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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8 23:58:41 조회 : 142         
유튜브 강의 (250강, 251강) 현실 , 자만 18091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50강            음성              동영상


251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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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9-20 01:36 
250강-YouTube강의(현실)20180918-이 근호 목사

 

제 250강, 제목은 ‘현실’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한 단어죠. 근데 성경에서는 이 현실이라는 당연한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현실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데, 그게 바로 세상이라는 단어, 또 달리해서 세대라는 그러한 단어가 나와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이 현실에 대한 안목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가 속해있는 현실이라는 안목과 다르죠. 그러니까 현실이라고 할 때는 현실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좋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실 안에 누가 살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현실을 믿지 않으면 뭘 믿겠어요? 현실 앞에 눈에 보인다는 말을 하나 더 집어넣을게요.

 

우리가 세상에서는 뭔가 믿고 살아야 하는데, 의지하고 살고 싶고, 기대고 살고 싶은데, 눈에 보이는 현실 말고 달리 기댈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현실은 좋든 싫든 간에, 이 현실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동네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 동네를 상당히 낭만적으로 좋게 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의 살던 고향을 자기가 부정할 수가 없어요.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향에 대해서 자기가 정을 붙이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안정감을 얻으려고 해요. 살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면 힘들잖아요. 정착하고 싶은 겁니다.

 

한번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편안하게 갈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행복중의 하나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너무 이리저리 변동사항이 일어나게 되면 사람이 불안해서 못삽니다. 괜찮은 동네를 발견해서 그 동네에서 이웃과 더불어서 편안히 사는 거예요. 마치 바구니에 과일을 담는다면, 열 개를 담는다면, 바구니에 담긴 그 과일 열 개를 보면서, 사과라든지 감을 보면서 우리는 뭘 느끼는가 하면 저 바구니에 담긴 과일은 참 안정되었다는 느낌이 들 거예요.

 

왜? 그 자리 안에 있으면 편안하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사는 마을을 하나의 바구니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 평온한 바구니에 자기가 거기에 하나의 일원으로서 들어가 있다면 그것처럼 안정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귀하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싸서 보호해주는, 안정되게 지켜주는 그 마을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있죠. 그 동막골이 6.25가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 마을입니까? 6.25전쟁이 일어나서 사상적인 대결상태가 되어 엉망이 돼버린 그런 영화잖아요. 동막골처럼 우리도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전쟁 없이 그냥 편안하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런 세계, 그런 세상을 꿈꾸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 같은 것이고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럼 이왕 지켜주는 것, 내가 그 주위환경을 잘 꾸미게 되게 되면 나에게 크나큰 이득을 가져다가 주겠죠. 교인들이 교회를 찾을 때 싸움하는 교회를 찾겠어요? 안정된 교회를 찾겠습니까? 복음 전하는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가 안정되고 편안해보이고 거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다 밝아 보이고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다 유복해보일 때, 여유가 만만해보일 때, 외지에서 떠돌이처럼 살다가 마음에 정들 곳은 교회밖에 없잖아요.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교회에 정붙이고 일원으로서 사랑받고 사랑주고, 이런 식이 교회가 주는 재미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이처럼 교회의 현실이든, 또 어떤 사람은 아빠엄마가 싸우는 가정의 현실은 별로 안 좋아하겠죠. 그러면 친구가운데서 아빠엄마의 정이 너무 넘치는 가정이 있다면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빠엄마에다가 동생 하나 내지 둘이 있고. 그 동생들은 왜 그렇게 예쁜지. 그리고 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사줄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이 많은 가정. 집도 1층이 아니고 2층 정도 해가지고 동화책에 나오는 그러한 멋있는 저택에 살면, 아이들로서는 그냥 왕자처럼 살게 되겠죠. 그런 것이 바로 가정의 현실이에요.

