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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23:50:37 조회 : 108         
유튜브(260강, 261강), 아름다움 , 목사의 실수 181204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60강        음성              동영상


261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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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12-05 22:25 
260강-YouTube강의(아름다움)20181204-이 근호 목사

제 260강, 제목은 ‘아름다움’입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걸 당연히 여기면 안 되고 신기하게 여겨야 되겠죠. 우리 인간이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아름답게 생각할 때에 놓친 게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할 때의 아름다움을 모릅니다. 몰라요.

처음 창조한 아름다움을 미리 알고, 그 다음에 지금의 아름다움과 이렇게 비교를 하게 되면 우리가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착하다고 하는 것도, 선하다고 하는 것도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한 착함과 선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우길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다른 사람보기에 내가 더 착하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의롭다고 했지만 하늘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는 의로움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 백날 의롭다고 우긴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발견해야 되겠죠. 원래의 아름다움을.

근데 그 원래의 아름다움을 성경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그냥 아름다움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거든요.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의로우심은 고귀함으로 발산되게 되어 있어요. 위엄으로서.

그런 경우가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천사들이 대단히 고귀하고 거룩하죠.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보게 되면 기드온도 천사를 만났잖아요. 왜 기드온은 그 천사를 어떻게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었을까? 인간하고 족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있고 고귀하니까 그렇게 했겠죠.

삼손의 부모도 천사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단박에 알아봤을까요? 보통 사람하고 다르죠. 아브라함이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극진히 대접을 했었습니다. 이처럼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할까요? 노는 레벨이 달라요. 그 천사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인간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먼지가 소복이 묻어있다고 칩시다. 인간에게 세속의 먼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먼지투성이지 아름답다고 평가하지 못하죠.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물심판 내리시는 것을 아시죠.

그럼 우리가 이걸 한번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그 노아가족 빼놓고 나머지기 모든 사람들이 물심판 당했을 때에, 그 물심판을 당했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미남미녀가 없었겠느냐 하는 겁니다. 뭐 이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노아의 식구들은 그 사람들보다 더 이쁘고 잘났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볼 수가 없죠. 그러니 인간들끼리 견주어서 상대적으로 따지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뚫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뚫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면, 그거는 세자로 이야기해서 ‘쓰레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쓰레기에요. 물론 쓰레기더미를 뒤집으면 이쁜 쓰레기 있어요. 참한 쓰레기 있고, 남보다 질 떨어지는 저질스러운 쓰레기도 있지만, 쓰레기라는 점에서는 하늘나라에 쓸모짝이 없는 겁니다.

천사가 왜 아름다운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천사의 존재자체가 하늘나라에 계시던 분이어서 아름다울 수가 있지만, 천사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냥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와 사명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해요.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의 아름다움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 나오죠.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하는 발은 냄새가 나요. 무좀이 있을 수가 있고. 피곤한 몸이니까. 지친 몸이니까. 전하러 다니다 보면 굳은 살 배긴 발이 뭐 그리 아름답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발을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뿜어져 나오는 그 사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그냥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 그것이 아름다움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명과 더불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대목을 찾으라고 한다면 바로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에스더가 나오죠.

에스더는 이뻤어요. 인간들이 내세우는 이쁨선발대회에서 최고점을 얻어 우승한 여자입니다. 바사나라, 페르시아죠. 그 바사나라에서 에스더처럼 이쁜 여자는 없었다는 것이 인간들 눈에는 확정되었습니다. 그 이쁨으로 분명히 인간세계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그 왕비의 자리가, 그 나라에서 아름다움의 최고의 자리는 왕비의 몫이 되는 거죠. 왕비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일 때 왕비의 자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에스더이야기가 왜 성경에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세상에서 살다 죽는 것은 누구나 다 공통적인 것입니다.

이왕 사는 것 최고의 자리인 왕까지, 왕비까지 올라가면 뭐 사는 보람이 있겠다 싶겠죠. 근데 아까 노아이야기에서도 했듯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마감되어버리면 그것은 쓰레기고 좀 허접하고 허무하죠.

