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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23:51:14 조회 : 85         
유튜브강의(326강, 327강) 중지와 정지, 친구와 이웃 2010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326강                       음성                    동영상


32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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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1.180) 20-10-07 06:16 
326강-YouTube강의(중지와 정지 출애굽기 16:3)20201006-이 근호 목사


제326강, 제목은 ‘중지와 정지’. ‘중지’라 하는 것은 일을 그만~하고 지난 것 다 후회스럽다 해서 그걸로 종결하는 것을 중지. ‘정지’라 하는 것은 멈춰있는 것. 멈춰있는 것이 정지죠. 중지와 정지가 비슷한 말이지만 광야에서 출애굽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나올 때 사람들은 자꾸 중지를 원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16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온 회중입니다. 이거는 뭐 당회정도가 아니고 온 회중이, ‘세례 교인 전부가’ 이렇게 보면 되죠.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자,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주모자가 몇 명 있는 게 아니고 온 회중이. 100프로입니다. 모세와 아론 빼놓고는 100프로 전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실패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한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럴려고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하고 지금 형편을 한번 당신이 눈이 있거든 똑똑히 한번 비교해봐라. 지금 우리 꼴이 정상인지 한번 비교해보라고. 따라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종결짓고. 당신의 그 구원 프로젝트, 쉽게 말해서 목회 그만두고 옛날 애굽에서 했던, 기존 교회에서 하던 대로 그냥 설교하고 그 내용으로 십자가 빼고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쪽으로 갑시다. 100프로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런 경우를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겪게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현재 십자가 가는 길이 추가적으로 하나 더 챙기는 게 십자가 가는 길이 아니고 주님이 망했던 그 망함의 상태가, 즉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실제적인 체험으로 공유하게 되는가’ 그게 살아있는 십자가입니다.

글자 속에 있는, 성경 속에 있는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가 바깥에 튀어나와서 나를 덮쳐버린 거예요. 덮쳐버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생각했던 그 형편보다도 상상외로 훨씬 더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망시키고 절망케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대한 희망자체가 없게 만들어요, 구원되는 희망이. 구원에 대한 여망이 전혀 없게 만듭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원리하고 대치가 돼요. 반대가 됩니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실제로 십자가하고는 서로 반대 힘으로, 반작용으로서 부딪치고 있는 거예요. 전혀 희망이 없어야 십자가만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고 여기다가 추가해서 십자가 은혜까지 보태버리면 얼마나 괜찮은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전에 썼던 책에 보면 목사는 목회에 실패해야 구원이 보인다고. 왜냐하면 모든 것을 목회에 다 걸었거든요. 내 교회 있다, 나 무시하지 마라, 내 교회 있다. 교인 수 몇 명 된다. 헌금 얼마 나온다. 그걸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건 애굽이죠.

주님께서 그런 생각 가졌습니까. 아버지 앞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언서 16장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맡길 때는 자기의 뜻과 희망 같은 건 다 맡겨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중지입니다.

그러면 정지는 어디 있느냐. 바로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위에서는 정지가 돼요. 모세와 아론아, 한 텀 쉬었다 가자. 지상에서 어떠한 성질의 인간들을 주께서 천국에 보냈는지 네가 한번 목격해봐라. 전~혀 약속의 땅, 전~혀 천국, 전~혀 하나님과 합세할 수 없는 그런 성질들을 가득 안은 자들의 집합체, 그게 바로 내가 구원하려는 이스라엘이다. 그걸 모세와 아론이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온갖 욕설이란 욕설, 퍼부어대는 욕설을 네가 다 받아라. 그들은 성질나서 퍼붓고 너는 그 성깔, 성질을 다 받아내고.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 하나님이 이 땅에 당할 수모를 모세와 아론이 미리 같이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 환경 자체가 좋은 게 좋다면 모세와 아론보고 그렇게 욕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원망까지는 안합니다. 수고하십니다. 대단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기도까지 해주시고 설교해주시고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이렇게 되지. 예의상이라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참다 참다 노골적으로 터트리는 그런 것은 다 감내해야 돼요. 주님이 당했던 그 억울함이에요, 억울함. 억울함입니다.

