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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23:56:24 조회 : 275         
유튜브 강의 (246강, 247강) 쟁기, 낯선 사람 18082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46강      음성         동영상


24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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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8-22 21:30 
246강-YouTube강의(쟁기)20180821-이 근호 목사

 

제 246강, 제목은 ‘쟁기’입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성경에서 쟁기라고 할 때,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뒤돌아보지 말라는 겁니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그렇게 되어 있죠. 이거는 밭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죠. 밭가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향성이 그 자체로 정해졌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과학 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 있다. 연구하는 일. 그러면 자기가 그 연구하는 일에 종사하고, 교육받은 것도, 뭐 물리학 박사라면 거기에 평생에 종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뭐 천박하게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인류를 위해서,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사명감으로 자기의 과학적 지식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자기의 전공분야의 일을 하면서 방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의 전공분야의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방향이 세상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애착을 갖기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의 일부, 거기에 자기의 전공분야를 살려서 몰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구약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처와 연관되어서 나오거든요. 그러면 내가 열심을 냈고, 살아온 그 모든 것에 자기의 업적이 남아있다 이 말이죠. 어떤 여자가 시집을 와서 시집살이를 하는데, 시부모 모시고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제사까지 드리면서 줄곧 그렇게 살게 되면, 그 시집에서 자기가 발을 못 뺍니다. 자기가 너무나 공들인 시집이고, 고생했던 것이고, 자기의 모든 노고가 거기에 다 남아 있잖아요.

 

수평적으로 볼 때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역사를 뒤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살아온 현장에 무슨 폭탄을 터트리는가를, 과연 사람들이 생각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나를 망치기 위해서, 나를 부정하기 위해서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렸다고 했을 때에, 롯의 처가 뒤돌아본 이유를 충분히 우리는 이해합니다.

 

자기가 살았던 곳이잖아요. 그곳에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절대로 니가 살아온 곳을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말하고 같은 맥락이라 이 말이죠. 롯의 처한테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말은 니가 살아온 그 모든 기억이 주님께서 뭔가 손대고 있다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자기 보기에는 열심히 살았어요. 자식 키우고 남편건사하고 시집에 충성하고 대단히 잘났는데, 그걸 뒤돌아보지 말라고 한다면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쟁기라고 이야기를 할 때에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리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 열심히 하려고 해도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방향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열심히 살고자 하면 계속 길게 꼬리가 늘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 말고 다른 말씀이 있는가? 그 말씀 말고 다른 말씀이 있어요. 그게 골로새서 3장 3절에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겁니다. 위를 바라보라. 이 두 개를 같이 생각해봅시다. 뒤돌아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위를 보지 뭐?”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위를 보게 되면 맨홀에 빠지는데요? 위를 보게 되면 전혀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만약에 위를 본다면 나 빼놓고 다 어디를 보느냐 하면, 뒤돌아보기 때문에, 그렇게 땅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땅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땅이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뒤돌아보는 것은 뭐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자기 역사를 뒤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역사를 뒤돌아볼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꿋꿋하게, 꾸준하게, 철저하게 제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늘 뒤돌아봐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뒤돌아보지 말고 위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위를 보게 되면 우리한테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느냐 하면, 사실은 우리가 내가 열심히 살아서 인생을 산 게 아니고, 위에 계신 분이 계속 나를 끌어당기죠. 우리의 미래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에요. 위로 끌어당기죠. 위로. 과거를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미래와 연관해서 더불어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럼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미래를 앞으로 보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미래라는 것도 하루 지나면 다 과거가 돼요.

 

위에서 위를 보라는 말은, 너한테 주어진 모든 일이 너를 구원하고자 하는 위에 계신 주님의 일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랬는데,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1이 아니고 2가 되면서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가 있는 하늘나라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오늘을 주었고, 내일이 되면 내일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사다리를 본 것처럼 우리는 하루하루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루를 살면 한 계단을 올라가겠죠. 그러면 이제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점점 땅과 괴리가 일어나기 때문에. 땅에서 점점 높이 보는 안목을 우리가 갖추게 되는 겁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언 듯 보면 앞을 보면서 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신 것과 관련지어서 보게 되면, 살면 살수록 이 세상과 결별해야 된다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세상 보는 것보다도 한발자국, 몇 센티라도 더 위에 올라가는 것이니까, 세상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사처럼 점점 더 위에 올라가는, 세상 보는 눈이 보다 더 넓어지겠죠.

