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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7 00:28:53 조회 : 303         
유튜브 강의 (218강, 219강) 선입견,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18011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18강     음성                  동영상


21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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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2-21 22:45 
218강-YouTube강의(선입견)180116-이 근호 목사

 

제 218강, 제목은 ‘선입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진리를 주셨습니다. 진리를 주셨는데, 진리를 주신 동시에 사람들 나름대로 만들어낸 진리가 있어요. 만들어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진리와 견주게 됩니다. 자기들이 아는 진리와 외부에서 온 진리와 일치점이 몇 퍼센트 맞아떨어지는지를 따지게 되어 있죠.

 

따질 때, 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이 진리가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 것인지, 실제적인 어떤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요. 나에게. 나에게 보탬이 되는 그것이 진리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은 겁니다. 상당히 자기 딴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지혜롭다, 슬기롭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힘이 더 커지는 것, 힘이 더 늘어나는 것을 가지고 이익이라고 하는데, 그 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본인들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걸 정리하게 되면 진리란 본인이 더 단단해지고, 안정적이고, 더 커지고, 본인의 영역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그 모든 방안을 그들은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주신다고 한다면, 인간들은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먼저 마중을 나가죠. 우리한테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곧 진리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진리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를 위한 뜻이죠. 굉장히 간단하죠. 아버지를 위한 뜻이 아버지의 뜻이에요.

 

여기에 뭐가 전혀 끼어들면 안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한 뜻은 진리에 포함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진리를 줄 때는, 진리 아닌 것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진리가 이 땅에 정착하게 되죠.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되는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뭔가 외부에서 진리라고 하게 되면 거기다가 보탤 생각을 해요. 자기가 깨지는 것이 아니고 멀쩡하게 있으면서 추가적으로 더 얻어지는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고, 아버지의 뜻이 들어왔을 때에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느냐 하면 모든 진리는 나한테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과 자기 뜻과 어쩔 수 없이 꽝하고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진리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무엇도 함께 몰고 오셨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도 함께 몰고 오신 거죠.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고 칩시다. 안 왔다고 치면 사람들의 뜻만 여기에 놓여있겠죠. 사람들의 뜻만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세계는 멀쩡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진리를 대동하고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은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전쟁터로 유발했고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진리를 배격하기에 급급하게 된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꼭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죠.

 

여러분들이 진리를 받을 때 어떤 식으로 받았습니까? 도움 된다고 받았습니까? 이익 된다고 받았습니까? 제일 처음의 이익이 뭐냐 하면, ‘이 진리를 확보하면 죽어서 천국 간다.’ 이런 이익을 생각했죠. 그러니까 진리가 참 좋아 보이죠. 벌써 거기에 뭐가 포함이 되었습니까? 충돌이 아니고 나를 천국 보내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일방적인 자기 이익을 고려한 개념을 이미 본인들이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거는 “예수님은 길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라고 백날 이렇게 외워도, 그리고 환영하고 반기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반복을 해도 여전히 자기영역을 떠난 적이 없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진리라고 합니다. 엉터리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근원적으로 바닥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다시 정리해드릴게요. 예수님은 진리인데, 진리란 아버지의 뜻이에요. 아버지의 뜻이 왔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있는 인간세계가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따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따로 왔다는 자체가 기존의 인간들 속에는 진리라는 것은 아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예요.

 

없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각자 인간들의 포부와 이익과 노림수, 원하는 것, 기대, 희망, 이런 것으로 구성된 진리관이 이미 성립이 된 이상은,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그것을 내 위주로 해석해놓았기 때문에, 해석해놓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우겼던 겁니다.

 

이게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한테 한번 물어보자 이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데 뭘 원해서 믿었던가요? 무엇이 좋아서 믿었는지 다시 한 번 자기한테 질문을 해보자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그 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나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소위 인간들이 시도한 것이 뭐냐 하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쪽을 원할까요? 그것을 기피할까요? 이게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을 원할 때, 이미 살아난 거예요.

