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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0 23:45:11 조회 : 408         
유튜브 강의 (222강, 223강), 전부와 부분 , 건너지 못할 강 180220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22강       음성             동영상


223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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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2-21 22:42 
222강-YouTube강의(전부와 부분)180220-이 근호 목사

 

222강, 제목은 ‘전부와 부분’입니다. 보통 부분은 전부보다 작고, 전부는 부분들의 총합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서 잘못된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개혁주의 사상에는 주권사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끝.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것 같으면 부분에 해당되는 우리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그런 논리가 되죠.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하나님이 원해서 하신 일인데, 그게 죄가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성질대로 막 살아놓고, 이거는 죄가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에 다 계획하시고 뜻이 있어서 펼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나한테 물을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라고 자기정당성을 그렇게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 밑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전부고 우리는 부분이다, 라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근데 그런 사고방식으로서는 창세기 1장 26의 말씀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6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래 되어 있죠.

 

‘우리’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 또는 ‘복수’, ‘여럿’을 이야기하죠. 근데 뭘 만들었느냐 하면 사람을 만들었어요. 사람을 만들 때, 사람이 몇 명이냐 하면 달랑 하나입니다. 아담 하나에요. 그렇다면 인간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형상이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인간이라는 하나에 다수의 형상이 여기에 담긴 게 돼버려요.

 

상당히 불합리하죠. 인간은 하나인데?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우리는 여럿이다. 이러면 우리가 이해가 되죠.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이러면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다수의 형상이 오직 하나 인간에게 다 쏟아 부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인간 안에는 몇 개의 형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삼위일체라면 세 개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겁니까? 삼위일체가 맞는다면 세 개의 형상이 있는 셈이 되잖아요. 그러면 네 개는 왜 안 될까요? 그래서 이게 전부와 부분에 대해서 새로 정리가 되어야 해요. 뭐냐 하면 전체라는 것을 인간이 생각할 때, 인간의 눈에 띄는 모든 다수의 것을 인간이 모두 끌어 모은다고 해서 그게 전체(전부)가 아닙니다. 전부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제가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주권사상이라는 자체가 이단적인 발상이다 이 말이죠. 주권사상.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하면 인간은 다수고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부분이고 하나님은 전부기 때문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해서 다 집합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이런 논리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해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모르는 부분은 그냥 하나님의 뜻에 맡기자.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방향이 뭐가 되냐 하면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작다. 나는 조금밖에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를 알고 계시니까, 조금밖에 모르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접고 그냥 전부를 아시는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었다는,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그 방식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거부하는 거예요. 결국은 나는 부족하니까 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연약한 인간이 뭐 이렇게 해도 그냥 눈감아 주실 수 있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어디 되도 않는 인간을 밟습니까? 그러니까 뭐 좀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어물쩍 그냥 넘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일어난 창세기 2장, 3장을 보게 되면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인간 밖에 있는 위대하고 거대한 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아담 안에 꼬깃꼬깃 담겨있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권사상에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은, 그 마귀라는 것이 인간하고 상대 안 해도 되잖아요. 영이니까.

 

근데 왜 마귀가 아담을 구태여 유혹을 하겠다고 그렇게 벼르고, 기어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그렇게 미혹했느냐 이 말이죠. 그건 아담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진짜 하나님의 뜻이 아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심어져 있는 거예요.

 

그걸 악마가 알아요. 아담을 유혹하는 것은 아담을 유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천을 건드리는 겁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의 ‘우리의 형상’이거든요. 다수, 보통 우리가 전부라고 하면 하나인데, 이거는 전부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전부고, 부분이라는 인간은 일(1), 하나가 돼요. 모든 것이 된다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주권사상을 반대로 뒤집어야 되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전부에 관한 일들이에요. 부분에 관한 일이 아니고. ‘나 하나 뭐 이래 주께서 무시해도 되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자, 또 하나 예를 들게요. 누가복음 15장에 백 마리의 양이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인 줄 몰랐죠. 아흔 아홉 마리 밖에 없죠. 아흔 아홉 마리 양끼리 가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그게 전부라고 본 거죠. 하나 둘 셋... 아흔 아홉이니까.

 

근데 아흔 아홉을 전부가 아니라고 들통 내는 발언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나의 잃어버린 양”(눅15:6)라고 했거든요. 그럼 아흔 아홉을 놔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간다고요. 그러면 남아있는 아흔 아홉 같으면 하나에 비하면 구십 구배나 양이 많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99+1=100, 이렇게 해서 그걸 전부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전부로 보는 거예요. 아흔 아홉은 놔둬버리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한테 초점을 맞춘다고요.

 

그게 뒤의 탕자비유에 나옵니다. 탕자비유에서 나오는 그 탕자에게 아버지의 전부가 다 있어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쳤던 그 탕자에게 아버지의 전부가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들,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집나간 아들은 두 아들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전부가 가출한 겁니다. 전부가. 그 가출한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맏이라는 존재의미가 없어요. 아버지의 존재의미도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것도 존재의미가 없어요. 아버지의 아버지 됨의 의미도 몰라요.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이 자기를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전부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삭이 전부에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으로서, 먼저 선행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전부에요. 그 외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도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것이지, 인간이 예수님 빼놓고 달리 하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고, 인간의 악마적 사고방식에서 유출된, 유발된 상상의 가짜하나님입니다.
 이미아(IP:122.♡.178.64) 18-02-21 22:43 
223강-YouTube강의(건너지 못할 강)180220-이 근호 목사

 

223강, 제목은 ‘건너지 못할 강’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두 개의 건널 수 없는 강이 나와요. 하나는 홍해가 나오고 하나는 요단강이 나옵니다. 요단강과 홍해의 차이점은 뭐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건널 수 없는 강을 두 개나 마련했느냐, 그 점을 생각해야 돼요.

