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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23:47:51 조회 : 424         
유튜브 (266강, 267강). 성공, 마지막이라는 말 19012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66강    음성             동영상


267강    음성             동영상



 이미아(IP:122.♡.170.138) 19-01-23 18:31 
266강-YouTube강의(성공)20190122-이 근호 목사

 

제 266강, 제목은 ‘성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할 때는, 어떤 뜻이냐 하면은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이 유지되는 것, 전보다 더 확고히 되는 것.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해요. 뭐 꼭 재산만이 성공이 아니고 주위도 해당되고 건강도 해당되고. 건강을 잃으면 실패라고 보고 건강을 잘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부 다 성공을 지향하는 그런 정신으로 꽉 차 있어요. 이 세상의 성공.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공하는 이유도 여기에는 없어요. 실패하면 안 되는 이유도 없어요. 자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에, 이 세상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의 지금 모든 학문은 그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 이유 없는 거예요. 우주가 왜 만들어졌는가? 이유를 찾지 마라. 아무 이유 없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있던 거예요.

 

사람이 왜 있는가? 이유를 묻지 마라. 사람은 그냥 유인원인 원숭이에서 이렇게 변화가 되어서 있다. 이유는 없다. 그냥 된 거다. 더 신경 쓰지 말고 그거만 생각하자. 왜? 성공실패를, 성공하고자 하는 이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그 이유를 잘라내야 돼요. 이유 말고 내가 뭘 요구하느냐만 있으면 족한 거예요. 이 땅에서는. 지금 내가 뭘 원하고 있느냐만 족하지, 이 원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버리면 사람이 기분이 팍 상하는 거예요. 사는 보람도 상해버리고.

 

그래서 대학에서 인문계출신들이라도 취직하게 되면 인문계의 모든 의미를 다 버려요. 오직 성공만을 위한 거예요. 성공만을 위한. 인생이 무엇이냐, 성공이 무엇이냐, 그 의미를 찾던 것을 다 버립니다. 내가 성공하겠다는 그 의지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철학을 버리잖아요. 국문학 한 사람은 국문학을 버리고. 만약에 철학을 안 버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살하고. 철학을 꽉 쥐고 있는 사람은 거의 자살수준이에요. 세상도피, 은둔, 뭐 그쪽으로 나가버려요.

 

아무리 공부를 하고 철학을 해도 내가 이 자아정체성과 내 자아를 유지하겠다는 여기에 대해서는, 이거는 불교도 마찬가지고 종교도 마찬가지고, 어떤 적절한 이유가 없어요. 그냥 내가 되고 싶었다는데 왜 말이 많아? 이래 돼요. 내가 그렇게 성공하고 싶다는데? 성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잃지 않는 것, 유지되는 것, 그게 커지는 것, 작아지는 것, 다 포함되어 있죠.

 

그렇다면 교회에 온다. 성공하고 싶으면 오겠죠. 왜냐하면 무조건적이니까. 성공은 무조건적이에요. 성경을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겠죠. 무조건적이니까. 순복음교회가 커졌던 이유가 뭐겠어요? 거기에 온 사람들은 실패하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 성공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공은 이유가 없다니까요. 성공하겠다는 이게 진리지 그 외에는 진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성경이든 전부 다 내 성공이라는 진리를 위해서 보조적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냥 보조적인 역할. 만약에 성경을 보고 교회를 가는 것이 내 성공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당연히 안 가죠. 내 확고한 존재의 의미는 이미 성공으로 굳혀놨는데, 내가 굳힌 것이 아니라 본래 충동이, 욕구가 성공 쪽으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한테 성공이 되고 도움이 된다 싶을 때는 가지만, 성공실패에 지장이 된다면, 예를 들어서 일요일에 손님이 오면 교회에 못 가죠.

 

왜냐하면 이미 성공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된 이상은 그 다음부터는 이 성공을 성경과 대조해서 성공에 보탬이 되느냐, 성공에 방해가 되느냐, 그거만 따지면 되는 겁니다. 따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하려면 성경 속에서 당신의 성공은 정당합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아서 그 성공을 성공하세요! 성공한 의지로 성공하세요! 다시 말해서 못 먹고 힘들더라도 성공하겠다는 그 뜻만 버리지 마세요! 그것만은 성공하세요! 그거 잃어버리며 안 됩니다! 성공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했죠.

 

그러면 성경을 한번 봅시다. 성경에서 과연 그렇게 해주는지. 하나님은 사랑합니다. 성공하기를. 이걸 앞에 붙여야죠. 그러면 말이 되죠.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죽이기를. 이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냐, 당신의 소원대로 성공하기를 후원해줍니다. 뭐 이런 식으로 사랑이라는 의미가 또 왜곡이 되겠죠.

 

그러면 성경을 보자 이 말이죠. 성경에 누가 나와요? 모세가 나와요. 출애굽기 7장에 보면 모세 앞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가 등장해요. 22절,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죠. 이건 뭐냐 하면 애굽 나라에 대한 이익을 주지 않죠. 애굽 나라를 유지하는데 위기가 발생했죠.

