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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0 15:22:52 조회 : 1243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저 오생근 역 나남(서울: 2014)

이 책의 목표는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 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악인이 정당하게 처벌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가능하다면 악인은 스스로를 재판하고, 스스로에게 유죄 선고를 내려져야 한다. 사법적 처벌은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의식 행사에 속하는 것이다.

군주가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에는 법이 군주의 의지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군주를 인격적으로 해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징벌은 손실에 대한 보상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며 처벌 속에서 군주는 자기 권력의 몫이 항상 챙겨야 한다. 처형 의식의 목적은 군주와 아랫사람 사이에 벌어진 힘의 불균형을 최대한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곧 범죄는 군주의 적이라는 차원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백성들을 향하여 각인시키는 것이다.

모든 처벌의 잔인성이란 통치자에게 가해지는 도전의 모습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군주는 보복하게 되는데 그 보복성의 잔인성은 신체형 처벌을 통해서 가시화된다. 군주의 신체와 범죄자의 신체가 한데 묶을 수 있는 일반적 신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18세기와 19세기 개혁자들은 신체적 처형이 단순히 민중을 위협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처형제도의 폐지를 요청하게 된다. 왜냐하면 통치 권력보다 민중의 연대의식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군주가 사적으로 복수하는 식의 형벌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부의 전반적인 증가와 인구의 급증에 따라 민중적 위법행위의 중심적 표적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재산이 일치적인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날치기나 절도 대신에 밀수입이라든지 징세관리들과의 무장 투쟁으로 양상이 바뀐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소유권은 절대적인 소유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권리에 관한 위법행위이라는 풍부한 영역을 확보한 셈이다.

전에는 범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제압하는 군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이상, 각자의 재산을 보호하는데 지장이 되는 무질서를 정비하는데 목표로 처벌의 효과를 노려야 했다. 질서란 만인이 납득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유죄 선고와 무죄 방면의 이유가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사법 당국은 사회에 대한 개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데 신경 써야 한다. 이는 곧 범죄와 범죄의 객관화로 이어진다.

범죄나 처벌이 모두 사법적 기호로 매겨져 거대한 질서망 속에 편입되어진다는 뜻이다. 범죄를 꿈꾸는 자는 범행에 대한 생각만으로 처벌에 관한 기호를 일깨우게 될 것이다. 기호와 범죄규정의 객관화는 감정적 요소를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고 중성적 성질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법이 입법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기에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폭력과 살인을 행사하는 식으로 처벌을 내린다는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복수 감정에 입각하여 범죄인을 상대로 본인들의 분통을 터트리고 보복하면서 해소하고 마는 식이 아니라 ‘이성적 미학(美學)’이 가동해서 범죄자를 치유해서 다시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갱신 프로그램으로 처벌이 진행된다. 그들로 강제로 일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는 상거래를 불편하게 만드는 비실용적 도리가 너무나 많고, 도둑들은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방해하는 자들이기에 그들 손으로 도로재건 작업을 수행하여 과거에 자신이 사회에 끼친 손실을 보장하는 데 여생을 바치게끔 하는 것이다.

‘징벌이라는 기호’는 과거의 범죄자들이 신체형 형벌을 받으면서 새겨진 뺨이나 어깨에 새겨지는 낙인과 같은 것으로서 처벌법을 범사회적으로 유포하는 본보기로서 개입된다. 즉 법전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법의 현실이 곧 유일한 현실임을 대외적으로 알려주는 기능을 범죄자들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범사회적으로 새로운 의식에 관한 기호체계를 생시키게 한다.

전에는 범죄자에 대한 교수형이 마을의 축제였지만 이제는 교도소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시범적 교육장이 된다. 법은 교도소를 담을 넘어 범사회적으로 실제화되어 있음을 누구나 수용한다. 모든 국민은 ‘잠복적 범죄자들’이다. 범죄자에게 실제적인 처벌이 미리 전 국민을 상대로 선취(先取)되어 있다. 이것이 권력의 실체이다.

범죄자는 교도소에는 노동이 의무화되어 있고 공공작업을 한다. 작업에 대해서는 수당도 지급된다. 그들로 하여금 무위도식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깃들게 한다. 그러면 나쁜 소행도 고쳐지고, 일하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출소 후 얼마간의 수입을 손에 넣으면 걱정 없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된다. 그는 아무 위험 없이 생계가 보장되는 직업교육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경제적 인간으로 재교육 받는 기간이 사람이 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범죄가가 사회에 진 빚을 돈으로 갚은 형식이 된다. 이것이 개혁의 전략이다.

