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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9 23:59:12 조회 : 94         
유튜브강의 (294강, 295강). 타인 , 불신자의 심정 19111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94강         음성            동영상


295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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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19-11-21 10:48 
294강-YouTube강의(타인)20191119-이 근호 목사


제294강, 제목은 ‘타인’. 남. 남이죠. 우리가 ‘남’이라고 하는 것은 나하고 어느 정도 유사하냐 또는 나하고 어느 정도 차이 나는가, 내가 저 사람을 의지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저 사람을 사귀면 내가 사는데 도움 되겠는가.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하면서 남을 대하게 돼요.

이 말은 순수하게 그 사람 입장이라는 것은 아예 우리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게 필요하냐’라는 점만 고려하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거냐는 것은 나중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게 이익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작전에 들어가는 거죠. 내가 저 사람의 마음을 달래게 되면 내가 달랜다고 수고한 에너지 이상으로 나한테 뭔가 들어오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을 알아놓게 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타인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 타인 가운데에서 제일 심사숙고하는 타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배우자를 고를 때 제일 신경을 많이 쓰죠. 뭐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고를 때는 배우자만큼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싫으면 갈라서면 되니까. 그런데 부부는 갈라서려고 하니까 너무 짜증나는 서류들이 많아. 주위에 나한테 실망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너는 그런 여자를 찼나? 넌 완전 쓰레기야. 하고 욕할 거 같아, 주위에서.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인간의 타인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확장입니다. 나의 확장. 내 영향력의 범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죠, 타인을 보는 게. 그렇다면 작은 교회가는 것보다 큰 교회가는 것이 내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에 분명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큰 교회에, 마구마구 타인들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들이 하는 그러한 규칙이나 원칙에 대해서 맞춰주기만 한다면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는 타인이 한꺼번에 들어올 것 같아요.

만약에 큰 교회 장로님들이 유수한 기업의 회장님이고 사장님이라면 그 사람 앞에서 믿음 좋다는 소리만 들으면 면접볼 때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가 있고 또 내 괜찮은 인물 가지고 그 회장의 손자나 손녀,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가 있다면 이참에 팔자 고칠 수 있는 찬스가 많아지죠.

그런데 개척교회는 교인 수 다섯 명 앉아가지고 아무리 잘 보여봐야...뭐 가게세도 부담해서 하려 하면 거기에 가겠어요? 못가죠. 자칫하면 그쪽 파악하려 하다가 내 사생활 다 쉽게 들통날 수 있어요. 개척교회에서 점심하면서, 아저씨는 옛날에 뭐했어요? 부터 시작해서 어느 학교 나왔어요? 혹시 과거에 연애해본 적 있습니까? 이렇게 시작하게 되면 탈탈 신상털기에 그대로 다 노출되지요. 그런데 큰 교회는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헌금 내나 안내나 분간도 안되고 돈 천원짜리 하나 내고 점심먹고 나와도 누가 아무소리 안하니까, 워낙 많으니까 내 자아를 은폐하기 아주 쉬운 곳이 큰 교회가 되는 겁니다. 혜택도 많고 공짜로 주는 게 많고.

그래서 인간의 설침, 인간의 나댐, 인간의 까부는 이 모든 것은 바로 내게 유리한 타인을 골라 선택하기 위해서 하는 나의 확장술입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계속 남들을 살피는데 마치 밀림에서 맹수가 먹잇감을 찾듯이 자기 입맛에 맞는 싱싱한 먹잇감을 고르는 거예요.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어슬렁거리면서 내 입맛에 맞는...

그런데 그렇게 남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항상 내게 유리한 타인을 원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남들을 생각할 때 어떤 타인을 고르는지는 사람들은 생각조차 안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아, 너희들 보기에 나는 어떤 타인으로 보이느냐’ 그 말씀도 되고 ‘내가, 예수님이 원하는 타인은 어떤 타인이냐’ 라는 것도 되고. 주님께서는 타인을 원해요. 제자들도 타인을 원합니다.

네가 원하는 타인과 내가 원하는 타인이 어떤 공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찾을 수가 있는가를 질문을 하시면서 하는 거예요. 그럴 때 16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어떤 이익을 얻겠다든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낙을 보겠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선택하고 고른 게 아니고 그냥 내 앞에 당신께서, 주님께서 나타났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제자들, 베드로 뽑을 때 본인이 손들고 자기가 제자 되고 싶어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주님보시기에 베드로는 이미 타인이에요. 그냥 타인이 아니에요. 주님이 선별한, 선택해 낸 타인이에요. 이 자체가 큰 복이고 이런 행운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남으로 생각하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남으로 생각할 때에, 그 관계를 형성할 때 담을 수 있는 내용을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를 했어요.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자기 견해가, 그냥 이성적인 공부나 견해가 아니라 이것은 그 뒤에 나오지요.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복이란 말은 선물 받은 거예요, 그냥. 그냥 어떤 좋은 것이 덮친 거예요. 이런 복이, 이런 선물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행운이 없다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한 것은 나의 의견도 아니고 너의 의견도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결정한 바, 그것이 네 입을 통해서 방금 고백되었다는 거예요. 타인과 타인에 대해서 서로 이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와 나 사이를 어떤 식으로 맺어줬는가 그러한 관계를 네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으니까 네가 정말 복된 사람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원했던 타인 아니고, 베드로가 노렸던 남 아니에요. 베드로의 존재의 확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매자가 되셔가지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남과 남으로서, 이제 하나가 되겠지요, 맺어준 거예요.

