보이는 것을 메워야 하는 부담을 지닌다. 그래서 주체가 있어야 한다.

분절, 끊어짐은 결국 그것을 연결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문화를 일으킨 인간의 문화 전반에 걸친 문제의 바탕이 되는 것이며 여기에부터 사회, 언어, 역사, 권력, 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슈가 발생한다. 이러한 근거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인간의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말과 의미는 몸을 경계선으로 해서 올라온다. 여자는 몸, 남자는 언어에 비유하면, 몸에서 의미(기의記意)가 생성되어 기표記標가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몸은 의미의 그릇이 된다. 이는 여자가 아이를 배는 것과 같은 여자의 잉태가 똑같은 단어가 반전하여 남자에게는 개념concert가 된다. 의미가 형성되면 의미가 밖으로 표출되는 기표를 소리와 기호記號가 다투면서 담당한다. 음성 안에서는 소리가 먼저 기표가 된다. 그러나 문자언어에서는 문자가 소리를 제압한다. 이는 문제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문명을 이루는 이치와 같다. 또한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가부장하는 억압과 같다.

이때 소리는 의미로 변전하여 숨어 있게 된다. 소리가 의미가 되면 기표면 문자를 독점한다. 문자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 된다. 이는 의미의 소유권이 문자에게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과 흡사하며, 동시에 여자가 낳은 아이에 대해 남자의 이름을 붙이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칸막이를 한다는 것이고, 칸막이를 한다는 것은 어떤 주체나 정체성을 덧씌우는 것이다. 이것이 문자의 권력이다.

인간이 음성언어에 의해 살았으면 결코 오늘의 제국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권력의 주요인은 문자에 있다.

세계는 기호의 세계, 기호가 연결(연장)된 세계가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호에 의미가 붙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기호가 붙는다. 기호는 의미라는 아이를 받아서 자신의 이름에 담는다. 의미 작용이란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의미는 기호로부터 자유롭다. 의미 되어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고 저절로 되는 것의 근저에는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초월의 대상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은 돌아가는 대상이면서 없는 동시에 주체이다. 즉 자연 비어 있는 주체이다. 하지만 자연이 비어 있는 것이지 기호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호는 단지 자연을 은유할 따름이다. 세계는 기호의 바다가 아니고 의미의 바다이다.

6. 인간

인간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만물의 영장으로 만물을 지배하면서도 동시에 만물에게 자신을 바쳐야 완성이 되는 존재이다. 이것이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주체로서의 하나님’이다. 이를 종교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부처, 신선, 상제)이 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샤머니즘은 영육일원론과 영육이원론의 경계에 있다. 영육이원론으로 가면 고등 종교가 탄생이 되고, 영육일원론에 남으면 원시 종교인 것이다. 영육이원론과 과학의 발달은 같이 간다. 여기서 자력自力 신앙과 타력他力 신앙이 나온다. 영육 간에 잘 통하는 사람은 자력 신앙을 택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타력 신앙을 택한 것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서로 물고 있는, 서로 겹치는 이중성을 가진, 서로가 서로의 매개가 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매개(촉매, 영매, 관계)를 무시함으로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주인(주체)과 종(대상)은 서로 가역 하는 것이고, 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세계는 끊임없이 요동하고 한데 합쳐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그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이미 동일성을 전제하거나 강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동일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어떤 것, 곧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정체성은 불변의 자아나 절대성을 말한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자아나 절대성이라는 것은 없다, 생각의 대상이 되는 흔히 대상이라고 사물들은 하나같이 같은 것이 없다. 바로 같은 것이 없다는 것, 곧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물의 본질이요 진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나 진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고 혹은 느끼고, 접근하는 그것들에 대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생각보다는 사물을 더 우선시하고, 동일성 보다는 차이에 중점을 두는 것이 사물 그 자체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생각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이미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나 그 무엇은 자기동일성을 갖추지 아니하면 안 된다.

7. 존재가 아닌 생성

존재하고 고정되게 되면 여기에 이理가 생긴다. 곧 이치가 생기는 것이다.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은 기氣를 말한다. 곧 에너지이다. 모든 존재가 곧 이理는 아니지만 존재는 ‘존재=이(理)’를 목적으로 한다. 이에 비해 차음부터 기氣이며 에너지이며 파동이다. 우주는 파동의 바다이다. 그 파동이야말로 생성이다. 다시 말하면‘ 생성=기氣’가 된다. 결국 언어화한다는 것은 과거이고 기억의 집합이다. 현재는 생성의 파도가 아니다.

동양은 오랜 기간 동안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영위해 왔다. 유교는 욕망의 밖에서 욕망을 억제하고, 불교는 욕망 안에서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계는 인간 밖에 있다. 세계는 언어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계속되고 언어도 또한 계속 생산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존재다. 또한 인간 자체가 자연이다. 자연으로부터 생성된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이면서도 자연을 다스리는 이중적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다가도 인간의 자연을 따로 주장하기도 한다. 인간의 다스림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철학은 이理를 강조한다. 이는 철학 자체가 이理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이理를 극복하지 못하면 사변적이고 되고 실천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철학은 철학을 버려야 한다는 요구를 계속 받게 된다.

자연에 반항한 철학은 다시 살길을 찾아 자연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몸은 육체나 물질이 아니고 정신과 영혼이 동거하는 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이 현대에 와서 몸을 찾지만 아직도 그 몸의 주인인 자아, 부성父性, 아버지에 머물러 있다. 인식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아無我, 모성, 어머니로 돌아가야 한다.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쉴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다. 어쩌면 깨달음이 아니고 세계와 하나 됨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것이 없다. 인간이 단지 그것을 설정했을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난 존재 가운데 처음으로 존재를 생각한 존재이다. 생각은 자연의 시뮬라크르(가상 복제물)이다. 이 시뮬라크르는 단지 차이의 복제이다. 자연, 여성, 진정한 인간에 이르는 길도 이러한 것이다. 자연으로 왔으나 자연으로 돌아가자. 태초에 자연이 있었다.

(평) 사람은 날마다 신선한 것을 찾게 된다. 날 것을 원한다. 낡은 것에서 오래 머물면 초조감을 느낀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오래하면 지루하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믿음도 언제 빠져 나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믿는 척하며 남 속이는 짓도 이제는 본인에게도 짜증 날 일이다. 한때 눈에 핏발을 세우고 서슬이 퍼렇게 덤벼들었던 신학 논쟁 게임도 같이 놀아줄 상대가 비겁하게 사라지니 왜 그리 재미가 없는지….

사람 사는 게 뻔하다. 늘 재미있어야 하고, 늘 몸이 편해야 하고, 늘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이라야 순간 살 맛이 난다. 저자(1950년 생)는 평생 세상 학문 세계 속을 이런 식으로 비집고 살아왔다. 굳이 진리를 찾겠다는 것도 아니다. 진리를 찾는 그 과정 자체의 즐거움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람 눈에 늘 대하는 일상의 대자연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보이니 않으니까.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 이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다. 교회 직분과 상관없다. 성경은 잘도 예언해 놓으셨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본 책은, 십자가 영을 받지 않는 자의 세상 보기다. 동시에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도 항시 적용된 안목이다. 예수 오래 믿다가 보니 믿음 떨어지면 안 믿으면 된다. 가룟 유다처럼 지옥 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 “주여, 이제 주님도 별로입니다. 자진해서 지옥 가겠나이다.” 이러한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솔직함을 동양철학을 앞장 세워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의 배면에는 이런 진심이 깔려 있다. “예수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알아보니…”

하지만 복음은 한결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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