권력이 더 익명적이고 기능적으로 됨에 따라 권력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 더 분명히 개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의 시대에는 개인화가 군주권이 행사하거나 권력의 상층부에서 그 본질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무공의 업적인 있는 가문과 족보를 자랑하는 식으로 개인화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이 보편화되는 시대에서는 ‘정상’을 규정하는 비교의 척도에 따라 차이를 통해서 천한 계급에서 개인화가 돋보이게 된다. 예를 들면 환자가 건강한 사람보다 먼저 개인적으로 규율의 대상이 되며 광인(狂人)이 보통 사람보다, 비행(非行)자가 보통사람보다 더 개인화된다. 이는 개인의 형성에 있어 전통과 역사적인 관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규율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바라보는 쪽에서 시작해서 관찰의 대상의 생성으로 완성된다. 규율의 기호화는 권력이 개개인의 신체에 제한을 거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에 굴복하도록 조치하게 된다. ‘새로운 정신’이란 곧 ‘인간다운 인간성 확립’이다. 이는 유용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기술의 발달로 이어진다. 보다 생산적인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인의 온전한 모습이 우리의 사회질서에 의해서 절단되고 억압되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 속에서 힘과 신체에 관한 전술에 의거하여 개인은 세밀한 의도로 빚어지는 것이다. ‘부드러움-생산성-이익’의 원칙에 따라 규율의 기호가 작용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객체화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교류하는 가운데 권력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경제적인 도약이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한 여러 가지 방법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면, 인간의 축적도 이 자본이 축적운동을 가속화하는 식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면, 자본이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군대에서나 통하는 규율이 산업조직 전반에 동원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일괄 감시체제의 형식을 사회 곳곳에서 채택하는 이유이다.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형식은 ‘일망감시시설’을 두고 말한다. 거대한 원형으로 된 건물 중앙의 감독실에서 소장이나 간수장이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독방의 출입구와 심지어는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 보일 최대한 많은 독방의 내부뿐만 아니라 각 층에서 죄의 수감을 담당하는 감시자들까지 모두 보게 된다면 감시는 완벽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1808년 법전 이전 시대에는 죄에 대한 속죄와 관련해서 형벌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는 죄인의 개심(改心)에 비중을 두게 된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 도덕 감정이 자기의 내면에서 다시 깨어남을 느끼는 것이 도덕적 변화이다. 비록 교도소 벽은 끔찍스러우나 인간은 선량하다. 간수가 순시할 때마다 몇 마디의 친절한 언설이 감시인의 정직한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면 수형자는 그 언설이 전해주는 희망과 위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 속에 받아들인다.

그러면 감옥은 본질적인 활력을 되찾은 사회 자체가 되고, 영생의 요람이 된다. 한시적인 단절과 격리를 통해서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귀 기울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 근대 감옥의 취지이다. 따라서 수감 기간도 형벌의 양에 따라 복역되는 것이 아니라 개심의 정도에 따라 후차적으로 조정되어진다. 개심을 유도하는 통제에 대한 순응 여부에 따라 죄의 질도 판정된다. 악인을 교정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고정이 일단 이루어지면 죄인은 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 개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구금하는 것은 비인간적 처사이기 때문이다.

1836년에 내각에 보고된 중앙형무소 소장(프랑스)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경범죄의 수형자가 가장 사악하다는 것이다. 중죄의 수형자 중에는 격정적인 흥분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죄하거나 혹은 많은 식구들의 생계문제의 필요성 때문에 본인들이 희생해서 범죄한 경우들이 많지만, 경범죄들은 사기꾼이나 방탕자 또는 게으른 자들이기 개심에 불성실하다. 하지만 중형자들은 경범자들보다 훨씬 순종적이고 성실히 복역생활에 임한다는 것이다.

