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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15:22:37 조회 : 1873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화이트헤드Whitehead, Alfred North (1861~1947)의 과정(過程)신학

화이트헤드는 플라톤과 같이 모든 것은 변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과는 달리 생성 변화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세상이 전부 변화하는 것을 가지고 그는 ‘과정의 원리(Principle of Process)'라고 했다.

종래의 전통 철학자들과는 달리 화이트헤드는 ‘존재’(being)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실’(fact)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화이트헤드가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실’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것’ 즉 구체적인 개체로서의 사물을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사실존재는 잇따라 일어나 ‘생성’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에 있어 ‘사실존재’란 그 무엇보다도 경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사실존재는 주객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마치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관찰자’의 참여를 통해서만 관찰대상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실존재들이란 세계가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가장 최종적인 실재적 사물들’이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들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 사실존재들을 넘어선 곳에 어떤 다른 실재적인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사실존재들은 서로 그들 상호간에도 다르다. 심지어는 신마저 사실존재에 불과하다. 창공 속에 있는 가장 하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존재들 사이에는 중요성에서 그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가능성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사실존재가 모든 존재들을 ‘표본화’하는 원리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정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종에 가서는 모두가 동등하게 사실존재들이다. 이들 사실존재들은 경험적이며 경험을 떠나서는 성립되지는 못한다. 즉 복합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경험의 물방울이다.

전통 철학은 전체와 부분을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고질적으로 일원론 아니면 다원론의 함정에 빠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일원론과 다원론의 문제는 사실태의 본성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실재가 하나(一)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실제가 여럿(多)이라고 한다. 유한하다고도 하며 무한하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일원론과 다원론의 문제는 ‘있는 것’의 본성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에서 맥타가르트에 이르기까지 일원론자들은 사실태는 변하지 않고, 자존적(self-sufficient)․통일적 전체(unitary whole)로서의 일자(one)가 궁극적으로 ‘있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있는 이것이 ‘일자’이지 ‘다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일원론을 배격한다. 일원론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운데 하나인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하고 있다. 일원론들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사실적’이라고 한다. 있는 일자만이 있는 것의 전부이고 모두이다.

유일하게 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존재로서 불변하는 실체의 필연적인 면모를 일자는 나타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하지 않는 일자와 변하고 무질서하고 악과 오류로 가득 차 있는 다원적 경험 세계를 또한 언급하고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체계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인 것이다. 어떻게 변하지 않는 일자가 변하는 다원 세계를 설명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일원론자들은 궁색하게도 양태들(modes), 혹은 ‘현상들’(appearances)이란 말들을 지어 다원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는 것을 설명해 내자면 조건이 따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만들어 쓴 ‘양태’란 말은 변하는 다원 세계가 나타나 표현되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스피노자의 양태들은 단순히 한 실체에 나타난 모습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만약 양태들이 경험 속에 있는 여러 사례들에 어떤 타당성을 갖는다고 하면, 그 양태들은 이미 그 경험 사례들에게 고착된 필수적 요소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원론자들의 경우 사실적인 것은 오직 변하지 않는 일자(one)뿐이다. 그러나 경험 사례들에게 고착된 다자(many) 역시 사실적이다. 여기에 일원론의 비일관성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원론이 옳은가? 화이트헤드는 다원론도 거부한다. 모든 사실 존재들은 서로 우호적으로 연속되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다른 종류라면 서로 비연속적일 것이다. 모든 사실 존재들은 보편선상에 서 있는 한 종류일 뿐이다. 본성도 먼지도 같은 종류이다. 어떠한 사실 존재들에게도 동등하게 응용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들의 체계가 단지 있을 뿐이다. 만일 일관성이 철저하게 유지되려면 신도 이 체계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원리는 무엇인가? 화이트헤드는 존재론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과정 철학이 전통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과정’을 형이상학의 가장 근본적인 양상으로 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철학자들은 과정이나 변화 같은 개념을 보잘것없는 존재론적 위치에 놓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됨’(become)이란 ‘사실성’을 성취시키는 과정에 있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경우, 과정, ‘됨’이 바로 사실 존재의 ‘실존’ 그대로이다. 과정 철학은 과정 자체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차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이상학의 핵심으로 보는 철학이다. 과정 자체에 본질이 있다고 할 때, 존재는 어떤 목적이나 다른 존재에 의하여 규정되거나 향도(嚮導)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그 존재 자체에 의해 창조되고 거기에 목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모든 존재는 자기-창조를 해나가며, 자기-만족과 자기-향락을 누린다. 자기- 창조의 과정 속에 있는 사실성에 먼저 있었던 사실성을 포함시킴으로써 창조적 변혁이 이루어진다.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이것’으로 있다는 것이 사실 존재의 진정한 의미였다. ‘있’은 것은 반드시 ‘일’어남으로 있다. 그래서 사실존재는 행‘하’는 존재이다. ‘이’것으로 ‘있다’는 말은 존재들이 제한된 의미로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행‘함’은 곧 ‘결정함’을 의미한다. ‘이’것 혹은 ‘저’ 것으로 결정, 제한되지 않은 ‘있’음은 무의미하다. ‘이’ 혹은 ‘저’는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며 이를 소여 자료라고 한다. ‘주어진’ 어떤 것, 즉 ‘이’것 ‘저’것은 ‘받아진’ 혹은 수용된 것이다.

