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유투브강의
2021-04-06 23:56:16 조회 : 86         
유튜브강의(346강, 347강) 꿈, 쓰레기 2104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346강                음성                     동영상


347강                음성                      동영상


<iframe width="962" height="541" src="https://www.youtube.com/embed/RC_Wki0tOl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962" height="541" src="https://www.youtube.com/embed/YTJeKioAJTg"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이하림(IP:124.♡.211.180) 21-04-07 05:56 
346강-YouTube강의(꿈 시편 73:20)20210406-이 근호 목사


제346강, 제목은 ‘꿈’. 꿈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요셉 같은 경우에. 또 삼손의 아버지한테도 하나님이 꿈으로 이야기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이야기했지만 인간 속에서 특별히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는 자들, 그런 자들에 대해서 신명기나 율법에 보게 되면 그런 사이비를 용서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사람에게는 꿈으로 계시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꿈을 내가 꿨다고 해서 그 꿈을 내 소유화시킬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실 때 이것이 제대로 된 꿈이냐를 알기 위해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하나는 ‘이게 예상 밖이었다’ 라는 것. 하나님께서 꿈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꿈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허망한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꿈으로 들어오죠.

사람들은 오히려 꿈을 허망한 것으로 보고 현실 따로 꿈 따로 그렇게 보거든요. 꿈은 밤에 착각해서 그런 거니까 현실에 넣어주질 않아요. 부질없는 것, 그것을 꿈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 같은 경우에 특별히 꿈으로 이야기하시는 것은 바로 대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지독한 현실,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부정 못 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나 부정하지 조금이라도 제정신 있다는 사람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더욱더 확실하고 생생한 이 현실, 그 현실을 깨는 겁니다. 대결시켜서 깨버리죠. 깨버리게 되면 그 현실 속에서 네 진리와 네 희망을 찾는 자체가 애초부터 잘못이라는 겁니다.

삼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 온갖 것을 찾아 헤매도 그 헤매는 영역이 꿈이 아니고 본인이 말하는 그 생생한 현실 내부에서 계속 찾게 되죠, 현실 내부에서. 그 당시 블레셋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배받으면서 자기한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절대로 생각 안하죠. 자기한테 문제없다고 생각하죠. 본인한테는 문제가 없는데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그러면 해결점은 어디서 찾습니까? 난감하죠.

그게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둘 다 하나님께서 긴급적으로 꿈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은근히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던 사람조차도 그 꿈의 내용은 예상 밖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의 내용이 예상 밖이라면 지금 우리는 뭐 꿈속에서 계시 받습니까? 계시 안 받죠. 성경이 있으니까요. 계시 안 받잖아요. 그러면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되느냐. 그것은 항상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성도한테는 예상 밖의 일로 일어나는 겁니다, 예상 밖의 일로. 당황스럽죠. 매사가 당황스러워요. 예측을 했는데 이게 하나님에 의해서 강력하게 묵살당하는 겁니다. 거절당하는 겁니다.

사람이 예측할 때 그냥 예측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뭔가 될 때 나는 어떤 어떤 것을 준비하면 되느냐를 생각하면서 예측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음식을 하기 위해 재료를 다 준비해서 ‘손님 오게 되면 이런 음식을 준비해야 된다’ 다 예측이 되잖아요. 그냥 예측하는 게 아니고 마트에 가서 음식재료를 사온단 말이죠. 사오는데 그날 따라 가스를 배달해서 쓰는 집 같으면 가스가 그만 딱 떨어졌다든지, 안 그러면 올 손님이 30분 전에 ‘미안해요’ 하고 안 와버린다든지, 음식 이만큼 준비했는데. 친구 5명 오기로 했는데 5명 다 취소되었을 때 내가 준비한 것이 바보짓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바보짓이 되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십니다. 이게 참된 계시에요. 너 바보 안 되려고 했잖아. 네가 지혜롭게 실수 줄이는 방향으로 인생 살려고 네가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너 바보 아니라고 자부하지? 그런 자세로 내가 천국 들여보내줄 거 같아? 아니야.