사람이 나쁜 짓하고 욕 얻어먹으면 그래도 보람은 있어요, 보람까지는 아니지만. 뭐, 미안합니다. 하면 끝나는데. 내가 그들의 영혼을 생각해서 걱정해서 힘들여서 그렇게 수고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그리고 곡해, 오해밖에 없을 때 그것은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유발시킨 겁니다, 의도적으로. 모세와 아론은 그것을 다 겪어야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러분들이 꼭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원망을 받았을 때 모세와 아론은 되레 백성들을 나무라기 시작하는 거죠.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너희들이 내 공로와 희생을 모르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나에게 원망하는구나. 너희들이 당해도 난 모르겠다. 나는 거기서 발 뺄란다. 이렇게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광야에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까? 못 들어갔죠. 욕 듣다 듣다 같이 성질나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나한테 욕을 할 때 그 욕하는 사람이나 욕 들어먹는 내가 욕 들어먹는다고 그 사람보다 더 의롭고 주님보시기에 더 합당하다. 이런 것은 없어요. 주님만이 억울하지.

사실 우리는 억울한 게 아니고 매사에 평소에 설교하거나 뭐할 때 살아가면서 고맙고 감사한 것이 빠져버린 겁니다. 고맙고 감사한 것이. 내가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 할 때만 고마워하겠다는 그 조건을 내가 임의로 만들어버렸어요. 이렇게 희생하는데 이래도 감사 안 해? 그럼 너희들 나빠. 이런 식으로.

내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내가 포기를 못했습니다. 아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교회 나와주니 고맙습니다. 하는 고마운 마음이 없는 거예요. 감사한 마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내 복음 듣고 다른 데 가서 지옥가라. 이런 식으로. 그러한 울화가 막 불쑥 튀어나온다 이 말이죠.

바로 그러한 타인을 통해서, 주님 편에 서있다는 내가, 복음을 안다는 내가 오히려 주님의 복음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환경을 통해서 까발리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잘해주면 고맙고 못해줘도 고맙고. 왜? 우리 자신은 천국갈 수 없는, 지옥 가야될 마땅한 존재인 것을 주님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통해서 늘 되새겨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하림(IP:124.♡.211.180) 20-10-07 06:16 
327강-YouTube강의(친구와 이웃 요한복음 15:13)20201006-이 근호 목사


제327강, 제목은 ‘친구와 이웃의 차이’. 이웃이라는 것은 넓은 범위이고 그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친구.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이웃이라고 다 친구가 아니고 그중에 특심 있게 특별한 마음, 관심을 가질 때 친구가 된다. 이렇게 하는데 그럼 친구와 이웃이 굳이 차이가 있을 수 있느냐.

이웃은 이미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없는데 새로 생겨난 사람이 친구가 되는 겁니다, 없는데. 어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다 친구입니까? 아니죠. 이웃이죠. 그런데 그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 단짝을 만났다면 그건 친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이웃은 많이 있는 거고 친구는 없는데 살다보면 새로 생기는 것이 친구죠. 그런데 친구와 이웃을 굳이 구분하는 이유가 뭐냐.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뭐라고 소개하느냐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15장 13절, 14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웃 아닙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을 베풀 때 그냥 아무에게나 사람이라고 사랑을 베푸는 게 아니고 꼭 집어서 그 사람을 특별히 규정을 해요.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 친구라 여기고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그 친구란 말로만 친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친구 사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증명을 하느냐 하면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참, 세상 살면서 날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히 황송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되는 일이기도 해요. 저쪽에서는 목숨까지 내놨는데 난 그럼 뭘로 보답해야 되는가. 꼭 보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무심코 길을 가는데 차 오는 것도 몰랐는데 친구가 와가지고 친구가 차 오는 것을 대신 막아가지고 나는 아무 다친 데 없고 친구는 6주 진단. 6주 진단 좀 그러면 직장 짤림. 그러면서 치료비는 나한테 한 푼도 안 받아요. 자기가 어디 보험 넣어놨다고 그 보험으로 다 된다는 거예요. 보험 이야기하니까 누구 생각납니다만. 어떤 사람은 보험 받아서 집 산 사람도 있어요. 본인이 그걸 다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한 푼도,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뭐 때리기라도 하고 나한테 돈을 요구한다면 덜 미안한데 보답조차도 못하게 말리니까, 적극적으로. 우리가 그런 사람 만나면 할 말이 없죠. 아니 왜 그래.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간단한 말이에요. 친구 아이가! 이렇게 하거든요.

