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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16:48:07 조회 : 121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도미니크 르쿠르 저 박기순 역 새길(서울: 1996)

본 책은, 프랑스 철학자들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 ∽ 1962), 조르주 캉기옘Georges Canguilhem(1904 ∽1995),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들을 통해서 내려오는 인식론의 추이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마르크스의 유물적 변증법에 준해서 지적한 책이다.

1. 바슐라르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 과학계가 요동을 친다. 실증적 실험에 의해서 기존의 과학 이론들이 하나 둘씩 폐기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동안 과학계를 철학계의 보조 정도로 생각했던 기존의 철학들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진리를 최종적으로 정립을 한 철학체계들이, 과학계 내부에서 스스로 자연법칙에 대한 인식 변화를 시도하는 그 작업에 따라 철학도 같이 수정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기존 철학체계 안에서 얼마든지 예상된 변화라서 세상을 대한 인식론에 수정이 필요 없이 고수할 수 있는지를 통해 새로운 논쟁이 일어난다.

인식론이란 세상이나 자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철학 분야다. 이 인식론 분야는 전통적으로 철학의 사유 방식으로 정립되고 확립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실험과학이 이를 기반부터 흔들어 놓게 된다.

철학이 아무리 ‘그렇다’고 우겨도 과학계에서 ‘과학적으로 따져서 그게 아닙니다’라고 나온다면 철학적 주장은 단박에 웃음거리로 전락된다. 따라서 철학이 그나마 위신을 챙기면서 명맥을 유지하려면 과학의 눈치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과학 의존적이어야 할 판이다. 과학 쪽에서 무슨 새로운 성과가 나온다면 철학 쪽에서 알아서 후딱 진리성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계에서도 아예 그동안 철학에서 담당했던 인식론 분야를, 과학자들끼리 의논해서 그때마다 내놓는 과학적 인식론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동안 철학적 사유논리에 의해서 이어져 온 인식론은 ‘연속적’인 반면에 과학 공동체에서 내놓는 인식론은 ‘불연속적’이다 는 사실이다. 이 인류 역사에서 ‘불연속’이 법칙처럼 나온다는 사실을 언급하기에는 철학적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변화라도 ‘먼저 것’이 있고 난 다음에야 ‘나중 것’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 ‘먼저 것’과 ‘나중 것’은 필연적으로 불연속적이 아니라고 연속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먼저 것’과 ‘나중 것’이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우발적으로 발견한 법칙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인류의 지혜의 진보에 끊어짐이 없이 이어진다고 알고 있는 철학계에서는 도발적인 발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감히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선배인 메이에르송Émile Meyerson(1859∽1933)의 과학사에 대한 견해를 염두에 둔 태도이다. 곧 기존의 철학의 이론으로는 과학계에서 발견한 ‘불연속적’을 설명할 수 없으니 아예 철학적 인식론을 과학적 인식론으로 바꾸자는 제안에 해당되는 것이다.

실험하지 않고 생각으로만 버틴 철학계가 과학의 도움으로 그 진리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어차피 기존의 철학이론으로서는 과학계가 밝혀낸 불연속성을 설명하거나 참견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계가 밝혀낸 ‘불연속성’이란 곧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최종 입자의 이중적 존재성이다. 입자가 되었다고 파동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입자를 예상하고 보면 입자로 보이고, 파동인 것으로 여기서 양자를 보면 파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여러 최종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궁극적 존재이다. 물질 탐구의 종착점에 가서 발견된다.

과학에서는 이러한 이중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회의(의심)했고 오류와 오류로 양산해내었다. 과학적 인식론은 바로 오류의 나타남이 더 이상 진리탐구에 있어 장애요소가 아니라 필수적 요소였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인식론 체계와 달랐던 것이다.

특히 실험과학에서는 미리 알고 있는 미결정의 미지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심거리도 못된다. 하지만 실험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미지의 것’이‘ 미지의 것’으로 특정화된다. 그냥 상상해서 특정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에서 말하는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우주보다 더 크고 종합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따로 있을 것이다’는 관념론은 과학에서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이 관념론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철학에서 주장하는 관념론의 입구로서의 인식론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험과학이 중요한 것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 실험실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공동체 내에서 법칙이 될 가능성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빈번해진다. 과학자의 자세와 태도는 실험하기 전에 가설은 내리지만 그 가설마저 실험결과에 거꾸로 의존적이다. 이는 결과가 원인을 새로 정하는 논리다.

