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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8 23:44:30 조회 : 183         
유튜브(264강, 265강) 식사 , 사귐 1901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64강           음성           동영상


265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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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1-10 12:28 
264강-YouTube강의(식사)20190108-이 근호 목사

 

제 264강, 제목은 ‘식사’입니다. 식사 안 하는 사람이 없겠죠. 다 식사를 해야죠. 그리고 유기질로 되어 있는 인간에게 외부에서 물과 영양소가 공급이 될 때 사람의 몸은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몸이 외부의 에너지요소를 공급받을 때 신호가 오거든요. 그 신호가 뭐냐 하면 배고프다, 에요. 배고프다. 뭐라도 먹자.

 

그런데 식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배고프다고 주스를 먹는 것이 식사가 아니고, 사람들은 계속 식사를 통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공통적인 공간을 마련해나갔어요. 식사 가운데서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에게 건네고, 듣고 싶은 것도 식사를 통해서 듣습니다. 그러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의 옛말에 식구라고 이야기를 해요. 식구란 식사를 같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식구라고 해서 자기 밥 따로 만들고 따로 하게 되면 그건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그걸 식구라고 할 수가 없죠. 식당에 가서 돈 내고 식사하게 되면 식당주인하고 식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죠. 파출부가 와서 식사해주면 그 파출부하고 식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죠. 식구라는 것,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고픔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나 혼자는 못 살겠다는 표현으로서 “우리 배고픈데 식사 같이 할까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죠. 요한복음 13장 3절에 보면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렇게 했습니다.

 

제자하고 예수님하고 결국은 하나가 된다는 그 암시를 식사시간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물론 이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발을 씻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식사할 때 발을 씻었으니까. 손도 씻었으니까.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도, 마태복음에서도 그렇겠지만 예수님께서 정작 제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어요. 떡과 포도주였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 그것은 일상의 식사의 연장이라고 이래 볼 수 있겠죠. 먹을 수 있으니까.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떡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몸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요한복음 6장 53-58절까지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53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않고서는 ~~가 없다, 라는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하셔요.

 

이 말은 뭘 강조하기 위함이냐 하면은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이유를 알려줘? 지금 너희들 속에 내 피와 살이 없잖아.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생명이 없다는 기준을 외부에서 주님께서 식사를 통해서 가져다주는 겁니다.

 

이걸 요한복음 13장에다가 적용시켜봅시다. 저녁식사 할 때에 생명 있는 예수님과 생명 없는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해요. 그러면 그들이 기대하는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생명이 없다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생명이 있다고 여기니까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겠죠. 인간이 자기 생명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먹었던 것이 뭐냐 하면은 떡과 포도주였습니다.

 

“나 이대로 살게 좀 내버려둬.” 이런 식이죠. “내가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마실 것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밥 먹고 사는 것이 사는 것 아닙니까? 이게 생명이 아닙니까?”라고,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이미 의기투합했죠. 의견이 하나가 됐죠.

 

그런데 그들이 먹는 떡과 포도주가 본인의 생명을 방해하는 거라면? 그것으로, 그 떡과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이퀄(=), 떡과 포도주=생명 그러니까 생명이 된다는 그 생명이 진짜 생명을 가로막는 인식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식사시간이 최후의 만찬이 되어야 되겠죠. 최후의 만찬.

 

주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러주는 것은 같이 식사를 해도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던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과 천국 가는 제자들과의 특수한 식사입니다. 그러면 이 특수한 식사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천국가지 못하는, 지옥 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도 생각해봐야 되겠죠.

 

구약에 보면 이방인들이 나옵니다. 이방민족들은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이스라엘과의 싸움의 대상이 되죠. 초창기에 이방민족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게 맨날 패배하기만 했어요. 나중에는 그게 역전이 됩니다마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이걸 한번 생각해봐야 해요. 하나님이 없고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이방민족이라도 본인 나름대로의 행복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 아니한가?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해요.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이런 것 말이죠.

