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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2:34:17 조회 : 1386         
리꾀르의 해석학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리꾀르Paul Ricoeur(1912-2005)의 해석학

2007년 5월 23일

사람은 계속 뭔가를 향하여 물고 늘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묻는 자기 자신을 몰라서’ 그러하다. 이 과정이 해석이다. 즉 해석이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되묻는 물음으로 멀리 우회해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리꾀르는 이처럼 해석학을 주체문제와 관련시켜서 소개한다. 성경을 해석하던, 대자연의 현상을 해석하던, 인간의 심리를 해석하던, 그 모든 해석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부단히 물고 늘어지면서 물어대며 이유도 모르는 채 불안 해 하면서 도피하고 초월하려는 염려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견해는 바로 하이데거에서 온 견해이다.

따라서 리꾀르는 기존의 근대 주체사상을 왜 하이데거가 공박해야만 했던가를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인간은, 자기를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확실히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눈앞에 놓여진 사물이 아니면 세계 안에 존재한다. 곧 세계가 인간보다 우선이다는 말이다.

인간의 존재 자리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쳐들어와서 만든 자리다. 인간은 늘 사태가 덮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존재성이란 사태 자체다! 이렇게 되면 ‘나’가 빠진다. 어떤 시태가 덮쳐 지나가고 난 뒤 앞 뒤로 ‘나’를 주체로 등장시키는 것은 문법적 습관일 뿐이다고 니체는 말한다.

사실상 ‘아래에’,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행위는 행위 자체며 모든 생성은 생성 그 자체일 뿐이다. 니체에게 있어 주체란 주체들 서로 간에 투장하는 주체들의 다양성으로 파악한다. 물론 그 주체들은 사태나 사건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로서 하나의 주체는 없으며 주체 ‘들’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흩어진 주체성’이다.

이 주체들이 ‘사실’을 말할 때, 실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들’뿐이다. 하지만 리꾀르가 볼 때의 니체의 이런 주장은 해석을 일으키는 매개와 해석을 행하는 주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리꾀르는 매개에 주목한다. 만약 신의 뜻을 해석하려면 성경이라는 매개물이 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리꾀르에게 있어 해석이란, 주체가 아무런 매개물없이 사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개물와 주체와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니체의 주체론을 따르지 않고 하이데거의 주체론을 따르게 된다.

하이데거는 ‘말 함’, 혹은 ‘말 건냄’을 인간이 이 세계 안에서 주체자로 등장되게 하는 사건으로 말로 보고 있다. 주체 물음은 존재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려 오는 바, ‘그 자리’의 문제로 바라 본다. 즉 묻는 본인이 그 ‘물음으로 인하여 걸리는’ 자리가 바로 주체의 자리이다.

말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주체로 만들 특이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 되고 그 자리는 비어 있거나 평균성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평균성’이란 일상적인 애매하고 산만한 삶을 의미한다. 말은 현존재를 은폐와 드러냄으로 출몰케 한다. 이로서 언의 본질은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즉 자신을 너머서서 다른 것을 지시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 말로 통해 뜻들이 자라서 낱말들이 된다.

의사소통을 통해서 주체는 다른 주체의 말을 듣는다. 이것은 세계 내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개방성이며 이해가능성이다. 이 이해성을 기초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해석활동은 어디를 겨냥한 것인가?

리꾀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근대적 주체비판은 데카르트가 주창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가능성을 아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론적 토대 위에 코기토를 재정립한다고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가 잊고 있었던 것을 하이데거가 복원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를 더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체 물음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현상을 통해 현존재의 처해있음에 대한 근본적 규정으로 나아간다. 현존가 세계- 내- 존재에 푹 빠져있다는 것이다. 불안이란 곧 세계-내-존재이다. 이 불안의 특성은 이 현존재의 세계가 ‘이미’ ‘거기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아무데도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니 이 세계는 그런 인간들을 압박하게 된다. 이로서 현존재에서 손 안에 있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파악을 폐기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안은 현존재에게서, 빠져 있으면서 자신을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버린다.