 

넓어지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시시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심각하고, “나는 이거 아니면 죽을래.”하는 그렇게 심각한 것도, 전에는 이렇게 높이 안 올라갔으니까, 두 계단밖에 안 올라갔으니까, 미련 같은 것이 너무 강렬했죠. 집착, 미련, 아픔, 상처, 트라우마, 이런 것들이 살아있었는데, 이제 뭔가 솜사탕처럼 점점 더 가벼워지니까, 높이 올라가니까, 지난 일어난 일이 그냥 에피소드, 가시 하나 찔린 정도, 종기 하나 난 정도, 그것도 시간 지나면 알아서 다 없어지는 정도, 아물어지는데,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인생 거기다가 다 걸었고, 그것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통곡했고, 울었고, 이런 일들에 우리가 참 미련 곰탱이 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위를 보라는 말이, 보면 볼수록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음 빼앗긴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옆 사람하고 대조했고, 비교했고, 니가 잘사나, 내가 잘사나, 니가 수입이 많나, 내가 수입이 많나, 니가 교인수가 많나, 내가 교인수가 많나, 자꾸 쓸데없는 것 가지고 비교한 거예요. 목사님도 마찬가지죠. 그쪽에 가냐, 안 가냐, 지금 심각한 문제, 가가지고 아무것도 못하면 내 가정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그런 문제.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으면 어떻게 되느냐 쓸데없는 그런 문제.

 

그런 문제가 과거에 정착했던 나의 기준, 나다운 기준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는 이 정도는 돼야 나답다는 그런 것은, 이게 땅에 밀착했을 때, 바퀴벌레처럼 살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걸 좀 떼버리면, 주님한테는 가깝고 사람한테는 멀어지죠. 주님의 기준으로서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아, 그것도 다 부질없는 한 순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추억에 불과한 거예요. 떨어버릴 수 있도록, 그냥 시원한 천국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08-22 21:33 
247강-YouTube강의(낯선 사람)20180821-이 근호 목사

 

제 247강, 제목은 ‘낯선 사람’입니다. 옛날부터 낯선 사람은 위험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가 오게 되면 이익이냐, 손해냐를 판단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은 내가 아는 정보량이 빈약해요. 그래서 친절하게 왔다가도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고 뒤에서 칼질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존재하는 모습을 구약 창세기에서 자주자주 언급했어요.

 

뭐냐 하면 창세기 20장, 21장에 쭉 나오는 인물이 있죠.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 자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이렇게 쪼개면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있어요. 그걸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다는 말인데, 언약이 들어있다는 말과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말은 같은 말이에요. 왜냐하면 언약은 아브라함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성취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물을 둘로 쪼갰다는 겁니다. 제물의 속살을 드러낸 거예요. 제물의 속살을.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룰 때에, 아브라함의 속살을 드러내는 식으로, 앞으로 너를 이끌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육과 영의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첩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중보자죠. 그 당시 중보자입니다.

 

육이 뭐며, 그리고 그 다음 영이 뭐냐, 두 가지가 다 들어있어요. 그런데 순서는 이렇습니다. 육과 영이 같이 동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육을 충분히 아예 밟아버리죠. 육의 한계를 충분히 드러내면서, 순서가 육이 먼저 나오고, 육이 철저하게 밟혔다고 하는 그 현장에 준비해놓은, 숨겨진 영이 그 뒤에 나와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적인 용어니까, 구약적인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 뒤에 나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유념해서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쪽 동네에 갈 때는 어떤 사람으로 가느냐 하면 낯선 사람으로 가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던 고향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쪽 사람에게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면 나그네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땅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소유가 없는 아브라함을 언약이라는 사건을 일으켜서 소유가 없었는데 땅의 소유주로 제공해줘 버려요.

 

그러면 땅이 제공되었을 때에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은데 자식이 없죠.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땅을 가져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유산으로 땅을 줄 사람도, 그 땅에 살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안 되겠죠. 땅을 주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자식을 아브라함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그 자식, 이삭입니다. 그 사이에 또 무슨 원리가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낯선 사람이라는 원리가 또 주어져버려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에 자기 고향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죠. 근데 거주지를, 완전히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는 동네로 이전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졸지에 아브라함은 그쪽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돼버립니다. 거기서 낯선 사람 만들기 작업이, 그 다음에 아브라함 자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돼버려요.

