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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23:43:38 조회 : 188         
유튜브강의 (296강, 297강) 만남, 슬픔의 이유 1912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96강              음성              동영상


29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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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19-12-05 10:11 
296강-YouTube강의(만남)20191203-이 근호 목사


제296강, 제목은 ‘만남’. 사람이 태어나서 만날 때는 같은 사람만 만나죠. 또 사람‘만’ 만난다고 그렇게 예상을 합니다. 애들 유치원에 보낼 때 같은 또래의 유치원 애들 만나죠. 그리고 나중에 초등학교, 중학교 가면 같은 또래 만나고 나중에 사회 나가면 사회 사람들 만나고 직장에 가면 상사 만나고. 여자들이 시집가면 시집 사람들 만나고. 또 남자는 처갓집에 가면 처가 식구들 만나고. 이 모든 만남은 사람에게만 국한된다. 우리가 아는 상식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도 그 만난 사람들이 어떤 해답을 제공하지 못해요. 같은 또래에 있는 아이들, 또는 사람들을 만나도 해답을 주지 못하고. 나중에 또 공부를 하게 되면, 책을 보게 되면 옛날 저자들, 그 사람들이 이미 죽어도, 돌아 가셔도 책이 남잖아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경우에는 음악이 또 남고. 그러니까 예술이라든지 저서라든지 이런 걸 쭉 보게 되면 간접적으로나마 항상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전부다 무슨 범위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으로 그게 한계지어 집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굴 만나느냐 하면, 18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리고 난 뒤에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되어 있어요. 창세기 18장 1절을 모르는 상태에서 2절만 보게 되면 ‘아, 아브라함이 또 사람 만났구나.’ 그렇게 되는데 그 분들이 사람의 형상이지, 사람의 모양새는 했지만 사실은 천사들입니다. 천사를 만나요.

천사를 만난다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 자체에서 어떤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평생을 두고 수천, 수만을 만나도, 책을 공부하면서 많은 저자들, 지식 꽤나 있다는 사람을 만나고 선배되는 그런 사람들한테 뭐 하나 배우기 위해서 만나지만 그들은 어떤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교회를 생각해봅시다. 주일날 교회가면 사람 만나죠? 천사 만나려고 교회가는 사람 봤습니까? 없죠? 목사 만나고 장로 만나고 집사 만나고 밥 먹고 집에 오고. 전부다 이거잖아요. 오늘도 피곤하게 사람 만나다가 뭐 만나서는 은혜 받았다고 하지만 육체로서는 ‘피곤해 죽겠다’ 이러고 집에 오죠.

사람하고 엮이는 게 피곤해요. ‘피곤해 죽겠다’ 하고 오죠. 왜냐하면 그 사람 만날 때 서로 위선을 떨면서 만나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 아닌 다른 걸로 위장하면서 만난다는 것이... 집에 혼자서 안방에 있을 때 태도하고 밖에 나가서 사람 만나는 태도 다르잖아요. 그게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긴장의 연속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신체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겁니다. 말로는 교회에서 은혜 받았다 해놓고는 사실 집에 오면 파김치 되가지고 오죠. 게다가 또 교회에서 성가대나 주일학교 교사한다 하면 또 피곤하죠. 왜 피곤하냐? 남한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나를 조작하지 아니하고 위장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그냥 꿰뚫어보는, 내가 나를 꾸미지 않더라도 단번에, “나 니 알아. 니 안다고. 내 앞에서 꾸미지 마. 내 니 속사정 다 알아.”하고 꿰뚫어보는 그러한 하늘 쪽에 계시는, 하늘 쪽에 사시는 분을 만나게 되게 되면 바로 그 자체가 해답이거든요, 평생. 내가 나를 꾸민다는 것은 해답도 모르면서 해답을 아는 척하는 이것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아는 척 안해도 되고 나 이런 인간이라고 조작 안해도 되고 그냥 마지막 때, 심판 때 만날 분을 미리 만나게 되면, ‘미리’ 만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리 만나게 되게 되면 “나 니 어떤 존재인지 알고 당겨서 미리 만났다.” 이런 분이 온다면 마지막 심판을 미리 경험했다는 그것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쉽게 말해서 천사 만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사람 만나면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마지막에 만날 분을 미리 만났기 때문에 어쭙잖게 중간에 스쳐지나가는 존재들을 만나봤자 ‘니한테 주도권이 없어’ 속으로 말할 수 있는 그 자유함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겁니다만은, 남들이 나에게 뭘 요구하느냐를 신경쓰지 말고 이 순간 주님께서 뭐를 나한테 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뭐라고 지시하느냐. 그러면 지시가 되려면 혼자 있으면 안되겠죠. 누구를 만나야 되겠죠. 만날 때 천사가 그냥 빈손으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서 이 세 명의 천사가 내년쯤 니가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작업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천상과 지상의 만남부터 시작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사람을 만나야 사명감 있는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해답이고 정답이에요. 방금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이 천사와 만나는 대목을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또 한 구절 보고자 합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보게 되면 1절, “하나님의 사람이,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로부터 벧엘에 이르기까지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이렇게 해서 남쪽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가 북쪽 이스라엘, 벧엘까지 가가지고 여로보암, 타락한 왕이죠, 그 여로보암에게 예언을 전하는 겁니다. 이게 또 하나의 만남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선지자니까 이미 누굴 만났겠어요? 하나님과 만났죠. 사람하고 만나고 난 뒤에 그냥 집구석 가만 앉아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 만남을 통해 그 다음 모션과 다음 일거리를 제공해줍니다. 하나님과 만났던 사람은 이제는 그 다음 순서가 뭐냐? 사람과 만나는 겁니다.

