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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1 16:19:22 조회 : 1551         
[신은 죽지 않았다 ]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신은 죽지 않았다 ] 아미트 고스와미 저 이봉호 역 시그마인사이트(서울: 2014)

유물론적인 과학자들은 초월성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 세상 밖에 있는 무엇이 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되면 의식 자체가 유물론자들에게 분석이 대상이 되지를 않는다. 그들에게 의식이란 그저 물질의 존재와 작용에 따른 부수현상일 뿐이다. 인간 의식의 무의미는 자연스럽게 인간 존재의 무의미와 더불어 무신론(無神論)적 환경을 조성하게 되고 이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나 윤리나 도덕을 괴멸시킨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저자는 유물론적 과학자들에게 반발한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고 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매번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의식을 인과관계는 최소 물질로부터 큰 물질의 현상을 설명하는 상향적 인과관계를 가지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신의 의지에 있다는 것이다. 신의 의지 작용으로 인하여 대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문제는 신의 존재와 작용을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물리학에 있어 하나의 혁명적 양자 물리학의 발견과 함께 지난 세기 벽두에 일어났다. 양자 물리학에서 양자 의식quantum consciousness이 등장한 것이다.

양자 물리학은 물질과 에너지의 본성과 움직임을 원자와 아원자 입자들의 스케일에서 설명하는 것을 발견한 물리적 과학이다. 그러나 이제 양자 물리학은 모든 물질에 대해 유효하다고 믿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아원자와 같은 미립자들을 단지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가라는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극미소 물질들의 역할을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양자 이론이 시작된 배경이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은 또한 오늘날 별과 은하계, 그리고 빅뱅과 같은 우주적 현상이라는 아주 커다란 대상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은 1900년 막스 플랑크의 연구 작업에서 시작됐다. 플랑크는 그의 양자 이론에서 에너지가 이전가지 믿어져 왔던 것처럼 불변의 전자기 파동으로서가 아니라 물질과 동일한 방식으로 원소들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그는 에너지가 별개의 원소들로 구성되는 것을 의미하는 ‘양자(量子)화’된다고 간주했다.

모든 물질은 입자라고 하는 작은 알갱이로 되어 있다. 이 알갱이는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런 국소(局所)화된 대상들이다. 하지만 이 알갱이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동들이 있다. 이 파동들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점진적으로 퍼지는 변동과 이 와중에서 상호 간섭이 일어나게 된다. 이 파동과 양자, 두 가지 모두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이 양자 물리학 이론의 핵심이다.

