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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23:53:33 조회 : 196         
유튜브 강의 (276강, 277강), 자랑, 고민거리 19060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76강          음성             동영상


27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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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61.♡.247.43) 19-06-05 20:47 
276강-YouTube강의(자랑)20190604-이 근호 목사


제 276강, 제목은 ‘자랑’입니다. 자랑은 자기 표현입니다. 사람은 그냥 살면 되는데 꼭 표현을 해요. 자기를 과시하는 걸 통해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습성이 있어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혼자 잘난 척하면서 그 잘난 체를 혼자 했을 때, 혼자 그걸 감수하거나 혼자 두질 못하고 자꾸 발표를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성도냐 성도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캐치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는.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의 속성을 찾아내는 방식 하나가, 쉬운 거예요, ‘너 내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라는 그걸로 뽑아낼 수가 있습니다. 포착이 가능해요. 너 나한테 뭘 자랑하고 싶으냐.

보통 이 사회에서는 ‘너 나한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를 얘기하죠. 그런데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보다도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너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자랑하려면 내부에 수습 들어가야 되요. 자랑 할 것과 자랑 못할 것을 자기가 심사숙고해가지고 화들짝 이렇게 구분을 지어야 되겠지요, 순간순간. 자칫하면 자랑할 것 하다가 수치스러운 것도 병행해서 드러내면 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랑할 것만 골라내는 작업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본성을 찾아가는 방식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잘 끄집어내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니까,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복음 전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을 만났습니다. 회당에 가서든지... 그 유대인들이, 보통 우리가 자랑할 때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자기가 표현하는 걸 정리하게 되면 주로 아는 것이 뭐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이 많은 민족 가운데에서 오직 자기 백성만 건지셨다. 그 근거가 있다. 그 근거는 뭐냐. 바로 출애굽 때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건져냈고 우리 조상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우리 민족을 향하여, 네가 특별한 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 우리 민족에게만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유대인, 이스라엘 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이라 해도 다 잘려지고 이제 열 두 지파 가운데 유대지파만 남았으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다. 그 자랑하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련성이 있다는 증거는 율법이 있다고 얘기했고 그걸 그대로 사도 바울은 잘 아니까 그들이 하는 주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들이 주장을 이렇게 했어요. 6장 12절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절, ‘할례를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아까 인간이 평을 하는 것은 자기 육체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평을 한다고 이야기했죠. 그게 유대인에게 국한되어서는 자기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는 자랑은 유일하게 우리가 꽉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것만 자랑하라’ 에 대해서 그들은 그들이 독보적으로 ‘예 하나님. 하나님이 이것만 자랑하라는 것을 우리 민족만 독단적으로 쥐고 있으니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육체의 할례를 이야기 한 겁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방인들은 할례가 없으니까 개같이 인간 취급 안당해도 합당하다고 보죠. 문제는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냐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자기를 통해서 자랑하겠다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우리는 할례를 자랑한다’라고 얘기하죠, 유대인들이. 그러면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에게, ‘우리는 할례를 자랑하는데 복음 안다는 사도 바울 너는 뭐 자랑할래’ 이렇게 나올 거죠. 그러면 우리가 흔하게 ‘그래, 너는 할례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자랑한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 자랑하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자랑하는 것을 구분해야 됩니다.

예수 자랑하게 되면, ‘너희는 할례 소유해라 우리는 예수님 소유할래’ 가 되어버리면 자랑거리가 주님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게 되요. 마치 그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 민족을 자랑하는 것처럼.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똑같이, 똑같은 실수를, 소위 예수 믿는다는 우리도 실수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 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편이다. 우리는 예수님 갖고 있다. 그렇게 되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이든 예수든 뭔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속성,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죠. 자랑은 우리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고요. 내가 누구를 자랑하는 것을 핑계로 해서 얼추 내 자랑도 같이 곁들이는 이러한 심보를, 주께서는 자랑 못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너희들은 할례 자랑해라, 너희들 손에 의해서 주께서 죽으셨던 그 십자가. 너희들은 왜 할례를 자랑할까. 하나님 빙자해서 내가 구원받았다 그 자랑하려고 했잖아.’ 뭐 우리도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밟아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그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랑할 게 없음을, 입 다물게 하시는 그 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랑을 통해서 우리가 쉽게 누구하고 비교하면서 ‘너는 뭐 자랑하노. 나는 이것 자랑한다’ 이것이 너무 안일한 태도에요. 자랑의 원천을 모르고. 십자가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 목걸이 달랑달랑 해서 ‘이거 자랑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자랑할 필요 없을 정도로 주께서 우리를 앞장세워서 주님이 자기 자랑하는 것이지, 내가 내 자랑하는 것으로 주님의 자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로 남 위에 서고 남한테 잘난 척 할 수 없게 만드시는 주님의 살아계심.

