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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23:54:39 조회 : 266         
유튜브 (244강, 245강), 민주주의 사회 , 후벼파기 18080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44강       음성          동영상


245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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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8-10 10:11 
244강-YouTube강의(민주주의 사회)20180807-이 근호 목사

 

제 244강, 제목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공산주의와 대비되어서 상당히 호감이 있죠. 공산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탈출하는 이유는, 뭐 이 땅에 와서 또 공산주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죠. 민주주의를 찾아서 온 거죠. 공산주의를 탈출하는 사람에게 민주주의는 무조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죠. 공산주의에 있는 사람한테는 그 주변에 민주주의 사회가 있는 이상 희망을 갖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어떤 희망이냐 하면, 지금보다 더 낫다는 희망만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가 있어요.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겨진다면. 근데 만약에요, 민주주의가 맘에 안 들 때는 어디로 또 탈출을 해야 됩니까? 곤란하죠. 민주주의라고 할 때 반드시 사회라는 것을 붙여서 생각하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민주주의를 떼 보자 이 말이죠. 떨어지게 하면 뭐만 남느냐 하면 사회가 남아요.

 

그래서 방금 연결한 것을 다시 연결시키면 사람에게 있어서의 희망은 혼자 사는데서 여럿이 사는 사회로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이 자기 삶의 안전망을 더 공고히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물론 살다가 남들에게 치일 때는 산속이나 혼자 고립되어 살려고 하겠죠. 그러나 그걸 정상적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으쌰으쌰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을 좋다고 하는 거예요.

 

정신병에서도 그것은 약으로 치유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울려야 그게 치료가 되는 것인데, 어울린다는 말은 내 말 좀 들어달라는 거예요. 복음을 알았다, 그 다음의 절차가 뭐냐 하면 “나 복음 알았으니까 이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게.” 이게 들어가요. “이 한 말 좀 들어보게.” 순서가 이래돼요.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다는 것에 한계에 이른다는 겁니다.

 

본인이 스스로 본인을 위로한다는 것은, 위로가 안 되면 마약 먹고 술 먹고 이렇게 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제일 좋은 것은, 내가 나를 위로하는 그 정도나마라도 누가 알아서 착착 나를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야 뭐 그럴 수가 있죠.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누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나는 뜻대로 안 돼도 감당을 할 수가 있어요. 내 뜻대로 안 돼도.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위로가 되려면 나는 뜻대로 안 됐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위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지금은 당신이 이렇지만 앞으로 이런 요런 길로 일하시면 당신은 옛날 못지않은 당신의 가치를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죠. “아이고, 이 바보야! 죽어라!”이런 식으로 한다면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건 위로가 되지 못하죠. 왜냐하면 내 희망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회인데요, 이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헛꿈을 가지고 집합된 공간이 민주주의 사회에요. 전부 다 헛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 헛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이랬으면 하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오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유토피아의 대체물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유토피아 그게 이상사회인데 그걸 한번 시도해보는, 이상사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희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고 한번 시도는 해보자고 모인 곳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민주주의의 사회의 가장 중심은 뭐냐 하면 사회가 잘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잘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남들로부터, 보다 더 많은 숫자로 위로를 받기에요. 한 둘로 위로받는 것은 이건 성이 안 차요. 보다 많은 사람이 나를 위로해주고, 그 위로해준다는 것이 힘이 모이면 그 다음에는 위로에서 더 나가요. 받들어 모시는 것이 됩니다. 받들어 모시는 것. 그게 바로 옛날에 귀족들이 했던, 또 왕이 했던 거예요.

 

사도행전 12장, 거기에 보게 되면 헤롯 왕이 군기를 잡는다고 요한의 동생 야고보를 죽여요. 죽이고서 아주 신이 났어요. 거기다가 누굴 잡느냐 하면 베드로를 체포하라고 명령해서 베드로를 감옥에 잡아넣습니다. 신났죠. 그리고 두로와 시돈에 있는 사람들이 왕한테 밉상을 받을까봐 겁을 내고 있다고 되어 있어요(행12:20). 그쯤 되면 왕의 자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받들어 모시는 자리죠. 그래서 왕이 연설을 하니까 이거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해서 아주 거들먹거리다가 해충에 물려죽었어요(행12:21-23).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여 버렸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자기의 이상형으로 생각하죠. 왕이 된다는 것, 최고가 된다는 것. 그 왕이 되고자 하는 그 희망을 그냥 꺾자, 나는 집안의 왕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꺾어버리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에요. 누구나 잘만하면 보다 많은 사람한테 받들어 모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라고, 떠벌이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에요. 아무리 사회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도 뭘 삭제하지 않느냐 하면, 나는 최고가 되겠다고 하는 그 희망, 여망을 보장만 해줄 수 있다면 그 사회가 최고의 사회에요.