그러면 이 고백이 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말 안의 내용은 앞으로 23절 쭉 보면 베드로가 하는 일에 대해 “사탄아 물러나라” 책망받죠? 그 하는 일을 쭉 보게 되면 이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베드로는 자기의 존재를 지워나가야 될 그러한 운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것 또한 선물이고 이것 또한 복이에요. 내가 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이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만 알기만 하면 천국에 합격. 하늘나라에 입성. 그렇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자기를 봤으면 물에 빠졌어요. 누구만 쳐다봤습니까? 예수님만 쳐다볼 때에 베드로는 자기가 물 위를 걸은 지조차도, 이게 땅인지 물인지 그걸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계시면 그걸로 됐지 나는 지금 솜씨 좋게 물 위를 걷는다, 바다를 걷는다고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인가 검토할 필요성도 없습니다.

그 관계가 뭐냐? 주는 뭐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아들 되기를, 천국 백성 되기를 우리에게 선뜻 돌발적으로 나타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잖아요 주님~ 아시면서 왜 그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는 자기 생각할 필요 없고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주님이 있다면 우리도 내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하림(IP:124.♡.210.16) 19-11-21 10:49 
295강-YouTube강의(불신자의 심정)20191119-이 근호 목사


제295강, 제목은 ‘불신자의 심정’. 우리는 자신이 신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제 불신자의 심정 같은 것은 몰라도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불신자의 심정을 더욱 더 깊이있게 우리는 파악을 해야 되고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그 불신자의 심정이, 우리가 성령오기 전에 그 마음가짐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신자의 심정을 보면서 그래 내가 저러했었잖아, 내가 저런 일 때문에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벌벌 떨었고 초조했었고 염려했었고 특히 내 장래,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우왕좌왕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해가지고 지옥가는 게 아닌가 걱정, 염려하는 게 불신자들이거든요, 그 염려한다는 게.

바로 성령을 받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 무슨 행동을 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재롱을 떨면 천국 보내주십니까’를 늘 챙기고 생각했던 그 모습을 우리는 교회라는 단체 속에서, 불신자들 속에서 자신의 옛날의 모습들을 발견을 해야 돼요.

옛날의 모습들을 발견하고 지금의 나와 이상하게 달라진 것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밖에 안 나오죠. 나도 저 사람하고 똑같은데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천국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허락해주셨는지.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든지 성령 받지 않으면 지금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구원 문제 붙들고 벌벌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심정에 대해서 성경은 가득, 트럭 화물칸에 넘치도록 가득 들어 있어요, 성경 전체에. 성경 전체를 보면서 계속해서 대조되는 것은, 대부분의 이야기가 불신자 이야기에요. 불신자 이야기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된 이야기가 간혹 나와요. 그래서 성경 전체가 결국 불신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는 내용들이에요, 성경이. 인간들아, 아니면 다른 말로 하면 돼요. 불신자야, 또는 인간들아 너희들 신자될 수 없는 것 너희들이 인정하지? 이런 식이에요. 너희가 구원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희들이 너무 잘 알거야, 그렇지?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가능이 어떻게 되었어요? 가능이 되었죠. 누가 오심으로 그렇습니까? 주님 오셔서 하는 일로 인하여 우리가 철썩같이 불가능한데 분명히 내 행위, 행동을 보면 불가능 맞는데 주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 예수님한테 고백할 때 그 변화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데 주님이 개입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남한테나 세상에나 주님 앞에 이야기하게 되면 그게 바로 복음 전파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예가 신명기 1장에도 나와요. 신명기 1장에 보면 정탐꾼 12명을 약속의 땅에 보내죠. 그런데 12명 보내진 이 사람들이 전부다 홍해를 건너왔던 사람들이에요. 그야말로 요새 사람 같으면 평생에 경험하지도 못할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물고기들이, 다시마, 미역이나 살던 그 바다 복판을... 갑자기 물이 갈라지는데 이것도 가뭄이 아니에요. 그냥 벽이 된 거예요. 이것은 물조차도 강제조치 당한 겁니다. 이쪽이 나이아가라폭포처럼 벽이 되었고요, 이쪽이 벽이 됐죠.