사실성과 가능성에서 영원 대상들은 순수 가능태라고 했다. 순수 가능태로서 영원 대상은 그 성격상 ‘영원’하기는 하지만, 영원 대상은 구체적인 ‘이’것으로서의 사실 존재를 떠나 있을 수가 없다. 이 점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화이트헤드의 영원 대상이 다른 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같이 독립된 영역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영원 대상이다. 됨됨이 과정 속에서 영원 대상은 사실 존재에 ‘주어진’다. 먼저 있었던 사실성들을 한정하고 매기는 것을 결정함으로써 영원 대상은 사실 존재에 주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먼저 있었던 사실성들 혹은 사실 존재들을 화이트헤드는 우주, 혹은 사실 세계라고 했다.

그런즉 사실 존재들을 되어가게 하는 합생(合生) 과정에는 ‘순수 가능태’ 그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있었던 사실들도 가능태가 될 수 있다. 이런 후자의 가능태를 실질 가능태라고 한다. 그런데 실질 가능태도 영원 대상에 의하여 틀이 잡히고 매겨진다. 즉 먼저 있었던 사실 존재들은 영원 대상들의 매개를 통해 ‘주어진다’. 영원 대상들은 먼저 있었던 사실 존재들과 서로 엉킴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해내어야 할 과제는 영원 대상과 사실 존재가 어떻게 엉켜서 복합적이 되는가를 분석해 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있었던 사실성들은 모두 됨됨의 과정 속에서 한 사실 존재에 대해 소여 대상 자료가 된다. 소여 대상 자료가 된다는 것은 ‘주어짐’을 또한 의미한다. 주어진 자료는 곧 ‘가능태’로 된다. 이와 같이 먼저 있었던 사실성은 실질 가능태로, 그리고 영원 대상은 순수 가능태로서 함께 합생되어 간다.

합생이란 ‘함’께 되어 남을 의미하는데 되어 남이란 행‘하’는 존재들이 사실적이 됨을 의미한다. 먼저 있었던 사실성의 그 행함이 완성되면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더 이상 사실적일 수 없고 가능적으로 남게 된다.

즉 일단 완성이 되어지면 그들은 곧 잇달아 일어나는 사실 존재들을 위한 소여 자료가 된다. ‘잇’달아 ‘일’어나는 ‘사실성들’을 위한 ‘가능성들’이 된다.

그래서 가능성과 사실성은 서로 상대적이다. 현재 ‘사실적’인 것이 일단 완성이 되면, 일단 새로운 사실태를 위한 가능태로 변한다. 가능성은 항상 사실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가능성’이다. ‘사실’ 존재는 그래서 행함의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이다.

사실태와 가능태는 과정의 범주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사실태와 가능태는 서로 상대적이다. 이는 아주 중요한 형이상학의 원리이다. 이런 형이상학의 원리를 ‘상대성의 원리’라고 한다. 모든 존재들은 ‘됨됨’을 위한 가능성이다.

