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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00:14:13 조회 : 515         
유튜브( 190강, 191강) 질서, 죽음과 삼킴 17051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90강               음성                 동영상

 

191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IP:119.♡.152.148) 17-05-17 16:34 
190강-YouTube강의(질서)170516-이 근호 목사

19강, 제목은 ‘질서’입니다. 세상에서 보통 질서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질서가 눈에 보일 때, 그걸 질서라 하고 그 바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질서’라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내 중심으로 모든 게 안정되어 있으면 질서, 그 질서 빼놓고는 다 무질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리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한 생각을 비유로 보면 이렇습니다. 연못이 있는데 위에서 비가 떨어진다. 그러면 물방울이 떨어진 그 부분만 파동이 생기지요. 동글 동글한 파동이 떨어질 때마다 생기지요. 동글 동글한 것이 여러 군데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로 사람이 있고 사람 주변에 질서가 형성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질서가 형성되고 그 중간에는 질서가 없는 무질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을 다 치워버린다 칩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 비워지고 거기에 아무도 안 산다 합시다. 과연 그것이 무질서이겠는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말하는 질서와 무질서가 얼마나 자기 위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형성되었는가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꾸 감사할 것에 대해서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감사할 게 뭐냐 하면 자기 소원대로 되는 것.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자기 기대대로 될 때, 그 주의 뜻을 자기의 소망대로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두 군데 있는데 내가 여기 담임목사가 저 쪽에 또 교회 목사 있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교회 있던 교인들이 저쪽 교회로 다 가버렸다. 하나 둘 빠져나간다. 그럼 그게 무질서일까요? 그러면 그게 기분 좋은 일일까요?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질서를 삼다보니까 교인들이 빠져나가서 옆의 교회에 간다든지 또는 음식가게가 있다면 두 개의 가게가 동시에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손님들이 자기 라이벌 가게로 다 빠져나갈 때, 그걸 세상의 무질서라고 “참, 세상 엉망이야.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푸념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모든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이 세상에 내가 턱하니 있다는 것을 너무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여기 있고 세상을 보다보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미라는 것은 아무리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 의미를 찾더라도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나의 소망과 합치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일방적으로 좋은 뜻의 의미로 그렇게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참, 세상 질서 잡혔어.”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아무리 봐도 자기중심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 해석 자체를 본인이 지금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1장부터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성경에는 인간의 있음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뜻이 함께 창조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비록 내가 이 땅에서 죽는다할지라도, 또는 내가 자기한테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할지라도 자기 입장에서는 그게 무질서고 엉망이고 개판이고 혼돈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내가 죽던지 살든지 그건 전혀 상관없이 꾸준하게 주님은 자기의 뜻대로, 의미대로, 계획대로, 약속대로 그냥 꾸준히 질서 잡혀 가는 거예요.

이 말은 얼마나 우리가 평소에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뜻에 충돌을 일으키느냐를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또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느냐 하면, 어린애들이 2살, 3살 먹은 어린애가 그 집 가정사를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지금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냥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쨍쨍 우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애는 자기 배고픔만 생각하는 거예요. 범위가 좁으니까. 세상 보는 범위가 자기중심으로 좁으니까. 밥 달라고 우는 겁니다.

영화에 그런 영화가 있지요. 이북에서 피난 올 때 몰래 와야 되는데 애를 안고 피난 옵니다. 그런데 컴컴한 온 주변에 곳곳에 인민군들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해야 무사히 탈출이 가능해요. 이것은 어른들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애의 질서는 배고픔의 질서에요. 지금 인민군이 있느냐는 애는 관계없어요. 그냥 배고프면 우는 겁니다. 부모는 애 입 틀어막는데 급급하고.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보는 입장이 얼마나 철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걸 우리는 확정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신앙생활 좀 하게 되면 오래하면 철  나겠지. 이렇게 하는데 사람이 80, 90이 되도 점점 더 자기 밖에 모른다는 그 성격은 더 심화될 뿐이지 그건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질서가 단 하나밖에 없는가. 그럼 하나밖에 없는 질서가 이러한 인간들의 악행, 인간들의 자기 위주, 이기주의, 이것 때문에 질서가 두 가지 색깔을 쥐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1편에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리 되어있어요.

