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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1 23:49:37 조회 : 112         
유튜브강의(288강, 289강) 욕심내기, 흐름 19100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88강         음성           동영상


28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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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61.♡.247.43) 19-10-02 17:48 
288강-YouTube강의(욕심내기)20191001-이 근호 목사


제288강, 제목은 ‘욕심내기’. 욕심은 안내야 되겠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했으니까 성도라면 욕심을 ‘안내야지’인데 여기 제목이 오히려 반대로 욕심‘내기’라고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성도는 욕심을 안내야 된다는 존재가 아니고 계속해서 욕심이 나오는 존재가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새삼스럽게 욕심을 안내야 된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욕심을 내기 전에는 욕심이 아니었다를 우기는 셈이 되거든요. 평소에 내가 욕심내기 전에는 욕심 같은 거 나 모른다, 난 욕심하고 관계없이 산다, 욕심? 그게 뭐지? 나하고 상관없네. 마치 전혀 욕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만약에 어떤 탐을 낸다면 아이고 내가 욕심냈구나. 줄곧 욕심 없다가 어떤 순간에 내가 정신을 못 차려서 욕심을 냈구나. 욕심 낸 것 내가 회개하고 반성해야지. 그러면 회개하고 반성한 뒤에 다시는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하고 다시 또 욕심없는 상태로 간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이냐 아니면 그냥 도 닦는 이야기이냐. 일반 다른 종교나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종교생활 하는 사람이나 종교 없는 사람이나 욕심내면 행여나 나한테 저주오는 게 겁나서 욕심을 안내고 또는 욕심 안내는 척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되겠지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는 것 자체가 욕심이고 네가 몰랐을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구체적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1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암몬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하는 그 가운데서 다윗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그냥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윗이 있을 때에 2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기서 아름답다고 했을 때, 이것은 다윗이 보기에 아름답다고 하는 순간 아름답지 않은 것이 동반해서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 인간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인간 말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이미 규정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여인은 평소에 다윗이 저 여인을 어떻게 해볼까 노린 게 아니에요. 그냥 충동적이란 말이죠. 충동적이죠. 이 사무엘하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아주 오묘한 것은 지금 정치적으로 암몬 자손과 전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KBS TV 뉴스 하는데 ‘지금 전쟁중입니다’ 전쟁 이야기가 계속 나왔더란 말이죠.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전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사가 밀리고 있습니다’ 또는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쟁 이기게 해주세요’하고 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있거든요.’ 그러면 이게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왜 사적인 이야기를 집어넣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암몬을 이겨야 된다는 당위성, 정당성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자체가, 이미 살아가는 그 자체가 욕심에 바탕해 살아가기 때문에 욕심있는 왕 그리고 그 휘하에 있는 장군과 그 백성들이 꼭 암몬 자손을 이겨야 될 어떤 정당성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욕심 있다는 것은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의가 죄를 이기지 죄가 죄를 이길 이유는 없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필히 이긴다고 여기는 겁니다.

마치 교회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 아닌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건강하고 부자되고 만사형통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게 바로 욕심인 거예요, 욕심.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암몬 자손을 이긴다. 과연 그게 정당하냐? 이스라엘이니까 정당하지. 그래? 그러면 정당한지 내가 한번 해봐? 하고 갑자기 아름다운 여자가 딱 등장한 거예요.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요새 같으면 드론을 한 번 띄워보고 싶어요. 드론 띄워서 조사하고 싶어요. 그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띄워보고 싶어. 아름답다는 게 객관적인지 안그러면 다윗의 주관적인지. 그건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 상관없이 그냥 다윗이 아름답게 본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그 여인이 그냥 처녀 같으면 첩을 들일 수도 있는데 그 여인은 남편이 있어요. 남편이 있다는 그 사실. ‘저 여인은 아름답지만 남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저 여인을 내 것으로 가지면 안돼.’라는 그 선이 있는데 아름다움이 이겨버린 거예요.

아름답다는 이유 때문에 남편이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은 내가 그 아름다움을 만족하는 그 목표까지 도달하는데 나머지 모든 조건은 장애요소가 되는 겁니다. 저 아름다움을 차지해야 되겠다는 그런 충동을 다윗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이겨보려고 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인간의 힘으로 못 이깁니다.

