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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23:52:27 조회 : 211         
유튜브( 238강, 239강) , 육의 한계 , 몰두 18061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38강      음성               동영상


23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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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6-20 18:46 
238강-YouTube강의(육의 한계)20180619-이 근호 목사

 

238강, 제목은 ‘육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육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육의 한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의 목표하는 것도 육이 원하는 것, 인간의 육신이 원하는 것, 그것이 자기 인생의 성공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죠.

 

인간은 거울을 보면 비치는 것이 있죠. 자신의 신체가 비치는 겁니다. 저 신체를 가지고 뭐 할 것이냐, 그것까지만 생각을 해요. 저 신체가지고 뭐 할 거냐? 따라서 신체라는 것은 육을 벗어날 때, 육을 벗어난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한계라는 것을 쓸 수 있지, 육 자체를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결과와 업적을 남길 것이냐 하는 것에는 그 한계라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를 탔을 때, 차안에서 보는 바깥풍경하고 차를 세워놓고 차 바깥에 나가서 바깥풍경을 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차안에 있으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게 한계입니다. 차라는 그 자체가 한계죠. 우리의 신체를 차로 봅시다. 자동차 구조로 봅시다. 우리는 항상 차안에 있으면서 바깥풍경을 보는 겁니다. 한 번도 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잖아요. 그 기쁜 소식은 어떤 때 기쁜 소식이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계실 때에, 마태마가누가요한의 그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뭐, 죄사함도 되고 천국이야기도 되고, 그렇게 돼요.

 

근데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중간 중간에 육의 한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덩달아 베드로까지 그 혜택을 입는데,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일었을 때에 제자들은 폭풍가운데 무서워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어떤 시커먼 물체 같은 것이 성큼성큼 물위로 걸어오면서 제자들이 탄 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베드로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본 겁니다. 유령이라고 이야기할 때, 유령의 특징은 인간의 육체가 없는 것이 유령이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겁니다. 유령이라고 해놓고, 일단은 다가오는 대상은 유령이에요. 근데 가만히 가까이서 보니까 많이 낯익은 얼굴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냐, 유령이냐,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어거든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위를 걷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가 예수님한테 끌려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베드로 자기가 지금 신체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물위를 잘 걷다가 자기 자신을 돌아봤어요. 그러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겁니다. 이거는 평소의 생각이 뭐냐 하면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절대로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육체의 한계를 자기가 생각할 수 있고, 자기가 상상할 수 있고, 자기가 구성할 수 있는 그 세계의 전부로 본 겁니다.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뭐, 세상이라는 것은 이 정도까지만 세상이라고 정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는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물에 빠졌습니다. 자, 베드로가 끝까지 차분하게 침착하게 걸어서 예수님에게 갔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죠. 그러면 거기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복이라는 것, 인간이 신체로서 할 수 있는 그 한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걸 능가한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의 한계를 능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뭘 달라고 할 때는 인간의 육의 한계 내에서 자기가 설정한 그런 것을 가지고 달라고 하는 그것은 터무니없는, 예수님에 대한 곡해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죠.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있던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5장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육의 한계 안에, 아까 비유 같으면 차안에 들어있는 것, 차안에서 세상을 보고, 지옥을 생각하고, 신학을 생각하고, 천국을 생각하는 이 인간을 어디서 어디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차안에 갇힌 인간을 차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무도, 차안에 있으면서 자기의 신체를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예수님 빼놓고는. 예수님께서는 차안에 계시다가 차 바깥으로 나가신 거예요. 나가시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육체의 한계에 있는 우리를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바깥으로 내놓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래요.

