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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01:30:50 조회 : 120         
유튜브 강의(284강, 285강), 인간과 인간성,, 환란과 보복 1909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84강         음성           동영상


285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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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61.♡.247.43) 19-09-04 17:53 
284강-YouTube강의(인간과 인간성)20190903-이 근호 목사


제284강, 제목은 ‘인간과 인간성’. 인간과 인간성, 이렇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구분되는 거죠. 보통 인간이 인간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 또는 짐승들과의 차이, 식물이나 다른 피조물들, 해, 달, 별 그런 것과 차이나게 하면서 ‘저것은 코끼리이고 우리는 인간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분에 대해서 인간 자체가 옳다, 그르다, 잘못됐다, 잘한다 하는 것은 나올 수가 없겠죠. 코끼리는 옳지 않은데 인간은 옳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너구리는 옳은데 인간은 옳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너구리는 너구리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할 때에는 옳다, 그르다 하는 그 모든 것은 배제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이구, 인간아. 인간이 되어라’ 할 때에는 인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을 두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인간답다고 하는 것은 다른 코끼리나 너구리나 낙타하고 차이점을 둬서 인간이 인간다워라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을 보고 하는 게 아니고 인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인간성을 두고 할 때, 그 인간이 올바른 인간인지 제대로 된 인간인지 아닌지가 여기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때 율법을 주시고 신약에서 복음과 말씀을 주실 때에 인간을 두고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을 두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뭐라고 변호를 하고 뭐라고 방어를 하느냐 하면 ‘저,  인간입니다’ 하고 방어하는 거예요. 여기서 무슨 문제 있지요. ‘나 코끼리 아니고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인간을 누가 창조했겠어요? 하나님이 창조했지요? 코끼리나 너구리를 하나님이 창조하듯이. ‘하나님은 너구리, 참새는 봐주고 왜 인간은 안 봐줍니까?’ 이런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우리를 만든 게 누구에요? 책임을 누가 져야 됩니까? 만드신 분이 책임져야죠. 로봇 공장에서 로봇을 만드는데 로봇이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로봇 자체한테 물으면 안 되죠. 로봇 쥐어박고 꿀밤 주고, 꿇어 앉아. 그래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로봇 만드는 공정에 뭔가 하자가 있으면 로봇 제조 회사 자체에서 ‘이 로봇이 말을 안 듣네.’ 그러면 그 책임은 누구입니까? 제대로 된 로봇 제품 되려면 공장 주인이 책임을 져야죠. 그 사업주가 책임을 져야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너 인간답지 못하다고 물을 책임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주 같으면 ‘아, 내가 나를 잘 만들었구나’ 할텐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인이 설계해서 본인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습니까? 아니죠. 내가 이런 식으로 태어나고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것은 본인이 개입할 여지없이 그냥 세상에 출현한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게 해놓고 뭐 ‘잘했니 못했니. 잘못했으니까 지옥가거라, 잘했으니까 천당가거라’ 그렇게 윽박지른다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냥 당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에이, 나 그런 하나님 같으면 안 믿을래.’ 하고 얼마든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 아니다’라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아, 누가 널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일방적으로 너한테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없어?”라고 물어 봅니다.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데 시원찮게 만든 그릇을 파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내가 만든 인간 지옥 보낸다는데 만들어진 네가 뭔데 “나 지옥 보내면 안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이건 불공평합니다. 왜 만들어놓고 지옥 보냅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만들 때에 지옥 가라고 만들었다. 왜? 거기에 대해서 네가 변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라고 물으면 인간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할 말 없죠. 할 말은 없는데 기분 되게 더럽죠. 할 말은 없는데.

“남들은 잘 사는데 누구 집 딸은 아버지 잘 만나서 의대 전문대 가는데 내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시고...왜 이렇게 합니까?”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과연 인간에게 있느냐.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은 “인간은 입 다물어라”입니다.

여기서 입 다물라 해서 입 다물 인간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α, 인간 말고 인간 여분에, 배후에 숨어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쭉 이야기하는데 1장 23절에 보면, 인간들이 인간 말고 +α, 인간의 여분에서 나오는 정신, 사상을,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그러한 성질을 인간들이 뿜어내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것 맞아요. 하지만 인간 신체로서는 어차피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게 마땅해요.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신체를 안타깝게 여기거나 애통히 여기지 말고 네가 비록 흙이지만 +α, 네가 뿜어내는 게 뭐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대듦이냐, 반발이냐. 그걸 주목하라는 거예요.