바슐라르가 과학계를 주목하면서 이해한 과학 작업의 특징은,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 더 이상 측정하지 않고 계산한다는 점이다. 이는 물리학자들이 수학에 의존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물리학자는 스스로 실시한 실험 측정값이 수학적 예측과 맞지 아니하면 조정과정을 거쳐서 이론적 정립하는 것이다. 즉 실험 도구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실험도구의 한계를 수학을 통해서 인식하고 수학적 논리에 합치되도록 실험을 조정해 나가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추상을 실험이라는 구체화를 통해서 현상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과학이란 결코 자연의 대법칙이나 질서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공적인 산물이요 테크닉의 결과물이다 는 말이다. 이제 수학적 이론과 결합한 도구는 이론의 대상 자체를 생산하고 개념을 생산한다. 도구가 다르는 것은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대상과 기초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더 나아가 과학이란 그 시대, 그 사회에 요구에 부응해서 결과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진리와는 상관없이 역사발전을 도모하는 노동생산물인 것이다 고 말한다.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마르크스 유물론적 역사변증법에 입각해서 바슐라르는 평가하기 위함이다. 역사 발전은 오류나 과오라는 모순마저 스스로 껴안고 투쟁하면서 늘 재조직한다는 이론이다.

바슐라르에게는 있어서, 이 과학시대의 철학의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적 인식론을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이 이미지를 위하여 비유적 언어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심리가 실린다. 현대물리학이 밝혀낸 이 대자연의 詩(시)적인 성질에 대해서 철학은 시적 언어를 동원하여 온 우주를 묘사하는 것이다. 과학은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 안에는 자연과 일상, 모두에 대해서 인간이 심리를 담기 때문이다.

2. 캉기옘

바슐라르가 물리-화학과 관련해서 인식론을 탐구해왔다면, 캉기옘은 생물학에서의 실시하는 실험을 통한 인식론에 관심을 가졌다. 생기론이 타깃. ‘근육의 수축 실험’에서 물이 든 비커에 근육을 떼어 놓고 전기적 충격을 가하면 근육은 수면의 높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수축한다. 이는 곧 수축하는데 있어 근육에 그 어떤 요소도 덧붙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물학은 생물학 나름대로 고유한 인식론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화학으로 환원되는 원리에 맡겨서는 안 된다. 생명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유기체가 통일체이기에 갖는 속성이다. 이 통일체를 분해하게 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경계가 모호해진다.

캉기옘은, 생물학은 물리나 화학에 의해서 쪼개져야 하는 결정론적 과학이 아니라 내적 환경이라는 것을 따로 조성하게 된다. 내적 환경은 자체적인 독립성과 보호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환경에 대한 탄력성을 보이기 때문에 고등 생물로서의 독특함도 설명할 수 있다.

생명이란 생명체 자체에서 나온 요구로서 자체를 보존하기 위한 로고스가 있음을 정해야 해야 한다. 이 로고스가 곧 그 생명체가 고유하게 지닌 정보이다. 이것이 곧 그 생명체의 ‘개념’이다. 이 개념의 역사가 곧 과학사이다. 개념은 곧 사회적 개념으로 전이된다. ‘세포’라는 개념은 역사는 ‘개체’라는 개념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과학계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은 그 시대의 다른 방면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면, 갑상선과 관련한 병리학의 역사는 뜻밖에 ‘요오드 발견’과 관련 있는데 갑상선 치료에 요오드가 도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요오드 발견은 우연이었다. 해초에 재에서 상당량의 소다를 얻기를 원했던 한 초석 생산업자는 자신의 기술적 실패에 대한 조언받기 위해 두 화학자를 찾게 되는데 여기서 1812년 요오드가 발견된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물질의 본질에만 약리적인 효능을 기대했던 그때까지의 맹신을 제거하고 인위적 화학 작업을 통해서 약제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는 ‘생명체’가 품고 있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보다 사회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개념들을 생명차원에서 일깨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과학에 의해서 생명체의 고유 생명들이 분해되지 않고 도리어 ‘개념’들의 집합체로서 사회에서 과학까지도 하나의 개념으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3. 푸코