에스더이야기가 사람들보기에 최고의 미인이었고 왕비가 되었다. 끝. 이래 끝나버리면 이거는 하늘나라, 천국하고 무관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에스더가 단순히 바사나라에서 최고의 미인이었다는 것으로 마감되지 않고, 천국에 부합되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그 스토리, 그 경과, 과정을 설명하는 에스더라면, 아, 인간이 시각적으로 보는 아름다움에,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걸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천국에서 요구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겠죠. 

그 아름다움이 뭐냐,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에4:16)는 고백이죠. 자, 에스더가 죽을 때는 뭐도 같이 죽는다는 말입니까? 인간들이 “아, 미인이다! 미모다!”라고 하는 것도 같이 소멸되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죽여서 지상에 없는 천상에서 인정하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이야기가 에스더이야기에요.

에스더 5장에 보게 되면, 1절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2절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라고 할 때에, 이 사랑스러움이 에스더의 고유의 것이 아니고 에스더와 만난 왕, 아하수에로 왕과의 관계에 주님의 천상의 요소가 개입이 되었다고 봐야 돼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이 개입되어 있을 때에, 이 아하수에로 라는 남자는 그 에스더의 미모에 반했다는 식으로 자기표현이 된 겁니다. 반해버렸다. 따라서 그 사람은 어느 때든, 어느 장소든 늘 사랑스럽다고 고집하면 안 돼요. 이렇게 되면 사랑스러움이 에스더에 내장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예요. 에스더의 소유가 돼버려요. 하나님의 개입이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개인적인 소유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진행할 때, 그 사이에, 그 관계 속에 주님의 아름다움이 스며드는 겁니다. 그래서 창기도 아름답게 천국가고 강도도 아름답게 천국 가는 겁니다.

주의 일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때, 그게 천사와 같은 천상의 아름다움인 겁니다.
 이미아(IP:122.♡.170.138) 18-12-05 22:26 
261강-YouTube강의(목사의 실수)20181204-이 근호 목사

제 261강, 제목은 ‘목사의 실수’입니다. 목사의 실수는 교인들을 신자라고 여기는 것이죠. 왜 그러냐 하면은 목사는 인간과 신자를 구분할 때, 자기가 그 사람들에게 집어넣고 부여한 것, 애쓴 것, 투자한 것, 모든 기도와 간절함, 주 앞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그런 공적을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뽑아내려고 해요.

마취 뭐와 같은가 하면, 이 앞에 올라오다보면 광고 하나 붙었거든요. 열 번 시술에 30만원이라고 해놓고, 뭘 시술하느냐 하면 종아리 살 빼는 것. 그리고 영화관 광고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살색 곰을 팔에 붙여놓고 빼~ 라는 광고가 있어요. 이게 안 떨어지거든요. 테이핑해도 안 떨어지고. “그때는 이렇게 시술하시면 빠집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자, 시술은 뭐냐 하면 누구하나 고객이 왔는데, 또는 살 빼기 위해서 권투를 배우려고 왔는데, 권투하는 트레이너 입장에서는 뭘 봐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내가 가르친 대로, 내가 시킨 대로 잘 해가지고 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어떤 변화 같은 조짐을 보고 싶어 하겠죠. 왜냐하면 자기가 그만큼 그 사람한테 애쓰고, 기대하고, 투자한 어떤 결과물을 본인이 얻고 싶어 하는 겁니다.

