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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23:45:16 조회 : 90         
유튜브 강의 (292강, 293강) 19110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92강          음성           동영상


293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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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19-11-06 21:04 
292강-YouTube강의(행복과 불행)20191105-이 근호 목사


제292강, 제목은 ‘행복과 불행’. 행복은 복이라는 거죠. 인간들이 복을 원하고 저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저주를 안받겠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당연히 복 받아야 된다고 우기죠. 저주 안받아야 되고 복 받아야 될 그 근거를 제시하시라고 한다면 화를 내겠죠. 그래서 출발을 ‘나 복받아야 된다’부터 이미 시작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엉터리이고 억지입니까? 이래도 인간 자체가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까? 문제 있지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그 근거를 추적하는 거예요. ‘나는 행복해야 되고 불행해서는 안된다’라고 우길 때 그들은 인간의 근거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근거를 밝히러 오십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42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장로들, 대제사장들도 합세가 되어 가지고 예수님을 놀립니다.

놀리는 대사가 나왔는데요. 그들의 멘트가 나왔는데,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아주 조롱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이 남을 구원했다고 그들이 생각하겠어요? 그렇지 않죠. 당신이 남을 구원했다는 것이 그게 진짜 구원이라면 남을 구원한 당신, 당사자도 구원되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라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이 처지가 예수님 십자가 달린 처지죠. 그렇다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그걸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십자가 달린 모습을 불행이라고 보겠어요, 행복이라고 보겠습니까? 이걸 복으로 보겠어요, 저주로 보겠어요? 당연히 그건 저주로 보죠. 저주받았으니까 그건 구원되지 않은 상태로 그렇게 확정한 거예요.

그러면 그 맞은편에 본인들이 있죠. 본인들은 지금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인간답게 살고 있잖아요. 예수님처럼 안됐으니까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겠죠.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의 현 상태가 이미 행복할 그러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시작해요. 이유도 없어요. 근거도 없고 무조건이에요. 내가 원하는 상태가 계속될 때 ‘이것은 내가 행복할 만한 요건과 자격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의식해서 주님께서는 그들 앞에 십자가 달려 죽죠. 그러면 누가 봐도 예수님은 복 받은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저주받은 모습으로 오죠. 그들로 하여금 인간들로 하여금 조롱케 주께서 유도하시는 거예요, 조롱하도록.

뭐라고 하냐면 다시 말씀드릴께요.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남을 구원한 게 아니죠. 구원했다고 치자. 그러면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게 복이고 그게 구원이고 그게 행복이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게 되면 구원과 반대되는 구원이 안된 상태고 그건 불행한 사태고 그것은 저주가 되고 그래서는 안되는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을 예수라는 작자가 그걸 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러우냐 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들이 이유도 없이 그냥 나는 행복해야 되고, 마냥, 그리고 나는 구원받아야 마땅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줘야 되고 우리는 구원받아야 마땅하고. 왜?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고 그런 입장에 있다 라고 했을 때에 과연 그런 주장을 펼쳐 놓을 수 있는 그런 근거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근거에 대해서 본인은 몰라요. ‘내가 잘났으니까 구원받아야지’ 뭐 이 정도지, 진짜 누가 봐도 납득되는 근거는 없죠. 없는데 주님께서 근거를 이제 집어넣습니다. 근거를 집어넣을 때 조목조목 따져서 당신은 이래서 저주받고 이래서 당신은 틀렸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기피하는, 그렇게 안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쪽에 바탕을 만들어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너희들 꼴이, 지금 너희들이 욕하고 있는 내 꼴이 원래 너희들 자리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렇게 기피하고 싫어하는 그 자리가 이게 너희들 자리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행복하거나 구원받을 그러한 어떠한 바탕이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너희들은 저주받아야 되고 지옥가야 되고 마땅히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되고 불행해야 당연하다는 거예요. “그걸 나 예수가 너희 앞에 보여줄게”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되면 내가 당신을 믿겠습니다”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그들을 한사람 더 꼬셔가지고 신자 만들기 위해서 내려오는 게 아니고 ‘믿지 마!’ 이런 뜻이죠. 누가 너희보고 믿으래? 그렇게 되겠죠.

