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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9 00:20:45 조회 : 492         
유튜브 (186강, 187강) 인간의 마음 , 고향 17041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86강          음성                동영상

 

187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IP:119.♡.152.148) 17-04-20 10:49 
186강-YouTube강의(인간의 마음)170418-이 근호 목사

제186강, 제목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변화지 않습니다. 인간은 변화지 않는데,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까 그 때 그때마다 적응하다 보니까 전에 자기 자신과 오늘의 자기 자신 그리고 내일되면 또 달라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처신하다 보니까 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만일에 동일한 환경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기 본성 그대로 남지요. 남녀 간에 연애할 때는 한 결 같이 잘해주겠다고 하지요.  막상 결혼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당히 당황스러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저럴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연애할 때 상대방을 자기 배우자로 얻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거지요. 적응했다가 이미 잡은 고기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법칙에 의해서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 용을 쓸 필요가 없어서 다시 자기 옛날 본성으로 되돌아가지요.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이 되는 것처럼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든가 또는 성령을 받아서 새사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새사람이 되었을 때 인간이 달라졌을까? 하는 겁니다.

새사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달라진 게 아니에요. 교회 나와서 그 교회의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자기 자신과 다른 행동을 억지로 뽑아내는 겁니다. 얼추 기도도 멋있어 보이고, 찬양도 경건해 보이는 쪽으로 찬양하고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 어려운 사람에 대한 동정, 아직까지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선교에 대한 의욕, 그런 걸로 중무장되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그런 환경에 나서게 되면 예수 믿기 전에 그 했던 본성이 그대로 나오게 돼있지요.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과 우애 있게 지내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쓴 그런 흔적에 불과한 겁니다. 일종에 교회 가서 묻은 훈장 또는 뿌려주는 꽃종이, 집에 가서 털어버리면 역시 자기 본색 그대로 드러나지요.

성경에 보게 되면 아담 자손들은 전부 다 죄인이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3장에서 그런 이야기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냈을까요? 사실은 이 생각은 사도바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 꾸준히 말씀해 오셨던 거고,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일을 구체적인, 사도바울이란 육체를 통해서 일을 진행시킨 겁니다.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인 것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고 달라진 게 없다는 거예요. 평생토록 살면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기 행함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된다는 이야기는 사도바울의 편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말은 한 때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자기 힘으로 예수 믿은 힘으로 내가 스스로 나의 구원을 달성하겠다. 그러한 생각하고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 서서 나는 죄로 말미암아 곤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게 겸손인가?’ ‘온유한 척 하는가?’ ‘실제로 그게 아니지만, 대단히 자기 마음을 낮추는 모범적인 행동을 우리한테 과시하기 위해서 저런 멘트를 날리는가? 저거 과장된 이야기 아니야?’ 이렇게 오해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실제로 곤고한 사람인데, 안 그럴 거라고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오해한다는 것은 교회 자체가 자기 마음들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자기 마음들을 왜 속였는가. 설교자들이 마음의 심층을 꽂아주는 그런 말씀들을 준 게 아니고 위장한 방법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를 꾸미는 방법들을. 교묘하게 경건한 모습으로 거룩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그러한 모습으로 연기 연출하는 방법들을 알려준 거죠.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거죠. 교회 바깥에 있을 때도 지옥 갔지만, 교회 나와서 자기가 지옥 가는 것도 모르면서 지옥 가고 있는 그런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야 되는데, 부활의 새 생명에 신경 쓰다 보니까 새 생명에 맞춘 어떤 위장적인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기대하는 목표치의 제2의 자아상에다가 사람들이 몰두하게 만들었어요. 수많은 청교도적인 책들이 개혁주의 책들이 그것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던 겁니다. 참, 은혜 받았다고. 나를 더욱 새 사람 되게 만든 그런 훌륭한 경건의 책을 읽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역겨워했고 더 이상 상종할 사람 아니라고 제자들이 떠나버리는 그러한 말씀을 오늘도 설교자들이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자칭 새 사람 된 사람들의 동호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마음을 본인이 계속 감추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3장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율법을 지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 믿는 것이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율법에 자기를 맡기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위장해도 저주 받는 자의 합당한 인간이 되고, 그 저주 받는 자의 합당한 인간됨을 우리를 공격했던 그 율법이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자동적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결심한다던지, 우리가 믿는다던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율법 자체의 완성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의 효과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화목제물 속에 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그렇게 인식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내가 나에게 뭔가 작전을 꾸민다던지 작업을 한다는 그 자체가 율법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거룩한 모습은 아닙니다.

더욱 날이면 날이 갈수록 율법 앞에서, 말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이구나! 깨닫는 그것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유일한 고백입니다.
 공은주(IP:119.♡.152.148) 17-04-20 10:53 
187강-YouTube강의(고향)170418-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187강, 제목은 ‘고향’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고향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릴 때 추억과 경험들이 차곡, 차곡 쌓여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 타향에 가서 살아도 어떤 낯선 도시에 가서 살아도 무엇과 비교하는가 하면, 항상 비교 대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무의식 속에 차곡 차곡 쌓였던 고향의 경험들과 새로운 도시와 비교하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어디에 가더라도 자기의 뿌리, 고향은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항상 유지되지요. 히브리서11장15절에서 16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 다음에 15절에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했다면 그러니까 수평적으로 이쪽에서 이쪽으로 이동이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돌아갈 기회가 있으려니와, 되어있어요.