 

강이 두 개가 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강을 건너기 전의 상황과 건넌 후의 상황이, 강 하나만 있다면 좌우로 대칭이 되겠죠. 좌우로. 그러면 강만 건널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이제는 합격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합격한 인간. 하나님의 천국에 합격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강 하나만 있다면.

 

만약에 강 두 개가 있다면, 첫 번째 강을 건너 합격한 그 인간에게 두 번째 강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첫 번째 강을 건넜던 그 방식으로 두 번째 강을 건너서는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첫 번째 강을 건너게 한 것입니다. 무지무지하게 복잡한 거예요. 두 번의 분리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애굽에서 따로 분리된 히브리인들,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죠. 애굽에서 분리된 인간에게 강 하나만 있다면 애굽에서 분리된 그 자체로서 이미 구원이에요. 천국의 합격자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들에게 또 하나의 강을 준비했다는 말은, 애굽에서 분리된 인간만이 인간이라는 것이, 두 번째 강에 가서는 어떤 인간도 인간이 아니다가 돼버리는 겁니다. 애굽에서 분리가 됐던, 어쨌든 간에 인간이라는 자체는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두 번째 강이 마련된 거예요.

 

그리고 첫 번째 강, 두 번째 강의 특징이 뭐냐, 둘 다 인간의 능력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이에요. 건널 수 없는 강을 두 개나 마련했던 겁니다. 첫 번째 강에서, 홍해죠. 홍해에서 그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건넜던 거예요.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이건 한 번이죠. 단 한 번의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으로 강을 건너게 돼요.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그 사람들이 홍해를 건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요단강을 건널 때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데 길을 내야 되겠죠. 길이 없다는 말은 홍해를 건너온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없어요. 홍해는 건너왔는데 요단강 길이 없어요. 그렇다면 요단강 길이 없다는 말은, “너희들이 인간이냐? 그렇다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다.” 인간이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나라에요.

 

그럼 뭘 보여주겠어요? 천국은 인간이면 못 들어간다. 그러면 천국은 왜 있느냐, 무엇을 위해서 있는 나라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해서 있는 나라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언약궤가 보인다고 했어요. “이에 하늘에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11:19).

 

언약궤를 제사장이 메고 요단강 한복판에 설 때, 전에 홍해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 홍해에서 무슨 현상이 벌어졌죠? 물 사이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홍해나 요단강이나 길이 났다는 말은 길이 없다는 말이죠. 길이 없다는 말이에요. 길이 없다는 말은 물로 덮여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연극무대의 커튼이 쫙 열리는 것처럼 물이 열어줘야 비로소 나오는 길이에요. 물이 열어줘야. 홍해에서 뒤따라오던 애굽군사들이 다 물에 빠져죽었잖아요. 오히려 바닷물이라는 것은 이 땅이 심판으로 덮여있다는 겁니다. 심판으로 덮여있는 거예요. 심판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심판으로 덮여있는 것을 홍해에서 갈라지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럼 홍해 바다에서 사람을 보고 심판의 길을 열어줬을까요? “어! 너네 히브리인이네 이리와!”라고 하면서 열어줬겠느냐는 겁니다. 인간이 건너겠다는 마음 때문에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에요. 심판을 열게 하는 유일한 요소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그렇다면 천국은 언약의 나라고, 언약된 자만 들어갈 수가 있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으로 넣어준 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바꿔치기 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바꿔치기 해야 되는 거예요. 처음에 홍해에서는 히브리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근데 그 피가 두 번째 강 요단강에서는 뭐냐 하면 살려내는 피가 아니라 그 피 안에 모든 인간이 죽어야 되는 피인 거예요. 피가 인간을 죽이고, 피가 죽였던 그 인간들만이 피를 앞장세워서 두 번째 강물이 열리는 겁니다.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력으로 천국에 못 가고 철저하게 언약의 피에 종속돼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에 종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으로 조금씩 끌려가는 거예요. 죽음으로 끌려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반복해야 돼요. “나는 이제 죽으면 천당에 간다.” 이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분은 세월도 아니고 나이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만이 나를 죽이십니다. 십자가 피에서 나를 죽이십니다.”

 

그렇게 피가 나를 덮쳐 날마다 죽일 때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있는 거죠. 십자가 지신 분이 살아있는 거죠. 그러면 이런 자격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살았다가 아니라 누가 살았다? 내 속에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언약이,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계속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그 사람은 천국에 이미 입성한 사람입니다. 천국을 이미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건널 수 없는 강이에요.

 

그래서 언약궤가 있던, 요단강을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들이 약속을 땅을 밟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본인이 어떻게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이 계속 살도록 보여주어야 하느냐 하면 요단강에서 이끌어낸 그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궤의 의미가 계속 살아있어야 하는데, 약속에 들어가서는 살아있지를 못하고, “이미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뭐.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는데 뭐.” 이렇게 하다가 그들은 전부 다 언약궤의 취지, 정신을 위해서 멸망한 겁니다.

 

이제는 그 언약궤가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떤 교회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 피가 들어와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는 날마다 살아나는 식으로 언약궤가 엔진이 돌아가듯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엔진이 웅웅~거리면서 계속 가동되듯이, 성도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만 계속 증거 되고 있죠.

 

따지고 보면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뭐만 생각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반긴다는 것. 이거 하나만 알게 되면 바로 천국은 주님이 머리되시고 우리는 주님에게서 퍼져 나온, 주님에게서 계속 생산되는, 그리스도에게서 생산되는 사지(四肢), 지체(肢體)로서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사지, 그것은 머리됨을 증거 하라고 떨어져 나온 사지입니다. 그걸 두 자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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