그러면 중간에 물이 없는 틈이 생겼고 그 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들어와! 들어오라고.” 아, 길이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길이죠. 그러니 전에는 홍해바다가 갈라졌지만 지금은 죽음 사이에 길을 낸 거예요. “내 죽음으로 들어와! 내 죽음 안으로. 죽어라, 이 인간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입니까.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은즉 이제 산 자는 어떻게 사느냐. 산 자는 지 목숨 사는 게 산 자의 남은 인생이 아니에요. ‘이 목숨을 어느 창구에 집어넣으면 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어느 창구에.   

다니엘 세 친구가 자기 목숨을 어느 창구에 집어넣습니까?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잖아요. 거기에 누가 기다렸습니까? 주님 기다렸죠? 네 번째 사나이. (다니엘 3장) 이 목숨을 부지했다고 신날 문제가 아니에요. 그 목숨 이제는, 보통 동사무소나 이런 데에서 창구에 뭐 넣잖아요 서류 넣듯이, 갖다 내야 되요, 그걸. 한쪽은 주님 십자가 걸려 있고 한쪽은 여기 예수 믿고 교회 다녀서 부자된다는 창구가 두 개 있다면 어디에 내야 됩니까? 십자가에다가 집어넣어야 돼요.

목사님이시니까 이쪽은 십자가, 이쪽은 교회부흥. 오천 명 들어가는 예배당 짓고...그러면 내 목숨 어디에 갖다 바쳐야 돼요? 새벽기도 잘해가지고 오천 명 거기다가 집어넣어야 됩니까, 아니면 나 없다, 나 없어. 목사고 뭐고 여러분 생각에 나 없어지는 거야. 하고 예수님의 죽음 속에 집어넣어야 되겠어요? 자기의 목숨을 주님의 십자가에 갖다 바쳐야 되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함이라.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행하지 못한 것, 불신자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주께서 행해 주셨으니까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고마울 데가.    

신명기 1장에서 불신자들의 심정은 뭐냐 하면, 정탐꾼들이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놀라운 체험을 한 거예요, 이거는. 주님 앞에 목숨 바쳐도 이제는 기꺼이 바칠만한 그런 기적을 받아도, 아무리 자기 몸 외부에 기적과 체험을 덤버기로 받아도 내부의 마음까지는 파고들어가 있지를 못했던 겁니다. 홍해는 갈라졌지만 자기 마음은 갈라진 적이 없어요.

참 이게 아무리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우리 마음은 안 갈라졌던 거예요. 불신자들의 심정이. 주님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혜택 주셨습니다. 뭐 온갖 감사거리 1000개를 다 동원해도 자기 마음은 요지부동. 그러니까 내 마음은 손대지 마세요. 내 마음 다치게 쪼개지 마세요. 내 마음 귀한 겁니다 라고 우리가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그 마음을 쪼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가나안 땅에 정탐을 해가지고 그들을 낙담하게 만들었어요. 못 간다.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는 못 간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정탐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못 간다,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똑같이 10명의 정탐꾼들과 마찬가지로 갈렙과 여호수아도 동일한 결론을 내린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못 간다. 인간의 내 행함으로, 그들의 열심으로 못 간다. 그러니까 얼마나 천국이 신나느냐 이 말이에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내가 할 수 있다면 거기서 또 내 자랑 해야 될텐데 이제는 내 자랑 하는 부담마저 내 손에서 놓을 수 있다는 이 자유. 내 잘난 체 안해도 된다는, 내가 까불이 안해도 된다는 이 자유. 여러분 보세요 내가 이정도로 잘났습니다 라고 과시하지 않아도 되는, 그 부담감을 놔버린 거예요, 이제는. 그런 부담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갈렙과 여호수아의 마음이 쪼개져가지고 주님의 능력이, 홍해 능력이 마음속까지 확 들어간 거예요. 히브리서 10장에 보게 되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새언약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 앞에서 돌아가는 게 새언약이 아니고 아예 마음속까지 십자가의 정신을 심어놓는 것까지 마감해야 이게 새언약의 완성이에요. (히브리서 10장 15-16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어떤 목회자들은, 목사님 다 그 말 맞는데요, 만약에 우리 교회에 그런 교인들이 두 명밖에 없으면 나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은 교회가 깨져야 되는데 나 이거 없으면 안된다고 그걸 버티고 있는 거예요. 제가 어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의지하는 무기가 약점이라고. 내가 의지하는 무기가 약점이에요. 철썩같이 믿는 게 약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신명기 1장 41절부터 뒤에 보면, 그들이 안되는데 못 간다하니까 약이 올라가지고 우리끼리 싸우자고 들어가다가 완전히 다 깨졌어요. 다 깨져가지고 전쟁에 패배해가지고 울고불고 통곡하는데 여기 45절에 보니까,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통곡한다고, 간구해서 통곡한다고 들어주는 줄 압니까? 오직 완악함만 확인될 뿐이에요. 쓸데없이 분통 터트리고 울지 마세요. 주께서 짓밟아 버립니다. 감사대신에 통곡? 안됩니다. 우리는 원래 안되는데 가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불가능의 가능이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을 때 우리는 감사만 나오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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