이 탈취의 긍정적 효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되던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현존재의 존재가능에로 되던진다. 이때 현존재는 비로소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탈각한 개별자로 등장한다. 이 개별자로서의 현존재 안에서 불안은 존재가능에로 현존재를 되던지는데, 사실상 이러한 존재가능이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그 자체이다. 불안이 열어 밝히는 것이 열어 밝힘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이 가능하다.

열어밝힘이 열어밝혀진 것과 실존론적으로 동일하다는 것, 그래서 이 열어밝혀진 것 안에서 세계가 세계로서, 안에-있음이 개별화된 순수한 내던져진 존재가능으로서 열어밝혀져 있다는 사실이, 불안의 현상과 더불어 하나의 탁월한 처해 있음이 해석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불안은 현존재를 개별화시키며 그래서 그를 이렇게 ‘유일한 자기’(solus ipse)로서 열어 밝힌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론적인 유아론(唯我論)은 하나의 고립된 주체사물을 무세계적 사건 발생의 해(害)가 없는 공허 속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은 현존재를 바로 극단적인 의미에서 세계로서의 그의 세계 앞으로 데려오며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그 자신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을 너머서’ 있다. 현존재가 아닌 그런 다른 존재자에 대한 관계 맺음으로서 그런 것이 아니고, 현존재 자신인 그 존재가능에 대한 존재로서 그런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존재구조를 우리는 자기를-앞질러-있음이라고 파악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너머서’, ‘자기를 -앞질러-있음’이란 고립된 주체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계-내-존재로서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내-존재로 대던져져 있다는 것은 다시 세계내부적 곁에 있음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는 세계내부적 존재자 곁에-있음이며 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안에-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염려다.

리꾀르는 자신의 이러한 논의 방향을 하이데거의 작업을 따라 가는 파괴와 재건의 이중적 작업, 즉 해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리꾀르는 하이데거의 작품인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물음에 대한 망각’이라는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자기의 문제가 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물음’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망각된 사실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이 망각이 바로 ‘존재망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망각된 존재에 대하여 질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이것은 데카르트적 코기토, 즉 자아가 먼저 나서는 식이 아니라, 존재가 먼저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물음이 코기토에 비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비판 받는 지점은 바로 그것이 물음을 거치지 않는 ‘확실성’으로 먼제 제시되기 때문이며, 존재는 그러한 허위적인 확실성을 확신하기 보다 먼저 물음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음의 구조는 그것의 인식론적 층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는 다시 말해, 만약 우리가 질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물어지는 것, 즉 그것에 대해 물어지는 것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물음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자기성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기 또한 그러한 물음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는 데카르트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아니다 다만 물음을 던지는 자기일 뿐이다.

이것이 중심을 탈각한 코기토이며, 리꾀르에게 이것은 이중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아의 위상에는, 물음으로서 물음을 망각한 자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망각을 묻고 탐구하는 자로서의 자아의 탄생도 또한 있게 된다. 자아는 물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애초에 확실하지는 않다.

이것은 자아(ego)가 자기(moi)로 가는 중에 겪는 변화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물음에 속해 있는 것이 바로 ‘현존재’이며, 이 현존재야 말로 ‘존재물음’과 ‘존재이해’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이 이중관계는 현존재를 특유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데, 그것은 ‘순환논증’의 상황과 같다. 물음과 물어지는 것이 ‘뒤로 또는 앞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순환관계 또는 이중관계에서 주체(자기성)가 탄생한다고 보는 점이다.

이렇개 해서 리꾀르는 하이데거의 주체비판을 고스란히 수용하면서도, 다시 그 주체를 하이데거적 현존재라는 존재론적 지반 위에 세우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론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실존성이란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든지 아니면 놓치든지 하는 형태로만 존재라는 존재의 구조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이 실존적이라면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은 실존론적이다.