아, 친구가 그 정도 되어야 친구였었어? 아, 친구란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구나. 친구라는 것은 대충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 챙기는 게 친구가 아니고 내 목숨을 바칠 대상을 가지고 나의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friend, 친구라고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주님께서 가르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친구가 좋은 단어가 아니고 무서운 단어에요. 이럴 거 같으면요, 친구 사귈 마음 안생기고 진짜 성가시죠. 그렇게 험악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 완전히 자아라는 것은 찾을 길이 없고 그 친구라는 타인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강탈당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럼 나는 뭐냐. 이렇게 되겠죠.

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나쁜 의미의 이용이 아닙니다. 주께서 친히 그 제자들을 사용하신다.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알게 된 것, 받은 지시와 명령이 있을 거예요. 내가 받은 명령과 지시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지상에 와서 그대로 펼쳐야 될 사명을 주님이 받은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자기 아버지께 받은 것을 꿍하고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활짝 펼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동원되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의 열두제자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갔죠. 이제부터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하고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립니다. 열두제자 다 그렇죠. 특히 그게 아버지의 뜻인데 아버지의 뜻 중에서 가장 제일 핵심 되는 뜻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 신으로부터, 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에요.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친구로 또 뽑아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친구 되기 위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 가입된 사탄의 종이죠, 악마의 종입니다. 더 이상 친구로 보지 않고 사탄의 종으로 보죠. 사탄아, 네 할 일 해야지. 악마야, 네 할 일 해야지. 라고 보내죠.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예수님이 친구라고 할 때 제자들은, ‘야,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서 참 제일 귀한 생명까지 주시는구나.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것은 아직 친구를 모르는 거예요. 친구라 하는 것은 주님이 버림받을 때 친구 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관여되어 있고 엮여져 있는가를 봐야 돼요.

예수님 죽을 때 제자들은 어디 갔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에서 사살당할 때 대통령 어디 있었냐고 묻는 플랭카드를 제가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러면 반대로, 나라를 구할 때 왕이 구하지 않고 논개라든지 이순신 장군이 구했다고 어느 사람이 또 이야기했죠, 나훈아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을 때 그 혜택 입을 사람 어디 갔습니까? 도망갔죠. 도망가고 부인하고. 베드로는 부인하고 모른다하고 저주하고 이랬죠. 그게 과연 친구 사이가 될까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누구도 친구가 성립된다, 안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친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을 나 좋으라고 친구라는 말을 하면서 이용할 생각이 앞서 나오기 마련이에요. 이용가치 떨어지면 그대로 뒤돌아서서 안보죠, 이용가치 떨어지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병 고치고 예수님이 천국 준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좋아라 하면서 하늘나라 가면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자리 차지하겠는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 거예요. 그게 제자들 생각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 생각이라고 보세요. 예수님 좋아? 좋아. 예수님에 대해서 목숨 바칠래? 아니요. 뭐 그런 거. 그게 우리 형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마음이 우리 자력으로서는 나올 수가 없음을 인정해줘야 이게 친구관계에요. 우리 쪽에서 친구라는 개념 자체를 주께서 십자가로서 없애버렸어요. 네가 생각하는 친구라 하는 것은 나는 안 받는다. 네가 지금 친구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친구라 하면 다 친하게 지내는 줄 알지?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친구 해줄게. 친구가 아닌데 친구 해줄게.

친구라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그 친구 아닌 것을 친구 되게 하는 데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그것을 받아들일 때 친구입니다, 그걸 받아들일 때. 그걸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내가 친구 될 자격도, 그러한 인간도,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겠죠.

그게 바로 주님의 친구입니다. 나는 나밖에 몰라요. 예수님마저 이용하려고 했던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위해 목숨을 주시다니. 그저 황공할 뿐이고 이제부터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절로 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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