10회에 30만원해가지고 종아리 살 뺀다고 했는데, 처음에 오고 두 번째 왔는데 종아리에 살이 그대로 있으면, 이건 돈을 물어줘야 하는 건지, 아무 효과가 없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효과 없음이라고 하는 그런 트레이너는 잘 없어요. 요가 강사들 잘 없습니다. 없는데도 불구하고 효과가 있다고 우기고 싶죠. 왜냐하면 자기가 투자한 것이 무의미로 끝나는 것을, 굉장히 자기 자존심과 관련해서 싫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꼭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밭에다가 씨를 뿌려놓고 계속 그 수확을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심정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게에 인테리어 해놓고 인테리어 해놓은 것만큼 손님들이 만족해서 입소문내가지고 전에 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이 목회라고 하는 것이, 이거는 교회운영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전부 다 이런 목회정신 같은 것이 다 적용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새롭게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계속해서 경제정책을 바꾸면서 통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얼마나 소득이 올랐는가를 신경 쓰는 거죠. 그래야 그 다음에 또 대통령이 될 수가 있잖아요. 서울시장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여론조사에서 얼마나 만족도의 퍼센트가 높은가를 늘 주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회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장사하는 사람이나 농사짓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잖아요. 직장 그만두고 애들한테 올인 해가지고 걔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할 때에 그 성적표에 점수 오르는 것에 늘 신경을 쓰겠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가 애쓰고 투자한 그 결실을 자기가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거예요. 목회라고 해서 인간들의 일반적인 행함과 움직임과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가.

내 역량이 어느 정도며, 내 솜씨가 어느 정도며, 그 내 솜씨와 내 역량을 통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목사냐, 아니냐를 자꾸 측정하고 싶어 하고 점검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목자잖아요. 그 목자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그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하면 양이라는 것이 있어요. 비유니까. 목자와 양 사이라는 비유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하고 자기의 양떼를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세울 때에,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라고 하는데, 그걸 특별한 소양이나 자질이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맡겼겠어요? 아니면 그거하고 상관없이 맡겼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목사라는 사람에게 양을 위해서 맡길 때에, 그 목사가 만약에 자질이 출중하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목사의 자질에 자기 양을 일임한 게 돼버려요. “니가 그렇게 대단한, 니가 양들을 양답게 만들어서 천국에 데려갈 정도로 그런 능력을 지녔기에, 내가 니한테 모든 것을 일임할게.”라고 해서 그 양들을 목자에게 맡기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죠.

그러면 성경에 보면 그 양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요. 그걸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성령의 은사를 맡은 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럼 사실은 이게 맡긴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그 목사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의 은사가 목사보다 더 위에 있거든요.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힘이라면, 그 힘 앞에 목사는 “꼼짝 마라!”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 9절에서 백부장이 고백한 그 고백 그대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러거든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후에 나온 말씀이 뭐냐 하면 베드로에게 당부한 게 있어요. 18절에,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의 뜻은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이고, 그럼 거기에 연관되어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기고유의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원하는 것, ‘아, 저 양은 주께서 맡기신 양이기 때문에 내 식대로 해봐야지.’라는 것이 베드로의 원하는 것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개입해가지고 베드로의 원치 않는 방법으로 양들을 대하게 될 때, 그럼 그 양은 결코 베드로의 양이 될 수가 없죠. 여전하게 꾸준히 누구의 양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간추려보게 되면, 말로만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라고 목사가 이렇게 말로만 그들에게 다가서고 자기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양이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는 자기의 성깔이라든지, 성격, 경향성, 지가 나름대로 해보겠다는 스케줄, 계획, 이런 게 있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허용하는 겁니다. 해봐라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니 식대로 막 목회해라. 막 목회하는 가운데 뭐가 실패로 끝나느냐 하면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목사뿐만 아니고 인간은 뭔가 투자할 때에 기대치가 있지 않습니까? 기대하는 것이 있죠. 그 기대하는 것이 좌절되게 만들고 뜻대로 안 되게 될 때, 비로소 목사는 알죠.

내 자질과 능력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없게 하셔서 저 양을 내 양이 아니고 주님의 양으로 만든다는 것. 이걸 목사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늘 실수하죠. 늘 실수하는 목회, 늘 실수하는 목사임을 아는 그 목사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목사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양을 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양을 통해서 목사 자기 자신이 또 하나의 주님의 양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자기 양들을 맡기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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