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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5 00:22:23 조회 : 382         
유튜브(184강, 185강) 관찰의 자리, 복제의 연속 17040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84강                음성               동영상

 

185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IP:119.♡.152.148) 17-04-05 16:34 
184강-YouTube강의(관찰의 자리)170404-이 근호 목사

제184강, 제목은 ‘관찰의 자리’입니다. 관찰하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옛날에 중세 때 그 위 지도자나 영적 무당이나 샤머니즘이나 또는 그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집단적으로 훈계하고 양육하고 가르치는 대로 그냥 따라가게 되면 그 사회가 안정된다. 그 정도 그들 시대에서 과학이라는 것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진리라는 체제가 확고하게 돼있기 때문에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고 사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따지지 말고 요모조모 의심하지 말고 평화로운 이 질서체제를 수용하면서 그냥 평온하게 평화롭게 한 평생 살다 가면 된다. 그런 시대가 과학 이전의 시대였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은 이미 문자를 해독하고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상체계가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육은 흙에 묻히지만, 영혼은 하늘로 간다는 것이 다 있기 때문에 이미 미래까지 확고하게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별나게 따지면서 그렇게 골치 아프게 살 필요는 없는 겁니다. 편하게 사는 거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바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때 과학이라는 게 별로 없었잖아요. 신라시대 첨성대 있고, 세종대왕이 해시계 만들고 했지만, 제가 말하는 여기 관찰의 자리라는 것은 뭐 하나 발명품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의 사상체계가 현 세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의심하고 이게 진리로서는 확정되지 않는다는 의식, 그게 과학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새로운 진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새로운 진리를 발굴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 애를 쓴다는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에 그 진리에 대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애를 쓰는 그렇게 판단하는 본래의 자기의 자리는 이 자연과 더불어서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자리에서 바깥을 관찰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관찰을 하게 되면, 관찰하는 도구가 있어야 되고 그 도구를 이용해서 망원경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세상에 대해서 과연 그런지 따지면서 묻게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기존의 이 체제에 대해서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관찰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목 가운데서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 눈에 중점이 있겠지요. 사실은 딴 것도 포함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그렇게 눈에 확실하게 될 때만 그걸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은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지요. 관찰의 대상이 안 되니까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보겠다? 내가 보겠다. 나의 무엇으로? 눈으로. 그냥 맨 눈으로? 아니요. 기구를 통해서. 우주를 쳐다보고 자연을 관찰하고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상당히 과학의 입장에서는 오늘날 일반적 생각이지요. 과학 하는 그것이 일반적 생각이라는 말은 아주 빠른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보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이걸 간추려 보면, 인간은 자기만 믿는다.

인간은 자기만 믿는다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 이미 과학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오직 자기만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볼 때, 그냥 쑥 쑥 받아들이겠습니까? 의심하겠습니까? 의심하겠지요. 창세기 1장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인데 그 하루가 여섯 번 지나서 천지창조가 만들어졌다.

옛날 중세 같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리 나올 텐데 과학시대에는 어떻게 합니까? “구라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성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성경이 분명히 거짓말을 했지만, 뭔가 교훈은 있을 거다. 따라서 성경은 거짓말이라서 내칠 게 아니고 우리는 과학적으로 안 맞으니까 그것은 재껴 놓고 어떤 교훈만 챙기면 성경도 우리한테 어떤 유익을 줄 것이다.” 라고 성경과 어떤 협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졌다. 바다가 갈라질 이유가 있겠어요? ‘그런데 갈라졌다 하니까 이것은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데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쳐서라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애를 쓰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여호수아에 보면 전쟁할 때 갑자기 지던 해가 잘 져야 되는데 안지고 스톱이 됐지요. 해가 멈췄다. 현대 천문학에서는 해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다 같이 운동하고 있는데요. 뉴턴의 만유인력에서 서로 견제하면서 운동하고 있는데 멈출 리가 있겠어요? 멈출 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을 봐도 성경은 틀렸다. 를 기본 전제로 하고, 성경은 틀렸다고 판단을 내리는 본인은 안 틀린 거예요. 과학이 진리니까. 안 틀린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보다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경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해버린다던지 그것은 안 들은 것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 간다. 믿지 않는 자가 지옥 간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구원이란 말은 뭐냐 하면, 뭔가 질곡에 갇혀있는 것을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끄집어내지 아니하면 망하는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출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니가 현재 있는 자리가 위험한 자리이고, 이건 망하는 자리이고, 저주받을 자이고, 지옥이다. 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내가 성경을 보고,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이 모든 행위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지옥 가는 나를 더욱 더 지옥 가게 만드는 작업을 누가 한다? 하나님이 벌리고 있는 겁니다. 라고 그걸 수용을 해줘야 돼요.