 

근데 애굽의 술객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그대로 해서 그들도 그런 요술을 부려가지고, 바로의 눈앞에서 물이 피가 되는 마술을 했어요. 요새 마술에는 그거는 마술 측에도 안 들어가요. 눈속임으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바로의 마음이 강퍅했다.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성경에서 성공이라고 하는데 그게 성경 속으로 들어오면, 이 성공이라는 단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이게 강퍅이에요. 그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강퍅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 바로의 마음이 강퍅했다는 것은 누구 앞에 설 때 그랬냐 하면은 모세 앞에 설 때 그랬다 이 말입니다. 모세 앞에 설 때. 근데 모세는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냈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성공하겠다는 이 의지가 사람들 앞에서는 이게 문제가 없어요. 하자가 없어요. 문제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포기를 못하겠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강퍅이 돼요.

 

출애굽기 8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개구리를 보냈는데 요술사들이 개구리를 내보내니까 마음이 완강한 거예요. 강퍅, 완강,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 것을 나는 못 잃어버리겠다. 내 것을 유지할 책임자는 나다. 미쳤나? 내가 내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그 고집. 그걸 고집이라고 하지 않죠.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건 강퍅이고 완강이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됐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게 무서운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발적인 생각을 갖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말씀의 영역, 말씀의 무대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위력 안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완강하고 완악하고 그리고 강퍅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어야 해요. 마음 자체가.

 

그래야 무엇이 빛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세상에 돌출했던 사람, 출몰했던 그 사람의 의미와 가치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 모세의 후배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오늘날 성도들이에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할 때에 그걸 성공이라고 보지 마시고 완강해서 강퍅한 데 되게 그걸 자랑스러워한다. 이래 보시면 돼요. 해석하기 쉽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강퍅했습니까? 강퍅했나, 안 했나를 뭐로 알 수가 있습니까? 뭐를 자랑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죠. 사도바울은 뭘 자랑했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만, 그 어리석은,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사건만 자랑하고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 이긴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 쏜 총알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성공한 것을 빛내잖아요. 근데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이순신 장군도 별 거 없네?” 이렇게 해요. 인간은 “별 거 없다”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처럼 진실이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과 반대가 되고 진실을 싫어하는 그런 패거리, 그런 분위기 속에서만 진실은 빛을 발하는 겁니다.
 이미아(IP:122.♡.170.138) 19-01-23 18:33 
267강-YouTube강의(마지막이라는 말)20190122-이 근호 목사

 

제 267강, 제목은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을 싫어해요. 마지막이 여러 가지 종류가 있거든요. 1교시 끝나면 딩동댕동~♬ 마지막 끝나죠. 그리고 연말이 되면 시간의 마지막이 있을 것이고. 기차타면 제일 마지막 칸이 있을 것이고. 마지막이라는 것을 왜 싫어하느냐 하면은 마지막이 돼버리면 무한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유한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럼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 왜 싫은가, 아무리 지금 내가 여유가 있고 넉넉하게 살아도 언젠가는 이 행복과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결국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싹 사라지잖아요. 잃어버린다고요. 그러면 그 마지막이라는 것을 미리 땡겨서 해버리면 지금 내 행복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40대의 가장이 자기의 생일에 생일파티를 하고 있는데, 다른 데 사는 아버지 어머니가 축하하러 왔어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부르고 케이크 자르고 난 뒤에, 아버지 어머니가 네가 옛날에 얼마나 공부를 잘했으면 지금 결혼한 것도 네가 훌륭해서 결혼했다고 뭐 이렇게 이야기하고, 며느리도 박사학위 따서 좋지? 우리 광산김씨 자랑거리가 뭐 이렇게 널렸다고 이야기하면서 하죠.

 

그런데 갑자기 “가만히 있어봐라. 조용히 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오늘이 너의 아버지로서 생일날 참석하는 것이 마지막 날이야.”라고 하면, 지금 한창 무르익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다 깨버립니다. 다 깹니다. 그럼 이 말은 아버지의 수명이 1~2년이 안 남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사실 내가 너한테 안 알렸지만 암 말기라서 병원에서는 6개월에서 3개월 이상은 못 산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생일 참석은 오늘로서 마지막이라고 해요. 이럴 때 아들이 아무리 철없어도 “에이, 3개월 뒤는 알아서 하고 지금 즐길 때 즐깁시다.” 이렇게 나오는 아들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나라 쇼트트랙의 유명한 선수가 있죠. 심석희 선수. 심석희 그 아가씨가 자신의 마지막을 선포를 했어요. “나는 코치한테 성폭행을 4년 동안 당했다.” 이거는 자기한테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일종의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심석희 선수가 나라에 기여한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국민의 희망이었는데, 사람취급을 못 받았다고 했을 때에 심석희를 응원한 사람들이 같은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런 인간은 재판도 필요 없다. 죽여라! 이래 나오겠죠.