성경에서 우리가 사는 이 현실세계를 지평의 세계로 본다면, 이 지평의 세계는 항상 돌아갈 기회가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우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이야기를 왜 히브리서에서 하느냐 말이죠. 히브리서11장에서 왜 고향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나의 고향은 내가 태어났던 그것으로 고향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나라는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끝이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설명하려 하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설명하려면 하늘나라를 그냥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체험과 경험과 비교해서 하늘나라가 설명이 돼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냥 비교 안하고 하늘나라 이야기하면 내가 아는 것 플러스 추가해서 하늘나라 정보 보태버리면, ‘죽어서 천국 가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껏 내가 살았던 식으로 살고 죽으면 예수 믿어줬으니까 천국 가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이 세상과 연장되어서 연결된 나라가 아니에요. 단절된 나라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메사아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데 그 유대인은 그들이 기다리면 그들이 확인이 가능한 분으로 삼았습니다. 기다린 자신들이 “야, 저 사람은 메시아다.” “저 사람은 메시아 아니다.” 구분이 가능한 대상자를 메시아로 삼은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온 백성들이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닙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들이 백날 기다려봐야 소용없습니다. 오실 메시아는 여러분의 눈에 안 띌 겁니다. 여러분들이 못 알아볼 겁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들이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메시아가 온다는 것은 온다는 이유가 성립이 안돼요.

알아봐야, 오심과 기다리는 사람과 만남이 주선되는데 오시는 분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못 알아보게 옵니다.” 이렇게 초를 쳐버리면 10년 기다려도 소용없고, 20년 기다려도 소용없고, 대를 이어 기다려도 소용없고, 결국 소용없는 짓이 되어버리면 메시아 중심의 생활 자체가 이게 허물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이 믿는 그 예수는 오시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선언을 해버리면, “여러분들이 기다린 그 메시아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교회 와서 열심히 돈 내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자기 관리한다고 그동안 나쁜 짓도 못하고 애썼던 그 모든 것이 자기 반성한다고 했던 것이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러면 종교라는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종교란 희망을 줘야 종교지. 희망을 짓밟아 놓고 그게 무슨 종교가 되는 겁니까. 심지어 적금도 희망이 있는데. 보험도 희망이 있잖아요. 죽고 난 뒤에 암 걸리면 목돈 타는 거. 요새는 그렇게 목돈 안 준다는 말이 있던데. 목돈 탈 때가 좋았지. 그러니 사람이 희망 때문에 교회 가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뭐냐 하면, 반대로 나와요. 너희들이 고향을 천국을 기다린다 할 때, 그 기다리고 있는 너 자신이 어디서 구성되었는가를 니가 한 번 검토해 본적 있느냐, 나는 뭔가 기다려야 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어디서 성립되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니가 한 번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니가 알았느냐, 아니면 이 세상사람 이라는 것을 그러한 체험을 가지고 살았느냐,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해서 믿는 자 자체가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결과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원인은 우리가 가야 될 그 본향이 원인을 제공하고 있고 우리는 이 땅에서 낯선 존재라는 결과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원인은 내가 내 구원의 원인을 내가 만들어 내거나 내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원인은 만약에 내가 소유해 버리면 내가 하루아침에 마음 바뀌면 그동안 쌓았던 구원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원인이 나이기 때문에.

그런데 결과가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떤 헛된 짓을 해도 원인이 이 결과를 그냥 방치하지를 않아요.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특징은 항상 이런 이야기해요. “내가 내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원인이 뭐냐 히브리서11장 다 보게 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하늘에 가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원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당기는데 그 당길 때, 그냥 당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살았던 증거물로서 이 땅에 살게 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나의 예수님이라는 그림의 파편적인 모자이크의 패널의 하나의 단편 조각을 갖고 있지요. 이 조각은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의 일부의 예수님 하신 일의 일부를 우리에게 부여했기 때문에 부여하신 쪽에서 이 조각에 맞추도록 우리를 개조하는 겁니다.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도록 개조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누구나 인간은 성도라 태어나면서 자기의 고향을 잊을 수 없어요. 내 고향은 충청도 어디라 하면 노래 부를 때마다 충청도 어딜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령이 와서 이게 개조를 해버려요.

충청도 고향에 갔더니만 누가 개발했는지 고향의 푸른 잔디까지 다 밀어버리고 현대그룹에서 공장을 세웠다. 이러면 두 번 다시 공장의 오염 때문에 고향에 갈 맛이 안 나게 만들어버리지요. 고향에 갔더니만 고향의 순이가 아직도 날 기다리겠지. 고향의 순이는 저 강원도 삼척에 가있고. 엉뚱한 데 가있는데 가 봐야 옛날 고향에 있던 신앙생활 했던 교회는 아름다운데, 교회가 아름답기는 교회 크게 짓는다 해서 20억 들여 크게 짓고. 옛날 아름답던 풍금 치던 교회는 없고. 뾰족한 이상한 교회 세워졌을 때에, ‘아이고, 고향이 날아갔구나!’ 그 날아가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니가 기존의 고향 생각 그런 낭만적인 생각 그만하라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고향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성, 저희를 위해서 한 성을 예비했다.

그러니 성도라 하는 것은 세상사람 보기에 미친 사람이에요. 정신 이상자에요.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자꾸 자기가 개조된대요. 땅에 것에 대한 어떤 미련, 아쉬움 없고 마치 점점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요. 하늘을 향하여. 삼층천에 올라가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이것이 바로 내가 믿어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고, 다녀갔던 예수님은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같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 계속 예수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분은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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