만들어 주신 분에게 마땅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늘 기분이 심란하게 되가지고 분통을 터트리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이럴려고 만들었습니까? 이럴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이런 고생 하려고 태어났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욥기 3장에서 욥이 얘기한 거고, 또 주님은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네가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가룟 유다보고 한 이야기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네가 알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인데 얼마 안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가, 그 내막이 있어요. 그 내막을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한테 아무 쓸모 없어요. 이것을 분명히 합시다. 나는, 내 몸은 나에게 아무 쓸모  없습니다. 괜히 이 몸 가지고 ‘나 이 정도로 잘났어’라고 쓸모 있게 운용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그런 것들은 불신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신자는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아무 쓸모 없는데 쓸모 있게 하시는 그 계획, 그 시스템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는가. 죄인인데 죄인 맞는데,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야 맞는데 이 죄인을 어디에 쓸모 있어서 죄인이라고 하실까’ 그 점을 주목해 보세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그게 바로 쓸모 있는 거예요. 누구 앞에 죄인이냐 하면 예수님 앞에 죄인이잖아요.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등장할 때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라는 그 고백, 그게 쓸모 있으라고 주님께서는 천국 백성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정리하게 되면, 다같이 쓸모 없는 인간인데 성령 주셨던 이유는 죄인+α에요. 우리 죄인, 거기에다가 뿜어 나오는 게 있어요. “예수님이 예수님, 주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 주시고 복음 주셨습니다.” 라는 그 고백, 그게 바로 천국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이하림(IP:61.♡.247.43) 19-09-04 17:53 
285강-YouTube강의(환란과 보복)20190903-이 근호 목사


제285강, 제목은 ‘환란과 보복’. 환란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왜? 유일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에게 있어서 ‘피해 입었다’라고 할 때에는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 관람객으로, 저 사람에게 피해 입힌 사람은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한다’ 해가지고 그 사람들을 교도소 보내고 그러죠.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이 가해자이고 모든 사람이 가해자의 편을 드는 건 아니에요. ‘저 사람은 사형 시켜야 돼’ 그래서 그 범죄에 대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쪽이 훨씬 더 많죠. ‘저건 재판도 필요 없어. 즉결처분 해야 돼.’ 이런 것 있잖아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저 흑해 근처에 있는 작은 나라들, 조르지아라든지 중앙아시아에 있는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같은 그런 나라들 있지요. 그 나라들의 독립사, 독립 운동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까? 별로 없지요.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에 독립한 것만 생각나지 아프리카가 독립할 때에 얼마나 열혈청년들이 그 지배국가에 대해서 몸을 바쳐 가면서 독립운동을 처절하게 했는지... 동유럽이 러시아 공산당의 통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참으로 눈물겨운 희생을 벌였는지 이런 것은 감 없지요? 없을 거예요.

터키 독립운동이나 조르지아 국가가 독립운동 한 것. 그런 나라에 혹시 배낭 매고 가보면 그 나라에 항상 뭐가 있느냐 하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하신 희생 전몰 장병들, 독립투사들의 비들이 다 있을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아픔만 비극이에요. 남의 민족, 남의 국가 독립의 비극은 신경도 안 씁니다. 베트남이 프랑스와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독립운동 하기 위해서 처자식을 전쟁터에 보내서 완전히 가정이 파탄나는 그런 독립운동, 관심 없습니다. 혹시 삼촌이 베트남 사람 같으면 관심 있을지 모르겠지만. 관심 없죠. 중국인들이 일본 전쟁에 대항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전혀 우리는 관심 없습니다. 신해혁명 때 얼마나 죽었고 텐진에서 학살을 얼마나 했는지 관심 없지요.

중국 본토인들, 국민당이 공산당에 쫒겨 가지고 장제스, 장개석이 대만으로 피신해서 대만의 원주민들과 좋게 지냈겠습니까, 학살 했겠습니까? 학살했죠. 한강에서 뺨맞고 엉뚱한 데 분풀이 한다고. 대만에서 타이완섬의 원주민들은 수만 명 죽었어요. 광주사태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대만 본토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다가 집권당한테 모조리 경찰, 군인들에게 학살 많이 당했어요. 그런 것 생각 안하죠?