모든 양자 대상을 측정할 때는 파동함수에 의해 서술된다. 파동함수는 그 대상이 측정될 때 어떤 위치에서 발견되는지는 확률에 의해서 계산된다. 그런데 각각의 측정은 물질의 상태 안에서 가능성의 파동으로부터 실재의 입자로 변화를 야기한다. 이게 신기한 일이다. 이것을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 function 라고 말한다. 이 개념은 파동 측면의 모든 가능성들이 입자 측면의 하나의 일시적인 확실성으로 축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에 의하면, 의식이라는 것이 없이는 파동함수의 붕괴도, 물질 입자들도, 물질성도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하나의 양자 대상을 바라볼 때, 가능성의 다발로서가 아니라, 뉴턴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입자와 많이 비슷하게, ‘실제적인 어떤 위지를 차지하고 있는 국소적 현상’ actual localized event로서 경험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양자 현상을 설명해낼 길이 없다. 여기에 ‘관찰자 효과’라는 것을 개입시켜 설명해야 한다. 즉 기본 입자들의 ‘가능성을 가진 움직임’은 원자들의 ‘가능성 가진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원자들의 움직임은, ‘가능성을 가진 분자들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또 분자들의 움직임은 ‘가능성을 가진 세포들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또한 그것은 ‘가능성을 가진 뇌’의 상태들을 만들며, 이것이 의식을 만든다. 그렇다면 의식 자체는 가능성들의 집합체이며, 그것은 가능성의 파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유물론적 입장에 있는 과학논리로는 여기에 등장하는 가능성을 실재(實在)로 바꿀 수 없다. 그 이유는 양자 가능성들은 모두 존재의 토대인 의식 그 자체의 가능성들이기에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실재는 모든 양자 가능성으로부터 독특한 국면을 선택하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어느 관점을 선택함으로서 그들 중의 하나를 실재로 이해하는 선택을 발휘한 셈이다. 여기에 대해서 엄격한 유물론자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어 한다. “어떻게 실재라는 것이 각자가 관찰자 되어 뱉어 놓은 결과물이 나중에 서로 같은 겉으로 합의에 이르는 실재가 될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아ego라고 불리는 개인적 의식이라는 일상적인 상태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자아라는 것은 행동주의적 심리학자(=유물론자)자가 연구하는, 조건 형성의 결과인 우리 자신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측면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아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비일상적인 의식적 상태를 의미한다. 즉 기꺼이 신과 일체감을 공유하는 그런 상태를 자아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자 가능성 파동의 붕괴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양자 하나는 A라는 지점 혹은 B라는 지점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지점에 있을 확률이 똑같이 1/2씩이라고 해보자. 관측자는 관측하기 전까지 양자는 A와 B 중 어디에 위치할지는 알 수 없다. 결정론자였고 불확정성 원리에 반대했던 많은 과학자들은 양자가 A와 B 중 어느 하나에 이미 위치해 있고, 관측은 그 위치를 확인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라는 학자는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는 A에 1/2 확률, B에 1/2 확률이 있는 두 개의 상태가 혼재(양자물리학에서는 중첩이라고 표현한다)되어 있으며, 관측을 행하는 순간 확률 붕괴가 일어나면서 (예를 들어 A가 발견됐다면) A의 확률이 1로, B의 확률이 0으로 공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 가능성 붕괴 현상은 ‘선택’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신의 ‘하향적 인과관계’가 발휘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신이 존재하는 증거가 이렇듯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에 과학적으로 따지는 타당성 평가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가 원자로 도약함에 따라 정기적으로 양자도약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예를 들면 방사능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 현상에서 전자들을 때때로 방사능을 가진 원자들의 핵으로부터 나타난다. 이 현상은 전자들이 ‘에너지 장벽’을 통과한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의 전자가 에너지 장벽을 뛰어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에 에너지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일부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장벽 투과, 터널링tunnel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자는 터널링을 하기 위해 공간을 통과하지 않고 양자도약을 함으로써 에너지 장벽을 뚫고 나아간다. 지금 전자는 그 장벽의 이쪽 편에 있다. 그러나 한 순간 뒤, 전자는 양자 점프를 통해 저쪽 편에 존재한다.

동일한 종류의 터널링 현상이 특정한 트랜지스터들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실험자들은 전자들이 에너지 장벽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전이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실험적으로 증명된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전자들은 공간에서 빛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전자들은 공간을 통과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움직이는 것이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자들은 양자도약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가능성 파동possibility waves이라는 용어로 말하자면, 실험자는 하나의 전자라는 가능성 파동을 장벽의 한 쪽에서 붕괴시킨다. 그리고 난 후 즉시, 전자는 다시 한 번 하나의 가능성 파동으로 존재한다. 이 경우 가능성 파동의 가능한 양상들의 하나는 에너지 장벽의 다른 쪽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측이 다른 쪽에 있는 가능성 파동을 붕괴 시킬 때, 두 가지 관측 사이에 시간 경과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 붕괴는 불연속적이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극미시적인 전자 세계로부터 부피가 커다란 인간의 세계로 이르는 길에 계속해서 이 양자도약 ,양자 붕괴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물론 그 길은 아주 기나긴 길이다. 그 과정에서 양자 붕괴는 자기 참조, 혹은 주체-대상이라는 분리라는 현상을 제공하는 뒤엉킨 계층구조를 야기한다. 그 와중에서 ‘나’라는 관찰자, 즉 붕괴로 인해 나타난 명백한 주체는 대상과 함께 상호의존적 양태로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창조성이 반복된다.

이 창조성은 늘 불연속적이다. 하지만 창조성의 불연속성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중요하다. 창조 관정은 네 개의 다른 단계들로 이루어진다. 준비, 무의식적 처리, 통찰, 그리고 발현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 작용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으나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 이루어지는 작용이다. 창조성에 있어 무의식적 처리는 생각의 모호함이 확산되는 것을 담당한다. 이는 양자 측정들 사이에 양자 가능성이 확산되는 것과 유사한다. 물론 창조적인 통찰은 갑작스러우며 불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전자가 사이에 있는 공간을 통과하지 않을 채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 양자도약과 유사한 것이다. 통찰이라는 것은 중단 단계를 거치는 사고과정 없이 하나의 생각에서 별개의 생각으로 넘어가는 불연속적 양자도약이다. 무의식적 처리는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들어 낸다. 통찰은 이러한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의 형태(새로운 가치의 가능성)가 실상으로 나타난(양자 가능성이 붕괴하면서 실재實在로 나타나는 현상) 것이다. 이처럼 창조적 작용은 연속성과 불연속이 분명히 뒤섞여 있다. 불연속성은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연속성은 통제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창조성은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이 실재를 만들어낸다는 의식의 우선성은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상향적 인과관계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특징을 보여준다. 유물론자들이 상향적 인과관계란 이런 논리이다.

