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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23:48:04 조회 : 214         
유튜브 강의 (228강, 229강). 국가의 정체, 장벽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28강     음성             동영상


22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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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4-05 15:16 
228강-YouTube강의(국가의 정체)180403-이 근호 목사

228강, 제목은 ‘국가의 정체’입니다. 국가를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국가라고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하는 것보다도 민족이라는 것이 더 강렬해요. 이스라엘 민족과 그 반대편에 있는 이방민족. 민족과 국가의 차이점은, 민족은 전통성이 있습니다. 전통성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이어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손자를 낳고.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내가 늙어죽어도 이 민족이라는 것, 나를 태어나게 했던 그 원천, 이것은 한결같이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내가 여기 이 땅에 산다는 그것으로 증명이 된다는 것. 이게 옛날에는 국가라고 할 수가 있어요.

국가를 요약하면 그거는 ‘나’라는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외부적인 이미지다, 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연속적으로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외부의 이미지. 그래서 현대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보다도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민족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얻을 수가 있죠.

그래서 항상 그 근거는 뭐냐 하면 옛날 고대국가는,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계속 이어져왔기 때문에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조가 중요하고, 족보가 중요하고, 그리고 역사가 중요해요. 여자가 시집을 갔다. 그러면 자기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간다고 하지만, 그거는 결혼하기 전이고, 막상 시집을 딱 가게 되면, 시집이라는 그 족보와 그 가문에 본인이 봉사해야 된다는 책무를 부여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피가 섞이지 않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아프다면 며느리로서 마땅히 돌아봐야 된다. 만약 안 돌아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안 돌아보게 되면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이 집안하고 결혼한 게 아닌데, 왜 갑자기 집안이 거론되지? 아하! 나라는 것은 나의 자식의 성(姓)부터 해서, 나에게 속한 그것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다른 집안이었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집안자체를 옮겨서, 이 집안의 연속성과 전통성과 영원성을 보장하는데, 내가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을, 결혼할 때 이미 부여받고 결혼한 것이었구나.’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은 자기 둘이 마음 맞는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집안과 집안끼리 한다는 것을 옛날부터 했잖아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상당히 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면 여기서 오늘날의 국가가 뭐냐, 오늘날의 국가는 이게 하나의 자본주의 이후의 국가에요. 자본주의 국가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뭐로 돌아가느냐 하면 기계가, 좀 어렵게 말해서 생산수단이 기계가 되거든요. 기계를 통해서 많은 생산을 확대시키는 그 구조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계를 통해서.

그러면 인간이 기계하고 맞닥트릴 때, 그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를 평가를 해요. 니가 산만하냐? 아니면 니가 집중 하냐? 니가 산만하느냐? 아니면 집중하느냐? 뭐를 붙들고 하느냐 하면 기계 앞에서요. 내가 기계를 다루고 있을 때, 내가 산만한지, 집중하고 있는지를 봐요. 내가 컴퓨터 앞에 있을 때, 내가 산만한지, 집중하는지. 내가 애를 양육할 때, 산만하게 하는지, 집중해서 하는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청소를 할 때, 내가 집중해서 청소기를 돌리는지, 아니면 딴 생각하면서 산만하게 청소기를 돌리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한 기계와 맞닥트리는 현대구조가 그래요. 만약에 한약재를 기계로 만들 때, 복음 생각하다가는 손가락 잘못될 수가 있어요. 딴 생각하게 되면 크기가 균열하지 않죠. 그러면 이거는 아주 혼나죠. 그렇게 하려거든 때려치우라고 이렇게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기계 앞에 설 때 인간은 기계를 다루는 게 아닙니다. 기계가 원하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이 시대에 자본을 키우는 기계로 변신해요. 하나의 기계가 되는 겁니다. 기계가 되려면 기계가 요구하는 것은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하라는 거예요. 기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집중하라는 겁니다. 오직 이 시대는 집중, 집중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서 컬링선수다. 그러면 그 선수는 국가를 위해서 집중해야 돼요.

이런 기계를 앞장세워서, 기계구조 안에서, 기계 하나 앞장세워서 뒤에 자기 존재가 달린 채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지고 현대에서는 국가라고 이야기를 해요. 국가가 기계 앞에서 이루어지니까, 전부 다 기계가 돼요. 쉽게 이야기해서 기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전공분야에요. 자기 전공분야에 집중해서 모였으니까 그 국가는 뭐냐 하면 바로 기계가 되는 겁니다. 이 현대국가는 기계가 돼요.

