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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3 00:16:48 조회 : 517         
유튜브(188강, 189강) 밤과 낮, 말씀과 생명 17050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88강                   음성                  동영상

 

189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IP:119.♡.152.148) 17-05-09 14:55 
188강-YouTube강의(밤과 낮)170502-이 근호 목사

제188강, 제목은 ‘밤과 낮’입니다. 제목을 낮과 밤이라 하지 않고 밤과 낮이라 한 것은 밤이 먼저 있고 낮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1장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밤 또는 저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가 전부다 어두울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밝은 것은 피조세계에서는 그걸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먼저 있었고 그 어두움에서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피조세계가 하나님 뜻에 의해서 어두움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피조세계는 거기에 대해서 반항질하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낮이 있다는 것, 밝다는 것, 그걸 당연시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두운 것이 나으냐, 밝은 것이 나으냐, 역시 밝은 것이 좋지요. 환하니까. 어우둠에서는 기피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만드신 것은 우리 인간들 좋아라 만든 게 아니고 낮과 밤이라는 그 교차되는 가운데서, 교차되게 하는 그 원리 원칙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그 의중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밤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 반복성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마저 어느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반복되고 있습니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방향성은 바로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조세계에 오시는 것을 마중 나오는 또는 반기는 고대하고 대기하고 있는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밤과 낮이. 이러한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시편19편에 보면 거기에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19편에 보면, “ 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밤과 낮이 뭔가 본래의 창조의 내용을 전달, 전달, 이동, 이동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온 피조세계가 밤과 낮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건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밤과 낮을 자기 쪽으로 몰리도록 그렇게 손길을 가지고 작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밤이 되면 어두움이 둘러싸고 낮이 되면 밝음이 둘러쌀 때 이게 단순이 밤과 낮이 둘러쌌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주님의 선한 손길이 우리를 밤과 낮이라는 모양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쌌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밤은 밤대로 예수님의 소식을 알려주고 낮은 낮대로 소식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러한 소식을 밤낮으로 부여받고 있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낮과 밤을 통해서 밤과 낮과 더불어서 예수님 소식을 마땅히 펼쳐내고 그걸 표현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밤과 낮만 이렇게 창조주를 드러내면 그만인가. 정말 범죄한 인간으로서 언제까지 밤과 낮이 해야 될 기능을 같이 참여하지 못하고 동떨어져서 자기가 신인 냥 이렇게 까불대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배신하는 그런 행동을 언제까지 나갈 것인가.

창조주를 보여주는 그런 새로운 인간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낮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원칙대로 밤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밤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 창세기32장에 보면, 거기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지요.

야곱이라는 사람이 출생할 때부터 그 야곱에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창세기32장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밤과 더불어 나타난 사람인데 밤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야곱과 씨름하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밤에 천사가 나타났는데 야곱의 등장과 천사의 등장은 둘 다 어떤 공통적인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서로 만나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 공통적인 목적이 뭐냐 하면 바로 야곱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얍복강까지 왔어야 했고 그리고 밤에 나타난 천사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필히 야곱을 꼭 만나야 됐다 이 말이죠.

그것이 밤에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우리가 생각하기는 밤과 낮이 우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창조의 비밀을 그냥 막연하게 전달한다. 이렇게 되어있지만, 그걸 이 역사라는 바탕위에서 구체화 시키는 그러한 사건들이 성경에 보면 군데 군데 터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낮에 인물인 야곱과 밤에 나타나는 천사의 만남입니다.

결국 낮과 밤은 공통점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공통점이냐, 낮에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야곱에게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언약에 의해서 주도 당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이 우선이에요. 이 말은 야곱은 야곱 자신의 잘남과 구원을 위해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야곱에서 주어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이 야곱을 찾아갔고, 찾아간 정도가 아니고 아예 태어나게 했고, 태어나서부터 줄곧 언약이 주도되어서 야곱으로 하여금 창조의 비밀까지 맞닥뜨리도록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그렇게 인도하신 겁니다.

그렇게 인도하셔서 결국은 진짜 창조주와 관련된 분을 밤에 만나는데 그 밤에 만남으로서 낮에 사람 야곱은 밤의 사람 천사한테 지도록 되어있어요. 지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이긴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야곱이 밤에 사람한테 패배당해서 축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갑과 을의 취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낮에 사람 야곱은 더 이상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가 계속 살아가는 것이 드디어 벽에 부딪쳤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의 존재의 의미는 뭐냐, 이 땅에서 낮의 모든 인간들은 밤에 나타나는 천사를 만나지 아니하면 자기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낮에 같이 활동하는 인간들이 그게 인간의 본래 본질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언약사람이기 때문에 언약에 이끌린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아! 나는 내 자체로서 이것은 살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지요. 인간이 죽는다고 인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으면 안 됩니다.

