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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7 23:56:48 조회 : 285         
유튜브 (242강, 243강) 다수의 환상, 사는 것과 살리는 것 18071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42강    음성            동영상  


243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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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7-19 00:09 
242강-YouTube강의(다수의 환상)20180717-이 근호 목사

 

제 242강, 제목은 ‘다수의 환상’입니다. 누가 혼자 꿈을 꿨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죠. 꿈을 꾸는데, 그 꿈을 남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환상에 끌어당기는 것이 되겠죠. 그럼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의 반응을 고르기를 원하는 있는 거예요. 내 꿈에 동조하기를, 그리고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재수 없다고 해가지고 나를 배타시할 수도 있는 문제겠죠.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더 이상 당신과의 만남은 지속할 수 없겠습니다.”하고, 그 꿈 이야기를 가지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꿈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한테는 동의가 안 될뿐더러, 더 나아가서 행여 그 꿈이 현실로 변했을 때에 그 꿈의 내용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의 인생이 불편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거부한 거죠.

 

요셉과 요셉의 형들의 이야기에요. 꿈 이야기를 했는데, 환상이죠. 환상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 환상이야기 속에 자기 자신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데, 들어가 있는 내용이 자기한테 썩 만족스럽지 않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요셉이 꿈을 꾸는 것은 좋아요. 근데 꿈을 꿨을 때, 그걸 형들에게 아버지에게 엄마한테 그걸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이 꿈이, 내가 꾼 꿈이 나의 개인적인 꿈이 아니고 다수와 연루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절을 하고 나는 절을 받는, 그런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그런 꿈을 꿨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요셉이 그 꿈 이야기를 안 했더라면,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느냐 하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릴 가능성이 없겠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화근이 되었으니까. 꿈을 본인이 꿨고 꿈을 발설하지 않았을 때에,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형들이 보기에 동생은 동생이고, 요셉이 보기에 형들은 형들이라 해서 한 가족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거는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현상이에요.

 

꿈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꿈을 꾼 후에나 전에나 변동사항이 없잖아요. 야곱가정에 변동사항이 없겠죠. 변동사항이 없지만, 갈라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만 알아요? 요셉만 딱 알고 있겠죠. 요셉만 딱 알고 있는 겁니다.

 

같이 살고 있는데, 다수죠. 다수. 다수가 같이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꿈이 없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꿨다면, 이것은 아무리 단결력과 결합을 선동하고, 단합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한 형제요, 한 공동체요, 한 집안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거는 소용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그렇게 하나로 가도록 놔두지를 않죠.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요셉이 꿈을 꿈으로써 요셉과 형들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요셉이 꿈을 꾸기 전에는 그들은 전부 다 한 가족이라고 여겼을 거예요.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 사이에는 꿈이 없겠느냐 하는 겁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그 꿈 말고, 그 전에는 꿈이 전혀 없었어요? 밤에 잘 때 꿈을 전혀 꾸지 않는 겁니까? 많은 꿈을 꿨을 거예요. 그 꿈 이야기를 안 했겠어요?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 꿈 이야기에서 어떤 꿈도 형과 요셉이 갈라지는 그런 계기는 일어나지 않죠.

 

자,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은 가 봐야 알지,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가봐야 안다. 상당히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죠.

 

그런데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사백 명 쯤 되는 선지자들이 유다 왕 여호사밧 왕 앞에 모여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아합 왕도 있겠죠. 사백 명이 왕 앞에 모여 있다 이 말이죠. 사백 명이. 사백 명이 모여 있을 때에 그들에게 왕이 환상을 요구해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요구한다는 것이고 예언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니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느냐, 패배하겠느냐, 이스라엘이 승리하겠느냐, 패배하겠느냐를 묻습니다. 그럴 때에 사백 명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질문, 왕이 선지자들에게 질문하기 전에는 그 선지자는 전부 다 왕하고 아무 문제없이 그냥 평화롭게 선지자노릇을 하는 겁니다. 사백 명이 다 모였으니까 서로 쳐다보면서 의견일치가 된 걸로 저희들끼리 합의를 봤어요.