 

스데반집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돌을 던진다. 그럼 유대인들이 스데반집사에게 돌을 던지는 이유는, 그 돌의 물리성이 스데반집사의 피부에 와 닿아서, 피부가 손상되어서 스데반집사가 핏줄이 찢어지고 깨어짐으로써 스데반집사를 이 땅에서 제거시키는 목적이죠. 흔히 쉬운 말로 죽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뭐냐 하면 그걸 주의 일로 본 거예요. 나로 하여금 이 육체라는 한계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이, 주님이 쓰시는 방식은 바로 저쪽에서 나의 육신의 한계를 벗어보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우리의 신체를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돌 던진 사람이 상당히 고맙죠. 내 힘으로 내 육체를 벗어볼 수 없는데,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짱돌 들고 스데반집사의 머리나 뼈 조직이나 힘줄조직을 때려주니까. 스데반집사님은 뭐 힘 안들이고 그냥 맞기만 하면 되니까. 약간은 따끔하겠습니다만. 자력으로 안 해도, 자력구원이 아니죠. 타인에 의해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과 제대로 만나는 거예요. 이제는. 전에는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만나다가 제대로 만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죠. 근데 세상 육체의 한계에 있는 사람은, 차안에 있는 사람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쁜 소식이 아니고 슬픈 소식으로 보는 거예요. 짜증난 소식으로 보고 어떤 위기, 괴로움, 좌절, 인생실패,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울 때는 자기 자력으로 육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걸 두 글자로 자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살은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살을 지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뭐든지 밖에 나올 때는 밖에 나오는 방식으로 끄집어내야지, 주님께서 밖에 나오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이 육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성령이 와서 우리를 끄집어내주기까지는, 우리가 빨리 주님을 만나고 싶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너무 성급하게 하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굶지 마시고, 조금 기다리시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06-20 18:47 
239강-YouTube강의(몰두)20180619-이 근호 목사

 

239강, 제목은 ‘몰두’입니다. 몰두를 다른 말로 하면 ‘집중력’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집중력이 없으면 아무 성과도 나오지 않아요. 학교 다닐 때 공부한답시고 밤새면서 책 펴놔봐야 소용없습니다. 공부 잘 한 사람의 특징은 짧게 해도 집중력 있게 해요. 집중력 있게. 속독법 딴 게 아니에요. 집중력 강화에요. 딴 게 아닙니다. 시간 많이 보낸다고 더 기억나는 게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대해버리면 두뇌에 깊숙이 박히니까. 어설프게 쌓이는 것이 아니고 깊숙이 박히는 방식은 눈에 들어오는 그림조각, 그림이미지를 가지고 그렇게 집중력을 강화시키죠.

 

그런데 이 집중력이 뭐든지 간에 이 세상일을 할 때는 대단히 유용한데, 집중력의 특징이 뭐냐 하면 둘을 용납 안 한다는 거예요. 하나에 집중해버리면 그 집중하는 그 일만 몰두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의 편지 같은데 보게 되면 성령께서 주실 때에 항상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동행함을 일깨워주는데 성령께서 일하신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동행함을.

 

그걸 영의 생활, 또는 영적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오죠. 육체를 위해서 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생을 얻을 자냐, 지옥 갈 자냐, 천국 갈 자냐 하는 것은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느냐 아니면 성령 없이 살아가느냐로 이미 결판이 난 겁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의 인생의 끝이 어딘가를 미리 간파할 필요가 있어요. 체크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그 사람에게 주눅 들거나 기죽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아는 게 많고 돈이 많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끝이 있게 마련이고, 그 끝이 어떻게 끝나는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이미 그 정보를 제시해놓은 겁니다.

 

영을 위해서 사는 자는 끝은 영생이고 천국이고, 육을 위해서 사는 자는 지옥이고, 뭐 간단하죠. 사람 파악하는데 뭐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파악하느냐, 예수님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 앞에 예수님이야기, 복음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상이 약간 찌그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나의 일에 몰두하는데 쓸데없는 그런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나올 때 그 사람은 지금 예수님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무관한 일에 집중이 된다는 말은, 그 일에 누가 빠졌는가 하면은 예수님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빠져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은 특징이 있어요. 자유함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주는 영이시니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데 자유함이 있다. 자유함의 특징은 뭐냐, 이 세상 일 어디에도 온전히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 없이 살게 되면 뭐하겠습니까? 성령 없이 살게 되면, 몰두해야 되니까, 집중해야 되니까, ‘오늘도 손님 이십 명 정도는 와야 수지가 맞는데.’라고 하면서 몰두하게 돼요. 그래서 손님이 들어오게 되면 ‘오늘도 잘하면 이십 명 채우겠다.’라고 하면서 좋아하겠죠.