 

그러면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이 낯선 존재가 돼버립니다. 흔히 아브라함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하죠. 아브라함이 누구를 대접했다고 이야기를 합니까? 낯선 사람을 대접했다고 하죠. 왜? 천사 세 명을 대접했잖아요. 왜 대접했을까요? 같은 처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 땅에서,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땅에서 전에 자기도 낯선 사람 대우받았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니까, 아브라함을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작용했기 때문에, 거주민들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대접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 경험을 아브라함이 갖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가 그렇게 해서 지금 살 수 없는 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자기 앞에 천사 세 명인지 사람 세 명이 왔다면, 나그네잖아요. 그 나그네를 대접할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옛날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을 베푸는데, 약간 오버성, 과하다 할 정도로 친절을 베풀어요. 동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언약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이 주신 어떤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말이 좀 어려워집니다. 오늘날 성도가 둘이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는 어떤 차이점이 있어야 해요. 어떤 차이점이냐 하면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을 주제로 끄집어내야 하고, 목사님은 내 말을 받을 때 목사님이 만들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이 땅에 없는 것을 가지고 대화가 되어야 해요. 그게 뭘까요? 그게 바로 복음이죠.

 

만약에 내가 목사님하고 대화를 할 때,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그거는 대화가 안 되죠. 그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만들어냈잖아요. 교회 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그쪽도 만들어내겠죠. 그러면 무슨 요소가 없어지느냐 하면, 우리 둘 다 만들지 않았다는 요소가 빠지겠죠. 그러면 우리 둘 다 만들지 않았는데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의 입장에서 우리는 나그네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원칙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목사님에게도 공히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우리 둘이 이야기를 할 때 심지어 영화이야기, 드라마이야기해도 괜찮아요. 프로야구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어디와 연결시키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나그네 입장에서 프로야구이야기 하는 겁니다. 나그네 입장에서 드라마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도와의 대화입니다. 동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이 동질성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라고 합니다. 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형제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자매관계에요. 그래야 이게 대화가 된다니까요. 대화가.

 

그래놓고 창세기 21장 32-34절을 보겠습니다. 32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을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절,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이 대목이 무슨 대목이냐 하면 그 동네 터줏대감이 등장합니다. 이름이 뭐냐, 아비멜렉이에요. 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갑자기 언약을 맺고자 나오게 됩니다. 약속을 맺고자 나와요. 그 약속을 맺는데, 어떤 것이 약속이 되는가 하면 30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들이 우물을 팠어요. 우물을 팠는데, 아비멜렉 그 토박이 추장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어요. 빼앗으니까 그 아브라함의 종들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토박이들이 빼앗아갔으니까 주인님이 조치를 해달라고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할 때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만났어요.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29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이래 되어 있어요. 지금 얼른 봐서는 스토리가 어떻게 엮였는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감이 안 오죠.

 

이게 아브라함의 특수성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지금 누가 잘못을 했느냐 하면 아비멜렉 쪽에서 잘못을 했어요. 그러면 아비멜렉이 잘못을 했으면 우물을 돌려줄 때에 누가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아비멜렉 쪽이 대가를 치러야 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우물을, 자기 우물인데 도리어 아비멜렉에게 줘버려요. 주는데, 뭐까지 주는가 하면 일곱 암양 새끼까지 줘버립니다. 이건 피해자가 값을 치른 셈이 돼버려요. 피해자가 도둑놈한테 오히려 줘버린 셈이 돼버렸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우물을 가지되 이 우물을 누가 팠다? 이 아브라함이 판 걸로 여기서 증거를 삼고 우리 계약하자고 되어 있어요. 하나의 언약을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아비멜렉의 동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계약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계약이 성립이 돼요.

 

아까 제목을 낯선 사람이라고 했죠. 낯선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동네에 갔을 때, 거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거주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동격으로 대화를 하지만 아브라함은 동격이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원리를 그들에게 제공을 해버려요.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우물은 내가 팠지만 너한테 그냥 줄게.” 그냥 줬다는 식으로 암양 새끼 일곱까지 주는 거예요.

 

이거는 절대 우물 값이 아니에요. 우물 값이 아니고 줘놓고 그 소유권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소유권으로 이전하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 덕에 너희들이 신선한 물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아주 시그널로, 그 땅에서 영원한 언약의 이름으로 새겨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계통, 하늘의 언약이 오직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려온다는 사실을, 그 뒤에 아비멜렉과 그 토착민들에게 아브라함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거예요.

 

낯선 존재라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붙었다하면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 출몰했다는 것을 주변에 보여주는 것, 이게 주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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