기계가 되기 때문에 뭐가 빠지느냐 하면 시조, 역사, 전통, 족보, 전부 다 이게 소용이 없어요. 소용이 없다고요. 옛날에는 전통, 시조, 역사, 정통성, 족보, 이러한 것들이 중요합니다.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거는 나를 지키기 위한 외부이미지에요. “당신 소속이 어디야?”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야.” 이렇게 나를 나타내는 외부이미지에요. 옛날에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고, 내가 소속된 우리 집안이 중요한 거예요. 집안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현대국가에는 이러한 과거가 어떠니, 미래가 어떠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나는 이 기계를 잘 다룰 수 있는 숙련된 사람이냐, 내가 맡고 있는 이 일이 남들 앞에 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일 경우에만, 그 국가에서 하나의 생각하는 기계로서 용납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뭐냐, 그 국가 단위의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나와요. 생계비가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런 차이가 뭐가 중요하냐 하면은, 옛날에는 어디에 소속이 되면 그 자체가, 왕이 있고 양반이 있고 쌍놈이 있고, 지배 계급이 있어가지고 소속되어 있기만 하면, 말만 잘 들으면, 소속된 그 구조가 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뭐냐 하면 기계 앞에 서기 때문에 권력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어요. 내 안에. 내 안에 있어서 내가 낮에 직장생활 하면서 컴퓨터를 잘 못 다루었을 때는, 퇴근해서 밤이 돼도 그 권력이 나를 굉장히 힘들게 몰아붙입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내일 출근했을 때, 실적 한 번 보자고 한다든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회계장부 제대로 처리했는지 한 번 보자고 하면, 제대로 못해서 상사한테 꾸중 들으면 나는 사표를 써야 되나?’ 이래 돼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 신체의 소속이 없어요. 일을 잘하면 그 일을 잘하는 동안에만, 기계처럼 집중해서 잘 한다는 조건하에만 그게 약간의 소속이 되고, 만약에 내가 몸이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 해서 딴 데 신경 쓴다고 집중을 못하면, 거기서 추방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권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나한테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책이라고 합니다. 자책. ‘똑바로 정신 차리고 하지! 일을 왜 그렇게 해! 너는 요새 왜 그리 실수가 많아?’ 본인이 자책하니까 본인이 권력자고 본인이 피지배자가 되는 거예요.

법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의 국가는 법이 바깥에 있어요. “어른 가라사대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근데 자기 법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못살게 굴어요. 내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요. 내가 나를 스스로 판단해요. ‘니 그 따위 식으로 하려거든 직장 때려치워라. 니 남한테 해코지한다. 치워라.’ 내가 그렇게 나한테 자책의 권력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어느 게 더 무섭습니까? 늘 따라다니는 권력이 어느 거예요? 바로 내가 밤 잠 못 자게 만들고, 우울증 걸리게 만들고, 내일 일을 생각해서 지금 내가 밤을 설치게 만드는, 외부에서 나한테 주어져 숙제처럼 안기는, 이 국가가 우리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더 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말하면 옛날 국가는 좀 소박했지만, 지금 국가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 악마라고 합니다. 니가 옛날에는 어디를 가도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섬기는 걸로 되었지만, 지금은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권력 안에 우리가 잠겨있어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그러한 하나의 기계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미아(IP:122.♡.178.64) 18-04-05 15:17 
229강, 제목은 ‘장벽’입니다. 성경에서 장벽이라고 했을 때에 대표적인 것이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여리고성이에요.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을 막는 하나의 장벽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여리고성이 무너졌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무너진 게 아니에요. 여리고성이 이동한 거죠. 고고학적으로 실제로 있는 여리고성은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여리고성이 어디 안에 들어왔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실제로 벽돌로 되어 있는 구축된 성벽은 무너트렸지만, 그 이후에 진행되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성벽 무너트린 것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단합니다. 잠언서도 있죠. 성벽을 무너트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뭐냐 하면 인간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잠25:28).

여러분, 젊을 때 연애해봤잖아요? 연애할 때, 자기가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밥 사주고 영화 보여주고, 뭐 비용내고 하는 이거는 어렵지 않죠. 뭐 선물사주고 반지사주고 이거는 약간 짜증나지만 어렵지는 않잖아요. 근데 그렇게 해주게 되면, 선물주고 챙기고 이벤트 다 해주면 그것으로 상대방 배우자의 마음이 열리던가요? 인간의 마음이 열립니까?

인간의 마음은 타인에 의해서 열린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인간의 마음은 태어난 그 마음으로, 내 마음 내가 지킨다는 그 기술이 이중삼중으로 더 발달될 뿐이지, 절대로 외부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법이 없어요. 보통 사랑했을 때는, “내 마음 다 가져가세요. 내 마음 문은 열렸습니다.”라고 하지요. 트릭trick,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백퍼센트입니다.