네 솜씨, 네 멋있음, 너의 대처 잘함, 너의 뛰어난 대처실력, 일말도 천국에 같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 다 떼고 들어와야 돼요. 그럼 그것 떼는 환경은 바로 천국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그게 떨어져 나가야죠. 그게 바로 어린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난 겁니다. 마노아 가정에 꿈으로 나타난 거고요.

시편 73편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여기 꿈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꿈은 무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천국 갈 때 우리가 한평생 산 것을 주께서 “너는 꿈속에서 살았어.” 하고 우리를 무시할 때 그걸 각오해야 돼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인생살이가 그래요. 자기가 집착하고 신경 바짝 써서 너무 신경을 써가지고 스트레스 받아 암에 걸릴 정도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완벽에 완벽을, 철저에 철저, 오직 실수 없는 쪽으로 안전빵이라 하죠, 가장 조심스럽게 안전한 길로 그렇게 갔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에 주님의 계시를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 발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상한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었음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한번만 느껴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매일같이 지금 내가 혹독하게 질감적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 현실이 십자가 앞에서는 무시할 만한 꿈같은 세월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시편 73편 22절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이야기하죠. 주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예상하고 고대하고 싶죠.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 모든 계획들이 여지없이 작살나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주님이 안 계신 순간이 아니고 도리어 너무 깊숙이 주님의 계시가 나를 장악한 순간입니다.

네가 그 일을 예상하고 성사를 노리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이유는 뭐냐. ‘나 이렇게 잘났잖아요’ 하는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처리한 것은 바로 자기 의라는 아주 강력한 죄를 처리한 거죠.

그러면 그 죄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으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남과 성공한 인생을 우리가 개무시해야죠. 그래서 우리는 인간도 아니고 우매 무지하고 짐승같사오나 23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붙드셨기 때문에 내가 짐승이라도 좋소. 내 인생에 대해 내가 질질 끌고 힘들게 지키려 한 이 참한 그리고 소중한 내 인생이 한낱 허망한 꿈이라도 좋소. “주님만 계시다면 그걸로 저는 좋습니다.” 라는 고백. 그것을 하기위한 인생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이하림(IP:124.♡.211.180) 21-04-07 05:57 
347강-YouTube강의(쓰레기 마태복음 15:27)20210406-이 근호 목사


제347강, 제목은 ‘떠남’. 제346강 <꿈>의 동영상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제가 하나밖에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예상 밖이다, 모든 내용이. 두 번째 내용을 이 347강 <떠남>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에다 넣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그 두 번째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계시에서는 누구를 지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지적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가 나를 지적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지적하지 않을 때, 이 말은 곧 내가 타인에 대해서도 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이런 말도 나와요. 남의 일에 간섭해서 인생 살지 마라. 또는 다른 말로 남의 인생에 보증서지 마라. 타인을 네가 보증할 입장이 안 된다. 자식이라도 부모를 보증하지 말고 부모라도 자식을 보증할 수 없어요. 누구라도 사람이 사람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 잘 될 거야, 저사람 못 될 거야, 확답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평소에 내가 나를 지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그 버릇이 남을 지적하는 식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럴 필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떠남’이라는 내용과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귀신들린 딸 이야기를 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죠.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내 딸이 귀신들렸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귀신에 대해서는 인간은 손 못 대고 우리 주님만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아까 346강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예상 밖이라 했죠.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올 때는 내 딸이 귀신들린 이야기하면 불쌍히 여겨서라도 나와 내 딸에 대해서 주님께서 관심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 주님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15장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되어있어요. 그럼 이것은 그 가나안 여인의 관심사와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긋난 겁니다.

