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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3 00:23:03 조회 : 415         
유튜브 강의 (216강, 217강) 희생과 이타주의 , 시간과 시대상 18010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16강           음성           동영상


21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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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1.188) 18-01-04 17:44 
216강-YouTube강의(희생과 이타주의)180102-이 근호 목사

 

제 216강, 제목은 ‘희생과 이타주의’입니다. 보통 사회에서 희생이라고 하면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 그걸 희생이라고 하죠. 남을 위해서. 근데 성경에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그 위치에 있지 않아요. 그것은 주님의 희생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이 희생한 것을 마치 자기가 선심이나 쓰는 양, 또 자기가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 이거는 우리한테 주제 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타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없어요. 성경에서 인간의 능력가지고 다른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거나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필히 인간의 영광이 돼요. 사람이 행동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기억하게 되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행동한 본인에 대한 가치를 따로 추리려고 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생과 이타주의를 분명히 구분하고, 성경에서 이타주의는 없음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느냐 하면, 주를 위해서 라고 할 때, 주를 위해서 살면서 성경을 보게 되거든요. 성경에 보게 되면 사도행전 2장에서 서로 도와주고 뭐 음식도 나눠주고 떡을 떼고, 라는 그런 대목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로마서나 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서로 돌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평소에 주님의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평소에 친한 사람끼리, 마음 맞는 사람끼리 서로 돌봐주는 것이 있잖아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가족끼리, 가족에 대한 애착은 인간으로서는 타고난 것이고.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족끼리의 정이라든지 가족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남들한테 베푼다고 실습을 하게 되죠.

 

이타주의, 나는 손해보고 남을 도와준다. 근데 문제는 그 이타주의가 한계에 봉착돼요. 한계에. 근데 자기는 성령 받아서 한다고 하지만, 자기 딴에는 그게 영적 일인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인간에게 영적 일이라는 것은, 본인이 살아있는 한 영적 일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부다 육적인 겁니다.

 

영적 일이라는 게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 유발되면서 비로소 영적인 것이 거기서 나오죠. 방울토마토 같은 것이 동글동글하고 작잖아요. 입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씹으면 팍 터지죠.

 

우리의 육이 자기 뜻대로 안 되고 팍 터질 때, 비로소 이타주의에서 희생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이타주의는 남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내 것 가지고, 내가 가진 힘 가지고 그쪽에 기꺼이 내놓고 도와주는 거예요.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가치를 포기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 그런 게 보통 이타주의입니다.

 

이타주의의 반대말은 이기주의거든요. 이기주의가 아니고 이타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이기주의도 아니고 이타주의도 아니고 어정쩡한 중간지역이 생긴다는 것은, 그거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모든 것은 나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그런데 나 중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까지 배려한다? 남을 생각한다? 그것은 역시 자기 생각의 확장이고 확대된 겁니다. 이기주의의 다른 형태가 이타주의에요. 제가 설명을 하는 것보다도 직접 성경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태복음 5장에 그 유명한 산상설교가 나옵니다.

 

39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게 이타주의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고발입니까? 상대방에 대한 고발이에요. 40절,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이거, 개기는 겁니다. 나한테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게 그러니까 더 하라고 들이미는 거예요. 상대방이 하라고 하는 그 지시가 영적이 아니고 육적인 거라는 것을 폭로하는 도구로, 수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희생은 뭐냐, 희생은 근본적으로 자기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께서 저 사람에게 저런 일을 발생시켰느냐를, 주님께서 발생시켰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돼요. 주님께서 저런 일을 발생시킨 것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이타주의라는 이름의 이기주의로 살아가는지, 내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발생시킨 겁니다.

 

그 한 가지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나오죠. 여기에 유명한 부자청년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부자청년은 자기 힘으로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자기 한계가 어디인지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한계를 주님 쪽에서 제시해버립니다.