 

제가 방금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가정의 현실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직장을 다니는데 그 직장이 너무나 안정된 직장이고 사원들을 그냥 상사처럼 모시는 그런 훌륭한 사장님이 계시는 직장이라면 그거는 평생 그 직장에 충성해도 자기생계, 노후까지 다 책임질 수 있고, 자기 자식들에게 장학금까지 줄 수 있다면, 최고의 직장이죠.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기업처럼. 대학교 가면 대학교 공납금까지 다 나오고 유학금까지 보조되는 그러한 멋진 공무원이라는 공기업. 그게 바로 직장현실이죠.

 

그러니까 가정현실, 교회현실, 직장현실, 이 현실을 사람들이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열심히 하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어떤 좋은 쪽으로 변경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희망을 품고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 봉사하겠죠. 그래, 그 현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악한 것이 없다는 것, 혹시 있을지라도 선한 쪽이 많을 거라고 여기는 것, 그 현실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의 대체물이라고 합니다. 두자로 이야기해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가정이되든, 교회가 되던, 직장이 되던, 그건 나의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 현실이 있음으로 해서 뭐가 빠지고 누락이 되느냐 하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 현실이 가르쳐주지를 않습니다. 나는 이만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그것을 자꾸 긍정해줬을 뿐이죠.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현실을 내놓고 자랑질을 하거든요. 니가 괜찮은 현실에 속했느냐, 내가 괜찮은 현실에 속했느냐, 니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느냐, 내 집안은 어떠냐, 이런 식으로. 니 직장은, 내 직장은,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 현실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어요. 누가 잘나고 못나고 없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정붙이고 싶고 평생을 충성하고 싶은 이 세대, 이 세상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아예 처음부터 어둡고 악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걸 못 본다는 것은, 그걸 못 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악을 유포하는 하나의 공모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을 더욱더 악하게 만드는 공모자가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을 더욱더 집착하게 됩니다.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꿈꾸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악하다고 하는 것에 해당되는 그 자리에서 더욱더 악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삶의 목적을 거기에다가 두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교회현실도 그렇고. 이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 편안하면 되고 안 싸우면 되고 편하게 지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처음 나온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고 이뻐해주고, 뭐 도와줄 것 없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섬기려고 하는 교회라면 자기는 훌륭한 교회라고 봅니다.

 

왜? 본인이 본인 생각에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남은 죽어도 자기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현실이에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는 악한 것이고.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정말 구하지 않아야 될 기적들을 구하고 있다고요.

 

오히려 그들이 구하고 있는 기적들로 인하여 점점 더 그들은 자신을 모르고 있으니까, 멸망의 길로 나락의 길로 빠지는 겁니다. 현실을 세상에서 주고받는, 인간들의 집단에서 찾지 마시고 성경에서 찾아서, 아, 이 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에 나도 한 몫 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09-20 01:38 
251강-YouTube강의(자만)20180918-이 근호 목사

 

제 251강, 제목은 ‘자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러나 이 약속은 구원하기 위한 용도뿐만이 아니고 저주를 유발하기위한 용도로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 해서 이 저주는 지금 대기상태에 있어요. 말씀을 안 지키기기만 해봐라. 이런 식으로.

 