 

성경을 안 볼 때 하는 이야기에요. 성경을 안 볼 때. 사람들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생활을 하지만 그 속에서 마지막이 얼마나 거부적인 요소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싫어버린바 된 용어가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하잖아요. 수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예술적인 것을 하게 되면 나는 죽어도 내 작품은 남아있으니까 나는 살아있다. 뭐 이런 거.

 

그리고 나는 죽지만 내 자식이 내 제사를 드려주게 되면 나는 그 제사를 통해서 살아있다는 것. 또는 생물학적으로 내 DNA가 할당이 되고 계속 분배되니까, 자식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조각조각 나누어지니까, 나는 죽어도 내 자식들이 살아있으면, 그것은 DNA가 널리 유포된 거죠. 높았던 내가 짜부라져서 전 세계적으로 내 자식들, 손자들이 가는 곳마다 내 DNA가 있으니까 곧 내가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식으로 생물학적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세상에서나 하는 이야기고요. 성경에서는 마지막을 뭐로 보느냐 하면 축제로 봅니다. 축제. 그 대표적인 것이 7×7=49+1=50 그걸 50년 째, 희년이라고 해요. 희년. 희년의 뜻이 뭐냐, 즐거운 날, 기쁜 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짐을 다 일거에 못 본 것으로 해준 날.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에 나오죠. 16절에서 18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온 것은 희년을 선포하려고 왔다. 내가 여기 있으매 곧 희년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곧 나와 함께 있는 그들에게 희년은 이제부터 영원하다. 이것은 뭐냐 옥에 갇힌 자를 풀어줄 것이고, 옥에 갇힌 자는 옥에 갇힐만한 이유가 있어요. 근데 이게 풀어준다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해방의 날이 된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죄 용서, 자기 백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죄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대신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오셨다.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축제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했지만, 제가 한 말도 잘못된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마지막을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사적인 마지막과 개인적인 미래상과 연결시키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용서하러오셨습니다,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라는 이 말을 들으면 내 사적인 것은 포기를 안 하고, “아, 예수 믿으면 사적으로 형편이 펴겠네. 사적으로 나중에는 내가 떵떵거리며 살겠네.” 계속해서 사적인 욕구와 욕망의 달성으로 예수님 믿겠다고 나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예수님 당시에 바로 예수님을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갔던 열두 제자와 그리고 많은 대중들과 민중들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횡재할 수가 있다.” 심지어 제자들도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중에 누가 높겠습니까? 자기 자리싸움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우리는 부하직원들이니까 우리도 자리 하나 맡겠지.”

 

원래 정치하게 되면 정치 운동했던 사람들이 공기업 임원진이나 뭐 맡잖아요. 이런 것처럼 자기 이득과 관련해서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게 아니라고 굉장히 여러 번 누누이 이야기를 했어요. 어린아이를 내세운다든지, 내 쓴잔을 마신다든지, 그 중의 하나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사적인 것과 마지막은 관계없어요. 사적인 것과 마지막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나의 마지막은 없어요. 왜냐하면 나 자체라는 것을 인정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지막은 공적인 마지막입니다. 사적인 마지막이 아니에요. 공적인 마지막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심석희 선수가 폭로를 해서 일체 코치는 제자들에게 성추행, 성폭행을 못 한다고 법이 바뀌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당했던 사람은 보상금을 나라에서 1억을 준다든지, 가해자한테 1억을 받아서 준다든지 해서 법이 바뀌었다고 칩시다. 사적으로 심석희는 영웅이 되고 그동안 아팠던 것이 보상이 되겠죠.

 

근데 심석희가 스케이트를 탈 때 제일 미운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제일 미운 사람. 그 미운 사람이 심석희도 모르게 자기보다 고만 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심석희는 보상금으로 1억이 갔는데 그 사람은 보상금 5억이 갔어요. 그러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가, 사촌이 논 사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공적으로 성폭행은 안 된다는 공적인 완성을 하려면 그 전에 뭘 포기를 해야 돼요? 내가 사적인 요구에 부응해서 공적인 것이 주어진다는 그 인과응보의 관계를 끊어줘야 되겠죠. 그렇죠. 쉽게 이야기해서 나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24장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절,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 나오고 25장에 달란트이야기 나오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예수님 자체가 마지막이고, 25장의 열 처녀 비유가 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그 마지막을 뛰어넘어서 지옥 안 가고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거는 이미 예수님이 말하는 마지막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욕구, 욕심이에요.

 

주님의 마지막은 일방적으로 주님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사적인 자기 안에 들어옴으로써 내 개인적인 열망, 욕구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에게만 이게 실효성이 있는 마지막입니다. 그 마지막이 성경적인 마지막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미리 앞서서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이런저런 아픔과 괴로움과 그리고 이 땅에서는 희망을 갖기 말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그 사람에게 그 마지막은 개인적인 이득과 연관되지 않고, 주님하시는 그 자체가, 주님의 계심 자체가 좋아서, 그것이 너무 행복해서 계속 마지막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재림을 기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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