 

예를 들어서 귀족들이 있는 사회에 민주주의 사회는 좋을까요? 나쁠까요? 귀족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그거는 나쁘죠. 지가 최고인데. 지가 현재 귀족인데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죠. 그래서 우리나라 조선말기에 민주주의 사회를 누가 싫어했겠어요? 소위 대관들, 귀족들, 양반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죠. 누가 좋아했겠어요? 아주 집안 다 털어먹은 사람이 좋아하죠.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거는 뭐냐 하면 옛날 귀족을 모델로 삼아서, 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능력만 된다면 언제든지 그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 그거는 나의 희망이다. 결국은 봉건사회에서 탈출이죠. 봉건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자, 오늘날 한번 교회를 보세요. 이 교회가 천국가기를 원합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죠. 마음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처럼 살기를 원하면서 능력이 없으니까 교회 와서 악바리처럼 기도해서, 그리고 약간의 헌금과 봉사를 해서, 정작 원하는 것은 내가 이 사회에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희망은 뭡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요? 아니면 내가 잘 되는 사회에요? 내가 잘 돼서 남한테 그래도 여전히 살만하다는 보람과 희망과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만약에 교회가 그것을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이유가 없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 바로 우리는 죽었고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사회, 우리의 고향은 이곳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민주주의에서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욕심 많은 우리 자신을, 성공하기 원하는 우리 자신을 서서히 소멸시키고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레이시아에 가서 제거당하세요. 서서히 죽어 없어지는 것, 후딱 오너라! 그게 성경의 뜻입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08-10 10:12 
245강-YouTube강의(후벼 파기)20180807-이 근호 목사

 

제 245강, 제목은 ‘없어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후벼 파기)’입니다. 서해안에 모래사장에서 피서객들이 조개 같은 것들을 잡죠. 조개가 기어 다니다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면 쏙 들어가 버립니다. 안보이게. 못 잡도록. 당연한 거죠. 그럴 때 어린애나 어른들이 보고 조개가 방금 저기에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어요. 대부분이 그걸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손가락가지고 후벼 파겠죠.

 

없어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을 약간의 촌스럽게 제목을 정한다면, ‘후벼 파기’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벼 파는 거예요. 전에 요한계시록을 강해할 때 그걸 ‘우물파기’로 강해를 했는데, 사람은 본성상 자기를 숨기는 본성이 있어요. 이게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죠? 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알아야 자기 자신을 아느냐 하면은, “내가 왜 수치스러워 해야 되지?” 이 이유를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의 마지막 최종지점입니다. “왜 나는 남한테 망신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왜 나는 남들한테 멋있게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전부다 같은 말이에요.

 

사람하고 동물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동물들은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물론 수컷이 암컷을 꼬실 때는 그렇게 한다고 동물학자들이 말하는데, 그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고요. 참새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생식의 본능 때문에 그렇다고 치고요. 평소에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죠.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거짓말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요. 거짓말 할 수 있는 아이큐가 되려면 인간정도의 아이큐가 도달이 되어야 되지, 원숭이 정도 돼가지고는 거짓말을 못해요. 교묘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자, 거짓말을 왜 하느냐 하면은, 진짜 자기의 뜻과 그리고 그 뜻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다른 제스처를 취할 때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니 빵 먹었어? 안 먹었어?”라고 자식한테 이야기를 하면, “엄마, 저 빵 안 먹었어요.”라고 이렇게 하죠.