잠언서16장4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이 어떠니 저떠니 세상이 어떠니 관찰 백날해도 인간 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관찰하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분석하고 따지겠다는 그것은 본인이 결심한 게 아니고 그러한 결심이 나오도록 주께서는 적당하게 지옥 갈 사람들을 지옥 가도록 그렇게 아주 맞춤. 맞춤 존재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잠언서16장 4절에서 5절에서.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탐구를 하고, 연구하고, 이전부터 악한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도록 그렇게 적당하게 내가 고런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관찰할 그 관찰의 자리 자체가 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관찰하는 거예요. 과학을 왜 하느냐, 그 과학하면서 망하도록 관찰하는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겁니다. 철학도 마찬가지고. 일반 현재 교육도 마찬가지고. 교육을 하면 할수록 본인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지옥 가는 인간의 맞춤, 합당한 존재로서 점점 더 그 본색을 드러내는데 이 작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흐뭇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는 옳다고 하고 하나님마저 관찰의 대상으로 본다는 이 자리마저 이미 사전에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의 자리 곧 이것이 저주의 자리입니다.
 공은주(IP:119.♡.152.148) 17-04-05 16:37 
185강-YouTube강의(복제의 연속)170404-이 근호 목사

제185강, 제목은 ‘복제의 연속’입니다. 복제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1953년 왓슨과 크릭이라는 영국의 두 생물학자가 DNA구조를 밝혔습니다. 그 전에 DNA 라는 가설은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구조는 요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라는 걸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DNA 구조를 딱 밝혀보니까 학자들은 경악한 거예요. 어떤 점에서 경악하느냐 하면, DNA라는 이것이 자체적으로 얼마나 이게 그 틀이 아주 확고한지 복제를 하는데 이 복제에 실수가 없다는 겁니다. 복제에 실수가 없다는 말은 똑같은 것을 똑같이 복사를 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생물들이 펼쳐져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복사기에서 복사하잖아요. 복사하면 할 때마다 글자 두 개 틀리고 그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그 DNA에서 전사, 복사가 되고 번역을 해서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나중에 단백질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단백질이 우리 몸을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으로 되어있거든요. 음식도 그런 종류로 먹어야 되고.

DNA라는 그것을 복사 그걸 전사라고 하는데, 메신저RNA(mRNA)라는 게 있어요. 그것이 RNA가 그것을 복사를 하고 그것이 핵 공예라고 해서 핵 바깥으로 튀어나와요. DNA는 주로 핵 안에 있으니까 바깥에 튀어나오면 리보솜 RNA에서 단백질을 구성하는 필요한 적당한 아미노산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 때 여러 가지 효소라는 게 만들어져가지고 이런 작업을 해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데.

모든 인간이 아빠, 엄마를 닮았는데 반반 닮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DNA가 자크 벌리듯 벌어지기 때문에 이쪽 반 가지고 가고 저쪽 반 가지고 가고 나중에 합쳐지게 되면 자식이 아빠, 엄마 반반 닮았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결국은 하나의 조상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의 조상으로 나왔으면 인간이 뭐냐 라고 했을 때는 니하고 나하고 서로 다르다고 하면 안 되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하고 나하고 어떻게 같은가를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래야 인간이 어떻다 하는 것이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모임에 100명이 있다면 우리 같은 거 끄집어내어보자. 취미 따져보자. 출생지 따져보자. 이렇게 하면 100명 다 같은 게 나올까요? 안 나오지요. 다양하니까.

그런데 같은 인간에게는 똑같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DNA라는 겁니다. 동일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동일하다는 것이 그 시대에서 100명이고, 그러면 우리 시대 이전의 사람하고 똑같으려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조상 DNA하고 동일해야 되겠지요. 조상에게는 또 조상이 있고. 모든 사람을 다 소집해야 돼요. 다 소집해놓고 지금까지 살다 죽은 사람 다 소집해 놓고 공통점 찾아봅시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나와야 되는데.

