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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00:18:02 조회 : 383         
유튜브(214강, 215강) 대기자들, 분노 17121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14강             음성


215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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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1.188) 17-12-20 18:55 
214강-YouTube강의(대기자들)171219-이 근호 목사

오늘은 214강, 제목은 ‘대기자들’입니다. 대기한다는 것은 현재 자기자리가 온전한 자리도 아니고 영원한 자리도 아니다 라는 그런 뉘앙스가 있죠. 대기한다는 것은 임시로 있는 것,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영원히 이동할 준비단계를 ‘대기’라고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을 ‘대기자’라고 하죠.

성경에서는 성도를 대기자로 봅니다. 어디에 대기하고 있는가? 무덤 속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베드로의 설교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설교 중에서 2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미 죽은 사람의 묘까지 거론을 한다는 것은 다윗이 죽어서 그 묘에 들어간 것으로 다윗의 인생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게 마감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제가 대기자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것이 다윗의 모든 운명의 끝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다윗의 묘가 있었는데, 다윗은 누구하고 비교가 되어야 할 인물이냐 하면 대기자에 있는 사람들, 대기자들은 그냥 외부에서 자기의 손을 잡아당기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대기된 상태에요. 그런데 어떤 분이 와서 대기자 속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 대기생활이 끝났다는 거죠.

누구하고 비교가 되느냐 하면, 3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를 시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설교를 하면서 인간을 먼저 거론해요. 사람을 거론하고. 그 사람과 같은 사람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사람이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과 비교를 시키죠.

다윗이 훌륭하냐, 예수님이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다윗이 갔던 인생 코스는 사실은 모든 인간도 예외 없이 가야할 그 코스를 다윗이 품고 있고 부각되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이런 대기 속에 있는 대기자들과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31절에 나오는데,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언하고 있는데, 그 예언한 내용이 누구를 예언했느냐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미궁에 빠졌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보니까, 옛날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예언한 그 당사자가 드디어, 그 당시 현재에 벌써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설교를 한다고 해서 어떤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팩트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게, 이게 아무소용이 없는 거예요. 종교를 갖는다는 게. 이미 인간은 하나님이 벌이신 이 팩트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 존재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윗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 보통사람 같으면 내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생각을 안 했다 이 말이죠. 그건 장차 오실 다윗과 예수님과 연결체제가 되어 있어가지고 자기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까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주께서 자기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는 일까지. 늙어죽는 일까지 이게 다 버릴 게 아닌 거예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그 기능을 자기가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는 어디까지냐 하면 자기는 그냥 무덤에 대기하고 있는 그 일까지 자기가 할 일이고. 그리고 자기와 대조되면서 자기 일보다 능가하는 일은, 그것은 자기와 관련된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무덤, 음부에 있지 않고, 육신은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부활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진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럼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설교를 보게 되면 무덤에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덤에 있지 않고 부활된다는 그것까지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렇다면 왜 다윗 본인이 알아서 부활될 수 없는가? 하는 그 문제. 에녹처럼 아예 죽음을 안 볼 수도 있는 문제인데, 다윗은 이렇게 실제로 죽음을 겪게 되는 것과,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될 때 무슨 근거로 부활이 되느냐, 그 내용은 안 나와 있어요.

그 내용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누구의 설교냐 하면 사도베드로의 설교가 아니고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다윗이 무덤에 있어야 될 이유는 늙어서 무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죄인이기 때문에 무덤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 죽는다고 할 때는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 역시 교회도 아니고, 이것 역시 종교도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죽음으로 간다는 말은 매일같이 뭘 짓는다는 말입니까? 매일같이 죄를 품어내고 있고, 죄를 드러내고 있고, 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죄를 짓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자기 죄책감에 힘들어하죠. 왜 힘드냐 하면 나는 죄를 안 지어야 되는데 죄가 나왔으니까 내가 책임져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다윗은 자기에게서 죽을 정도로 죄가 나온다는 말은,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나와야 될 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나온다는 것까지 무엇과 무엇의 재료가 되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데 충족될 조건으로서 죄가 나온다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봅니까? 우리는 조금만 불편해도, 조금만 사는 게 힘들어도 우리는 원망부터 먼저 하잖아요. 원망. 원망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는 착한데 왜 나에게 벌을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죠. “나는 성실한데 왜 내 인생을 고생스럽게 만드느냐?”라고 하죠. 이것 때문에 원망하죠.

그 앞에, 그러니까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말은 평소에 뭐가 깔렸다는 말입니까? 나는 성실하고, 벌 받을 짓을 안 했기 때문에 벌 안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행복해야 될 권리가 있는 사람이고... 그런 게 쫙 깔려있는 겁니다. 누가 그런 마음을 줬겠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탄이 그렇게 인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몰아간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게 몰아가죠.

행복을 찾아서 교회 왔기에 그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충분합니다.”라고 하죠. 근데 우리는 사랑받기위해서 충분한 사람들이 아니라 저주받기위해서 충분한 사람들이죠. 저주받는데. 사랑받으려면 아예 이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고생을 안 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식 사랑한다면서 밥 굶기고 고생시키는 그런 부모가 어디에 있어요? 사랑한다면 사랑의 값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힘들지 않게 살게 해야죠.