 

이 사람한테는 진리가 와도 진리를 배격할 수밖에 없던 요소가 아주 극렬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우리 각자한테 물어보는 겁니다. 본인이 똑똑하고 슬기롭다고 자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벌써 우리들에 의해서 진짜 예수님은 배격당하고 가짜 예수만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 감췄다는 겁니다. 우리의 선입견이, “하나님이 우리가 이런 것을 원합니다.”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우리 자신을 점점 더 지옥가게 만드는데 가담한 거예요. 방향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는 쪽으로 점점 더 우리를 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슬기롭고 지혜 있는 것을 우리가 자진해서 포기할 마음이 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구원받을 사람은,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슬기도 필요 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쪽으로 자꾸 몰아세워 가도록 해요. 네가 안다는 것이 화근이고, 네가 안다는 이것이 문젯거리라는 겁니다.

 

“나는 성경에 대해서 압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압니다.” 이게 화근이고 문젯거리에요. 몰라도 갈 수 있는데 왜 꼭 알아야 하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몰라도 갈 수 있는데. 자기가 모른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르면서 가는 것이 최고 아닙니까? 내가 주특기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구원을 받는다. 이게 바로 엄지척, 최고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남이 알아서 다 해주는 것, 그걸 가지고 여기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는 어린아이에요. 어린아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좀 알지 마세요. 똑똑하지 마세요. 슬기롭지 말고 행동 바르게 하지 마세요. 이성적으로 하지 마시고, 그냥 무턱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개판이죠. 제발 한번은 개판 맛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보세요.

 

그래도 천국 간다면 이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포착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여러분을 포착해서 어린아이같이,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되는대로, 몰아세운 대로, 그냥 흐르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뒤에서 미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자유만큼은 우리도 누려보는, 그런 자가 진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이미아(IP:122.♡.178.64) 18-02-21 22:46 
219강-YouTube강의(이방민족과 이스라엘)180116-이 근호 목사

 

제 219강, 제목은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입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을 볼 때에 두 가지 견해가 있어요. 하나는 이스라엘 편에서 이스라엘을 보는 것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을 보는 것과,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구약성경을 다 볼 때, 그들은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아브라함 혈족 이거는 무조건 천국 간다. 이것은 우리 이스라엘이 요청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족에게 할례를 행해서, 고추 끝을 잘라낸 그 가족과 공동체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주장이 있어요. 이게 창세기 17장에 나오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는 약속이기 때문에,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준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은 변경되지 않으니까 무조건 천국 간다. 이야기 끝. 이야기 끝난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들은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갈 수 있느냐, 두 가지 조건을 주셨어요. 첫째는 할례를 행하라. 이스라엘 쪽에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한 이유가, 여기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나와요. 혹시 이방인들이 너희들과 관련되어 있거든 제일먼저 할례부터 행하게 하라. 할례 행하지 아니하면 그 다음 이야기는 너희들에게 없다는 이야기에요.

 

할례를 행하고, 두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그냥 할례만 행하고 도망치면 안 되고 안식일을 지켜야 돼요. 그럼 안식일에는 하는 날이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준 율법을 가르친 날이 안식일이에요. 그날은 노동을 하면 안 돼요. 노동을 쉬면서. 그러니까 결국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와 안식을 행하면 몸도 이스라엘이 되었고, 정신도 율법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정신도 이제 유대인이고.

 