여기서 직관적 기술(記述)과 해석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직관적 기술이 데카르트이 몫이라면 해석학은 하이데거와 리꾀르의 몫이다. 현존재의 주체는 묻고 답하는 것이며 은폐된 채로 남아 있다. 일상성에 빠져있는 비본질적인 주체로서의 현존재는 본래적인 실존성의 주체와 대화를 마치기 전에는 공허할 뿐이다.

여기서 본래적인 주체란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또한 마주한 주체이며, 그것은 자유와 통한다. 은폐된 채로 남아 있는 주체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죽음의 자유 또는 이 자유로운 유한자로서의 현존재의 해석학은 항상 현존재를 염려의 존재구성틀로 육박해 들어가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

리꾀르의 하이데거 주체 해석에서 리꾀르가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현존재란 다름 아닌 자신의 해석학적 주체이며, 항상 잔여를 남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잔여는‘ 누구’의 물음이고 그것을 답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 결과는 존재가능이다. 이 주체는 ‘잔여적 주체’이다.

현존재 해석학과 자기성의 해석학에서 주도적인 물음은 '누구?‘라는 물음이다. 감안해야 할 것은 ’누구?‘라는 물음이 고립적인 어떤 존재자에게 캐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누구임‘은 이미 세계-내-존재로 틀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도적인 물음을 통해서 ’주체‘가 탄생한다.

그러나 ‘누구?’라고 물음과 동시에 ‘주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주체는 직접성과 실체성으로 빠진다. ‘동시에’가 아니라 ‘~을 통해서’가 맞다. 바로 ‘순환’을 통해서다. 순환이 있기 때문에 잔여도 생긴다. 그 역이 아니다. 본래 ‘잔여’인 주체는 단지 결핍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성으로서의 현존재, 실존은 결핍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먼저 기분 잡혀 있다. 그렇다면 순환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현존재는 존재 물음이 걸리는 ‘자리’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삼는 존재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① 현존재와 존재의 순환이 나온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는 실존이다. 따라서 이제 ② 실존과 존재의 순환이 나선다. 그리고 첫 번째 순환(현존재와 존재의 순환)에 대해 질문이 제기된다. ‘누구?’라는 질문이다. 그것이 현존재 자신이며, 따라서 ③묻는 자와 물어지는 것의 순환이다. 바로 해석의 순환이다. 그렇다면 실존은 해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을 통해서 우리는 해석과 실존과 존재를 순환 관계 안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셋의 순환은 지금까지 방법적으로만 이해된 순환을 존재론과 해석학에 뿌리내리게 할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해석은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달리 말해 해석은 이해의 기획투사된 가능성을 통해 형성된다. 이해의 기획투사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가능을 형성하는 것을 해석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자기 것으로 만듦’, 즉 전유(專有)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정리작업함’의 뜻이다. 무엇을 정리작업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인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다. 따라서 엄밀히 이야기 해서 이해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자 또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해하면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자는 오직 현존재 뿐이다. 현존재는 이제 이해를 통해 세계-내-존재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가진다. 그런데 이해는 이미 이 세계-내-존재에 앞서 방향 잡혀 있다.

또한 현존재는 이미 세계-내-존재다. 그렇다면 실존은 세계-내-존재와 더불어 함께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해석에 있어서는 더욱 급박하다. 왜냐하면 해석은 이해의 기획투사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이 이미 이해된 것 안에서 움직인다.

순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이해된 것이 의미라면 이해에서의 순환은 의미 구조에 속하며, 그 현상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에, 즉 해석하는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하이데거의 이해의 존재론을 해석의 존재론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다. 이해의 존재론은 역사와 상징에 대해 무력하다.

하이데거의 관심은 역사보다는 존재에 있다는 것이 리꾀르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를 이해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해의 존재론은 자기 이해에 별 소용이 없다. 리꾀르에 의하면 자기 이해란 늘 남의 이해를 거치기 때문이다.