우리가 진정 자랑할 것은 어느 순간도 내 자랑 못하게 하고, 내가 예수 믿는 자랑 못하게 하시는 분의 살아계심과 활동하심을 드러내는 그 것이 바로 우리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속성과 더불어서 주님의 속성을, 우리의 죄인 된 속성과 더불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입니다.
 이하림(IP:61.♡.247.43) 19-06-05 20:48 
277강-YouTube강의(고민거리)20190604-이 근호 목사


제277강, 제목은 ‘고민거리’입니다. 고민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달리 이야기했습니다. 고상하게 ‘근심’- 고린도 후서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고민, 근심이 된다. 너희들 때문에 걱정 안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근심이라는 말 대신에 고민이라는 말을 많이 하죠.

고민거리이다...고민거리라고 하니까 자기 일 때문에 고민한다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고민이라는 말 앞에는 ‘아, 나 고민이야’ ‘나’가 강조된 반면에, 근심이라는 것은 자기 말고 바깥의 상황 때문에 쳐다보면서, 주시하면서 근심이다...이렇게 하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나하고는 상관없다.’ 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관심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지되고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누가 창세  전부터 버려진 자냐.’ 그것도 아울러서 뽑아내기 위함입니다.

보통 복음에서는, 자기 식구 하나, 회원 수 하나 증가하면 좋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추가적인 회원 수가 필요치 않아요.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기 때문에. 누가 구원받을지 결정된 거예요. 그렇다면 구태여 사도 바울이 근심할 게 없지 아니하냐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좀 더 깊이 있게 나가야 됩니다.

복음을 전해놓고 신난다하고 휘파람 불며 손 털고 나가는 게 아니고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근심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 당시에 제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에 대해 갖는 근심과 동일한 체험을 사도 바울이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보고 근심하시고 걱정하시고...그러니까 기도하신 거예요. 아버지한테 기도하시고. 사도 바울도 걱정하고 근심했듯이 이제는 누구 차례냐 하면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도 그냥 ‘복음 전했다. 나 몰라’가 아니라 늘 관심을 두고 살피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근심이 아니고 주님이 하는 근심은 영생을 이룬다는 말이 있거든요. 근심을 안하면 지옥간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영생을 받은 자이기에 내가 세상적인 내용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좌절하는 게 아니고 복음적 차원의, 복음적 신호에 의해 떨린, 거기에 대한 전달, 그 과정 속에서 세상에 대해서 어떤 파열음, 진동을 유발 시키는 거예요. 이 복음이.

진동을 유발시키면서 그 복음에, 성도된 사람들은 그 동안 정들었고 친근했던 세상과의 헤어짐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원래 이사 갈 때 되면 그 동안 정들었던 것이 아쉽지 않습니까? 그냥 훌쩍 이삿짐 싸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돌아보면서 자기가 어릴 때 살았던 온갖 추억과 이런 것들이 다 기억나죠. 아쉽고 그런 겁니다.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세상의 일부로서 자기 정신 구조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떨어지지 않아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 놓고 모든 판단기준이 애굽적 판단 기준인 것처럼. 옳고 그름, 나한테 행복이다 불행이다. 이 기준이 애굽적 기준이예요. 내가 원한 것을, 내가 애굽에서 익숙했던 것을 달라고 요구하잖아요. 또 그 방식대로 살고자 고집부리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부 다 틀어지게 하는 겁니다.