이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사람은 혼자 살고 싶어요. 사람의 특징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그 어떤 간섭이나 그 어떤 통치도 받고 싶지 않아요. 잔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필요할 때 내가 나서지, 내가 있는데 그쪽에서 쓸데없이 조언한다든지, 교훈한다든지 이런 것 자체도 인간은 역겨워한다는 겁니다. 한두 번 참지만은 그 다음부터는 참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작은 신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행세를 가만히 보게 되면 누굴 이용할 생각을 하지 누굴 사랑할 생각은 없고, 그리고 그 누구로부터도 조언이라든지,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조언이라든지 도움을 주는 것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느 정도로 형편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성경말씀에 보면 이걸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이걸 안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죠. 얼른 생각하면 복 받는 사람이 50퍼센트 되고 저주받는 사람이 50퍼센트로 보이지만, 성경에서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해가지고 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복이라는 의미를 쓰시는 것은 복 받을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복을 이야기했고, 그 두 번째 나오는 저주이야기는 저주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예 저주 속에 태어났다는 것, 모든 인간이 죄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주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보게 되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힘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겸손하게 할 그러한 요령 같은 것, 기술 같은 것을 세월이가면서 습득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처세술 같은 것. 그 사람에게 호감을 얻어가지고 내게 필요한 것을 그 사람으로부터 뽑아내기 위해서 온갖 도덕적으로 괜찮은 품성을 가진 것처럼 위장합니다.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인내성이 있고. 서둘지 않고 굉장히 침착하고. 그리고 마음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갖춥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하한선이 있어요. 하한선. 그 누구에게나 겸손하지 않아요. 그 누구에게나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없는데 배려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누가복음 10장인가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설정해놓았어요. 강도 만난 사람을 설정해놓고 그 무대에 세 사람이 지나가게 하죠. 제사장 지나가게 만들고 레위인 지나가게 만들고.

 

제사장, 레위인들, 이 사람들은 뭐가 전문이냐 하면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전문가들이에요. 말씀의 이 뜻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면 이렇게 옮겨야 된다는 것을 남에게 모범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에요. 근데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때에 굉장히 순수해보이지만, 강도 만난 사람이 일어났을 때, 일단 강도 만난 사람은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빠요. 백수가 아닙니다. 노숙자가 아니고, 어디 할 일 없어 찾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 일이 있어요. 자기 일을 제쳐두고 자기와 상관없는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그러한 일에 덤벼들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냥 가버렸어요. 그런데 세 번째 등장하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일이 있어요. 자기 하던 일이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자기와 떨어지지 않는 자기 일의 일부라고 보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웃이라는 개념으로 그 사람을 도와줍니다. 마치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가 제 몸을 사랑하듯이. 그 이웃이 강도 만난 것을 자기가 강도 만난 것으로 동일화시키는 것이죠.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과 그 외에 모든 인간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세상일을 자기 일처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유일한 사랑이고. 사랑을 이렇게 구축해놓으면,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두 가지로 전부다 이렇게 응축이 될 수가 있어요. 모을 수가 있어요. 거기다 집합을 할 수가 있어요. 결국은 예수님 빼놓고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 교만일 수도 있고 자만일 수도 있어요. 미움일 수도 있고. 자만이라는 것, 미움이라는 것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이것은 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만은 물론 예수님 보기에 자만이지만, 본인은 그게 자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밥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요령이죠. 자기부터 챙겨야 살지, 남이 나의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지 않으니까.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말씀 앞에서는 자만이 돼버립니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 말씀 안에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말씀 앞에서 어떤 인간도 자만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모든 인간은.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래 되어 있어요. 율법이라는 그 자체에서 자기가 뭘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겁니다. 자기보다 율법을 더 사모한다는 것은 율법 없이 내가 그냥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이에요. 말씀 없이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떡이냐, 말씀이냐 할 때에 떡을 선택하지 않고 말씀을 선택하는 거예요. 돈이냐, 말씀이냐 할 때에 돈을 선택하지 않고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인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말씀에 매인자라고 할 수 있어요. 또는 말씀의 사람,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종속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사람만이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악인이 보이고, 죄인이 보이고, 오만한 자가 보입니다. 그런 자만이. 맨날 성경책만 들여다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떤 현장이든 그게 말씀이 우선되는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화장실에 가든, 세수를 하든, 직장에 다니든, 교회에 가든, 어떤 그 순간에도 내 이익을 위해서 있는 순간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노골화 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말씀이 현재 여기에 있다, 말씀이 여기에 살아있어, 모든 것은 말씀대로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체험의 장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만이 자만하지 않는 사람, 오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어떤 현장이든 십자가만을 위해서 그 현장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인정하는 사람, 믿는 사람, 그 사람만이 안에 십자가 들어있는 오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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