주님께서 십자가 달리시면서 ‘아이고,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내가 시범조로, 기적적으로 못을 빼가지고 내려오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계속 십자가 졌습니까? 지금 그들의 요구사항이 뭐냐 하면은 ‘당신이 끝까지 메시아라고 우긴다면 끝까지 기회를 줄게.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되면 당신은 정말 대단한 존재구나. 야, 당신은 이런 분이구나. 사전에 왜 그걸 몰랐지? 여러분 다같이 믿읍시다.’ 라고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걸 아시고 버티죠. ‘내가 너희들 말을 듣나봐라’ 하고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전도가 뭐에요? 그러면 전도라는 게 뭡니까? 버티죠. 믿지 마! 이게 전도 아닙니까?  믿지 마. 믿지 말라고 십자가 지신 거예요, 믿지도 말라고. 이게 십자가 전하는 형식이고 방식이에요. 어차피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에. 믿지 마. 복음 듣기 싫어? 그럼 오지 마! 교회에 만약에 기둥이 두 개 있다면 표어를 두 개하면 돼요. ‘오지 마!, 믿지 마!’ 교회 이름은 ‘믿지 마 교회’ 교회 이름은 그 옆에다가 ‘오지 마 교회’.
 
그 뒤에 43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예수 혼자 자기 꼴도 모르고 끝까지 저 우기는 거 봐, 응? 그게 진짜 하나님 아들이면 하나님이 아마 구원할 걸? 쯧쯧거리면서 지금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궁극적으로 조롱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오늘날 악마가 매일같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지금 이 본문이. 이게 옛날에 있었던 한 때 있었던 멘트가 아니에요. 매일같이 지금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너 예수 믿고 난 뒤에 형편 나아졌나? 살림살이 나아졌나? 예수 믿고 난 뒤 인생살이가 행복노선으로 바뀌었나? 니 몸이 건강해졌어? 집안이 화평해졌어? 더 돈을 많이 벌었어? 너가 예수 전해서, 복음 전해서 목회 성공한 거야? 세상 사람들이 너가 진짜 주의 종이고 성도라는 것을 많이 알아주던? 아니면 친구들이 다 떠나던? 계속해서 마귀가 하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만 보이면 되는데, 오지 마, 하지 마. 하면 되는데 그들은 그게 아니고 우리 편이 많아질 때 그게 진리에 가깝다는 거예요, 우리편, 우리편. 생각 같은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린 든든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44절에 뭐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러니까 이 욕하더란 말은 주님 십자가는 세상 사람한테 충분하게 욕을 얻어먹은 것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 지신 겁니다.
 이하림(IP:124.♡.210.16) 19-11-06 21:05 
293강-YouTube강의(진지함)20191105-이 근호 목사


제293강, 제목은 ‘진지함’. 사람이 어떤 일에 진지하느냐 하면 막상 자기에게 닥친 사태가 평소에 내 것이라고 지켰던 것에 도전이 되고 그게 위협이 되고 위기가 될 때 진지해져요. 이가 아프다든지 감기가 든다든지 갑자기 전화 왔는데 애가 유치원에서 아프다든지 그럴 때  진짜, 애는 남의 애가 아니고 내 애거든요. 아내나 남편이 사고 쳤다든지 언론에, 방송에 자기 아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좋게 나와도 진지하고 막 모자이크 처리해서 나와도 진지하고. 진지할 때는 꼭 자기와 관련된 것만 진지해져요.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 와서 복음 들을 때 진지합니까?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그냥 시간 때우러 온 거예요. 안 오면 또 심술궂은 주님께서 일이 꼬이게 할까봐 에이 가주자. 설교시간이고 예배시간 1시간만 참으면 될게 아닌가 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설교 듣다가도 뭔가 띠리릭 띠리리릭 소리나면 아, 예예 하고 나가. 왜? 진지한 게 날아왔거든요. 설교, 성경말씀, 예배도 전혀 안 진지해요. 빨리 예배 마치고 그 다음 스케쥴이 더 진지해요.

그래서 이 세상이 흔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 말씀으로 되어 가는 것 아시죠? 세상 모든 것은 말씀으로 흐른다. 흘러도 나한테 진지할 경우에만 말씀이 말씀대로- 약간의 관심 좀 가져볼까 이 정도지, 나한테 어떤 위기나 문제가 없으면 말씀이 날아다니든 돌아다니든 아무 생각 없어요. 내 것, 내 건강, 내 가족이나 내 위신이나 명예, 이런 것 안 다치면 우리는 헤헤거리면서 그냥 사는 겁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진지함으로 찾아오는데 시편 73편에 나오는 어떤 성도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성도가 돼서 십자가 안다. 그 다음부터는 이제 슬슬 이 좋은 소식, 내가 아는 기쁨을 가까운 일가친척, 친구한테 전하고 싶어서 작업에 나서죠. 우연을 가장해서 복음 한 번 전해볼까, 찬스 놓칠까 싶어서 겁나면서도 찬스 있으면 또 하죠.

할 때 막상 들이대게 되면 이 복음 말씀이 그 사람에게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더욱더 복음 전하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거부하는 게 아니고 고개 끄떡이면서 다 ‘오케이, 아 그거 옳네, 바르네’ 하고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이게 화가 나는 거예요.