성경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로마서5장1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거예요.

성경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은 그 사람이 두 사람이 되었다.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으로 해서 두 사람이 되던, 세 사람이 되던 넷 되던, 너희는 한 사람이 두 명 되었느냐, 네 명 되었느냐, 관심두지 말고 그 첫 사람에서 두 번째 사람들이 퍼질 때, 뭐도 함께 들어왔느냐를 주목하라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한 사람이 뭐로 가져 와가지고 세상이라는 것을 구성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평가할 때 사람의 인구수가 몇 명이냐가 중요하지를 않아요. 동일한 DNA가 동일하다. 그것도 중요하지를 않아요. 뭐냐 하면 10억이 됐던, 80억이 다 돼 가는데 65억이 되던 모든 인간은 변함없이 오직 하나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동일한 성질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5장12절에서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뭐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죄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란, 인간이란 말은 이렇게 사람을 규명하기에 많이 허술하지요. 뭐로 불러야 돼요? 인간은 죄인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다. 이리 하면 죄에도 경중이 있을 게 아닙니까. 죄가 많은 자, 적은 자. 이렇게 되면 안돼요. 죄 안에 있는 사람. 전부 다 “죄에 갇혀 있는 사람” 이렇게 불러야 됩니다.

그러면 죄에 갇혀있다는 말은 그러면 죄에 갇혀있다는 이 규정으로 말미암아 너, 나 할 것 없이 동일하게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추궁당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다. 이걸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모든 인간은 죄에 갇혀있기 때문에 저주 받는다.

이 사실을 눈치를 채야 되는데, 아무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것은 사람은 같은 인간하고 자꾸 비교하기 때문에 나와 너와 다른 점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가인 같은 경우 보면, 아벨과 나는 어떤 점이 다른가. 또 남이 오게 되면 저 사람하고 나는 어떤 점이 다른가. 저 사람은 재산이 얼마고 나는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저 사람은 남자고 나는 여자고. 이런 걸 따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진짜 인간을 알게 되면 차별이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말은 그 전에도 차별이 없는 거예요. 죄 안에 갇혀 있는 입장에서는 전혀 차별이 없는 겁니다.

TV, 드라마 보게 되면 주로 차별이 있어요. 재벌 집 가정과 그 직장에 일하는 계약직 주인공. 차별이 있잖아요. 모든 게 형형색색 차별이 있고, 사람들은 그 차별 가운데서 자기가 욕망이 원하는 쪽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드라마를 봅니다. 그 은근히 원하는 것을 달성했을 때를 가지고 출세라고 이야기하고 성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드라마가 세상의 단편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인간들은 누구나 드라마 같은 성공사례를 원하고 있지요. 그 원하고 있는 게 누구라고요? 죄인이지요. 그 죄인들이 교회 옵니다. 그럼 교회 와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할 때 뭘 원하겠습니까? 그 드라마 봤던 성공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달성하고 싶지요. 그걸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결국 죄인이 모였으니까 죄인 집단이 되고 죄가 있는 곳은 뭐가 있다? 저주가 있지요. 그러면 교회는 저주의 단체가 되는 거예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려운 논리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습니다.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똑같다고요. 사람은 달라지지 않아요. 다 같이 죄인이지요.

그러면 교회에 왜 와야 되느냐, 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을 인간이구나! 바로 그 이야기가 로마서 11장30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해서 순종치 아니한 걸로 되어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이에요. 32절에 보면.

3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거예요. 순종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없었다?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 있어서 다 같이 아담의 자손입니다. 같은 DNA에요. 어느 누구도 순종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순종치 않게 가두어 뒀다는 사실을 이제야 신약 때, 마지막 때 그걸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긍휼을 택한 자들이 그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따로 생긴다는 사실, 이게 복음이거든요.

그 긍휼한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을 입은 것은 인간이 잘해서, 착해서 긍휼을 입은 게 아니고 주님의 그야말로 긍휼하심에 증거물로 삼기 위해서 그냥 긍휼이 온 거예요.

그냥 자비와 용서가 온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이고, 이걸 증거 하는 자가 복음의 증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긍휼 입은 사람이 뭐냐, 아담이 복제해서 죄인인 것처럼 예수님의 하신 그 마음이 복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사람이 된 겁니다. 이게 복제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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