귀신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 당신이 유일하게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귀신이 있는 현장에 소방수가 와야죠. 아프다는데 아픈 사람 있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의사되시는 분께 이야기할 때 그 의사는 아픈 사람 있다면 의사로서 마땅히 고쳐주는 것이 본인의 사명 아니겠어요?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제자들이 있었겠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26절에 나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내게서 떠나라. 이 이야기죠. 내가 온 것은 양한테 온 거죠. 나는 양과 개를 구분 짓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개가 귀신들리든 뭐를 하든 나는 모르겠고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꽂혀 있느냐.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가나안 여인이니까 떠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잃어버린 양을 위해 왔다는 말은, 잃어버린 양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귀신이 들리든 귀신의 대장이 있든 간에 그것은 네 사정이고 예수님 내 사정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섭섭한 분이 주님이세요. 우리가 뭐 아쉬운 소리하면 오냐오냐해서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우리가 굉장히 착각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예상 밖의 계시를 받아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양 외에는 개가 되죠. 개에 대해서는 주님이 따로이 뭔가 지적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냥 떠나라 이 말이죠.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성도가 되었으면 내가 나의 옛사람에 대해서 지적하지 마세요. 왜? 그것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주님과 떨어질 것이거든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옛날 내 행동이 이랬습니다’ 에 대해서 내가 나를 지적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옛사람은 떼어내야죠. 떠나야죠. 옛사람은 떨어져 나가야죠. 자꾸 옛사람가지고 주님 앞에 귀신들렸다고 내밀지 말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게 아니에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죽여놓고 살리는 것이 주의 일이거든요. 구닥다리 옛날 것 고장 났다고 고쳐달라 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내 아쉬운 것 좀 고쳐 살았으면 좋겠다. 나 이러면 안 되니까 기도하면 주께서 응답하겠지. 이것은 엄청나게 주의 뜻을 오해한 겁니다.

주의 뜻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고치는 게 아니고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있으니까 떠나야 마땅하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죄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죄를 알고 난 매일같이 이렇게 나를 비판하고 지적합니다. 누가 너보고 지적하라 했어? 왜 쓸데없는 짓하고 있어? 버리고 떠나야지, 버리고 포기해야지, 왜 그걸 쥐고 뭔가 거기서 어찌어찌해서 천국에라도 들어가려고 왜 그런 수작을 하냔 말이죠.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옳습니다” 개라는 점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적받을 대상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야 양아, 너 잃어버렸어. 이리 와. 그건 양한테 해당되는 거죠. 개는 아예 귀신이 들렸든 뭐가 들렸든 간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옳습니다. 주께서 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주님 앞에서 떨어져 나가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그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 본인이 잘 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여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희망과 기대에 대해서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완벽하게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내 딸이 귀신들리든 귀신의 귀신이 들리든 그것에 대해 주님이 관심두지 않을뿐더러 덩달아 나도 거기에 관심둬서는 안 된다. 아니 내 자체가 나한테 관심둬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 개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개와 주인집이 이어지는 매개, 고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여분의 것, 부스러기거든요, 진짜는 다 먹고 갖다버린 것 있잖아요, 갖다 버린 것을 가지고 음식쓰레기라 하죠. 오늘 제목을 <떠남>보다도 <음식쓰레기>가 더 적절한데 음식쓰레기는 버렸기 때문에 제가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양한테 주고 나머지, 버려진 것이 있지 않느냐, 버려진 것. 그 버려진 것을 먹는다는 말은 개라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돼요. 개가 아니면 어떻게 버려진 것에 대해 구미가 당기겠습니까. 개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데 28절에 주님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크도다”는 말은 바로 그거야.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양이 어떤 마음씨가 되어야 되느냐. 너 같은 마음씨를 가질 것을 내가 원했던 거야. 잃어버린 양은 어떤 마음씨?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믿음을 잃어버린 양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개 같은 네가 보여줬으니까 네 믿음이 크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자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합치를 본 거예요. 일치된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과. 개만 건지겠다. 개 같은 인간만 믿음이 있다고 나는 간주하겠다. 이게 바로 주의 뜻입니다. 28절,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바로 주님과 링크가 되니까 연결이 되니까 부스러기의 효과로서 쓰레기 효과가 귀신을 떠나게 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쓰레기라는 그 마음자세를 유지하는 것, 그럴 때 뭐가 보이느냐. 주님의 일방적 능력만, 자비하심만 크게 느껴질 겁니다.
  ◁ 이전글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