그래서 유대인이 점차 확보되는 거죠. 포섭이 되면서 그들은 구원받는다. 끝. 이 구원역사는 그걸로 끝나요. 그러면 안식일도 안 지키고 할례도 행하지 않는 이방민족은 뭐냐 하면 그거는 시편에 보면 주를 모르기 때문에 필히 그거는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더 심하게 말해서 메시야가 오실 때에 그들은 갓난아기까지 다 싹쓸이해서 죽여 버립니다. 죽여서 지옥 보낸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보는 성경의 견해입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호세아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로마서 9장 25절에 보니까,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라는 이 대목에 대해서 유대인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도전하죠. 도전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약간은 난감해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에는 오직 할례 받은 이스라엘만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고, 호세아에서는 백성 아닌 자를 구원한다고 하니까, 이게 충돌이 되죠. 마찰을 일으키죠. 그럴 때 그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경 말씀에서 두 개가 충돌이 될 때는 우선되는 것, 먼저 말씀하신 것이 그게 더 정답에 가깝다, 정답에 더 확정적이라고 그렇게 본 거예요. 따라서 호세아 이 말은 창세기 이 말씀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고, 아까 이야기했죠. 이방인이라도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조건하에 부른다는 뜻이지, 그런 조건도 없이 마구 부른다는 뜻은 아니라고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정말 발상의 전환을 해요. 엄청난 이야기를 해요. 바로 자기 자신이 옛날 유대인중의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셔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너희들이 살해한, 죽게 만든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사고방식이.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생각은 이래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준 것은, 그들이 장차 올 메시야를 죽이기 위한, 그러한 만남의 장을 그런 식으로 만나게 한 거예요. 그게 대표적인 죄인의 티를 내게 하기 위해서, 할례 행하게 하고 안식일을 행하게 한 거예요. 행함이죠. 이 행하는 것이 구원받는다는 이 행함주의를 주님께서 일부러 유발시킨 겁니다.

 

그리고 유발시킨 이유가 뭐냐, 인간이 자기 행함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특혜를 입었다는 그 사고방식이 죄의 절정이라는 겁니다. 죄의 절정. 너희들이 그렇게 우리 이스라엘은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이방민족은 어떤 생각을 한 줄 아느냐? 아, 우리는 처음부터 제외되었구나. 우리에게 천국은 별 볼 일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이방인들이 가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붕 띄워놓고, 김칫국 실컷 마시게 해놓고, “아, 우리는 김칫국도 없어.”라고 낙담하고 자포자기한 이방인들을 그냥 무상으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출해버리면 어느 쪽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극대화하겠느냐? 한번 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의 편지를 써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둘 다 보낸 겁니다. 자, 이렇게 보냈어요. 그러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니까,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신이 납니까? 아니면 위기감을 느낍니까? 지금 그 말이 신이 나요? ‘아이고, 고소하다. 이스라엘이 까불다가 잘 됐다.’라고 이렇게 고소합니까? 아니면 이 이야기가 도리어 우리들을 향하여 뭔가 주의를 요하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겁니까? 주의를 주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특혜를 입었다, 라는 이것이 또 하나의 우리만의 특수 집단을 이룰 수 있다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로마서 9장 27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은 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남은 자.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을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잘라내고 남게 하는 주님의 작용에 눈여겨봐야 합니다. 주님의 작용에.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쭉 잘라내면 누가 남은 자냐 하면 남은 자는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지금 구원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이야기했잖아요. 그 다음에 이방민족이야기 했죠. 근데 뭐가 빠졌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야기가 빠져있는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를 제가 안 하고 그냥 이렇게 해버리면, 이방인과 하나님과 직통이 돼버려요. 예수님 빠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격하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끝.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이스라엘이 잘못 생각한 것과 똑같이 잘못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겨냥하기 위해서, 예수님 증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거거든요. 근데 “메시야가 왜 필요 하냐, 하나님이 직접 우리나라를 만들었으니까 나라만 붙들고 있으면 구원이 되지.”라는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나, “예수님이 뭐가 필요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구원을 해줬대.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구원해줬으면 그걸로 끝난 거지, 거기에 예수님이 끼어들 자리가 뭐가 있겠어.”라는 생각을 한 이방인이나 동일한 생각을 갖는 거예요.

 

둘 다 자기구원에 환장한 겁니다. 둘 다 자기가 구원받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둘 다를 언급함으로써 먼저 예수그리스도만 남은 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자비와 긍휼은 어디를 봐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데려가야 해요. 데려가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이방인이든-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입니다-유대인이든 모두 다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진 그 죄의 속성이 이방인에게도 있습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됐지. 나만 얻어 챙기면 끝난 거지.’라는 생각을 똑같이 갖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전에 이스라엘이 했던 그 죄를 구원받은 이방인도 똑같이 표내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 우리가 긍휼을 받았다고 이스라엘보다 나은 게 아니구나.’라고 할 때, 진짜 돌아온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이스라엘의 죄를 안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안은 사람, 그게 온 이스라엘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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