좀 이게 화를 내고 반대하고 거부하게 되면, ‘가만있어보자. 이게 사도바울 가는 길과 지금 같은 코스구나’ 해가지고 ‘나는 진짜 맞지, 성령받은 거 맞지’ 이렇게 자기 확인, 내가 신자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고개 끄떡이면서 ‘아이고, 그래 그 말이 맞네’ 하면서 아무 감동도 없이 동의하는 거예요.

왜? 그 심령이 너무 착해가지고. 성격이 반대하는 성격이 아니라. 응~. 전부 다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일 때 재미가 없어서 복음을 못 전해요. 좀 반대해줘야 또 순교받는 즐거움도 있잖아요, 순교 당하는 즐거움. 주여 보시옵소서 복음 전하다가 제가 주의 고난에...뭐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순교는커녕 칭찬들을 해대는데 아무리 표정봐도 믿는 표정은 아니고...아 너 참 바르게 사는구나, 네가 부럽다. 끝. 끝났어. 관계가 뭐 틀어진다든지 나 니하고 안 만난다 이러면 신바람 나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그 좋은 말씀 앞으로 더 전해줘. 뭐 이러고 가는데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 자신이 내가 복음 전해서 꼬셔가지고 내가 누구하나 전도했다는 내 일에 진지했지 복음을 안다는 내가 전혀 복음 자체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서 진지하지 않았어요. 복음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지금 느낌상 고귀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딱 전해보니까 반응이 미지근할 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자, 화가 난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은근히 뭔가 노렸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 깊이하고 기도도 무려 몇 분씩 해서, 너 하나 전도하기 위해서 너는 모르지만 사전에 밤새 기도해가지고 저거 하나 구원해야지 불쌍해 죽겠다 이렇게 사전준비 철저히 했는데 막상 그 찬스가 와서 전해보니까 미지근하고 웃음이 생글생글 웃어, 막. 눈이 동그라니 이래요. 그저 밝은 얼굴로 다 받아들이니까 내 계획이 완전히 다 깨졌잖아요.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내가 은근히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어요. 뭔가 우쭐댐. 복음 전하고 난 뒤에 나의 우쭐댈 수 있는 요소를 내가 건지기를 사전에 예측하고 노렸던 겁니다. 그게 좌절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시편 73편에 보면 진짜 복음 전할 때는 ‘내가 전해야지’가 아니라 나한테 먼저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가 일어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뭐냐면 내가 실족할 뻔했어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모르는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건강하고 쉽게 말해서 만사형통한 거죠. 아쉬운 것도 없고 게다가 복음은 모르는데 마음까지 낮아져 있어. 그리고 친절해. 품격이 보통이 아니라, 인격됨이. 평소에 화내는 것 못 봤고 욕하는 거 한번 못 봤어요. 예수쟁이 10명보다 훨씬 나아. 천하 성화됐다고 자랑질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우수해, 인간이 질적으로.

그러니 그 사람은 늘 웃고 다녀. 복음은 모르는데 늘 웃고 다녀요. 교회는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복음을 몰라. 그런데 늘 웃고 다니면서 언뜻 보면 성령 충만해가지고 감당을 못해, 막 빛이 나고 얼굴에. 그런데 복음 아는 나는 그걸 보기가 싫어.

우리 자신에게 뭔가 문제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바로 내가 복음 아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했는가 아니면 복음도 알고 내가 부러워하는 저 사람처럼 되기를 원했는가. 어느 것이 네 평소의 기대사항인가를 주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나를 지적질해주시는 겁니다, 나를.

복음을 빙자해서 더 얻고자 하는 것, 복음을 빙자해서 저 사람처럼 늘 평온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은근히 우리가 마음속에 원했던 것이 아닌가를 까발리는 그러한 기회들을,  복음 전달하는 우리는 그게 복음 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복음은 주님이 우리 자신을 향하여 그 사람들을 통해서 찌르고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라. 주님 가신 길은 네가 생각하는 그 쪽이 아니었었어. 날마다 우리 자신의 그 교만함과 오만함,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칭찬받고자 하는 그 탐욕을 주께서는 깨우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상황은, 복음은 누가 전하냐? 주님이 복음 전해요. 그러면 그 복음 전할 때 우리는 갑자기 내 뜻대로 전도가 안될 때 누가 진지하냐 하면 내가 진지해져요. 내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겁니다. 과연 나는 복음을 제대로 알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말씀대로 생각할 때는 늘 주님한테 진지한데 우리는 뭐냐 하면은 안 진지해도 될 만큼 어떤 상황을 미리 찾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바꾸시기 위해서 바로 어떤 누구를 만날 때, 갑자기 복음을 통해서 만날 때, 내 쪽에서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진지함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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