푸코는 이전까지의 철학이나 과학의 ‘인간주의’를 거부하고 비-인간주의를 표방한다. 이는 역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단절),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형편으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지식이 끊임없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해서 과학이 점유하듯이 탐구하기에, 모든 인식론에 과학을 기반으로 해야만 할 것 같지만, 세상의 지식이란 과학만이 아니라 비-과학적 요소에 의해 상호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푸코는 ‘물질’과 ‘물질성’을 구분하고 있다. ‘물질성’은 비-과학적 요소가 핵심이 된다. 이는 비-과학적 요소라 할지라도 ‘실증적’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물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물질은 각자 개체적이고 단독적이지만 물질성은 물질의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제도적’ 양상을 갖춘다. 이 ‘물질성의 체계’를 ‘담론’이라고 한다. 담론이란 물질로 인하여 발생된 언어적 의미들(언표)이 특정한 질서체계를 위하여 몰려들어 온 것을 뜻한다.

보통 ‘물질’은 실체를 갖고 있지만 ‘물질성’은 시간-공간적 위치의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도의 질서를 말한다. 이로서 이 사회에서 ‘과학’이란 여러 담론(이데올르기=이념) 중의 하나일 뿐이지 결코 세상이 지반이 될 수 없다. 담론들의 집합이 이 사회다. 이 담론 안에는 ‘주체의 실천’이 작용해야 하는데 이 실천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 다른 실천들의 침입을 받게 된다. 이로서 ‘주체’란 몸을 가진 개인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해 있는 담론의 사회(심급)의 조건을 위한 주체로서 자리 잡게 된다.

푸코의 인식론에서는 과학도 진리가 아니요, 철학도 진리가 아니다. 그 시대에 형성된 실천적 인 체계(담론)가 ‘진리’라고 우기면서 행세하는 것이다. 그래서 담론이란 최종 비-담론적 심급에 이해 조정되는데 그것이 국가조직체이다. 국가는 각 심급(조직체)에 지위와 권위와 힘을 부여한다.

저자가 푸코 이론에 반대하는 것은 이데올르기(이념)를 최종적으로 하지 않고 ‘지식’이라는 보다 넓은 개념을 채택하므로 서 자율적인 생산주체로서의 효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평)
‘實證(실증)적’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증빙이 되는 무엇’이다. 이 실험정신은 과학에서부터 출발해서 모든 학문 분야로 다 퍼졌다. ‘실증적 역사학’, ‘실증적 언어학’, ‘실증적 신학’, ‘실증적 문학’ 등등, 과학적 실험정신에 입각해서 진리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실증’의 반대말로 ‘관념’이 되고 이는 곧 이 시대에서 ‘허구, 거짓, 미신’으로 통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실증’이 우선이 아니다. 그것은 변명과 핑계의 구실에 불과하다. 참으로 인간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나의 생각만이 절대적이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이 그냥 ‘본인만이 절대적이다’라는 점을 계속 숨기면서 간직하며 산다. 곧 죽어가면서 이 고집은 못 버린다.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알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따지기 전에 “내가 꼭 이 세상을 알아야 하는가?”부터 먼저 물어봐야 한다. 이 물음의 답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한다. “내가 알겠다는 데 네가 뭔데 시비 거냐?”이다.

지식이 화근이며 지식이 죽음을 안긴다.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다. ‘모른다’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알고 있는 게 있기에 ‘안다’, ‘모른다’를 본인이 결정하겠다는 태도다.

과학이 발달하고 이 과학 실험정신이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증거를 찾게 하는 풍조를 유발한 것은 이미 인간들이 더욱 더 악해지고 교만해졌다는 말이다. 보고 믿지 않을 재주가 없음을 이 시대상이 말해준다.

진리는 설득이 아니다. 그냥 죽음으로 우리 눈 앞에 이미 나타났다.
십자가만이 믿는 자에게 유일한 실증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2-5)

 첨부파일 :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hwp (24.5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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