삼라만상은 물질의 기본입자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세상 속의 모든 것은 이 하나의 가설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입자들(=소립자)은 원자들이라고 불리는 집합체들을 형성한다. 원자들은 분자들이라고 불리는 보다 큰 집합체들을 형성한다. 분자들은 세포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세포들의 일부(신경세포들)는 우리가 뇌라고 부르는 집합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되는 인간의 개념들을 생각해낸다. 이처럼 기본입자들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식의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들은, 비-물질적 개념들의 전부는 다 이런 물질의 실체 없는 장식용 부수현상이라고 단정해버린다. 예를 들면, 신이나 종교적 의미, 사랑, 기쁨, 느낌, 도덕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더 나아가서 유물론자들은 비-유물론자들을 다음과 같이 공격한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신이 물질적인 세상에서 물체들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종류의 두 가지 실체는 매개 신호 없이 상호작용을 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신호의 교환에는 에너지가 동원된다. 물리적 세계의 에너지만이 항상 보존되거나 일정불변한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실체의 상호 교환은 이 에너지만이 가능하다. (상호작용에 동원되는 관측 도구 개개의 변형들의 합도 포함해서 일정해야 한다.) 만약에 신이 에너지를 가지고 개입한다면 에너지 불변의 원칙이 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일이 없으니 신이나 그 어떤 초자연세계의 개입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끝!”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꾸한다. “인간은 일상적인 의식의 상태 안에서는 현실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현실이라, 혹은 실재란 비-일상적 상태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의도의 힘’이라고 부른다.

관측 이전에 인간의 ‘신 의식(혹은 의식)’은 하나이며 그것의 가능성들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관측은 주체-대상의 분리, 관찰하는 자신self와 관찰되는 세상 간의 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경험하는 주체, 혹은 자신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극을 처음 경험할 경우 통합적이며 우주적인 존재로 경험된다. 이러한 첫 경험에서 우리 인간의 ‘신 의식’은 양자 가능성들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완전히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것은 다만 그 상황을 지배하는 양자역학 법칙의 제약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동일한 자극의 추가적인 경험, 학습에 이르는 경험을 통해 우리 자아 반응들은 그 자극에 대한 과거의 반응들에 의해 편향성을 띄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조건 형성이다. 자극 반응들의 조건화된 패턴(습관의 특징)을 과거 반응들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것은 주체/자신에게 하나의 뚜렷한 국소적 개정, 즉 자아를 부여한다.

우리 인간이 자아 그리고 우리 개인적 조건 형성 패턴에 따라 움직일 때, 우리 경험들은 예측 가능하게 되며 뚜렷한 인과적 연속성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개인적 자아라는 보다 큰 의식을 발달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의 통합적 전체 그리고 우리의 ‘신 의식’과는 별개인 것으로 느낀다. 우리의 의도들이 의도된 결과를 항상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러한 논리는 우주론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설명된다. 많은 유물론자들은 우리 인간이 완전한 우연, 일종의 우주적인 우연한 사고 때문에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물론자들의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우리 안 어느 곳이든 그 어떤 의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우주는 그만큼 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말했다(1993년)

유물론자들의 우주의 진화에 관한 모델은 다음과 같은 빅뱅 후 약 십억 년이 지난 후, 통계상의 우연한 원인에 의한 변들이 은하들을 응축시킨다. 은하들 또한 최초의 구형 가스 구름들로부터 많은 나선형 테들을 가진 좀 더 디스크 형태로 진화하다. 그런 후 별들이 응축하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1세대 별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수십억 년 동안 이러한 1세대 별들은 좀 더 무거운 요소들로 만들지는 폭발인 초신성으로 변한다. 새로운 2세대 별들은 행성들과 함께 초신성 파편들의 부스러기로부터 응축된다. 이러한 행성의 일부(지구와 같은)는 단단한 핵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의 진화에 필요한 것과 같은, 적절한 대기를 만들어 낸다.