 

복음 모르고 예수 몰라도 그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게 되죠. 드라마 같은데 나오잖아요. 그들은 굉장히 행복을 원하고 있고 사랑을 통해서 그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럼 식사는 뭐냐, 행복하기 위해서 먹는 거죠. 몸 아파서 굶으면 행복하지 않잖아요.

 

그럼 그들은 식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식사할 수 있다는 권리가 있다는 말은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 이방민족의 특징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멸절당해야 되니까. 너희들이 평생 자기행복을 위해 추구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를 가로막고 있는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나름대로의 행복 추구하겠다는 그 의지 때문에 정작 영생을 주려는 주님에 대해서는 그들은 배타시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방민족들이. 식사시간 같으면 좋은 시간이죠. 배가 부를 때는 포만감이 주어지게 되고 행복하니까. 그런데 주님보시기에 배부르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배부르다고 해서 그게 복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영생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서의 행복이 뭐냐, 내가 뭔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내가 미흡하다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함께하셔서 주께서 계속해서 영생으로서의 살과 피를 제공하는 이 식사자리가 나의 아침, 점심, 저녁식사보다 더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으로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아는 자가 신자에요. 내 식대로 인생을 사는 그것이 바로 오히려 진정한 복을 가로막는 짓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게 오늘날 주님의 식사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아(IP:122.♡.170.138) 19-01-10 12:30 
265강-YouTube강의(사귐)20190108-이 근호 목사

 

제 265강, 제목은 ‘사귐’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이 엄청난 말을 하고 있어요.

 

우선 보통 사귄다는 것은 현재 자기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견지하고 이걸 내가 다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사귐이 성립이 됩니다. 결혼했는데 아내가 암에 걸렸다. 사전에 그걸 여자가 남자보고 “당신은 나하고 결혼하면 후회합니다. 나는 3년 내에 암에 걸릴 겁니다. 위암, 간암, 유방암, 하여튼 자궁암이라든지 갑상선암이라든지 다 걸립니다. 그래도 뭐 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재산 좀 모아놓은 거 있어요? 보험 한 열 댓 개 들어놓은 것이 있습니까?”

 

이래 나온다면, 그거는 결혼 자체가 여자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이용한 게 돼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한 용도로서 건강한 남자를 고르고 또 내 병을 고쳐줄 치료비까지 넉넉한 사람을 어떻게 꼬셔가지고 자기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결혼 자체에 잘못된 기대감이 거기에 들어가 있겠죠.

 

방금 제가 길게 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는 안 다치겠다는 겁니다. 나는 안 다치겠다. 내가 누구로부터 다치는 일은 내가 용납 못한다. 나 때문에 상대방이 다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성의 표시하는 것으로 “아이고 고맙습니다. 얼마면 돼요? 얼마면 되겠어요?” 라고 퉁 치면 그만이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뭐 호의를 베풀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니까, 내가 당신을 이정도 사랑해주면 당신이 나한테 하는 그 헌신은 그냥 같은 걸로 치자고 이렇게 되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안 다쳤다, 나는 내 인생 만회했다, 나는 내 인생이 전에 보다 더 개선되었고 우수하게 되었다, 라는 것을 기대 안 할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굴 만났는데, 그 사람 만나서 참 좋았다, 라는 것을 기대하고 만나게 돼요. 근데 그 사람을 만났는데 분명이 그 사람은 나보고 보증서라고 할 것이고, 내 돈 한 3억을 가지고 태국으로 날아갈 것이고, 그럼 내 돈과 일가친척 돈까지 다 가지고 도망친다면, 그래도 나는 그지없이 행복해! 라고 하는 이런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람 없다고요. 손해 봤는데 행복하더라. 이건 미친 사람이에요.