‘가능태’는 어떤 존재성이 없는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태 자체가 곧 ‘존재’이다. ‘됨’(becoming)을 위한 가능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곧 ‘있’음이다. 존재 한정(곧 ‘이것’)을 ‘있음’으로 풀이한 것은 ‘이’ ‘있’ ‘잇’이 모두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됨’이 ‘있’음이요 ‘있’음이 곧 ‘됨’이다. being이 becoming 이요 becoming이 being이다, 영어로 표현해 놓고 나면 그 의미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됨’이 ‘있’음이란 뜻은 모든 존재는 자신의 행‘함’ 속에 있든지, 어떤 다른 사실 존재들의 행‘함’에 연류 되어 있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어떤 다른 사실 존재들의 행‘함’에 연류 되어 있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있’음과 ‘됨’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 원리이다.

나중에 속한 존재들의 부류는 연루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사실성이 되기 위한 가능성들이다. 가능성이 바로 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됨’이 ‘있’음이란 말의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됨’이란 ‘잇’달아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자기 창조적 행함의 과정을 완성하자마자 사실 존재들은 곧바로 ‘가능성’이 된다. ‘잇’달아 ‘일’어나 ‘이’루어지자마자 존재들은 곧바로 ‘가능성’이 된다. ‘잇’달아 ‘일’어나 ‘이’루어지자마자 존재들은 다음 창조에 어울리려고 준비하는 ‘가능성’들로 된다. 먼저 있었던 사실 존재들이 다 이루어져 가능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주’ 혹은 ‘사실 세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사실 존재는 사실적이 되기 위해서 가능성들을 이 사실 세계로부터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 세계 속에는 다 이루어진 숱한 가능성들이 ‘주어져’ 있다. 가능태들은 주고 사실태들을 받는다. 이렇게 주고받는 관계성 속에서 상대성의 범주는 성립된다.

주고받는 것은 마치 맥박이 고동치는 것과 같다. 잇달아 일어남은 한 줄기 맥박의 고동침이다. 다 ‘이’루어진 것과 ‘잇’달아 ‘일’어나기 위해 마련하고 있는 가능적인 것이 쌍을 이루면서 흐름을 만든다. 이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사실성에서 타당성을 갖는 양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역사성 없는 사실 존재는 없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많은 차이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의 같은 점이란 개별화될 때만이 실존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다른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궁극적’인 것을 행위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창조적 행위 자체를 궁극적이라고 할 뿐이다. 사실성 속에 있는 어떤 요소로서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하지 않고 ‘행위’ 자체를 궁극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행위 자체로서의 궁극적인 것이 서로 다른 형식을 갖도록 효능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의 ‘궁극성’을 ‘창조성’이라 하며, 라틴어의 ‘creare'는 ‘낳음’(to bring force, beget, produce)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효능성’이나 ‘행위’ 같은 것은 결코 ‘궁극성’ 자체에다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형식’으로밖에 돌릴 수 없다고 여겼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인과 효능인이라 작위와 효능을 처음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형식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형상인과 효능인에 의해서 질료는 여러 다른 형상을 취할 수 있게 된다. 화이트헤드의 경우 효능인은 ‘창조성’ 자체인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효능인은 ‘형상’에 돌려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형상을 능가하는 어떤 행위로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을 넘어서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형상은 아무 행위도 없는 행위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거부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행위’ 혹은 ‘행함’이 사실성의 한 일반적인 면모라는 점에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에 행위가 그 행위로 인해서 사실성이 ‘형성’으로 되어지게 된다면 그때 그 ‘형상’은 이미 암묵적으로 ‘궁극적’ 인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형상인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효능인을 작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이 ‘존재’와 동일시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동안만은, ‘형상’이 ‘궁극성’의 요구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게 된다. 형상은 언제나 구체적 존재들과 동일시될 때만이 궁극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형상은 구체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궁극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사실성이 사실성일 수 있게 만드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궁극적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 속에 일어나는 요소들이 모아졌기 때문에 그것을 집결시킨 어떤 것이 ‘궁극적’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궁극성의 요구 조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서 사실적일 수 있는” ‘이것'(this) 자체가 궁극적이라는 것이다.

즉 많은 사실적 존재가 개별화되어진 ‘이것’, 혹은 ‘저것’이 궁극적이라는 뜻이다. ‘이것’과 ‘저것’이 모아져 총체로서 궁극성이 형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게 하는 행위 자체가 궁극적인 것으로 행위 속에서 있는 ‘이것’과 ‘저것’이 모두 궁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존재의 ‘있음’은 잇달아 일어난 됨의 행위(act of becoming)이다.