 

여기에 어느 누구도 사백 명과 다른 환상, 다른 예언을 말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때에 이스라엘은 필히 승리한다는 그러한 집단 환상, 다수의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유별나게 미가야 라는 선지자가 정말 천상회의에, 거기를 가게 되었습니다. 봤어요. 천상회의에 가보니까,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본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이걸 안 봤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탈이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안 보고 난 뒤에 자기 왕이 죽든, 자기 나라가 망했든, 그 책임은 선지자가 질 필요가 없어요. 전쟁은 선지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왕과 그 신하들, 군인들이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가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대로 된 미래를 보여준 거예요. 22절에,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1절에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 영’은 마귀거든요.

 

마귀가 거짓말 하는 영을 그 선지자들에게 다 부어줬다는 이야기를 미가야 선지자가 발설을 합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죠.

 

우리는 개입했다는 것을 뭐로 하느냐 하면 결론을 보고 알잖아요. 인간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이에요.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다수가 모여 있을 때, 다수의 뜻은 뭐냐 하면 일이 되고 난 뒤에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 다수의 환상이에요.

 

근데 반칙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미리 인생의 장래에 대해서, 세상의 장래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기존의 단체의 것과 결별을 선언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니가 왜 하느냐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천국 가는 백성들에게는 뭐냐 하면 성령이 와요. 성령은 마지막 영입니다. 사도행전이나 요엘서에 보면. 마지막 영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을 이미 알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그 사람이 발설을 안 하면 조용하게 살아요. 그런데 발설하는 순간, 이 국가라는 환상, 대한민국이 생각하는 환상, 대다수가 생각하는 이 환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러면 그 다른 이야기가 그냥 다른 이야기일까요? 안 그러면 대치되는 이야기일까요? 반대가 되는 이야기에요. 이것을 성도는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성도 입장에서 볼 때 전부 다 거짓말 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이야기하지 않는, 말씀하지 않는 모든 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 성도는 외롭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07-19 00:10 
243강-YouTube강의(사는 것과 살리는 것)20180717-이 근호 목사

 

제 243강, 제목은 ‘사는 것과 살리는 것’입니다. 사는 것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근데 우리는 사는 것조차도 생각 안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라는 것을 언제 생각하느냐 하면 죽음의 순간, 위기의 순간, 이러다가 죽겠네, 하는 그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내가 죽지는 않았어. 아직 살아있어.”라고 할 그때에 사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사느냐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라는 그런 햄릿이 했던 고백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정신을 그런데 팔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거니까. 근데 그냥 살 때에, 아까 말한 것처럼 그냥 사는 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느낄 경우에는 죽음이 왔을 때, 여기서 중요합니다. 누가 죽었을 때에 사는 것을 느낍니까? 누가 죽었을 때에. 바로 내가 죽음의 위협을 느낄 때에 산다는 것을 인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죽음의 위기에 부딪혔을 때에,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그리고 인간이 죽는 것을 죽는 것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참된 죽음과 참된 사는 것의, 그 핵심의 의미를 종결시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을 영생이라, 그걸 사는 것이라고 하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그걸 죽음이라고 하고,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영생, 사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짓지 않는 어떤 사람도, 죽어도 죽음을 모르고 살아도 사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 것도 모르고 사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사이에서 지낸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인생을 보내면서도 내 인생이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세월만 보내고 시간만 보내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순간순간 어떤 위기 같은 것을 느껴가지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안 돼! 내가 여기서 좌절하면 안 돼! 힘차게 일어나서 다시 살아야지.” 자기 사는 것, 자기 죽는 것, 거기에 얽매여서 자기가 밥 먹고 살면 더 사는 것이고, 위기가 되면 죽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일종의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반칙입니다. 퇴장감이죠. 축구에서 퇴장감입니다. 축구할 때, 축구 선수가 운동장에 스물 두 명이죠. 운동장에 뛰는 선수가 스물 두 명인데, 만약에 그런 선수가 없겠지만 그 중에서 단 한 명이 자기편이 공을 줘도, 또는 상대방이 공을 줘도 공에 관심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잔디밭에 눕기만 하고 자기만 한다면, 심판이 그러려면 나가라고 하죠. “그러려면 나가라! 그러려면!”