왜냐하면 본인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이만큼 양보해줬으니까 마음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 본인이 조절하고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1차 문 열렸죠. 1차 문 열렸다고 확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자동적으로 2차 문이 형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기체의 자기방어기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개별자인데, 이 개별자는 외부에서 뭔가 자기에게 위험이 온다 싶으면, 여기서 자동적으로 생기는 게 뭐냐 하면 장벽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펜스fence가 생기게 되어 있다고요. 장벽.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이에요. 순간적으로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로 30년, 40년, 백날 살아도 이 장벽은 절대로, 니 장벽 무너지지 않고, 내 장벽 무너지지 않아요. 적당한 선에서 거래하는 거죠. 여기 부부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무너지던가요?

여리고성 이야기는 바로 그겁니다. 실제적인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너희들 이스라엘의 마음이 무너짐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리고성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본인들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전략적인 전쟁방법을 가지고 여리고성을 무너트린 게 아닙니다. 하나하나 지시가 누구한테 주어졌느냐 하면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고, 그 하나님께서 그 제사장에게 뭘 불라고 하느냐 하면 나팔을 불라고 했죠.

나팔을 분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겁주기 위함도 아니고, 은나팔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일이 최종적으로 해결이 났을 때, 더 이상 처리할 게 없을 때, 장날에 장터가 마무리 지었을 때, 일본말로 시마이(しまい끝마침)되었을 때, 그때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부는 것이 뭐냐, 은나팔입니다. 은나팔.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나팔을 불고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지시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뭘 하느냐 하면 저 여리고성의 무너짐의 목표에 대한 본인들의 제안, 본인들이 생각했던, 구상되어 있던 계획이 있잖아요. 그걸 언약궤 앞에서 자제를 하고, 그걸 포기를 해야 됩니다. 신앙이란 포기에요. 포기하는 겁니다.

여리고성 장벽을 여리고 사람들이 세운 것은 맞아요. 그러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의도해서 마련한 장벽이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묻는 거예요. 여리고성 사람들에게는 묻지도 않아요. 묻지도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 생각에는 이 여리고성 장벽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주님이 제시하는 방법을 제시해놓고, 이미 있는 상태에서 자꾸 묻는 거예요.

이야기를 쉽게 하겠습니다.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 이게 성경으로 제시가 되어 있죠. 이 제시된 것으로, ‘아, 십자가로 천국 가는구나.’라고 끝나면 안 돼요.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다음부터는 이제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그걸 증명해놓고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그래, 너희 생각에는 천국이 있다면, 천국은 어떤 식으로 가면 되지?”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있는 이상, 자기 생각을 어떤 식으로든 십자가를 합류시켜서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뭐라고 하겠어요? 일단 십자가 피를 믿고,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다음에 착한 행실로 구원받는다, 라고 나오겠죠. 그럼 그 사람은 아직도 십자가 피에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악한 사람이 가는 거예요. 악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내세울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이제는 바닥이 났어요. 쉽게 말해서 명분이 없어요. 내가 “나를 구원해주세요.”라는 명분이 바닥이 난 겁니다. 우물물 바닥이 났을 때 그걸 바가지로 한번 긁어보세요. 소리가 납니다. 박박~~ 내 입장에서 천국 간다는 것은, 이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닥났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죠. 바닥난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바닥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예수님을 포용해가지고 잘 해서 같이 천국 가고자, 처음에는 그렇게 시도를 했거든요. 랍비여! 선생이여! 뭐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대중들이 호응하니까 무시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는 그게 아니었어요. “십자가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구원받을 이유는 바닥났습니다.”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자기를 비추어보라고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랑할 것은 뭐 밖에 없어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십자가에 마음이 열린 사람이에요. 천국 못 가게 하는 장벽, 천국을 방해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이미 사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 딴 소리 하고 있어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착실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착할 수 있고, 남한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그런 저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겁니다.

뭐 어떤 사업을 해도 안 되는 장벽이 있다, 교회 부흥이 안 되게 하는 장벽이 있다, 우리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장벽이 있다,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한 장벽이 있다고 하는데, 모든 장벽은 단 하나의 장벽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자리가 되어야 될 이 천국의 위치에, 자꾸 자기 의견이 개진되는 거예요. 자기 의견이. 자기 뜻이.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했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나’라는 가치를 아직도 포기를 못하고, 내 가치도 살고 주님 가치도 같이 살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게 장벽이 아니고 뭡니까? 우리가 여리고성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난 뒤에, 그 다음 아이성을 칠 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여리고성은 무너졌지만, 자기 안에 있는 여리고성은 안 무너졌어요. 여기 희생자가 필요했고, 그 희생자가 죽고 난 뒤에 아이성은 정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내 속에 어떤 장벽이 오늘도 만들어졌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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