 

21절,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죠. 그러면 부자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줘야 될 그 가난한 자, 자, 여기서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면 구원받습니까? 그 사람은 이타주의를 행사한 거예요.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주게 되면 이기주의라는 이름의 이타주의를 행사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뭐냐, 나를 좇아야 돼요. 예수님을 좇아가야 돼요. 예수님을 좇아가게 되면 내가 행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게 이타주의든 희생이든 주님 앞에서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점차 깊이,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내 죄를 들추어냄이에요.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근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주의 뜻을 행한다고 일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만들어요. ‘저 사람을 도와줄까? 말까? 어려운데 내가 희생해? 말아?’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모든 작업의 예상을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행한 이 행동에 대한 실적과 성과를 은근히 찾아보게 됩니다. 고대하게 돼요. 기다려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과가 좋으면 자기는 선한 일을 했다고 여기고, 선한 일을 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교만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까싶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의 은혜로,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우회적인 자랑질을 하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막사는 겁니다.

 

왜냐하면 막사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막살 때 그걸 본인도 알아요. 그게 죄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도 알아요. 그게 죄라는 것을. 그래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냥 죄짓고 살면 되는 거예요. 살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죄가 더욱더 깊어진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베푸는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 예를 하나 들게 되면, 회사에서나 어디에서 부정한 일을 요구했을 때, 이것저것 따지면 골치 아파요. “나 그거 못합니다.”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NO!”라고 하면 돼요. 그러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의인입니까? 아니에요. 노라고 한다는 것은 본성상 내가 사는 식하고 맞지 않기 때문에 노라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노라고 유발할 수밖에 없는, 자기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태를 주께서 일으킨 거예요. 뒤에서 뭐 부당한 요구였다, 정의에 어긋났다,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노라고 해놓고, ‘참 나는 또 내가 가치 있다고 챙기려고 했구나.’라고 곱씹으면서,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희생 앞에서의 죄인의 자세입니다.
 이미아(IP:122.♡.181.188) 18-01-04 17:45 
217강-YouTube강의(시간과 시대상)180102-이 근호 목사

 

제 217강, 제목은 ‘시간과 시대상’입니다. 사람이, 본인이 사는 세상을 시대라, 본인이 있는 세상을 시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인간이든 자기의 시대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이유는 사람이 외부환경을 이용해야 본인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적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적응한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못살고 자기한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하죠.

 

그것도 적응하는 하나의 방식이 돼요. 너무 외톨이로 살게 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 시대상에 대해서 인간은 잔뜩 기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어떤 나라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나라가 갈수록 잘 살게 된다, 그러면 신나죠. 인간은. 잘 사는 나라의 일부니까 덩달아 자기가 편하게 살고 여유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나라가 정치적으로 어지럽고, 싸우고, 국민소득이 떨어지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민 갈 생각을 하겠죠. 자기가 속해있는 시대상이 허망하기 때문에,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데 손해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41장에 보면 요셉이 등장하고 그 요셉 주변에 요셉의 시대상이 나옵니다. 그 요셉이 있는 나라가 바로 애굽 나라고, 그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입니다.

 

근데 이 바로라는 시대상에 요셉이 있을 때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요셉이 그 바로의 막강한 나라 앞에서 어떻게 힘들어서 살겠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죠. 근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꿈을 주셨을 때, 여기서 또 우리는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주신 꿈이 더 세고 넓은가, 아니면 요셉이 바라보고 있는 애굽 나라의 권세나 왕의 권세가 더 센가, 어느 쪽이 세냐를 생각하게 돼요.

 

성경을 안 본 사람은 지금 인간이 그냥 꿈을 꾼 것뿐이니까, 개인보다는 국가통치자가 더 힘이 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런데 성경이 왜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그 바로 왕이 꿈을 꿉니다.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꿈의 해몽이 안 되는 순간 이제는 권세에 역전이 일어나는 거죠.

 

그 바로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 그냥 미미한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이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서, 드디어 이제는 누가 누구를 기대고 의지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왕이 요셉에게 기대서 빌어먹게 되어 있어요. 역전이 일어난 겁니다.

 

이와 같은 비슷한 예가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니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성도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는 거예요. 세상의 권세자보다, 심지어 천사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자리가 성도기 때문에, 성도끼리는 재판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흔히 말해서 재판장이 최고인데, 재판장을 그야말로 내려다볼 수 있는 천사의 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희끼리 무슨 고소를 하느냐, 고소하고 고발할 필요가 없다. 누구의 힘에 기댈 필요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이게 구약 때부터 줄곧 내려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대상이 점차 발전할 때 사람들은 좋아하겠죠. 이러한 시대상에 애굽의 통치자 바로 왕이 무엇에 이제 몸달아하느냐 하면,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가 앞으로 잘 될 것인가, 바짝 기대를 하고 있잖아요.