 

이번 월드컵 축구 경기장에 프랑스하고 크로아티아하고 축구를 하는데, 난데없이 선수 아닌 세 명의 사람이 뛰어 들어왔죠. 뛰어 드니까 심판이 뭘 중지합니까? 축구 자체를 중지하는 거예요. 세 명이 들어왔을 때는 축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세 명을 내보내겠다는 말은 축구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이 축구장에서 나가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들을 선수로 뛰게 하실 때에,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전부 다 반칙하는 사람, 사는 의미, 죽는 의미를 모르고 뛰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들을 이 세상이라는 운동장에 뛰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전부 다 퇴장감이라는, 나가라 이 말이죠. 하나님이 원하는 게임에 적합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 나가버리면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나가야 마땅한데, 사는 의미, 죽는 의미도 모르니까 나가야 마땅한데, 지옥가야 마땅한데, 그러면 그 중에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을 입은 사람이에요. 그 혜택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려주는 주는 분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는 분으로 인하여 매일같이 살림을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래 되어 있어요.

 

첫 번째 아담은 육의 몸으로 오고, 흙으로 만들었거든요.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만들기를 왜 만들었는가? 주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 가치도 없고, 산다는 것 자체가 반칙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깔아놓은 겁니다. 아담을 통해서 새끼 깔아놓듯 쭉 깔아놓은 거예요. 그들은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주님의 일의 마무리가 아니에요. 끝이 아니에요. 첫 사람 아담 말고 두 번째 아담이 오게 되면, 첫 번째 아담은 육의 몸에 속했지만, 두 번째 그 분은 신령한 분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46절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신령한 자가 아닌 자가 신령한 나라에 합류하려면, 두 번째 오시는 분, 그 분이 살려주는 영으로 오셔서, 살려주는 영과 결합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있는 아담은 그 아담의 속성과 본질에서 본인이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몸 자체가 내가 미리 생각해서 조립한 3D프린터 기계로 만든 게 내 몸이 아니거든요. 이게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은, 만들어진 몸의 속성대로 내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시작은 내가 아니고 아담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담의 몸에 종속되어 있는 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아담한테 물려받은 아담의 연속, 연장이에요. 그래서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몸 안 아프고 싶죠? 그렇죠? 누구 맘대로요? 누구 맘대로 안 아프고 싶어요? 나는 안 아프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건강한 채로 뭐든지 하고 싶고. 내 맘대로 안 돼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반칙, 아담의 몸이니까 죽으면 되는데, 내 자아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가지고 반칙을 하는 거예요.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을 고집한다 말이죠. 몸은 그 몸이 아닌데. 자, 그러면 그 반칙을 그만둡시다. 어떻게? 살려주시는 분이 와요. 성령이 오잖아요. 주님의 영이 온다고요.

 

영이 오게 되면, 옛날에 첫 번째 아담한테 내 맘대로 안 되듯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온 그 순간부터 내 맘대로 안 돼요. 내 뜻대로 안 돼요. 이 첫 번째 아담 뜻대로 안 되고 두 번째 아담 뜻대로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미리 알면 되지 않느냐, 미리 몰라요. 성경을 보고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의 뜻은 내가 이렇게 건전하다는 것으로 주의 뜻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오기 전에는 내가 건전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말씀이 오고 난 뒤부터는 내가 문제투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문제투성이로 드러난 채로 그 다음부터는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가더라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계속 폭로시키면서 계속 살려주시는 거예요. 살려주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딴 방식 없습니다. “니 문제 있어. 이래도 문제 아니야?” 그걸 일깨워 주는 것. 그게 주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뭐든지 고집부립니다. 하지만 그 고집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는 식으로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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