우연의 작동은 계속되고 있다고 유물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완전히 우연하게 함께 작용하는 통계적 변동들과 대기의 에너지가 아미노산(단백질의 재료) 혹은 DNA를 구성ㄹ하는 분자를 만들어 낸다. 단백질과 DNA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분자들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세포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며 자신들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살아남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유물론자적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이제 새로운 구성요소가 추가된다. 생존의 필연성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 지구와 같은 행성에는 생명의 진화를 촉진하는 우연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역사가 기록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인류원리’에 입각해서 우주론을 설명한다. ‘인류원리’란 우주의 진화나 존재가 지적 생명체를 위해 맞춰졌다는 것으로, 우주가 인간중심적으로 생성됐다는 이론이다. 문제는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물리법칙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이 우주에 관한 물리적 논리가 지적 생명체를 존재할 확률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다른 ‘인류원리’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우주 때문에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적 실험은 우리는 관찰자인, 우리 인간 때문에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관측의 중요함이 우주론에서 다시금 나타나게 된다. 관측이 그것을 소급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사 나타나게 하기 전까지는 대상의 전체 경로는 여전히 가능성 안에 머문다는 말이다.

마치 야구 세 종류의 야구 심판의 판정법과 같다. 세 명의 야구 심판들이 투수의 공에 대해 나름대로 판정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심판은 뉴턴 학설을 신봉하는 과학자가 말한 것처럼 “나는 있는 그대로 판정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심판은 약간 덜 독선적인 사람이며 그는 전체론자이다. “나는 내가 본대로 판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 번째 심판은 마음속으로는 ‘양자 붕괴적 심판관’이다. “내가 판정하기 전까지 그 어떤 판정도 없다”고 말한다.

우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그 어떤 우주도 없다. 단지 가능성들만이 존재한다. 우리 인간이 그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능성 있는 분기점들 가운데 하나에서 어떤 한 지각 있는 존재가 가능성 속에서 나타날 때 그 때 비로소 우주는 나타난다.

한 관찰자가 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이 가능성에 대해서 선택을 해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모든 대상들은 그저 가능성에 머무른다. 소급적으로 선택할 지라도 말이다. 우주는 하나의 가능성의 파동이며 우주들의 중첩이다. 우주는 그것의 가능성 있는 분기점들 가운데 하나 안에서 지각력과 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는 상태 혹은 존재가 진화기 전까지는 가능성으로 머무른다. 그러다가 최초로 진화된 의식적 존재가 관찰을 하면 그때 우주는 ‘지연된 선택’인양 소급적으로 비로소 나타난다. 양자 붕괴의 순간이 뒤늦게 최초의 시간을 밝혀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우주와 우주의 목적지향성을 가진 설계 때문에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간 때문에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참이다. 이 같은 사실에는 순환성이 존재한다. 순환성은 논리의 와해이며 논리의 와해로 인해 관찰자도 역시 붕괴시켜 존재로 드러나게 만든다. 이것이 신의 뜻이다. 양자 의식이 곧 신인데 이 신은 인간을 참조로 해서 움직임을 나타낸다. 유물론적의 결함은 ‘생명의 자기 참조’를 고려하지 못한데 있다.

신의 개입에 의해서 진행되는 하향적 인과관계에서는 처음부터 의식 및 초정신적 지성과(=신) 정신적, 생기(生氣)적 및 육체적 가능성들을 있다고 보고 거기서 불연속적 비-국소적 붕괴가 일어나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느끼는 생기체’와 ‘생각하는 멘탈체’와 ‘직감하는 초정신적 지성체’와 ‘지각하는 물질체’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신은 사람을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고 있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무의식을 의식으로 만드는 놀이를 하신 것이다. 규칙 없는 게임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은 규칙과 제약과 맥락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움직임들과 변화들을 위한 원형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양자 물리학의 규칙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양자 가능성이라는 초정신적 세계를 갖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단계에서는 의미성이라는 추가적인 제약이 가해진다. 모든 양자 가능성들 중에서 의미 있는 가능성들로 제한이 되는데 이것이 ‘초정신적’ 세계가 아니라 ‘정신’ 세계이다.

그 다음 밑으로 점점 내려가는 차원은 생기 세계라는 가능성들이다. 생기 세계라는 것은 어떤 역할을 하게 하는 특별한 생물학적 형태들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주는 형태형성의 장들을 말한다. 신비체는 스스로 붕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붕괴에는 오직 미시적인 것이 거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질 때만 나타나는 뒤엉킨 계층질서적인 양자 측정 장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차원은 물질체이다. 물질체인 육체는 처음에는 양자 가능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로서 나타나게 돕는다. 그런 후 앞서 지나가버린 미세한 생기, 정신, 그리고 초정신 세계들의 소프트웨어 표상을 만들어 내는 미적인 것과 거시적 것의 특별한 설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진화는 첫 번째 살아있는 세포의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그 세포는 보다 복잡하고 더욱 체계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목적인 더욱더 많은 생물학적 기능들을 정교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바로 형태형성의 장이라는 설계도 때문이다. 이것이 생명의 진화이다.