밤의 사람. 언약을 완성시키는 분과 맞닥뜨릴 때 인간은 자기가 죽기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죽음을 알려주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비로소 제공되는 진실, 죽음의 진실과 생명의 진실을 이렇게 천사를 만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성도입니다.
 공은주(IP:119.♡.152.148) 17-05-09 14:58 
189강-YouTube강의(말씀과 생명)170502-이 근호 목사

189강, ‘말씀과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과 생명이 같이 겸해서 나오는 대목들이 성경에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한복음1장입니다. 요한복음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니, 이것은 이 말씀이 나올 때는 사람들이 말씀이란 말을 왜 이렇게 거론하는지를 그 취지를 잘 모르지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생명이란 말이 나와요.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말씀이라는 분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사람들이 생명이라고 여겼던 것, 우리가 아는 목숨 부지한다는 그 생명은 사실은 가짜라는 겁니다. 수상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목숨을 가졌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니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너 자신을 어느 쪽으로 강력하게 끌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나 지금 목숨 붙어있어.” 라고 거기서 생각을 멈추지 말고 목숨이 붙어있다. 붙어있다. 붙어있다. 오늘도 나는 살았어. 살았어.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목숨이 하나의 미끼처럼 작용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생명이라고 보는데,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우리를 둘러싼 어떤 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빛에서 나오는 힘이냐, 그걸 생명이라 하고 어두움에서 나오는 목숨이라면 그건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몸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행동에 나설 때는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몸의 신체가 100조개의 세포가 발휘하고 있는 영양소가 타서 발산되는 에너지를 자기가 사용함으로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은 방향이 딱 정해져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는 것, 내 원대로 되는 것, 내하고 싶은 대로 딱 결과물을 낳는 것, 그런 쪽으로 쓰여 지지요.  나는 저 사람을 전도하고 싶다. 할 때 배고프면 못 하잖아요. 그럼 일단 식사하고 배부른 상태에서 말을 하더라도 지치지 않도록 조치해서 전도하면 그게 전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하던, 교회 가서 예배드린다. 할 때 배고프면 못 가니까 아침 밥 먹고 가지요. 이 모든 전제가 뭐냐 하면 사람은 일단 떡으로 먹고 에너지가 충만할 때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마귀의 일도 할 수 있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밥을 일단 먹고 난 뒤에 그리고 이왕 밥 먹고 행동한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거기다가 남들이 나를 알아줄 때, 인정해줄 때, 존경해주고 사랑해줄 때, 이건 밥 먹는 에너지보다 더 신이 나서 기가 살아서 더 활동하지요.

그러니 사람은 떡으로 사는 거고, 사람은 남들이 알아주는 것으로 사는 거고 또 이 땅에서 소망과 목적은 있어야지요. 소망 없는 사람은 허무해지니까. 세상에 뭐 하나 더 자기 영향력이 확장되고 갖고 싶은 것 더 많이 가질 때, 세상의 아름다운 것, 참한 것 그리고 탐나는 것, 세상 부귀영화를 가지고 이런 것이 기본으로 갖추고 그걸 내용으로 할 때,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대해서 성경을 덮어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누구나 동의합니다. 교회 왜 가는가, 살아있는 걸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사는데?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죽어서도 더 살아있게. 이걸 희망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이 땅에서 살아 있는 게 과연 살아있는 현상인지 아니면 반대로 죽어있는 현상인 것을 만약에 누가 따진다면 우리는 벌컥 화를 낼 겁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더 살려고 애를 쓸 건데, 만약에 내가 누가 나보고 죽어있다고 한다면, 아~ 죽어있는 인간이 더 살 이유가 없잖습니까? 살 필요도 없고. 죽은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죽어가고 있다면 살아있다는 그 보람이 없을 거니까 삶의 동기 부여도 되지 않을 거다 이 말이죠. 화를 낼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내가 더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되고 니가 지금 죽어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어있다면 우리 말고 누가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살피게 될 거예요.

요한복음1장에서는 말씀이 바로 생명이라는 겁니다. 말씀만 생명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된 그 분만 생명이고 그 분만 생명이라는 것은 나머지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세력, 악마의 세력에 그들이 포로 잡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요한복음1장에서는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잡혀있는 것을 요한복음1장에서는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왔으되 그 사로잡혀 있기에 아무도 그를 영접치 아니했다.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활동에 기본이 뭐냐 하면 행여 저들이 나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일하신 게 아니고 처음부터 가능성을 단절시켜 놨습니다. 니가 나를 알아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희에게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데 왜 너희는 그걸 사용하지 않느냐?” 그런 식으로 주님은 다가서지 않는 겁니다. “아~ 너희들이 잘만 하면 알아볼 수 있는데. 아~ 너희들이 부여된 기회를 놓치네.” 이런 식으로 주께서는 전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갑니다. “니가 나를 믿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어떻게 어두움이 빛을 알아봐요? 그러니까 나는 내 의지로서 내 이성으로서 내 지식으로서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는 그 모든 구라. 그 거짓은 어두움이 만든 종교에서 나온 거죠.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 교회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그것을 활성화시킨 겁니다.

그것을 그렇게 거짓을 유포시킨 거예요. 여러분들이 정신만 바짝 차리고 마음에 결심만 해주신다면 언제든지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아! 사랑의 하나님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구나! 알아본다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은 주님이 집어넣은 방식이 아니고 이미 마귀가 모든 인간을 예수님 올 것을 예상해서 그런 거짓 것을 유포시켜 놨던 이 어두움 세력의 그 현장성을 그만 그냥 노출된 거예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3장에서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생명 되시는 분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과천선을 노렸던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갑자기 벼락 맞는 것 같은 느낌. 주님 앞에 갑자기 납치당한 느낌. 보쌈당하는 느낌.

아무 방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쑥 들어와서 데려가서 자기 사람으로 전환시켜 놓고 “니는 바로 빛 앞에서 어두움이었다.” 라는 것을 차후 적으로 이미 모든 구원이 끝나고 난 뒤에 영생을 주시고 난 뒤에 사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주시는 겁니다. 함께 동행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은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태초에 계신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자는 없고 다만 주님 쪽에서의 낮아짐과 낮아짐. 죄인 만큼 낮아졌던 그 낮아지심의 혜택 속에 끌려 들어간 사람만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그 생명과 함께 있음으로서 주님의 생명에 공유하고 있음을 믿게 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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