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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1:07:35 조회 : 1568         
[기독교의 본질] 포이에르바하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기독교의 본질]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저 박순경 역 서울(종교서적:1982)

저자: Ludwig Feuerbach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1804-1872. 독일 철학자

짐승에 있어서는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이 합일되어 있지만 인간은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 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의 무한자 의식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이 하나의 존재자라면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또한 그 존재자가 가지는 의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성의 목적은 그냥 이성이다. 사랑의 목적은 그냥 사랑이다. 의지의 목적은 그냥 의지의 자유이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그것을 소유할 수도 없고 또한 만들 수도 없다. 그냥 그대로 노출시킬 뿐이다. 무한자, 즉 인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신이라 불리는 그 대상은 무엇인가? 자연에 나타난 것으로 쉬운 예가 있다. 태양은 여러 행성들의 공통적인 객체이다. 수성, 금성, 토성 그리고 천왕성에 있어 그들 나름대로의 태양이다. 각각의 행성은 그것 자체의 태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왕성상에 있어서의 태양은 실제로 지구상에서의 태양과 다른 태양이다. 동시에 지구에 대한 태양의 관계는 자기 주체의 본질에 대한 관계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지구의 대상으로서 갖는 크기와 빛의 강도와 성질은 거리에 의해서 척도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즉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대상은 인간 자신의 본질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하루살이의 생명은 더 오래 살고 있는 다른 동물의 생명과 비교하면 대단히 짧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살이에게는 이 짧은 생명도 다른 동물에게 있어서의 수년의 생명만큼이나 긴 것이다. 이처럼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그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자의 재능이며 그 존재의 능력이다.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히 행복하고 또한 만족해하는 것이다. 이 제한된 오성으로 제한 자기 본질을 찬양한다. 왜냐하면 제한된 오성은 제한된 본질의 오성이기 때문이다. 오성이란 곧 본질의 시야이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의 눈이 다다르는 한 연장되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의 본질이 연장되는 곳까지만 도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감정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의 주장) 신의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나타낸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감정이 종교의 제 1 원리로 주장하게 되면 과거에 그렇게도 신성하다는 기독교 교리들이 무의미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감정은 당신의 신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 안에 있는 본질로부터 다른 대상적 본질을 구별하려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감정을 초월하려 하는가?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참 본질을 넘어 설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상상을 매개로 하여 자기보다 더 높은 종류의 개인을 생각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종(種)이나 본성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소위 믿음 있는 사람은 신의 존재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꼭 인간 일반에게 존재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신과 ‘나를 위한 신’을 구별지므로서 자기 자신을 초월했다고 자부한다. 즉 자신의 본성, 자신의 절대적 척도를 초월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초월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는 대상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서만 자체적으로 있는 것과 ‘나를 위한 존재’하는 것과 대상과의 구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이 나의 절대적 척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곳, 또 대상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나는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과의 구별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신의 (서)술어와 인간의 (서)술어와의 동일성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동일성)을 없애므로 서 신의 초월성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를 인간들이 하게 된다. 즉 신은 무한한 존재로써 다양한 술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충만이라는 표상에 의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신이 인간적인 본질과 전혀 다른 본질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 이외에 술어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묘사된 것뿐이다. 따라서 진실은 미래, 즉 피안의 세계에서는 비로소 가능한데 이 피안의 세계는 자꾸만 지연될 뿐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모르겠다”는 고백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겸손한 답변일 뿐이다.

앞으로 인간의 본질을 계속해서 풍부해진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새로운 서술어서 새로 태어난 인간들의 재능으로 더 늘어날 뿐이다. 현재인은 미래인에 비해서 바보다. 이는 동일한 해답을 보장받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포이어바흐(이 책에서는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의 오성(悟性)을 원본적-원초적 본질로 본다. 오성은 만물의 제 1원인으로서 세계의 근거와 목적과 질서를 명석하게 판명하고 파악한다. 즉 오성이 모든 것의 규준(진리 측정 기존)이다. 오성은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본질이다. 오성의 통일성이 곧 신의 통일성으로 이어진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사유할 때 나는 내 안에서 나의 자아가 사유하고 있는 것이며 어떤 다른 것이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안에서의 이 사유가 나의 외부의 다른 사물에 내속(內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내속한다는 것을 추론한다. 따라서 역시 나는 내가 실체라는 것과 즉 나는 다른 사물의 술어로 존재하는 일없이 나 자신을 위하여 실존하다는 것을 추론한다.”

즉 나는 2+3이 5가 된다는 것을 알며, 또한 개와 사람을 구분할 줄도 안다. 이게 다 오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무한까지 확대하자. 그렇게 해서 확대된 것에 하자가 있다면 이는 처음 출발한 밑바닥 오성에서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2+3이 6이 될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개가 사람의 일종이라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그 품성과 인격성은 오성으로 인해 충분히 보장된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는 곧 신은 무한이라는 형식으로 덧입혀진 오성의 총체적 구성물이라는 말도 증명해주는 것이다. 신성(神聖)함이란 오성이 보여주는 최종적인 도덕성이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필히 성육신을 거론한다. 하지만 인간화된 신은 단지 신화(神化)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으로 격하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 고양(高揚)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즉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내기 전에 인간이 이미 신 안에 있었으며 이미 신 자신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신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늘 타당하다.