여기에 보세요. 분류를 해보면 복 있는 사람 따로 있지요. 그리고 맞은편에 누가 있어요? 악인 있고, 죄인 있고, 오만 한 자 있지요. 이게 하나님이 만든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질서라 하는 것은 누가 이 세상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바로 복 있는 사람이니까 이들은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율법으로 짜여 진 세상 입장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의 맞은편에 있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세상을 볼 때, 자기 이익과 자기 행복과 자기 편리 위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모조리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바로 죄인이 되고, 악인이 되고, 오만 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면 율법 중심으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갖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세상에 율법만 생각하는 사람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하고 복 받아 마땅해! 라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구원해 달라느니 복 달라느니, 천국 보내달라느니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 자기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에서는.

자, 그렇다면 천국 간 사람은 어떻게 갔는가, 그 율법이 축 늘어져서 율법은 주님이 지휘하거든요. 그 율법이 축 늘어져서 우리에게 와 닿았다면 우리는 바로 내가 죄인이며 오만한 자이며 악행자라 하는 것을 인정을 할 때 그 사람은 그동안 자기 위주로 살아왔던 것이 이게 허상이며, 이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고 율법에 맞추어서 율법이 찾아왔으니까 율법에 의해서 시편1편을 증명하기 위해서.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그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활용하신 거예요. 찾아오신 거예요. 따라서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율법이 들어있거든요.

여기 시편에서는 율법을 묵상하지만, 새 언약에서는 율법을 묵상하지 않고 아예 율법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일하고 있어요. 율법이. 그러니까 본인이 결심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믿음이 생기도록, 구원이 되도록, 우리 안에는 율법이 작용합니다.

그렇게 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 세상은 예수 중심으로 이미 질서 잡혀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의 세계라는 사실을 말할 때, 그 사람이 바로 질서를 질서답게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공은주(IP:119.♡.152.148) 17-05-17 16:37 
191강-YouTube강의(죽음과 삼킴)170516-이 근호 목사

191강,  제목은 ‘죽음과 삼킴’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이 무엇이냐 물으면 자기의 숨의 끊어지는 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인간은 호흡에 있나니, 이사야2장 22절에 보면 인생이란 목숨은 호흡에 있다. 호흡이 멈추는 한 그 사람은 더는 못산다. 라는 대목이 나오고 전도서에도 그런 게 나와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구약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이란 하는 것은 세상의 층이 얇아요. 그냥 표피층이라 보면 됩니다. 그걸 역사 층이라 해요. 구약에서의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천국이 아니에요. 가나안 땅이에요. 가나안 땅. 그리고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애굽에서부터 결별을 말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에 결별을 나와서 다윗 때 오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다윗을 왕으로 삼아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상황을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다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왔느냐, 그림자요, 모형으로 이끌어왔다는 겁니다. 모형, 그림자라는 말은 모형과 그림자에 거기에 맞추려고 온 몸을 거기다가 바치고 던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십계명 지키면 구원 받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구약 사람들은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19장에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올 때, 십계명은 어릴 때부터 지켰나이다. 라고 나온 겁니다. 십계명, 율법 지키면 그 끝은 영생 얻는다. 부자 청년의 그러한 생각은 아직까지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나 그리고 12제자도 다 같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에 매진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탓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는 어떠했는가. 선지자들도 율법으로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중에 살고 보니까 자기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요.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이 자체가 이게 구원에 소용없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감을 잡습니다.