따라서 인간은 욕심을 내야 욕심이 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애초부터 욕심 위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가 뭐냐? 내가 이런 욕심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게 노출되고 발각되고 그게 드러날 때, 그 때 성도다움이 나타나는 거죠. 성도는 욕심을 안내는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욕심 덩어리인 것을,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폭로당하는 자,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주께서, 누구 말대로 ‘탁’치니 ‘억’한다는 식으로, ‘탁’치니까 “나에게 이런 욕심이 있었어?” 하고 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 아름다운 여인을 본 것은 다윗이 노린 게 아니에요. 우연적이고,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다룸의 대상에서 벌써 벗어난 겁니다.

왜 성경에 다윗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바로 다윗이 신앙인이잖아요. 우리가 다윗의 계열 아닙니까. 계열 같으면 똑같은 현상이 계속 일어나줘야 우리가 말씀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말씀의 사람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건드린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에요.

자기는 이 여인을 가지기 위해서, 자기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장애되는 요소, 남편을 죽였죠. 그 여인을 자기에게 데려오는 데에 지장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에 보게 되면 드디어 다윗이 욕심을 낸 게 아니고 욕심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했다는 그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도 나단. 나단 선지자가 여기 등장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가지고 어떤 욕심쟁이 부자와 그 집안의 종을 비교시킵니다. 자기는 양이 많으면서 단 한 마리의 양을 극진히 사랑했던 종이 있었는데, 손님이 오니까 자기의 많은 양은 제껴두고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잡아다가 했을 때 이런 부자의 터무니없는 욕심에 대해서 왕 당신은 어떻게 처단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다윗은 아주 거침없이 평소에 알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탁 던집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나라고 나는 그 왕이다 이 말이죠. 나는 백성들을 율법에 준해서 여태까지 통치해왔다는 티를 선지자 앞에서도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해놓고 그 인간은 네 배나 갚아야 되고 차라리 그 인간은 죽여 버려야 된다. 이유가 뭐냐?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것은 마땅히 죽을 자다라고 했어요. 사무엘하 12장 5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러니까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는 내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딱 듣고 하는 말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신이 바로 죽을 자고 당신이 율법 위반자다. 여기서 다윗의 고백이 시편 51편에 나오죠. 내가 욕심을 낸 게 아니고 욕심이 나를 만들었다. 다윗이라는 인물을 만든 거예요, 욕심이.

이것이 폭로 당하고 노출 당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죠.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는 게 욕심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하림(IP:61.♡.247.43) 19-10-02 17:48 
289강-YouTube강의(흐름)20191001-이 근호 목사


제289강, 제목은 ‘흐름’. 이 흐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제일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홍수나서 개울천에 벌건 진흙색의 흙탕물이 흘러가는 걸 생각하면 되겠지요. 흐름이라는 것은, 그냥 거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은 그 탁류에 의해서 전부다 휩쓸려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큰 비가 내려서 앞 개울천이 넘쳐 가지고 냉장고든 돼지든 막 떠내려 갈 때에, 그걸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존재라는 것은 흐름을 당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죠.

이 흐름이 지금 우리는 못 느끼지만 사실은 이 큰 강물, 우리가 어떻게 대처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흐름을 우리는 매일같이 당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시간이라는 겁니다. 시간이라는 홍수에 아무리 노력해도 당할 수 없어요. 어떤 분은 막 이 바닥을 치면서 이야기해요. 청춘을 돌려 달라고. 또 어떤 사람은 시계야 멈춰라. 저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는데 왜 우리 인생의 시계는 왜 안 멈추냐는 노래도 있어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제목은 ‘고장난 벽시계’ 유튜브 한 번 찾아보세요, 나옵니다.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왜 둔하냐 하면 우리 인간을 흐름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봐요. 존재인데 그냥 존재라고 하게 되면 잘 의미가 안다가오니까 흐름 안에서 흐름을 일시적으로 자기 임의로, 지 마음대로 스톱을 시켜가지고 결정체를 만들어요. 그게 바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인생이 하는 모든 것이 흐름이 대세인데 뭔가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멈추게 되면, 흐름에 반하니까, 대항하니까 존재로 산다는 것이 억지이고 참 괴로워요.