 

그런데 식당을 하는데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식당을 한다. 성령을 주목하게 되고 성령과 함께 식당일을 하게 되면 주께서 보낸 자가 돼버리죠. 주께서 보낸 자. ‘오늘도 손님을 한 사람 보냈구나. 두 사람 보냈구나.’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도 주께서 내 심장을 뛰게 하고 건강하게 하셔서 아침부터 식당일을 하게 하시니 감사하구나.’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동업하는 거예요. 자기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식당일에 신경 쓰는 그 이상의 집중력을, 성령께서 마련해주신 식당일에 같이 신경 쓰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매개가 있고 통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냥 영광, 영광이라고 해서 영광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할 때에 영광이 되는 거예요. 다른 방식으로는 영광이 안 됩니다. 율법으로는 영광이 안 돼요. 율법의 한 의로만 영광이 돼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손님이 이렇게 왔는데, 손님이라고 왔는데 이건 깡패인지 손님인지 분간이 안 돼요. 만약에 손님의 주머니에 있는 돈이 한 푼이라도 아쉽다면, 그 사람의 온갖 비위를 맞추어주면서 그저 음식 값을 빼내려고 하지만, 너무 과도한 손님에 대해서는, 만약에 주님이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과도한 행패를 부리는 손님이 왔다면 그렇게까지 그 사람한테 돈 때문에 굽실거릴 필요는 없겠죠.

 

그러면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음식 안 팝니다. 딴 집에 가세요.” 이렇게 내보낼 거라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넉넉함이고 자유함이에요. 마치 예수님께서 주의 일을 할 때에 아쉬움이 많아서 주의 일을 했습니까? 당당하게 하셨죠. 예수님의 주의 일은,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이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일.

 

따라서 자기에게 성공실패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한테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아주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식당일을 하는데, 자기가 먹어봐도 맛이 없어. 근데 돈은 벌어야 하겠어. 그래서 대충 고등어 구워서 손님 오면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줬다. 그래서 맛이 없다고 손님이 삐지면, 이건 뭐냐 하면은 결국 범죄요, 사기 치는 것이죠. 그거는 벌써 식당일 할 자세가 안 되어 있죠.

 

그렇게 편하게 하겠다는 말은 손님한테 성심성의껏 안 하겠다는 말이고, 이 말은 본인이 돈 버는데 주님을 이용한 거밖에 안 돼요. 제대로 자기를 부인하면서 식당일을 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의 일은 어떤 일이냐 하면 십자가중심이기 때문에,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게으르며, 못났으며 내가 편하게 돈 벌려고 하는 그런 속물인 것을 날마다 깨우치는 주의 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집중적으로 몰두하면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는 일에 몰두해야 돼요. 근데 혼자 자기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몰두하지 말고, 주와 함께 협의하면서 몰두해야 돼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겠는가? 그것에 몰두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뭐 대충 읽자. 이런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보고 이 시간에 무슨 일을 시키실 것인가? 그렇다면 그게 힘들고 어렵고 눈 따갑더라도, 주님께서 이 일을 마감하라는 느낌이 오게 되면 그 일은 마감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게 주님의 집중력이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거기에 몰두시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편하게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힘들게 살라고, 이마에 땀 흘리라고 사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같으면 그저 쉽게 살기 위해서, 쉽게 살면서 쉽게 돈 버는 일에 집중할 거예요. 몰두할 거예요. 어떻게 편하게 돈 버는 방법이 없는가? 인터넷 찾고. 식당일 하면서 자기가 거기에 보조로 일 안 해보고 그냥 인터넷 찾아서 식당일 차리는 거 보면 이거는 미친 것이지, 도둑놈 같아요. 몸소 그 직장 일을 해봐야, 밑에 일을 해봐야 몸소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잖아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가, 그 고생담을 우리에게 하라고, 우리를 그 일에 몰두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고생에 집중하자!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꼭 남 흉내 낼 필요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될 때는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마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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