 

뭘 생각하는 거예요? 빵 먹은 내 모습이 자랑스럽겠어요? 수치스럽겠어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했을 때, 수치스럽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의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결국 인간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같이 있다고 봐야 돼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따먹지 말라는 그 명령이 인간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밑에 숨은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숨길 것은 숨기고 숨긴 것은 들키지 않는 용도로, 다른 식으로 보여주는 행동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특히 어떤 말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데서 나타나는 것은 전부다 감춘 것을 더 깊숙이, 깊숙이, 안 들키게 꼭꼭 숨기고, 누가 찾아도 찾지 못하도록 계속 숨기는 용도로 행동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서해안의 조개 숨듯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질 때는, 이렇게 좋게 테이블에 앉아서, 하나님이 옆에 계시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성도 여기에 있고 해서, 좋은 게 좋다고 하는 이런 식으로 하겠어요? 아니면 예수님 말 하는 것을 성도가 제대로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죠. 왜냐하면 성도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짓거리가 자꾸 자기를 감추는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으로 누굴 내세우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6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을 보게 되면, 물론 거지나사로도 그 대목에서 유명하지만, 유명한 대목이죠. 장례식장에서 보면 이런 본문이 나오잖아요. 그 앞에 대목이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하면서 9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런 대목이 나와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한 재물이니까, 이건 횡령한 것, 나쁜 짓 한 거잖아요. 나쁜 짓을 앞장세우고 살라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본성상 나쁜 짓을 앞장세울까요? 안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출까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겠죠.

 

인간은 자기가 잘난 존재이고 싶어 해요. 당당하고 싶다 이 말이죠. 누구 앞에서도 자기가 욕 얻어먹지 않는 정당함을 계속 쌓고 싶어요. 그리고 부모들이 자식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 가르쳐요. “니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나만 욕 얻어먹는다. 그러니까 니는 이 정도 실력을 쌓고 공부 열심히 해가지고 남들이 너를 볼 때에, 아, 저 사람은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이 부모가 너를 양육한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니냐?”라는 그런 쪽으로 계속 압박을 가하거든요.

 

여러분들 친척 가운데서 영웅적인 사람이 있으면 그걸 자랑해요? 자랑 안 해요? 자랑 안 하죠.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지 더러운 것을 주제로 합니까? 자랑스러운 것을 이야기합니까? 자랑스러운 것을 이야기 하죠. 자랑스러운 것이 밑천 떨어졌으면, 지 아는 사람, 자식이야기, 남편이야기가 거덜 났으면 친구이야기, 교회이야기, 교회 장로이야기부터 해가지고 하여튼 그 이야기를 줄줄이 끄집어내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것보다 낫다는 것, 상대적으로 우열하다는 것, 누굴 씹어 먹을수록 내가 높아진다는 것,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모자라요. 밤새도록. 새벽 두시까지 이야기를 해도 그 점에 있어서 지치지를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후벼 팝니다. 계속 후벼 파요. “니 못난 것을 내놓고 같이 못난 사람끼리 만나라.” 이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 거지나사로 이야기가 나와요. 자, 거지 있다, 부자 있다고 한다면 누가 나의 가까운 친척이고 싶어 합니까? 누가 나의 절친이고 싶어 해요? 거지하고 엮이면 평생 고생합니다.

 

그런데 부자하고 엮이면 평생 이거는 내 인생의 담보물이에요. 조금만 어려우면 찾아가서 돈 얻어 챙길 수가 있어요. 우리보고 선택하라고 하는 거예요. 선택하라고 해놓고 주님 쪽으로 감추어요. 우리만 감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감춥니다. 뭐냐 하면 부자 뒤에는 지옥으로 감추고, 거지나사로 뒤에는 천국으로 감추고. 낙원으로 감추고.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니까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를 친구로 삼겠어요? 어느 바보가 삼겠어요? 나중에는 내 돈까지 다 훔쳐갈 인간인데. 그러면 거지를 친구로 하겠습니까? 그냥 거지가 아니에요. 안 아프면 희망이라도 있지, 이건 아파서 개들이 핥을 정도 같으면 이거는 노동력도 박탈당할 사람이에요. 희망은 일체 없어요. 우리는 부자를 그리워하고, 우리는 부자가 찾아오기를 원하고, 부자가 찾아올 때 우리는 인생 횡재했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뭘 감추고 있어요? 부자가 문제가 아니고 불의한 청지기가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참, 코 후비듯이 우리를 후벼야죠. 우리를 후비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도망치죠. 왜 도망치느냐? 앞면 보여주고 뒷면도 보여주기 때문에 도망치고 그런 거예요.

 

이제 주께서 불러줄 때는 앞면 내세우지 말고, 평소에 남들에게 내세우지 말고, 우리 무능한 뒷면을, 우리 무가치한 뒷면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로 살아왔지, 그래서 이 날까지 자식 놓고 결혼해서 사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지, 내가 아등바등 요령 부려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을, 그 정도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서 저 동남아로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늘 주께서 후벼 파는 그 손길에 같이 딸려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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