그냥 위에서 탁류가 밀려오면 밀리는 대로 그냥 휩쓸리면 되잖아요. 휩쓸리기가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내 존재감이 날라가 버리니까. 존재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이죠.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나서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라고 신에게 또는 하나님에게 물으면 ‘너라는 것은 원래 없는 거야. 너 마음대로 네가 생각하고 상정하고 결정체를 만든 거야. 너는 아담의 흐름 속에서 일부이지 너라고 따로 뽑아내지 마’ 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나 그런 말을 잘 이해 못할 거니까 전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1장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흐름이 존재한테 손에 잡히질 않죠. 자기가 자꾸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중국집에 가서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그래 결심했어. 그래서 짜장면 시켜 놓으면 남 짬뽕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고, 짬뽕을 시켜 놓으면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고.

그러니 본인의 존재를, 결정체를 만들어 놓으니까 흐름을 모르고 흐름을 억지로 만들어서 흐르는 탁류를 손으로 뭉쳐가지고 나라고 우기니까 그 ‘나’가 현실과 맞딱뜨리지 않는 거예요. 그게 헛된 거예요. 니가 널 위해서 사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 어떻게 바람을 뭉쳐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 내냐.

그래서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내 중심으로 자꾸 곧게 하려고 하는데 세상은 나를 구부려요. 내 뜻대로 안된다는 말이죠. 2장에 보면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흐름에다가 딱 이건 나라고 이렇게 규정을 해놓고 ‘내가 나를 이제부터는 행복케 해야지, 한 평생 살면서 보람있게 살아야지’ 백 날 해봤자 ‘나는 웃으면서 살아야지’ 백 날 해봤자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2장 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웃어봐도 오래 가지도 않고 심지어 슬퍼하는 것도 슬퍼해봐야 자기 눈두덩이만 붓게 될 뿐이죠.

근본적으로 인생 살면서 힘든 이유가 나는 흐름에 휩싸이고 있는데 그 흐름이 눈에 안들어오고 다른 결정체, 그걸 남이라고 하죠, 타인. 타인의 존재 그리고 내 존재, 이런 것들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왜 저 사람처럼 행복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왜 건강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웃으면서 못 사는가. 그런 열등의식이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할까 하는데 흐름에 휩싸이는 자체가 최고의 즐거움이에요. 그 속도감 있잖아요. 매일 하루가 휙휙 지나가는 속도감. 오토바이 타는 것보다 더 빨라요. 빠라바라바라밤 애들이 오토바이 타는 이유가 뭡니까? 속도감이죠. 멈출 수 없는 것. 브레이크 없이 비탈길을 그냥 질주하는 것. ‘분노의 질주’라는 영화가 있듯이 그냥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거죠, 정신없이.

멈춰야 보인다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볼 필요가 있어요? 그걸 본들 그게 허상이죠, 환상이거든요. 내가 멈춰서 ‘비로소 나구나’ 봤다고 한들 그것은 뒷통수 옆에서 흐름이 때려버리면 그것은 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와해되고 무너져야 될 모래성 같은 겁니다.

여기 2장 4-5절에 보면,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뭘 기대하겠어요? 나는 내년에 이 정도 되어야지, 두 달 뒤에는 이 정도 잘나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자기 현재의 행복이 없으니까, 지금 불행을 느끼니까 시간적으로 자꾸 지연을 시키는 거예요. 내년되면 잘되겠지, 내일이면 잘되겠지, 나이 40되면 무슨 낙이 있겠지. 무슨 40되면 낙이 있습니까? 그 낙을 내가 누린들 낙을 누린 내가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탁류에 휩쓸리면 그것도 다 와르르 무너질 건데.

10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내 중심으로 안다고 우긴 것이 전혀 하나님 앞에 동의가 안되는 내 중심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러한 허무 속에서,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의 방향을 봐야 되요. 도대체 그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를. 방향이 골로새서 1장 16절-17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니까 모든 것이 지금 한 곳으로 모이는 거예요. 블랙홀 같아. 진공청소기 같아. 지익-하면 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방향을, 어느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우리가 머리카락부터 들어가든지 빨려 들어가면 되잖아요. 왜 고집을 부립니까?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이 있어야 된다고 우기니까 본인도 힘들고 남들도 힘들고 식구들도 다 힘든 거예요. 주변 사람 다 괴로운 겁니다.

죽으면 되잖아요. 죽는 게 우리 할 일이에요. 왜? 그게 주를 위한 죽음이라면. 살 생각하지 말고 매일같이 죽음으로 끌려갈 때 “주여 누가 죽이십니까?” 주님이, “내가 죽인다.” 그러면 “죽여 주옵소서. 매일 매일 저희를 죽여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마음 편하게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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