즉 사실 존재의 ‘있음’은 곧 ‘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eing'을 ‘form'(형상)과 일치시킨 데 반해서 화이트헤드는 ‘being'을 ‘acting'(행함)과 일치시켰다. 이 점은 양자 간의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존재는 행하는 존재이다.

과정 철학에서는 우주가 온통 행함의 단위 과정들로 만들어진 사실 존재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 우주란 ‘함’의 과정들로 잇달아 일어나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낱낱이 행위하는 존재들을 떠나서는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혀 없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창조적 행위의 과정’에 의하여 구성되어져 있다는 하는 말에 비유될 수 있다. ‘창조적 행위’나 ‘창조성’이 우주적이며 궁극적이다. 모든 사실 존재들에게 가장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면모가 곧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성’이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사실성들을 가장 일반적이게 하는 형이상학적 성격. 창조성이 바로 그 성격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성이 궁극적인 두 번째 이유는 사실성들을 개별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창조성은 낱낱의 개별적인 사실성들을 실례화 시킨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이다. 개별적인 사실성들은 모두 실례들이다. 실례화된 사실성들이 모두 ‘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모두들 사실적이란 점에서 궁극적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사실성들은 별개적인 개체성으로 보여지는데, 그것들은 우발적이며 동시에 우연적인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궁극성’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연적인 개별자들에게는 그것들을 밑받침하는 ‘터전’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터전을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라고 했다.

신학자들은 이를 ‘신’이라고 했으며, 일원론자들은 그것을 ‘절대자’라고 했다. 과정 철학과 한철학은 이러한 철학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철학이다. ‘인간이 곧 신’(人乃天)이라고 하는 천도교의 격률은 이 우주 가운데 개별자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밑받침하는 신적 존재가 따로 터전을 만들고 있음을 부인하고 있다. 신과 인간이 ‘하나’임을 의미한다.

일원론자의 주장이 일관성을 갖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우주의 ‘터전’을 ‘궁극적’이라고 해야 하는데 과정 철학은 그런 터전을 부인한다. ‘궁극성’은 이런 ‘터전’과는 아무런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는 개념이다.

과정 철학은 이러한 ‘궁극성’을 ‘창조성’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창조성은 낱낱의 개별적인 사실적 피조물을 초월하는 동안은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개별적 사실성 속에 실례화 되어진다. 이 우주는 연접되어 있다. 궁극자의 성격은 자기-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 우주는 영원히 진행되어 ‘감’이다. 모든 사실 존재들이란 곧 우주적 창조 행위의 과정 속에서 피조된 피조물이다.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해 있지만 ‘창조성’은 개별적인 피조물들 속에서 그 자체를 개별화시켜 나간다. 지어져 변화되는(造化) 과정 속에서 모든 개별자는 안정되어 정(定)해진다는 것이다. 신은 초월적 창조주가 아니다. 신도 창조성 속에서 피조된 시원적 피조물이다. 즉 창조성이 시원적으로 실례(實例)화된 것이 바로 신이다.

신은 사실 존재들의 ‘실례(實例)’가 되는 동시에 다른 사실 존재를 ‘조건’지우는 자라는 뜻이다. 신은 창조성 안에서 창조성을 동시에 ‘조건 지운다’는 이 말은 신은 세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 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조건 짓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조건 짓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 자신도 창조성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곧 창조성 안에 있으면서 이 창조성을 한정한다. 신은 창조 전에 있지 않고, 창조와 더불어 있다. 신은 세계와 함께 자라나며 세계가 변하기 때문에 함께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세계와 함께 커진다. 특히 유대교-기독교적 신관에서 볼 때 신은 변하는 세계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코 진리란 변하는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와 실재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진리와 실재가 항상 자라나고 있다면, 실재와 접속되어져 있는 지식도 자라나 커지지 않을 수가 없다. 실재가 변하고 달라지고 있는 그것을 아는 지식이 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변하는지를 컴퓨터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컴퓨터가 없을 당시에 안다는 말의 의미와 컴퓨터가 생긴 다음에 안다는 말의 의미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 생겨난 다음부터 우리가 사물에 대해 일차적으로 안다는 말은 무의미해졌으며,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프로그래밍 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식의 지식이며 또한 제2차적 지식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이와 같이 실재(reality)도 자라나 있고 또한 그것을 아는 지식(knowledge)도 자라나고 있다. 이처럼 실재와 지식은 상호 연관되어 창조되어 진다. 신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에 신은 ‘우월한 실재’이지만 시원(始原)적인 즉 추상적인 면에서 보면 신은 ‘결핍된 사실’을 지니고 있다. 그의 감응은 단지 개념적일 뿐이며, 사실성의 충만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시원(始原)적 본성은 신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시원적 본성은 신의 완전한 사실성으로부터 추상됨을 의미한다.