그럼 사람과 만나게 되면, 이것은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 그걸 확인하려고 만나겠어요? 아니죠. 보편적인 이 세상의 해답과 운명에 대해서 드디어 언질을 줍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박수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외치는 거예요, 그냥. 사람과의 만남은. 그럼 외칠 때 사람과의 협상이나 타협을 의도해서 만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외치고 그 다음에 엮일 필요 없죠. 심판을 외치고 떠나면 되죠.

떠나면 되는데 그 여로보암이 멋진 제안을 합니다. 나라의 반을, 내가 이 왕의 집 반을 너한테 줄게. 이렇게 세상의 사람들한테 통하는 것, 그걸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제공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먹혔으니까.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 시험할 때 그 시험이 뭐냐 하면 악마가 모든 사람한테 다 먹혀 들어가는 그러한 요건을 예수님한테도 들이민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악마가 예수님이 누군줄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만났던 사람, 성령이 있는 사람은 악마가 자꾸 세상적인 조건 가지고 니 하는 그 일을 그만 두라고 회유를 해요. 니 해도 안 먹혀. 흔히 하는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은 뭐하면 돼요? 바위 만나서 계란은 ‘계란이 더 세다’ 하면 안돼요. 깨어지면 돼요. 깨어지면 후라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은, 성도의 운명은 후라이되는 거예요, 깨뜨려가지고. 후라이되면 없어지는 거죠.

말씀만 남고 우리는 없어지고. 이게 주께서 만남에 대한 이유입니다.
 이하림(IP:124.♡.210.16) 19-12-05 10:12 
297강-YouTube강의(슬픔의 이유)20191203-이 근호 목사


제297강, 제목은 ‘슬픔의 이유’. 사람의 정서는 아주 호들갑을 떨죠. 좋을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방금 울었는데 방금 또 웃고.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지금 장례식에 앉아 있는데 TV는 ‘웃으면 복이 와요’ 방영하고 있으니까 온 장례식장의 유족들이 깔깔깔 웃고. 제가 그거 목격했습니다, 현장에 있었으니까.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신 분이고 웃기는 것은 구봉서, 배삼룡 웃기는 것은 웃는 거고요.

인간 정서의 특징은 자기가 주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웃을 때는 웃을 수밖에 없고 슬플 때는 자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 자제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요. 슬픈데 뭘 자제를 하고 뭘 절제를 합니까? 슬픔은, 슬프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보다도 이런 인간의 정서가 더 강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해도 수 십년동안 신앙생활 제대로 해가지고 난 하나님에게 늘 감사한다고 우겨도 갑자기 돌발적으로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엉엉 대성통곡하고 울 일이 얼마나 많이 남은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는 세상을 초월하고 하늘나라 쳐다본다고 그렇게 장담하다가 갑자기 돈이 많이 들어온다든지 하면 돈 보따리 들고 좋아가지고 숨길 수가 없어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경우 생기잖아요. 우연히 길에서 로또복권 주웠는데 그게 20억짜리다 이러면 뭐 예수님 십자가보다도 돈이 더 좋아가지고 히죽히죽거리면서 갑자기 선한 사람되고. 갑자기 남한테 베풀고 싶고요,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사람되는 거는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의 정서를 통해서,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인간으로 다짐한다든지 결정짓는다는 것이 무의미한거다 이거에요. 그게 사실은 소용없는 거예요.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려야지 하지만 정신 바짝 차린다고 슬픈 일, 기쁜 일이 그렇게 평정스러운 마음으로 정돈되는 게 아니에요.