수형자들의 정신 안에 선악의 개념을 일깨우고, 그들을 도덕적 반성으로 이끌며 그들을 어느 정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는 그들로부터 어떤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문제는 더욱 치밀해진 사회 전반에 걸친 감시 시설과 기술로 인해 위법 사례가 더욱더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감시 체계가 치밀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특별한 범죄 행위가 되지도 않을 경우들이 위법자의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도소 내에 범죄인들의 노동으로 인하여 바깥 사회에서 건실한 노동자들의 수입에 손실이 주어지는 경우, 바깥 사회에서 파업을 해버리게 되면 이는 또한 질서를 문란케 하는 범죄자에 합류하는 셈이 된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기계 설비 파괴, 혹은 파업과 노동운동이나 집단결사 형성에 의해 조업 중단, 주거부정, 원료나 완료된 작업의 양과 질에 관련된 속임수 같은 것은 새로운 합법을 가장한 노동착취 제도에 대항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위법행위들은 범과 동시에 법을 강요하는(법에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급을 맞서 싸우는 온갖 투쟁과 관련되는 것이다. 곧 범죄 행위가 추가적으로 도입된 법의 실존적 의미를 부가시켜 법을 더욱 더 증강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의 적용이 만인을 위해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법원에서는 사회 전체가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부류가 무질서에 빠져 있는 어떤 사회적 부류를 제재하는 것이 된다. 기소인 및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쪽과 피의자 및 피고인의 의자에 있는 다른 한쪽으로 뚜렷하게 구별된 두 계급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비행(非行)의 악순환은 결국 처벌은 가능하나 교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감옥의 부산물이라기보다, 위법행위들을 관리하기 위해 감금이 주요한 업무가 되었을 때에 ‘처벌-메커니즘’이 마치 자본의 순환처럼 새로운 투자처로 형벌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적법성과 위법적 실행 사이에는 분명 법률적 대립이 성립하지만 위법 행위와 위법 행위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질서법에 비협조적인 비행은 전략적 대립이 형성한다. 따라서 비행마저도 위법으로 전환시켜 감금하려면 지속적으로 처벌이 자본처럼 투자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범법자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경찰 권력은 지배 계급의 전략적 조치에 의해서 비행마저 위법적 행위로 전환시키는데 동원된다. 보다 감시자를 늘어놓기 위해 밀고자(정보원)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이들 밀고자들은 대부분 전과자들인데 이들은 자기들보다 더 나쁜 악인을 발견하여 사회질서 안정과 법치국가 유지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인해 그 전의 죄책에서 부담을 갖지 않게 된다.

경찰-감옥-범죄는 상호보완적이 되며 결코 중단되지 않는 회로를 형성하는 전체적 양상을 띠게 된다.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처벌의 메커니즘mechanism(어떤 대상의 작동 원리나 구조)을 나타내는 구조적 특성이다.

단순한 탈선을 출발점으로 하여 점차적으로 규칙을 무겁게 하고 제재의 강도를 높이는 처벌 기준과 제도들의 사이의 연속성, 독단적이나 비난은 피해가면서도 규정에 의거하여 관찰과 평가를 통해 등급을 매이고, 주모 관청들을 세분화시켜 확산시켜 나가는 기구를 갖추는 것이 근대 사회의 권력 표출형태다. 평등을 표방한 사회계약이론이 법적 주체의 허구성을 통해서 규율의 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권력기구의 한없는 복제 체제는 무한한 욕망을 현실화해가는 시장경제 원리를 닮았다. 권력은 특정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그 자체가 곧 권력이다.

(평)

서양사의 오랜 기독교적인 전통에서 보면, 육체가 곧 영혼의 감옥으로 진술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푸코는 오히려 정반대로 진술한다. 영혼이 육체를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에 길들여진 영혼이 육체의 언어에게 침묵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외쳤던 진리란 권력에서 초연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권력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권력과 무관한 진리는 없다.

권력의 역사적 변형이 곧 그 시대에 써먹던 진리였다. 모든 그 시대의 생각과 행동은 그 시대가 임의로 정해놓은 규칙에 복종하는 실천양식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식은 단순히 권력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식의 생체적 권력이다. 이 권력에 의해서 오늘날 인간들은 스스로 예(禮)를 갖춘다. 알 수 없는 허구적 권력을 위하여.

(복음적 평)

성경은 두 이질적 힘 사이에 인간을 두고서 평하신다. 한 종류의 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또 다른 힘이 있었다. 또 다른 힘에 의해 인간은 허무를 느낀다. 파악할 수 없다.

전도서 1:14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되어 있다. 이러니 세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자기 자신도 바람에 포함된다.

전도서 1:17-18에 보면,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되어 있다.

언약은 자기 사람에게 ‘다른 현실’을 접하게 하신다. 이렇게 되면 언약사람을 통해서 두 종류가 구분지어 나온다. 푸코는 이 언약적 힘을 모른다.

왜 모를까? 본인 잘못이 아니다. 악마의 위세에 눌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사람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계시는 그리스도를 악마는 오늘도 못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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