이해의 존재론은 미리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지평, 곧 겨냥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석하는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오직 해석의 운동 안에서이다. 해석되어진 존재의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은 오직 경합하는 해석학들의 갈등 안에서이다. 단일화된 존재론은 고립된 존재론과 같이 우리의 방법과는 멀다. 그 보다는 모든 예들에서 각각의 해석학이 방법으로서 각각의 해석학을 도입하는 실존의 측면을 발견한다.

해석학이 개입하는 모든 예들에서 각각의 실존의 특면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해의 존재론이 겨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해석하는 실존이 모두 해석의 겨냥에 따라 자기를 발견한다. 정신분석과 정신현상학, 종교현상학이 제각각의 겨냥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증거한다.

따라서 해석은 실존의 이해에 기대면서 그 실존을 전유하기 위해 해석한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그러한 해석들이 실존적 기능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말장난에 그칠 수가 있다. 해석은 궁극적으로 존재론, 즉 현존재의 해석학인 것이다.

여기서 해석과 실존, 해석과 존재 사이의 순환이 일어난다. 그 결과는 자기성의 순환구조의 확장이다. 첫째로 앞서의 순환구조로부터 주체가 탄생한다. 둘째로 주체는 어떤 자기성을 겨냥하며(이해하며) 해석을 통해 부단히 그것을 전유한다.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확장을 통해 자기성은 단숨에 충실한 주체로 드러나는가? 아니다. 자기성은 가정 먼 우회로를 거치더라도 도달하기 힘들다. 순환은 항상 잔여를 남긴다.

순환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는 자기성으로서 항상 잔여적이다. 잔여를 형성하면서 그 잔여로 남는다. 잔여를 형성하는 해석학적 운동과 순환 속에 주체가 탄생하고 이 주체는 잔여적이라는 말이다. 실존의 편에서도 그러하고 해석의 편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경우 지평(horizon)이 나타난다.

리꾀르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경우에 빗대어, 반성 안에 아르케(기원)와 텔로서(도달점,끝)의 양극이 있다고 말한다. 아르케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무의식은 의식이 ‘되기를’ 거부한다. 무의식은 다만 표상과 증상을 통해 알려온다. 그래서 무의식 자체는 무시간적이며, 시간 안에서 의식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주체의 성장과 문화의 창조를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두 방향에서의 운동이 그저 무난하게 절충되거나 종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의 변증법은 의식의 타격과 포기를 전제로 반성을 행한다. 일단 의식철학이 논박된 장소에 반성이 들어서면 반성 또한 위험에 노출된다.

반성은 주체의 고고학과 의식의 목적론의 ‘앞으로 뒤로 가는 운동’을 늘 염두에 두면서 자기성의 기원과 형태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성으로서의 현존재는 항상 존재가능으로 기투(내던져짐)하면서 이해와 해석을 행한다. 주체의 지평은 이러한 이해와 해석의 운동이 주도적으로 묻는 질문, 즉 ‘누구?’에 걸려 있다.

그러나 리꾀르는 이러한 순환과 운동이 종교현상학 차원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차원에서 ‘누구?’라는 질문은 그 주도권을 상실한다. 프로이트를 우회하는 길의 경우, 종교 현상은 리비도(원초적 욕망)의 경제(효율적 활동성)와 위상으로 환원되며 헤겔을 우회하는 경우 ‘절대지(絶對知)’ 속에 해석된다. 헤겔의 경우 이 해소는 사실상 종교현상에 대한 겨냥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곧 정신이라고 부른 것은 종교현상학 차원에 이르지 못한다. 정신의 형태들과 거룩의 상징들 사이에 아직 풀리지 않는 것이 많다. 헤겔은 형태들의 전개에 끝을 정해 놓고 그 끝을 절대지라고 보았다. 그러나 끝은 절대지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매개물이 남김 없이 전체 덩어리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끝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약속된 것’, 곧 거룩의 상징들을 통해 약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꾀르는 그 절대지의 자리에 ‘거룩’을 놓았다. 그렇다고 거룩이 단지 대체물은 아니다. 거룩의 의미는 종말론적이라서 결코 앎이나 영지(靈知)가 될 수 없다.