우리가 지금 교회 다니면서도, 또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대하면서도 어느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지, 우리가 어느 장단을 더 좋아하고 있는지, 그게 바로 우리가 죄를 또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바울의 심판이라는 것, 이 심판 속에 놓여있을 때, 그 자리에서만 구원이 보이는 법입니다.
 이미아(IP:122.♡.181.188) 17-12-20 21:34 
215강-YouTube강의(분노)171219-이 근호 목사

 

제 215강, 제목은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 현장에 주님께서 당도하신 겁니다. 사람들은 늘 분노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늘 분노하지는. 자기에게 웃음을 야기하는 일들이나 예상 밖의 어떤 복이 굴러들어오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이 왔을 때는, 웃지 말라고 해도 아마 껄껄껄 웃고,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웃죠.

 

웃는 그 이유를 정리하게 되면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웃습니다. 남들로부터 내가 인정받을 때와 남들로부터 내가 사랑받을 때, 이 두 가지죠. 사실은 같은 거죠. 제가 둘로 나누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뭘 돌려줘야한다는 그런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둘로 나누는 거예요.

 

사람은 우선적으로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샤이니 종현처럼 연탄 피워놓고 죽을 수 있죠. 그 자살이, 자기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는데, 뭐 딱 깨놓고 말해서는 마음이 높아져서 그래요. 물론 마음이 왜 높으냐, 그것은 사탄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마음을 낮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높여온 겁니다.

 

이 정도 되는 위치가 딱 나라고 정할 때, 누가 그렇게 정합니까? 그것은 남들이 나에게 그걸 요구한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하는 기대에 자기가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으면,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을 내가 충분하게 속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요.

 

남은 100을 요구하는데 자기가 1도, 5도, 10도 못했을 때, 자기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것이 괴롭다고 하는데, 앞뒤의 논리가 이게 잘 안 맞죠. 인정 못 받으면 못 받는 대로 살면 되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 대로 살면 되잖아요. 사랑 안 받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외롭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근데 외로우면 그 외로운 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 보세요. 엄마 없이 혼자서 있으면 되잖아요. 근데 엄마 없다고, 엄마가 시장에 갔는데 엄마 없다고 곧 죽을 것처럼 고함치고 고통스럽게 누구 꼬집는 것도 아니고 누굴 발로 차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잠이 와서도 아니에요. 자기 곁에 누가 없다고 해서 앙탈부리면서 크게 우는 겁니다.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점을 주목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점을 주목한 사람들. 왜 인간은 혼자서 안 되는가? 심리학자들이 이걸 하는 겁니다. 심리학자들은 탄광에서 탄 캐는 사람들이 아니고, 식당에서 서빙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지금은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고, 남의 머리 해주는 이발사가 아닙니다.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를 연구해보니까, 인간은 외로운 것을 상당히 참기 힘든 것으로, 외로운 것을 고통으로 간주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이렇게 들어보게 되면 결론은 딱 나옵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나라는 것은 이미 남들이 거기다가 담아준 것이고 남들이 양육한 것이고 교훈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미숙하기 때문에, 육체로서는 떨어졌지만 정신적으로서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떨어져 나온 지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래서 옆에 보호자가 필요하고, 커서도 엄마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그 엄마나 아빠로부터 너는 이래이래야 사랑받는다는 것을 계속 그런 식으로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심지어 키우는 개, 고양이에게 자꾸 잘해주다가 잘 안 해주게 되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개도 우울증 걸린다고요. 개가 그냥 개가 아니에요. 사람이 만들어준 개로 달라지고 있다 이 말이죠. 주변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지면 영원히 그 사람은 주변사람들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같은 경우에 보호받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안 해줄 때는 그 보호자 자리의 빈터가 그렇게 나에게 힘든 자리고, 결핍을 유발하는 자리고, 마음이 허하게 만드는 자리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엉터리다 이 말이죠.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나 좋아라고 믿는 겁니다.

 

내 허한 것, 내가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을 때에 아무도 나에게 만족할 만한 사랑과 인정을 안 해줄 때에 예수를 초청하는 겁니다. 내 마음 달래달라고. 초청할 때 아주 간곡하게 초청하는 것을 간구라고 하죠. 간구. 통곡하면서 “주여! 주여!” 해가면서 계속 요청하는 거예요. “집 사 주세요. 주여!” 계속 요청하는 거예요. 집을 사줘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 이 말이죠.

 

그게 가짜거든요. 가짜가 뭐냐 하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떠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마태복음 12장 39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보호자, 영웅 같은 분을 우리한테 파견해달라는 겁니다. “신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살펴주옵소서! 나라는 덩치를 지켜주옵소서! 임마누엘 해주시옵소서!” 함께 있어서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함께 해 달라는 그들의 종교열정. 함께 있으매 그 증거물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눈에 띄게 실적으로 남겨달라고 할 때, 주님의 표적은 뭡니까? 요나의 표적입니다.

 

곁에 있다가 갈라서서 떠나는 겁니다. 떠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과연 너가 지킬만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하나님과 함께 있을 존재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그런 버림받을 존재인지를 니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요나의 표적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보호자가 왔다고 좋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그 결말은 그 사이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빠이빠이 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과 헤어지겠다고 자부한 것은 그들이 생각했던, 원했던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떠날 때 떠나주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느끼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기회를 잡은 거예요.

 

자진해서 우리는 가출해야 되고 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때, 재회할 때는 탕자의 몸으로 재회하세요. 잃어버린 자로 만나시면 그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와 강도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자에요. 예수님의 증거를 흠뻑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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