슬플 때는 그 슬픔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에게도 세상살이에 슬프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대성통곡하는 경우가 여러 경우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보내놓고 모세가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못들어간다고 할 때, 그들이 대성통곡하죠. 그러면 모세 말 안 듣고 우리끼리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시비 걸다가 오히려 본토인들에게 된통 패배를 해가지고 오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죠.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광야에서 죽을 수도 없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라 하죠. 어떻게 인간으로서 행할 도리가 없을 때 그 때 그들은 슬퍼했습니다.

자, 슬픔의 이유가 뭐냐. 내 쪽에서 내가 스케쥴 짜거나 마음 먹은 모든 것이 좌절될 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내가 앞으로 더 살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그러한 어떤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때, 나의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때, 이기고 싶은데 자기가 무너질 때 자기가 슬퍼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왜 내가, 내가 무너지는게 왜 슬프죠? 묻는 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와장창 무너지는데 그게 기쁜 일이 아니고 왜 슬픈 일이냐 하는 거예요. 이 물음이 무의미한게 아니에요.

창세기 21장에 보면 여기에 크게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하갈이 주인 사라한테 밉보여가지고 쫓겨나죠. 사라한테만 쫓겨나는 게 아니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쫓겨납니다. 시키는 대로 애 낳아줬더니만 애와 더불어서 같이 쫓겨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의 모든 계획이 다 좌절되죠. 그 집안의 사람으로서 추방되는 거예요. 자기가 평생 마음먹고 내가 이 자리에서 미래까지 내가 살아보겠다 하는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하갈이 쫓겨나가지고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14절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 엄마는 본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않아요. 뭐가 슬프냐 하면 나보다 더 귀한, 내가 죽더라도 제발 너만큼은 살아달라고 했던 그 대상자, 자식이죠. 이 어미 잘못 만나서 자식까지 함께 죽을 때 엄마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슬픈 게 아니고 내 잘못으로, 내 탓으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죽을 때, 슬퍼서 방성대곡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갈의 심정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만큼은 살려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 있죠. 그래서 하갈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존재해도 자기 존재는 돌아보지 않고 자식만은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는 어미의 본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니까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슬픈 거예요.     
자, 슬픔의 이유가 뭐냐? 내가 할 게 없을 때 슬퍼지는 거예요. 내가 할 게 없을 때. 이 말은 오늘날 성도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도의 슬픔은 뭐냐 하면 주님의 지시가 없을 때 슬퍼해야 돼요. 주님의 뜻과 지시가 끊어졌을 때 꼭 끈 떨어진 사람처럼 진짜 슬퍼하는 거예요. 집이 부자고 자식들이 잘 돼도 그것에 성도는 마음 두고 살지 않기 때문에 그게 성도의 존재 이유가 되지 않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자기를 다루어준다는 그러한 의식이 없을 때 성도는 슬퍼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하거든요. 그 신랑집에 신랑이 있을 때는 니가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은. 혼인식에 신랑 있으면 됐지 뭐 더 필요합니까? 뭐 음식이 문젭니까? 주인공이 신랑이잖아요. 그러나 너희들이 신랑을 잃어버릴 때가 올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랑을 잃어버릴 때 너희들은 금식하고 울어 버려라. 너라는 존재는 신랑과 결부된 존재인 것을 니가 안다면. 신랑이 우선적이고 나는 신랑을 위해서 존재하는 신랑의 종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웃어야 된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 잃어버릴 때 울고 다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는 그 때는 잃어버린 이상으로 보상을 받아서 크게 기뻐하겠죠. 잃었다가 얻었으니까. 그만큼 우리 성도의 마음은 어디에 뺏겨 있다? 몽땅 다 주님한테 빼앗기고 주님 하나만 바라보는, 아주 주님 때문에 혼이 나간, 주님만이 소중하고 나는 안 소중한 그 관계가 바로 성도의 모습인 겁니다.

때로는 슬퍼할 때 슬픔의 이유는 주님 때문에 슬퍼하고 따라서 주님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거뜬히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성도의 기쁨이어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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