“신은 사랑이다”는 명제에 있어 잠시 신이 주어자리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신이 자기의 신성(神性)을 거부한다는 것은(성육신 사건)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술어(術語)인 사랑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성보다도 더 높은 힘이며 진리인 것이다. 사랑은 신을 초극한다. 사랑을 위해 신은 자신의 신적 존엄성을 희생하였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른 것인가? 신이 신을 위한 사랑인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오성이 기대했던 바로 그 사랑이다. 곧 인간이 인간에게서 기대한 그 사랑이다.

만일 신이 참으로 사랑한다면 신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신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에게서는 없어야 한다. 인간이 납득 못할 사랑을 신이 제시하면 인간은 “악마야, 저리 가라!”고 외칠 것이다. 인간들이 성육신을 통해 신의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기대한 사랑이 바로 거기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나타낸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두 종류가 발생하게 된다. 사랑이 과연 복수(複數)형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와 같다. 따라서 신의 사랑은 단수(單數)다. 인간의 사랑은 구별되지 않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사랑이다. 따라서 성육신 사건이 있건 없건 인간이 자기 초월에 대해 애정을 바치는 행위는 모두 사랑의 단일 의미에 합치한다. 따라서 진리란 기독교에만 소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담겨있다. 모든 종교다 다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신의 내용이라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가장 깊은 속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도 사랑은 내 속에 있다.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사람이든 물건이든)을 잃을 때 왜 슬퍼하며 왜 상실하는가? 인간이 내부의 사랑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인간의 본질이 그 자체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의 본질 안에 있는 그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의식이나 핵심적인 교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첫째. 세례식 및 성찬식에 대해서

효력이 없는 물을 가지고 세례를 하고 효력이 없는 떡과 포도주로서 의식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든 의식이 물(物)(Nothing=평범)다운가! 즉 신성하게 겉보임을 보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물질에 대해서 평범성을 부여하는 인간적인 속성에 대한 무례함이요 위선이다 는 말이다.

둘째, 삼위일체에 대해서

신을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구별 짓기 위해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고독은 사상가의 궁극적인 욕구 목표가 된다. 고독은 자족이며 자기- 만족이다. 이 욕구를 간접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제 2, 제 3의 인격화된 신이 필요한 것이다. 인격과 인간의 만남에서만 비로소 통합된 사랑이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기도의 비밀에 대해서

예술가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귀로 기울이며 그것을 대상화하고서는 자신을 치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자는 종교적 예술가이다. 자신의 심정에 깃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허공으로 전달하며 자신의 고통을 일반적인 본질로 만들면서 그 짐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자연은 무정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온다. 남모르게 숨어서 자기에게도 무섭고 무거운 억압된 비밀을 털어놓는다. 신이란 바로 이런 탄식이 있는 곳에서 해소하는 배출구로서 출현한다. 신은 인간의 만들어 놓은 세계의 같은 구성원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성원은 자연이 이기는 기적을 행사하는 위력자라고 욕구는 일방적으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연의 운행까지 변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제한 없는 소망이 춤추고 있는 바로 그곳이 인간 본인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본질이다. 이로서 인간은 기도하면서 자기로 인하여 즐겁고 행복하다. 곧 자아도취이다.

넷째, 부활과 불멸과 영생에 대해서

인간의 자기 본질에서 일어나는 불쾌함 제거책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쾌함을 피안의 세계에서 해결코자 한다. 하지만 해소된 즐거움은 언제든지 자기 쪽으로 귀환시킨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다. 인간들이 신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실은 자신의 육체에서 분리된 자기 혼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끝까지 자신의 잔존을 버릴 생각이 없다. 사체(死體)가 가지고 다시 자기를 만들어낸다. 영원한 존재로. 자신의 제 2의 신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실생활에서 오는 불쾌함이 끼지 않는 영원한 불멸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런 속성이 이미 인간의 본질의 내용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종교로 통해서 노출되는 것이다.

다섯째, 고난 받는 신에 대해서

신을 존중해주기 위해 신보다 더 행복해서는 아니 된다는 의식의 발로가 ‘고난받는 그리스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나는 이 땅에 살면서 얻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가? 이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다!”고 여기는 것이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가졌기에 그 가치의 드높이기 위해서도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가상한 마음으로 지옥 갈 불신자와의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평)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사회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이나 종교는 인간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곧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 자체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p 17)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을 덧붙인다.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고. 쉽게 말해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인간아. 너는 그저 인간에 불과함을 알라!” 종교를 가졌다고 인간의 위상이 변모되는 것이 아니다 는 말이다.

(복음적 평)

저자는 예수님의 특수성, 곧 주되심을 알지 못한다. ‘주’라는 의미가 구약 때부터 줄곧 성취되어 온 언약을 통해 증거된다 는 것조차 모른다. 그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따라서 이 세상 전체가 (저자 본인의 존재와 활동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5-16)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영적 전쟁터로 보고 있다.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저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는 식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도라 자처하는 자들에게 있어 본 책은 민망한 것을 감추지 않는 동지(同志)의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첨부파일 : 기독교의 본질.hwp (29.0K), Down: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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