유물론적이고 고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생물학자들은 양자 유전자 변형들은 의식이라는 것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없이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 붕괴는 의식과 하향적 관계라는 의도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라고 육안으로 보이는 특성을 창조하는데 있어 표현되지 않는 어떤 유전자는 드러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의식은 표현되지 않는 유전적 변이들-모든 양자 가능성들-을 유전적 변이들의 전체 형태가 표현되어 새로운 기관을 만들기 전까지는 붕괴시키지 않는다. 의식은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창조적인 과정에 그렇듯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 처리해야 할 것에 대한 대략의 가이드라인을 무의식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의 생기적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태공명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어떤 종의 한 개체가 습득한 행동양식은 형태장을 통해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에게도 전파된다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양자도약은 갑자기 발생하며 의식은 붕괴되지 않는 모든 필요한 유전자들을 즉시 나타냄으로써 형태형성 설계도의 물질적 표상(기관)을 만들어낸다. 생기의 비-국소성이 결국 종species로 작용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뇌의 신피질은 생물학적 존재 안에서 진화하며, 그렇게 되면 이제 정신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진화는 정신적 의미를 나타내는 진화가 된다. 이 진화의 끝은 바로 모든 인간이 신성을 갖는 것이다. 비록 선하신 신이 악이 출현하는 것을 허용은 하지만 신성 자체가 아주 원시적으로 불완전한데부터 출발해서 점점 나아가는 표상들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선한 것이 점차 악을 능가하게 된다.

저자는 결론 삼아 범종교적으로 이 양자 물리학에서 발견한 양자 의식의 원리가 적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뉴턴 물리학에서는 대상은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에서는 대상들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아라는 것도 미리 결정된 대상이 아니다. 신의 선택, 곧 양자 의식의 선택은 양자 가능성들을 한 관찰자에게 경험되는 실제적인 사상(事象)event으로 변형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상향, 하향 뒤엉킨 계층구조Tangled Hierarchy에서 놓이게 된다. 여기서 자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꿈을 꾸어놓고서 누가 꿈을 꾸느냐 라는 질문은 유물론자에게는 곤혹스러운 질문이 된다. 주관적 경험에 대한 객관적 설명은 결코 풀리지 않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담박하게 답변한다. “의식이 꿈꾼다” 즉 꿈꾸는 주체를 구분하는 과정을 통해 꿈을 꾸는 것이다. 이는 곧 의식이 자아를 만들어 낸다는 말과 같다. 자아는 부여받는 것이지 결코 자아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놓여 있는 일종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8:58과 요한복음 10:38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

자아가 자아를 초월하거나 추월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양자 의식이라는 행위주체가 자아를 초월한다. 이 신은 비-국소적 상호작용 관계의 대상으로 자아를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첫째, 신의 모습과 하향적 인과관계, 둘째, 인간의 신비체적인 본질성, 세 째, 순결과 죄 라는 기본원리를 갖추게 되는데 이는 인간들이 비-국소적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참된 일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을 저자는 ‘변형’이라고 표현한다. 변형된 자는 신성한 자이며 그런 양자 자아를 가진 분이 예수라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 통합을 거론하면서 요한복음 10:16을 인용한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즉 그 예수에게 그 어떤 악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신의 가능태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평)

저자는 신 자체가 악마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게 된 그 이유가 바로 인간들이 성경을 보는 바가 동기가 되어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 올린 그 상상한 신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신’이라는 이미지로 이 세상에 뭔가 건전한 영향력을 실시해보겠다는 의식 자체가 결코 예수님에게 나온 발상이 아니다. 영적 덫이다.

예수님은 오직 언약을 앞장세우면서 일하신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에 그러하다. 예수님의 출현, 곧 언약 완성의 출현 현장에서는 필히 그동안 감추어졌던 악마의 그 본색을 드러나게 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악마 논리의 시작은 ‘신’ 혹은 ‘신의 존재’이다. 하지만 예수님 논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약속(언약)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렇게 소개하신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따라서 복음적 진실은 이러하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을 리가 없다는 자들에게 의해서…”

 첨부파일 : 신은 죽지 않았다.hwp (51.0K), Down: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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