리꾀르는 이처럼 반성의 한계와 지평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그것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반성이 더 이상 이전의 관계 속에서 순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리꾀르는 그러한 지평의 출현을 ‘악’의 문제에서 본다.

절대지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유의 하나는 악의 문제 때문이다. 악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거기에 상징과 해석학의 문제가 상겨난다. 악의 본질과 기원, 종말과 관련된 큰 상징들이 평범한 상징이 아니라 특별한 것들이다. 악의 상징은 합리적인 앎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정론(神正論)의 실패와 체계를 세워 악의 문제를 풀려는 작업의 실패는 곧 헤겔이 말하는 절대지의 실패이다.

이것은 곧 철학적 개념보다 종교적 상징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악의 문제를 자기성의 지평으로 말하면서 거룩을 겨냥한다는 것은 거룩이 결코 앎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요 더나아가서 거룩은 ‘기호’나 ‘부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정신의 형태들은 기호를 매개로 거룩한 어떤 것의 부름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부름의 기호들은 역사 속에 주어지겠지만 그 부름은 역사와 다른 무엇을 가르킨다. 이 상징들을 의식의 예언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들은 나의 존재와 의미가 어떤 강력한 뿌리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뿌리는 곧 끝이며 정신의 형태들이 향하는 궁극이다.

상상 가능한 거룩함의 기호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자기 포기를 감행한다. 이러한 포기는 정신분석과 헤겔의 현상학이 야기시킨 것을 초과한다. 고고학과 목적론은 여전히 주체가 아르케와 텔로스를 이해하는 동안에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거룩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자신을 종교 현상학에서 명백히 한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정신 고고학의 알파와 모든 목적론의 오메가를 지칭한다. 즉 이러한 알파와 오메가는 주체가 다룰 수 없다. 거룩함은 인간을 불러 세우며 그 부름 속에서 그의 실존을 다루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밝힌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이 실존을 존재하려는 노력과 욕망으로 완전히 세워 주기 때문이다.

해석의 순환이 가 닿은 지평에서 부름의 기호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불 수 있다. 여기서부터 반성은 상징의 넘치는 의미, 즉 은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해석의 적극적 순환은 여기서 기호와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처해지게 된다.

리꾀르는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실존이 해석을 통해 순환하는 동안 궁극적으로 종교 현상의 상징 해석으로 흘러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부름’이라는 최초의 윤리적 요청이 순환의 전체 내용을 틀 잡기를 원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잔여적 주체가 겨냥하는 것은 그 자신의 윤리적 모습이며 곧 종교적 복종이다.

이처럼 리꾀르는 죽음 앞에 놓인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을 주체자로 간주하면서 끝없이 초월을 향한 처절한 반성 행위와 더불어 도피를 감행하는데 그것이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해석의 되풀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처 처리 못할 잔여적 존재성을 꼬리처럼 키우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죽음’이 인간을 마중 나와 있기 때문이다.

(평가)

열왕기하 21: 10-15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

리꾀르는 죽음을 언약적으로 보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진노나 분노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실존적으로 죽는 것을 미지의 X로만 간주하여 결국 와해될 실존이 여전히 와해되지 않는 실존으로 인해 일어나는 ‘기어이 살아남고 버티고자 하는 욕망’(코나투스)을 해석의 중심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신다. 즉 십자가 복음을 보여주고자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정없이 적용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 ‘진노’라는 배경을 철회하지 아니하시면서 그 속으로 마구 끌어당기시는 사랑과 용서의 힘을 받게 되는 인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과정으로서의 해석과 그 해석이 십자가의 진노의 힘에 의해 늘 부서지는 과정으로서의 해석, 이 둘을 동시에 뿜어내게 된다.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 성령님의 고유활동이다.

 첨부파일 : 리꾀르의 해석학.hwp (46.5K), Down: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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