세상 방식은 산 사람이 열심히 살라고 애쓰는 방식이라면, 천국 방식은 어린 양의 죽음을 내가 현실화하는 것이 천국의 삶의 방식이지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탈출했기 때문에 서로 상반된 다른 세계입니다. 따라서 근심하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이유가 세상 사람과 달라야 되겠지요.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현장에서 각자 어떤 고민이나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고민이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관찰하고 파악해 내는 작업이 같이 따라와야 되요.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뭘 고민합니까!’ 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 지에 따라서 마치 사람에게 X-ray 사진을 찍어 놓고 그것을 판독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복음은 우리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듭니다. 에스겔 3장 1절의 말씀처럼 사도 바울이 말씀을 먹을 때에 입에는 달았지만 속은 어떻습니까. 속이 쓰렸죠. 아팠어요. 위궤양 약 먹어야 될 것처럼 속이 굉장히 쓰린 거예요. 낯설다 이 말이죠.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허락도 없이 들어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굽니까? 나인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쑥- 하고 주의 말씀 덩어리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미 들어와 버렸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배앓이 하는 겁니다. 때로는 밤잠도 못 자요. 말씀 때문에. 뒹구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근심 안 되겠어요? 근심 되지요.

그래서 고민거리라고 하는 것은 고민거리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신자 맞아? 라고 확인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계속 하시고 그런 식으로 말씀을 듣는 겁니다. 말씀 들을 때는 신났다. 기뻤다. 좋지요. 하지만 거기서 내가 몰랐던 온갖 내 진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비유하실 때, 농사 짓는 사람이 말씀을 뿌렸잖아요. 뿌렸는데 마귀가 유독 달려들고, 돌이 있는 것이 드러나고, 가시덤불이 있고...그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요?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내부에 가득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2장 3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참, 복음 들을 때 이런 반응이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어찌할꼬...고민거리지요. 이 사람들, 정말 우리가 어떨 때는 좀 이상해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습니다.’ 이것이 고민거리입니까?

더 쉽게 말씀 드려서 네가 이 땅에 누가 아는 친척이 너한테 유산을 넘겨주는데, 서울 도곡동에 50평 짜리 아파트 하나 준비해 가지고 키를 너한테 준다고 하고, 차도 하나 준다고 해서 키가 두 개다. 새 차 뽑은 키하고 아파트 키하고 있는데 이게 네 것이란다. 이게 고민거리입니까? 이게 고민거리에요? 아이고 이게 웬 떡이지 이것이 고민이 될 이야기인가 이 말이지요.

차와 아파트는 나의 변화를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쥐고 좋은 데 살면 되잖아요. 우리는 천국이 그러고 싶어요. 내 손 끝 하나 안대고 그냥 덤으로 더 주기만 하고 그것 붙들고 천국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우리의 의식이에요. 왜? 받아 챙기는 거지 근성이 있어가지고. 자기는 손톱도 안 대려고 해요. 주여 주기만 주시옵소서 하기만 하는데. 여기 사도행전에 나오는 진짜 복음을 들을 때에는,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어찌할꼬’가 나오는 거에요. ‘아니 버리란 말인가? 날 죽이시려고 작심을 하셨습니까, 주여?’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군대 통지서 받은 청년 같이, 그럼 앞으로 나 어떻게 살아요?

쉽게 말해서 ‘지금껏 내가 산 것 다 엉터리이고 다 거짓이고 악마의 길이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거예요.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죠. ‘지금껏 네 인생 산 것,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것은 가짜였고 악마 짓이었다.’ 그런 의미로 담고 들은 거예요. ‘그럼 나 어떻게 살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 어찌할꼬. 이것이 진정한 고민 아닙니까. 복음을 들을 때 그런 쇼킹, 충격으로 다가와야 되지 않습니까. 뭐 의지나 준비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그럼 나 어떻게 살아요. 정답은 낚이며 살아야지요. 내가 거기다가 내 행함을 추가할 것이 없어요. 그냥 늘 터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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