 

손해 볼 줄 알았는데 30배, 60배, 100배로 갚았다. 이거는 괜찮아요. 이거는 하나의 투자니까 괜찮은데, 그 사람에게 약간을 주고 나중에 성경대로 30배, 60배, 100배를 다시 내 것으로 만드는 그런 것이라면 잠시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참을 수가 있지만, 아예 그쪽은 뜯어먹고 나는 뜯기고, 근데 나는 그게 좋았다. 이건 정신 나간 사람이죠.

 

그래서 사람이 누구하고 사귈 때는 계산을 해보고 사귀어요. 이익과 손실을 따져보고 사귄다고요. 아니 복음 듣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저 복음을 시간 내서 듣게 되게 되면 저 복음이 나로 하여금 천국에 넣어준다. 그거 뭐 괜찮네. 돈도 몇 푼 들지도 않고. 그런 계산 하에 컴퓨터 열고 설교 들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언젠가 제가 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나고 내가 앞으로 얼마나 잘 될 것인가를 보려고 연못에 이렇게 얼굴을 비쳤는데 연못에서 예상도 못한 괴물의 손이 올라와서 나를 멱살 쥐고 그 죽음의 물속으로 집어넣는다면,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걸 기대하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멀쩡한 나를 더 멀쩡하게 괜찮은 나를 더 괜찮게 만들어서 천국 간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 가는, 우리가 하나의 생각해놓은 상상한 절차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사도요한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완전히 거부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귐이라는 것은 어떤 이득이나 이익을 얻으려고 사귀는 것이 아니고, 막상 사귐 속에 들어가면 거기서 나는 없어지고, 나는 있더라도 내 계획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피가 부각이 되는 그런 사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시작한 성령의 사귐이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읽었던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귈 때 어떻게 사귀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내쳤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했습니다. 그게 사귐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다른 것은 상상하지 마세요. 구원의 길은 십자가 길 뿐이에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십자가 길은 주께서 피를 흘렸던, 피를 남겼던 그 피를 따라가는 것이 십자가 길이에요.

 

그럼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그겁니다. 만약에 진리가 우리 속에 있다면 그 증거가 뭐냐, 나는 뭘 해도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게 사도요한이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인임을 어떻게 아느냐, 이미 죄인임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제공된 것은 돈도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건강도 아니에요. 날려버린 1억 5천도 아니고. 인생만회 그런 것도 없어요. 뭐냐 하면 ‘피’입니다. 예수의 피.

 

따라서 내 꿈, 내 인생 계획을 생각한다면 그거는 진리 속에 있음과 어울리지 않는 망상에 불고합니다. 우리교회가 개척교회인데 성공한다든지, 기독교가 이 전 세계를 점령한다든지, 이런 생각들. 우리 동네가 다 기독교고, 우리나라 장관부터 대통령까지 전부 다 교인들만 있고. 북한의 김정은이가 복음 듣고 회개해서 아예 단체로 전부 다 김일성 우상 다 부수고 예수님 동상, 예수님 십자가 꽂아놓는 그걸 위해서 기도한다 이 말입니까? 그걸 기도해요?

 

그게 바로 진리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망상을 통해서 그게 기도의 내용이 돼버린 겁니다. 그거는 진리가 아닌 기도죠. 마귀가 시킨 기도고. 마귀가 계속해서 소위 교인들을 농락하는 기도가 그런 내용입니다.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말 할 때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는 것.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사귀자고 오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을 버릴 필요는 없어요. 다만 이 생각이 얼마나 악하고, 내가 스스로 이걸 못 고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생각만 할 수밖에 없는 나 앞에, 이기주의 그거만 있으면 안 되고, 그거만 알면 안 되고, 그 앞에 예수님의 피가 보여야 합니다. 그 피와 극단적인 나와의 사귐.

 

그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영광입니다. 모든 것이 이 현실 자체가 나를 죄인으로,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현실 진행에 하등의 차질이 없었다는 사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현실은 피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아주 차질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성도가 내뱉을 수 있는 고마움이고 감격이고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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