자,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신약 성경에 와서 보면 알 수 있어요. 신약 성경에.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 많이 나오지요. 구약에 있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요. 그들은 평생에 살아온 걸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평생에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은 모형에 불과하고 그 일을 유도하고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분은 믿음의 원천으로서의 자기가 죽어서 만나볼 그 예수님이 바로 그 지시를 자기에게 인생을 그런 식으로 이끌었다는 겁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 할 때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걸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자는 겁니다. 자기 인생들에게. 각자의 인생에게. 걱정할 게 없지요. 그러면. 내가 원해서 만든 인생이 아니잖아요. 머리 노랑 물들인 것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몸이 아픈 것도.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왜 그걸 몰랐는가.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떠나야 될 곳에, 떠나야 될 세상이 이게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잘못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올인하고 우리가 마음 붙이고 우리가 거기다가 모든 것을 다 거는 그 대상이 사실은 주님께서는 철거대상이에요. 쓰레기에요. 쓰레기. 쓰레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희망과 모든 기대와 의미와 가치를 거기다가 다 쏟아 붓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그랬었을 거예요. 다들. 그러나 그들은 점차 뭘 느꼈느냐 하면 아, 우리가 기대 걸고 우리가 욕심내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나오는 상투적인 질문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이 세상을 왜 우리에게  허락했느냐 하는 그 문제가 계속해서 질문이 나오겠지요.

거기에 답변은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나옵니다. 15장 54절에. 이 세상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개인이 목숨 끊어지는 걸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신약에 보면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에요.

고린도전서15장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세상 전체를 하나의 인물로 통합시켜버렸어요. 이 세상 전체를.

이 세상 전체를 사망이란 인격체로 만들어났다는 말은 그렇게 이 세상 자체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놓은 그 분도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인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이라 해요.

이런 것이 굉장히 난해한데요. 예수님이 생명이지요. 그러면 이 생명에 대드는 게 뭘까? 하는 거예요. 뭐 흔히 유대인들, 본디로 빌라도 뭐 이리 하겠지요.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 대들 때, 예수님께 누가 대드느냐고 보지 말고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보자 이 말이지요.

그러면 생명의 대드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의 반대  말은 뭔가 우리한테 알려줍니다. 그게 뭐냐, 사망이에요. 우리는 그동안 개인적 사망을 생각해서 사망을 내가 숨 끊어진 걸 자꾸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 사망의 기운, 사망의 힘, 사망의 에너지, 사망으로 모든 것을 전환시키는 그러한 막강한 권세, 그 권세 이름을 사망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생이라면 나머지는 사망인데, 그 나머지 것을 사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셨어요. 그럼 이 세상은 달랑 두 개의 세계만 남았습니다. 하나는 부활의 세계고 부활의 세계가 아닌 그 외의 것은 뭐가 되겠지요? 죽음의 세계에요. 이제는 개인적인 죽음에 대해서 연연해 할 필요 없어요.

요한계시록20장에 보면 뭐냐 하면 목 베인 영혼이라 했습니다. 목 베인 영혼. 성도를. 목 베인 영혼인데 누가 봐도 그건 죽은 건데,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첫째 부활’이라고 해요. 첫째 부활.

불신자들이 보면 사형당한 거고, 주님이 보면 첫째 부활이에요. 그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집사가 돌 맞아 죽는 겁니다. 누가 봐도 스데반집사는 죽은 거고 예수님만 봐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품에 달려가서 팍! 안기는 겁니다. 수고했어! TV는 사랑을 실고에서 그리운 사람 만나는 것처럼. 정말 간만에 그리운 사람, 이제는 눈으로 볼 것이라. 하는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품에 안기듯이 안기는 겁니다. “그래, 그거야. 잘했어. 그거야. 그래. 내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이 그 말씀이야. 선지자들도 그렇게 죽었어.” 안기는 겁니다.

그 때 그 스데반집사의 상태가 뭐냐, 성령 충만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 오전 그런 설교했잖아요. 세상은 오직 건강만! ONLY 건강이에요. 그러나 오직 거룩만! ONLY HOLY! 거룩 거룩만! 부활의 세계는 흠도 티도 없어요. 너무 깨끗해요.

그 깨끗한 세계가 미리 스데반집사에게 임할 때 그걸 성령 충만이라 했어요. 스데반집사는 세상기준에 서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인 평가에 대해서 그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명의 힘이 죽음을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삼킨 결과물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성도가. 너희들이 모르는 생명이 나를 삼키고 스데반집사처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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