보편적 인간들의 평등이나 권리 같은 것은 인간은 생각 못합니다. 오직 항상 모든 생각과 모든 논리의 시작점은 내가 속해 있는 내 민족, 내 나라 그리고 내 가족 중심이에요. 제가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도해가지고 그들이 경찰 동원해서 빌라도의 군인에 의해서 살해 당했죠. 만약에 우리가 불교 신자라면 거기에 대해서 동정 같은 것 하겠습니까? 뭐 안됐다 하겠습니까? 힌두교인이라면,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 교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동정하겠어요? 이단 하나, 귀신들린 자 잘 죽었다 이렇게 하지. 유대교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겠습니까? 아니죠.

예수 믿고 기독교 신자라고 우기고부터 ‘이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 지옥 가 마땅하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성경을 볼 때에, 지금 데살로니가 후서를 펴 놨는데 이 후서를 볼 때에 먼저 우리 마음가짐이 어떤 마음가짐이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한 번 믿어볼까 이런 마음가지고는 성경 해석, 볼 권리, 자격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민족, 내 조국, 내 가정, 내 직장... 이미 그것이 생각의 시작점이에요. 그래서 내가 예수 믿을 테니까 예수님이 내 직장, 내 민족, 내 국가 잘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일본에서 예수 믿는 사람하고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 의견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후서, 성경에 있죠.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뭐냐 하면 나 자신부터도 주님의 가해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봐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을 볼 때에. 내가 가해자라면 내가 내 가족들, 내 식구, 남편, 아내, 자식 그것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해자 주제에 그런 권한 없죠? 우리 교회 부흥되라고 그렇게 기도할 권한 없지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애초부터 잘못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위해서 성경 보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죠.

데살로니가 후서 1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이렇게 할 때, 여기에 ‘너희’라는 것은 내 가족, 내 민족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욕되게 한 가해자 맞습니다.’ 라는, 예수님의 성령 받아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에 한해서 비로소 그러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는 환난에 그들도 이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받는 겁니다.

주위에 직장에서 돈 못 벌어서 환난 받는 그런 것이 포함되는 게 아니에요. 내 살 궁리 하는데 잘 안돼서 환난이라고 하면 안돼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환난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복음 안에서 예수님만이 의고 우리는 의인 아닌 것을 인정하는 자, 우리가 이 땅에서 환난 받아 마땅한 것을 인정하는 자를 말하죠.

7절에서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할 때에 형벌을 주신다는 것에 우리가 찬동해야 되고 ‘형벌 주는 날이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마땅하고 당연한 거죠.

‘다음 달 우리 딸 결혼하는데 좀 미뤄주세요.’ 이러면 안되겠죠? 마땅한 거예요. ‘두 달만 미뤄주시면 내 아들 기어이 복음 가르쳐가지고 예수 믿게 해드리겠는데 아직 지금은 예수 안 믿으니까 두 달만 말미를 두시면 두 달 안에 예수 믿게 하겠습니다.’ 이런 것 없죠? 그냥 ‘형벌 주신다는 그 약속이, 주여 속히 오셔서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런 생각을 할 때에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보는 태도는 어떻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미련이 없을 겁니다.

따라서 믿음이 뭐냐?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는 것. 미련 두지 않는 것, 애착두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의 형벌이 마땅함을 인정해서 ‘주여, 시간 끌 거 뭐 있습니까? 오늘 두 시간 뒤에 작살내셔요.’ 하는 그 것, 그겁니다.

‘아, 뭐 이번에 차 벤츠 뽑았는데 지금 재림하시면 벤츠 제대로 타지도 못하고... 적어도 한 달 타보고 죽겠습니다’ 이런 생각 하지 말란 말이죠. 가구 새로 들이고 티비 새로 샀는데 티비 사자마자 세상이 유황불 되면 티비 산 값 아까운데... 이런 것 없단 말이죠. 6개월 동안 뱃살 빼려고 애썼는데 뱃살 다 빼고 폼 잡기도 전에 오시면 곤란한데...이런 것 없죠.

그래서 신자는 뭐든지 예상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게 바로 그냥 누운 채로 주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그냥 현 상황에 맡기는 것. 누가 법무부 장관 되든 관계없이 뭐가 되든 맡기는 것. 이게 바로 주님 안에 있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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