 

올해가 2018년도 초반인데, 초반에 올해는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억지로라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시간과 시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앞으로 흘러가게 되면 못되는 것보다 잘될 것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데, 과연 인간의 마음대로 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 아닌 또 다른 누구의 마음으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은 창세기 41장,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꿈을 꿉니다. 바로가 꿈을 꾸는데, 꿈에 보니까 처음에는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왔다. 그 뒤에 곧장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서 그 소와 함께 하수가에 있더니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소를 먹은지라.

 

소는 원래 채식동물인데 소가 소를 먹어버리니까 이건 얼마나 짜릿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스러운 상황이죠. 그 꿈을 바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가 소를 잡아먹다니! 사자라면 몰라도, 풀을 뜯어먹는 소가 다른 고기를 잡아먹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잊을 수가 없죠.

 

또 꿈을 꿨는데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뒤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어요. 자,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시대상은 반드시 미래의 낙관을 기대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 꿈이 해몽이 안 되면, 이 시대상,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죠. 여기서 이제 이 꿈을 해몽하는데 어느 누구도 나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그냥 꿈의 해몽으로 끝날 것 같으면 구라를 쳐서라도 돼요. 근데 이게 현실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돼요.

 

그럼 이 꿈의 해석을 누가 하겠어요? 이 꿈을 꾸게 한, 인간을 초월한 어떤 분이 있어서 그 분이, 이미 앞일을 다 내다보시는 그 분, 내다보는 정도가 아니죠. 그 분의 뜻대로 세상을 운영해나가시는 그 분이 꿈을 집어넣었기에, 문제를 출제한 그 분만이 해답을 갖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나섭니까? 나서다가 틀려버리면 죽는데? 책임져요? 인간이 내일 일을 책임질 수 있단 말입니까? 못 지죠. 그런데 여기에 요셉이 개입합니다. 요셉이 개입해서, 우리가 알다시피 칠년 대 풍년 이후에 칠년 대 흉년이 옵니다, 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이걸 보면서 사람들은 나 같았었어도 그렇게 해석을 하겠다고 하는데, 문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해석을 좋게 하고 나쁘게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게 실제 돌아가는 것하고 일치가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칠년이니까, 칠년 기다렸다가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기꾼 능지처참 할 거다 이 말이죠. 죽여 버린다 이 말이죠.

 

자기 목숨 걸고 꿈을 해석할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무당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칠년 동안 붙잡혀 있어야 돼요.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했을 때 여기 창세기 41장에서 보면, 풍년과 흉년의 교차에 의해 실질적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가 아니고 요셉이 우선입니다. 요셉의 지위가 저 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 바로의 모든 권력은 사실은 바로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초점이 모아지고 응집이 되겠어요? 요셉한테 응집이 되겠죠. 모아지겠죠.

 

그게 하나님께서 꿈을 줬던 이유입니다. 요셉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야곱 언약에 의해서 살아야 될, 인도함을 받아야 될 자기 아버지 어머니, 본 어머니 라헬은 죽었지만 레아는 있잖아요. 그리고 열 한 형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언약의 공동체에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애굽 나라를 위해서 바로에게 꿈을 준 게 아니고, 그 애굽 나라에 개입된 요셉의 가정, 몇 명 되지 않아요. 70명밖에 안 되는 그 가정을 위해서 이 계시가 주어졌고, 그 계시가 주어진, 집중되는 그 지점에 요셉이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41장을 다시 보게 되면, 소출이 심히 많은 뒤에 50절에 보게 되면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51절, “요셉이 그 장자의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므낫세 라는 뜻이 뭐냐 하면 잊어버렸다. 자신의 모든 고생은 잊어버리고 이제는 안식의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고생 많은 성도의 마지막 모습이 꿈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이 고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열 두 아들 중에 므낫세이라는 그 이름을 차용해서, 하나님께서 꿈이라는 칠년 풍년, 칠년 흉년을 이 현실 바닥에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현실은 누굴 위한 현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녀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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