모든 보통의 일반적 사실 존재들이 그들의 주관적 목적을 가지고 있듯이 신도 주관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은 특유한 주관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러면 신의 특유한 주관적 목적은 무엇인가? 신의 주관적 목적은 신의 시원적 본성이며, 모든 영원 대상들을 완전히 개념적으로 모상(模像)함으로써 구성되어진다.

신의 주관적 목적은 세계의 사실성들 속으로 실현되어 들어가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즉 영원 대상을 자기의 기호성(嗜好性)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하는 기능이다. 그래서 운동에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이 끝은 지금까지의 어떤 운동보다도 오래 계속되는 현실적인 의해서 영향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영원하다. 시간성이 없다는 뜻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무한 것이다.

‘변하지 않음 속의 변화’, 이 궁극의 범주에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두고 있다. 그리고 신을 존재의 범주에다 넣는다. 이것은 종래의 철학과 신학에서 신을 궁극의 범주에 넣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 창조성이 신이라는 이름의 ‘우주 주관성’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신을 비롯해서 모든 사실 존재를 ‘상호 의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아무 것도 독립되는 것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각 개체의 사실성이란 오직 창조 행위의 개별화로만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매시간적으로 피조물들은 창조적이다. 그래서 합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주관성들은 초주관(신)의 시발성에 의존함으로 존재의 합목적성이 부여된다고 화이트헤드는 보고 있다. 우주란, 합생과 더 큰 규모의 전이(轉移)에 의해서 생성된다. 낱낱의 개체들은 그 안에서 고동친다. 이것이 우주의 맥박이다. 이로서 화이트헤드는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것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탐구했다고 여긴다.

(평)

진리는 마지막 때, 십자가에 달린 분의 입에서만 나와야 한다.

그 분만이 최종 언약이며

인간은

그분 앞에서

최종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태초의 창조성에 끼어들어 갈 권리가 없다.

태초를 논한 자격자가 아닌 것이다.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된 새언약(십자가)의 취지를 위하여

피조물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곧 죄인으로서의 역할이다.

이로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 의로움’으로 겨냥한 채 나온다.

인간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임의로 분절(分節)한다. 쪼개진 사건을 거울처럼 사용하여 자신을 규정하려 한다.

모든 사건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쪼개서 자기 의로움이 되는 쪽으로 끼어 맞추어서 남들에게 “이것이 나의 정체야”라고 알려준다.

“사건이 이러하니 내가 아직도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또 생겨났소. 그만큼 나는 의로운 자요!”라고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수고는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한 수고이다.

존재를 사건화한다.

자신의 존재가 곧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자에서 행위자로 전환한다.

행위가 개입될 때만 그 사건은 의미가 있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것, 이건 정말 사건이야, 사건!”라고 들뜨면서 산다.

이로서

나라는 존재는 나에게 하나의 사건이 되고 마땅히 의미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는 복음과 완전히 딴 판이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십자가에서 볼 때 모든 자가 이미 죽은 자이다.(고린도후서5:14)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말씀하신다.

그 바깥에서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원래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산 사람 대 산 사람으로 대화가 가능한 예수는 가짜 예수이다.

사도 바울은 아예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나오는 행위의 지향성도 한결 같이 고정되어 버렸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따라서 그에게서 나오는 행위 규정은 다음과 같이 오직 하나 뿐이다.

“나는 날마다 죽음으로 넘겨집니다”(고린도후서 4:11)

산 채로 신을 규명하는 자,

그들이

지옥 갈 자들이다.

참고도서

[종교론] 화이트헤드 종교서적(서울:1990)

[이성의 기능] 화이트헤드 통나무

[수운과 화이트헤드] 김상일 지식산업사(서울:2002)

[역과 탈현대의 윤리] 김상일 지식산업사(서울:2006)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김상일  서광사(서울:1993)

『成唯識論〉에서 본 유식사상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의 비교 연구』, 2007년도 감리교신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51

 첨부파일 :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hwp (49.5K), Down: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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